- 상위 항목: 시민 불복종 운동, 대한민국/정치, 사회 운동 관련 정보
4월 19일에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2 배경 :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
이 하위 항목의 서술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학술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서적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때는 저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린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은 1960년. 그때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왔던 것이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195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어가며 잿더미가 되어 전세계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게 바로 이 때였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숭고하고도 고결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시대에 반독재 민주시위가 가능했던 것인가?
1950년대에 민주주의 정신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정착하는 것이 성공한 데에는 몇 가지 꼭 알아야 할 필연적인 사회적 배경이 있다.
2.1 언론의 영향력 ¶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 을 제외하고[1]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55년 동아일보 "괴뢰" 표기 오식사건
- 편집상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던 동아일보 하나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
-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2]
-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당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필화사건
- 1958년 함석헌 필화사건
-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2.2 의외로 높은 교육수준 ¶
물론 오늘날에 비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그 외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성인 교육 프로그램" 을 통해 문자의 독해율은 1945년 22%에서 1959년에는 79%로 급증했다. 즉 문맹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 그와 함께 초등~중등 교육과정 중에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원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겠지만.
게다가 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오늘날에 비하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이었는데 1960년에는 97,819명으로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이는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제3세계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였다
2.3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 ¶
6.25 전쟁 이후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정착하고 인구 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열 개 남짓의 도시들이 수 배의 급격한 인구 성장을 보였다. 총인구 대 도시인구 비율은 1949년에 17.2%였는데 1960년에는 28%로 늘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당시의 교육 수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55년 전국 대학교 중 85개 대학교의 소재는 도시 내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서울 소재 대학교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 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에서 사는 대학생이었다.
2.4 청년실업 문제 ¶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인텔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대학교는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 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근데 이건 요즘에도 그렇지 않나? 요즘의 실업률은 애교수준으로 실업률이 무려 50%에 달했다 사회 전체에 미래에 대한 비전을 딱히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가뜩이나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고... 그래서 사회 전반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단지, 이 당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축에 속했는데, 이런 "배운 사람"을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당연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를 이끌어야하는 책임역시 크다.)이 시대의 실업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은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뛰어들지 않거나 제대로 된 사람구실을 못할 때 주어지는 비판으로, 오늘날의 청년실업문제와는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비판의 형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던 시대임을 염두에 둬야한다. 실업문제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200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이런 "대학생이라면"이라는 태도는 20세기를 통틀어 대학가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2.5 소결 ¶
종합해보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어찌 보면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아득바득 학교에 갔더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겹도록 가르친다.[3] 게다가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의외로 가방끈이 길다. 언론 활동도 활발한 데다 장기간의 검열과 탄압으로 악에 받쳐 있는 언론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사설을 독자들이 무리없이 읽을 수 있다. 주위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어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런 인재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으니 나라꼴이 하 수상하다...
4.19 혁명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4][5]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총 1,200여명.[6]
다음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 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학생의 시위를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여러 시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7],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하지만 그 공원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시민들이 많다
이와 같이 시작된 2.28 의거는 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 의거는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대한민국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닌다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전국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서울 1,000여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균명고, 강문고, 중동고, 대동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등
- 부산 7,800여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 동래고, 부산상고,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항도고, 영남상고, 북부산고 등
-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명, 대전상고 300여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명, 청주고 100여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명 등
3.2 3월 15일, 마산 의거 ¶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이른바 3.15 부정선거. 마산지부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로 들어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으며 민주당 마산 지부는 최초로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개표도 안한 통에서 이승만이 기표된 용지가 우루루 쏟아져 나왔기 때문. 심지어 투표하러 갔는데 표를 받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8]
민주당 간부들은 옛 마산교도소(현재의 불종거리 삼성생명 앞)에서 시민을 모아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은 사태에 기름을 붓는 짓을 저지른다. 어느 고등학생이 경찰서장이 든 확성기를 빼앗아 들고 "자유" 를 외치자 서장은 그 고등학생을 곤봉으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 두들겨패버렸던 것. (전투적인 기질을 지닌?) 마산 시민들이 이 꼴을 보고 눈에 천불이 나서[9] 소요를 일으키자 경찰은 반공청년단을 동원해서 해산시켰다.[10]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 앞에 모인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일몰 후 시위대와 경찰과 대치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11] 무학초등학교[12] 앞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정전이 되고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다. 경찰은 때를 같이 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8명 사망, 80여명 부상.
이 사건에 대해 후에 국회조사단이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주장하였으며[13]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희대의 병크를 터뜨렸다. 가뜩이나 건국 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대민발포" 사례인 마당에!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AP통신이 마산 사건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였다.
본인과 그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인 이기붕 민의원 의장은 3.15 선거가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을 물리치고 석권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정부가 질서유지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선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민주당의 선동을 받은 일부 시위자들이 일을 저지를 때 수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경찰이 야당측의 정치적활동을 방지하는데 동원되었던들 이런 불행한 난동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민주주의적 발전에는 방해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폭력수단으로써는 결코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은 어느 시기에 가서 국민이 동당을 권위있는 자리로 이끌게 될 참을성 있고 건설적인 지도역량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폭력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원하는 바도 아니요 실지 행하고 있는 일도 아니다.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데 대해 한국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직접 경찰에게 어느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해서도 어떠한 종류의 영향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경찰은 하시에도 간섭을 하지 않했다고 말하였다. 사실 수많은 한국 애국자들이 민주당의 전술과 공격의 일부에 대해 분개하고 보복을 원하였으나 그들은 경찰 당국에 의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이는 3.15가 부정선거가 아닌 공정한 선거였으며 마산 사태는 민주당이 패배를 못 참고 난동을 부린 사건이라고 이 대통령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다음날 성명을 다음과 같이 내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것이다. 이대통령이 AP기자에게 폭력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수치스럽게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것에 대해 한국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는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을 국민에게 부끄럽게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으며 또 하늘이 무섭지 아니한가? 이번 3.15 선거에 있어서 도덕과 법을 파괴하고 부정, 추잡, 폭력, 살인 등 모든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여 국민 주권을 철저히 강탈하고 민주주의를 도살하였으며 그러고도 부족하여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총격으로 대량학살하였음을 전 국민이 몸서리나게 체험하였고 민주 우방제국인 공인한 바이며 런던 타임즈의 사설에선 폭력이 가장된 선거보다도 나쁘다라는 요지로 비난하고 또 워싱턴포스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세력은 또 한번의 선거승리를 불도저로 밀고 들어가듯이 차지하였다라고 비난하였다. 이 대통령은 이를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지 아니면 진실로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지? 어느 것이건 간에 대통령으로써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발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3.15 의거 기념탑. 창원시 마산 합포구 서성동 소재.
15일의 발포 사건은 이미 중앙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14] 당국에서는 여야합동 국회조사단을 파견, 치안국장의 사임 및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교체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자리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인사조치였다. 게다가 홍진기 신임 내무장관은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고 이후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마산 사태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져 갔다. 이에 몇몇 자유당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어차피 우세한 선거였는데 너무 오버했다" 라며 지도부를 비난하였다. 또한 이승만, 이기붕에 의해 모든 당론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 의해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했다라며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여 혁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집단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이 직접 호통을 치자[15] 이들은 기가 죽었다. 이에 이들은 이기붕과 면담을 갖고 이기붕이 당을 위해 애쓴다며 치하한 뒤 선처할 것을 약속하자 이에 만족하여 해산한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입니까?" 라고 묻자 이들은 '이기붕 의장이 선처를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더이상 혁신에 대해 거론 않겠다' 라고 답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측에선 이승만의 호통 한 번에 잠잠해졌으니 논에 우는 개구리한테 돌 던지자 순신간에 잠잠해진 격이라며 비꼬았다.
민주당은 3.15 선거 무효선언을 한 뒤 당 내 방침을 두고 신파와 구파가 내분을 일으켜 계속 지리한 회의를 거듭하였다. 구파는 국회 총사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파는 원 내에서 싸워야한다고 주장하였다.[16] 이들은 이 논쟁으로 인해 3월이 다가도록 2주 동안에 걸쳐 대응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신파가 이겨 원 내에서 투쟁하기로 결정했을 땐 이미 자유당 측에서 마산 경찰들 체포와 내무장관 경질 등의 조치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유당측은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여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었고 때문에 민주당의 정남규 도의원을 남로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 총지휘하였다라고 혐의를 씌운다. 정남규 도의원은 당시 유치장에 갇혀있었는데 기자가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자 노발대발하며 "뭐요? 날더러 빨갱이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를 시의원으로 놔두고 도의원으로 당선되게 놔두었단 말이요?" 라며 반박한다.
그리고 22살 먹은 청년을 체포해 그가 경찰서를 방화하였다고 하고 그가 6.25 때 공산당 측에 부역한 자라고 하였는데 6.25 때는 그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민주당 측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그러자 경찰측에선 32세라고 나이를 올려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인다.[17]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신원조회를 하는 중 자동차 정비 면허증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본 순경은 자동차=휘발유=방화라는 괴랄한 공식이 머리속에 떠올라 그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한편 3.15를 지휘하였으며 이 책임으로 물러난 최인규 전 내무장관[18]의 후임으로 임명된 전 법무장관 홍진기[19] 내무장관은 "경찰의 구속, 마산 시위대의 선처 등의 대략적인 조치를 한 뒤 모든 조치를 마쳤다" 라고 밝힌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조치에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이때 민주당은 간신히 내부 의견을 통합하고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하자 서울시장은 부정선거는 서울시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서울 어디에서도 집회를 열 수 없다라고 통보한다.
그러자 민주당 측은 이를 무시한 채 4월 6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가 엄청난 시민의 호응을 받아 인파가 상당한 규모로 불어난다. 이 시위의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 측은 지부를 통해 각 지역에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한다.
하지만 서울시에서의 시위에 놀란 정부측은 등교중지령을 선포하는 등 시위를 철통같이 감시토록 하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4월 8일 민주당의 지부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이러한 자유당 측의 감시에 의해 시위대는 소극적으로 가두행진을 벌인 뒤 해산하게 된다.
4.1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 ¶
김주열 열사.
한편 3.15 마산의거 이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에 입학하기 위해 와있었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당시 마산시청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부둣가(현 마산합포구 중앙동 대한통운 앞(다음 로드뷰))에 떠올랐다(이를 보면 어느 정도는 소문에 근거가 있었던 셈이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급히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다.[20] 여담이지만 이후 먼 훗날 이와 거의 유사한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1차 마산의거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김용실 군이 마고생(1-C반 급장)이었고 김주열은 상고생이었기 때문.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악다구니를 쳤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교사들이 신발을 전부 감춰버렸기 때문. 결국에는 안전을 이유로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때 중년 여성들의 시위 참여도 확산되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 학생 5,000~6,000명,[21]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까지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성난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차량들이 대파된다. 그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에 더 자극받은 마산 시민들은 3일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22]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 를 구성,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이쯤 되면 그냥 녹음기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
5.1 4월 19일, 피의 화요일 ¶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에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우선 서울의 경우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교,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여담이지만 문리대 학생회가 당초 계획하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다고.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23]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이 날 정부에서는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명 이상의 학생들과 시민이 몰려나왔고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국회의사당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24]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25] 이때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 사망, 172명 부상.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에 경찰측 사망자로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타 지역의 경우는 부산의 경우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 70명. 그 외의 지역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없어 사상자가 없었다.
5.2 학생들 ¶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데모를 나간 당시 한 여중생의 편지. 이 편지는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이 시위를 떠나기 전 부모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로 진영숙은 시위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대학들 중에서는 이화여대를 제외한[26][27]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던 것. 그리고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다. 이어 9시경에는 법대와 약대, 수의대, 치의대 등 동숭,연건캠퍼스의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 및 비교적 멀리 있던 상과대학생들은 9시 30분경에 합류했다.[28]
특히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의대생답다면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구호를 썼다. 예를 들자면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이런 구호들.
10시경에는 전날 시위를 벌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각각 수천 명 단위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연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학생시위대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교들의 이름과 참여 숫자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5.2.1 동국대학교 ¶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앞을 선점했을 때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효자동 쪽으로 진출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칠봉(당시 법대 '58)은 "이승만과 면담하러 가자!" 고 외쳤고 이 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경무대(현 청와대 위치보다는 약간 뒤쪽)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에서 경찰과 부딪친 시위대는 이에 맞서서 큰 수도관을 굴리며 행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을 도로 주워 경찰들에게 던지며 전진했다.
대치 상황에서 선봉을 맡은 법대와 농대 학생들 중 일부가 3차 저지선으로 형성해 둔 소방차(혹은 전차(電車)) 위에 기어올라갔고[31] 저지선을 뚫은 시위대 중 일부는 최종목표인 경무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위대의 선두로부터 경무대까지는 100여미터를 목전에 둔 상황. 나머지 대열은 중앙청 옆길에서 경찰과 여전히 엉켜 있었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40분이라는 얘기도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맞고 故 노희두 열사(법대 '59)와 박흥규, 이종학(농학 '59) 등 여러 명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조준 사격에 분노할 대로 분노한 법대 학생들은 서소문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로 몰려가서 적십자병원 옆 이기붕 국회의장 자택을 점거해버린 후 한달음에 서쪽 끝인 서대문에서 동쪽 끝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시위를 벌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참 지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희두가 4.19 혁명 당일의 최초 희생자였다" 라고 김칠봉 열사는 증언하였고 이 노희두 열사의 경우는 불행히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법정대학의 후신인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현재에도 '선봉법대' 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에는 단과대 로비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하고 있다. 또한 동국대 전체적으로는 만해광장 한 켠에 '동우탑' 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으며 매년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4.19 등반대회' 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에서 수여한 4.19 혁명 공로훈장 건국포장 239개 중에서는 35개가 동국대학교에 추서 혹은 서훈되었다.
5.2.2 서울대학교 ¶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32] 서울대학교는 피해가 가장 컸다. 이 날 하루에만 7명의 학생이 사망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4.19 탑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사회대와 법대를 내려가면 있는 두레문예관 앞에 있다.
출처 뉴시스.
이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발표한 4월혁명 선언문.[33]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하여 사악과 잔악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천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이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 같이 어설픈 것임을 교시한다. 한국이 일천한 대학사(大學史)가 적색 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구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줄기는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쟁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자유의 싸움은 바야흐로 풍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주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고 나섰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락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사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모른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협박과 폭력으로써 우리를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생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하에 미칠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
5.2.3 중앙대학교 ¶
4.19 혁명에 참여한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4.19 당시의 상황을 중대생 중심의 관점에서 생생히 기록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
다음은 중앙대에서 발표한 선언문.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함에 있다."
사망자 명단 - 故고병래(상학과3), 故김태연(약학과3), 故서현무(법학과3), 故송규석(정외과3), 故지영헌(신문학과3),故전무영(신문학과1).
6인의 열사들의 영정과 이름은 중앙도서관 앞의 탑에 새겨져 있다. 다음은 탑의 비문의 내용
우리들은 남으로부터 싸워 올라가
마침내 사월학생혁명 그 대열에
기를 높이 올렸다
그러함에 있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번영
생존의 평등 평화를 위하여
모든 지성 모든 생면 모든 사랑을
다하여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벗을 잃었으니
아! 슬프도다 4월이여! 광영이여!
벗의 이름으로 끝이 없어라
4293년9월 중앙대학교 학생일동.[34]
5.3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이래저래 병크짓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으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35]
-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군사부 지도자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6.1 등을 돌리는 우방들 ¶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제는 감을 좀 잡아도 좋으련만 이승만은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다음은 4월 20일자 대국민 담화의 내용 중 일부이다.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서는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미 국무부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37]
다음은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세세한 토씨의 경우 다소 다를 수 있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되어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38] 그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6.2 4월 25일, 교수들이 나서다 ¶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냐 하면 먼저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 이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 교수들은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의 머릿수는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부정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교수들이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애국가까지 제창했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전에 당국에 알리지도 않은 강행 시위였는데도(...)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6.3 어린이들이 시위에 나서다 ¶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명으로 불어났으며 국민학생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지난 19일, 피의 화요일 때 수송국민학교[41] 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42]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43]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가 남긴 글 '나는 알아요'.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
6.4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 되다 ¶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데다 착검까지 하고 방독면을 쓰고서도 이미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올라가서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민주화 관련 사료들 중에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이제 계엄군은 이승만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고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7.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
"미국으로 망명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ㅡ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中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 학생대표 5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였고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44]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해방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사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짐작하겠지만 저기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표현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에 외무부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는 단지 문구상 표현에 불구하고 사실상 하야한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7.2 제2공화국의 출범 ¶
8.1 한계와 의의 ¶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 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 데다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47]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그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민들의 피로 일군 4.19를 1년만에 뒤집게 된다(5.16 군사정변). 장면은 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보선은 이를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쿠데타는 성공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 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 의거라고 정의하였다.
그래서,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 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 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 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한편 당대에는 실제로 5.16 군사 정변을 4.19 혁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변화상은 5.16 군사정변 항목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해당 항목을 참고.
8.2 4.19 세대 ¶
4.19 혁명 기간에 대학생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세대를 4.19세대라고 한다. 당시 대학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386세대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맨땅의 대한민국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수호하였고 산업 발달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위대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50]
한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로 칭송하는 일부층에서는 '4.19세대나 6.3세대가 이승만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51]
그리고 2011년 4월17일 이승만 유족인 이인수[52]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으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최근 동상 건립 시도 및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으로 인한 이벤트성이라고 대차게 까인데다가 희생자들과 4.19 단체 또한 사과에 대해서 진정성이 없다며 사죄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결국 이인수는 당초 의도했던 대로 4.19 민주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과문을 읽었다. 근데 잘 들어보면 4.19 혁명을 4.19 의거라고 칭했다!
거기에 뉴라이트는 이인수 혼자만의 생각일 뿐, 북한의 입김이 크며(...) 이승만을 몰락시킨 4.19 자체를 사과하는 일은 있어선 안된다고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성' 의혹은 곧바로 사실로 밝혀졌다. 4.19 혁명을 맞아 유족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서울행정법원에 '4.3 사건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항소장을 원고 대리인을 통해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8.3 기타 ¶
서울 수유동에는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3번째 컷은 정의의 불꽃 조각상이다. 맨 밑에 있는 구멍 부분이 애들 들어가기 딱 좋은 곳이긴 한데 참배 와서 저기 들어간 채로 사진 촬영하는 몰지각한 짓은 하지 말자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계절을 좀 타기는 하지만 참배객들도 꾸준히 있는 편이며 인근 주민들은 은근히 동네 공원으로 여기고 드나들기도 한다(...) 가끔 어디선가 노동자들이 와서 단합대회도 한다. 기념관은 당시 사건개요를 순서대로 둘러볼 수 있는 구조로 정리되어 있으며 리그베다 위키에 작성된 글들도 일부 볼 수가 있다(희생자 김주열 열사가 오웅진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 등). 참배시 간단하게 싸온 음식들을 취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참배를 와서 쓰레기 버리는 짓은 제발 하지 말도록 하자.
2012년 4.19혁명 52주년 행사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화환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보통 정부주관의 행사들에 화환을 보낼 때 정부에서 지정한 권장 '규격' 이 있다고 하는데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일반 장례식장용 화환을 보내면서 추모 문구도 전혀 없이 이름과 자신의 직책만 적어서 보낸 게 문제.
현재 이투스에서 역사를 강의하고있는 설민석의 아버지 설송웅 씨[54]가 이승만을 직접 대면한 시민 대표 중 한 명이다. 설민석의 말에 따르면 컬러링도 애국가고 휴대폰 번호도 0419로 끝나는 등 평생의 자랑이시라고. 설민석 한국사 교재에서도 당시 설송웅씨를 찍은 사진이 매년 실려있다. 설송웅 씨 인터뷰
8.4 관련 창작물 ¶
- 마산MBC(現 MBC경남)에서 4.19 혁명 특집 드라마로 '누나의 3월' 을 제작했다.
-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요구사항 중 하나인 민주주의와 관련된 '하... 그림자가 없다' 라는 시를 썼고 시인 김광규는 군사독재에 침묵하는 등 현실에 순응하게 된 4.19세대에 대한 반성으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라는 시를 썼다.
- 일본 애니메이션 마리아 홀릭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일본에는 혁명 같은 건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면서 죽간(...)에 전 세계의 혁명을 적어놨는데 거기에 잠깐 등장했다. '1960 4.19 學生運動(학생운동)' 이라고 나와있다.
- 작가 이문열이 4.19 혁명을 다룬 배경의 소설이 있다. 하나는 그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고 하나는 변경.
- 보컬로이드 시유가 부른 '너를 소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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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제로 4.19 혁명 당시 서울신문사는 상당히 큰 재산 손실을 입었다.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 [2] 참고로 이 신문사는 같은 해 5월 20일에 "견통령 오식사건" 을 일으켜 이미 높으신 분들의 응징을 받은 적이 있다(...) 자세한 내막은 대통령 항목 참고.
- [3] 한국이 전제왕정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접어든 초창기여서 당연히 이것에 대한 선전이 필요한데다,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체제인 사회주의가 좁게는 북한, 넓게는 소련에 이르러 민주주의와 더불어 세계를 양분해 첨예한 대립각을 형성하던 시대이다보니 좋든 싫든 민주주의를 강조할 수 밖에 없던 시기였다.
- [4] 지금은 고등학생들의 시위라 하면 낯선 느낌이지만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 쯤 되면 이미 성인이었고 사회 참여 역시 빈번했다. 물론 명문고가 존재하는 등 고등학교가 서열화 되어있는 것도 한 이유여서 상위권 고등학교가 그 주체가 되었다.
- [5] 반면에 의외로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저조했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역시 어렵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여 신분 상승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보니 체제순응적(출세지향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의 미적지근한 사회 참여에 열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 사실 4.19혁명이 이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다.
- [6] 익일인 28일에는 대구여고, 대구상고 역시 합류하였다.
- [7] 원래는 명덕로터리(오늘날 명덕네거리)에 기념탑이 있었지만 훗날 두류공원으로 이전했다.
- [8] 이 외에도 3인조, 5인조 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며 3~5인씩 1조로 투표하게 한 것. 이 3인조는 모의투표까지 실시했었는데 일찍이 도시화가 진행되어 정치색이 짙은 마산시민 입장에선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일이었다.
- [9] 4.19 당시 주요한 시민 참여 요인 중 하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했다' 는 사실이었다. 전쟁 직후의 가난한 나라에서 인적 자원은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 초등학교도 겨우 나오던 시절인 만큼 학생들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 [10] 아이고 어른이고 할머니고 여고생이고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팼다.
- [11] 요즘의 물대포 용도 외에도 염색약이 들어간 물을 뿌려서 시위에 가담한 학생이나 시민을 색출해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본 거 같으면 그건 눈의 착각대부분 흰 광목으로 된 옷을 입고 다니던 시절. 학생들의 교복도 칼라 부분은 흰색. - [12] 아직도 그 담벼락엔 총알자국이 남아있다.
- [13] 최인규 내무장관 주도로 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시체 주머니 안에 '인민공화국' 운운하는 날조된 삐라까지 집어넣는 등 공산당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공작을 펼쳤다.
- [14] 동아일보는 3.15 카르테라는 코너를 아예 따로 마련해서 매일 선거 관련 소식을 현지 르포로 보도했고 AP통신도 사안의 귀추에 주목하고 있었다.
- [15] 이승만은 장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요새 자유당 내가 대단히 소란한 것 같이 들리는데 우리가 민주당의 내분을 옳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흉을 보았던 것인데 자유당이 단결해서 일을 잘해오다가 소란과 내분의 인상을 국민에게 주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부끄러운 일이라. 합심하여 조속히 수습책을 강구하라" 라고 발언하였다.
- [16]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는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식 자유주의자들이라 장외투장 같은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자유당이 작정하고 국민들을 두들겨 패는 상황에서 원내투쟁 운운하는 신파는 참으로 사태 파악이 안되던 것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을 듯.
그러니 5.16 때도 그 지경이었나 - [17] 동아일보에선 이를 두고 "10살을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경찰이니 공산당원 하나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군" 이라며 비웃는다.
- [18] 최인규는 훗날 5.16 군사정변으로 군정이 시작되자 군부에 의해 마산 시민에 대한 발포의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다.
- [19] 일제시대 총독부 판사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처벌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 해방 후에 계속 판사로 있으면서 조봉암의 사형을 내렸고 법무장관, 내무장관을 거쳐서 4월 혁명 책임자로 체포되었으나 5.16 직후 유일하게 사면되었다. 이후 삼성그룹 중앙일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건희의 장인으로 맏아들 홍석현이 현재 중앙일보 회장, 광주고검장 출신 둘째아들 홍석조가 현 보광훼미리마트 회장이다.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는 맏딸.
- [20] 후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해본 결과 그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 이라는 설명까지 적혀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이다.
- [21]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었다. 앞 주석 참고.
- [22] 그러나 이때는 부산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1일 당시에 취재하고 전국에 특종을 터뜨린 상태였다. 이때 기자가 훗날 할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장까지 오른 이만섭.
- [23]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속에 이와 같은 구호들은 사실 수없이 많았다. 당장 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만 해도 "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 정신 이상 없다" 같은 구호도 있었고.
- [24] 광화문은 이때 복원되지 않고 있던 상태여서 세종로 앞은 뻥 뚫린 공터였다.
- [25]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만해광장 옆 언덕배기에 있는 동우탑은 노희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념물이다.
- [26]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가 이대 출신이라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분위기상 여자대학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자유부인' 은 4.19로부터 불과 4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고생이나 여중생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다는 것에 연장자로서 책임감을 못 느꼈다는 주장도 있다.
- [27] 1960년 당시에는 대학은 집안 형편이 받쳐주지 않으면 가기 힘들었다. 게다가 여자들의 경우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도 보내지 않던 시절이다. 그런 시대 상황이다 보니 그 시절의 여대생들은 집안이 어느 정도 부유한, 즉 이미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집안이거나 그런 계층에 진입하여 신분 상승을 하려는 소수의 보통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이런 집안의 보수적인 분위기상 교문을 박차고 나올 리가 없다. 이런 분위기는 70년대 초반쯤 되어서 대학 입학이 어느 정도 대중화된 후에야 바뀐다.
- [28] 서울대학교의 경우 진출 시각이 각 단과대학마다 제각각인데 여기에는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서울대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각 단과대학이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나뉘어 있었던 것. 심지어 상과대학의 경우는 고려대보다도 더 먼 현재의 종암동 서울사대부고 위치에 있었다. 참고로 당시 서울사대부고는 현 청량리역 앞 아파트 단지 터에 소재.
- [29] 1971년 고려대에 흡수합병
- [30] 현 중앙대 예술대학.
- [31] 이 부분은 기록에 따라 전후 사정이 뒤바뀌어있다. 동국대학교측과 3.15의거기념사업회측의 기록은 발포 전이 아니라 발포 후 탈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소방차 쪽으로 오히려 진출하여 이탈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이 외에도 여러 상황과 기록을 종합해볼 때 동국대생들이 바리케이트를 뚫은 것은 버려진 전차(電車)였고 소방차는 조준 사격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듯하다.
- [32] 당시 문리대 캠퍼스는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맞은편인 마로니에공원 자리로 일설에는 관악캠퍼스로의 이전 이유가 서울시내로의 진입이 용이한 서울대생들을 산골짜기에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울대학교 정문의 로터리 구조나 전투경찰부대 입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
- [33] 이 선언문을 기초한 이수정은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후에 5공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서 5공 체제 홍보의 일익을 담당했다.
- [34] 4293년은 1960년으로 단기이다.
- [35] 아이러니한 것은 1957년경 사망한 경찰 초대 총경 차일혁은 무정부주의자적 성향에 가까웠다는 것.
- [36]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 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몇 자루의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機動化)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 김정남, '4.19혁명', 2003, 84페이지.
- [37] 이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배타적 외교행태를 탐탁지않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미국은 자본진영 우방국인 일본과 남한이 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원했으나 이승만은 항일운동가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는 등 대일외교 부분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2ch 혐한들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친일파를 자기 세력에 끌어들여서 친일파 득세의 원흉(게다가 보수우익 가운데 상당수도 친일을 용서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경우까지 있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담이긴 하지만 이승만이 한 일 중 호평받는 것 중 하나가 독도 해역 들어오는 일본 배는 꼬박꼬박 나포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이른바 '이승만 라인')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 [38] 이에 대해 "이승만이 하야하면 대통령직을 받을 사람이 사임하면 어찌하겠느냐" 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하야를 촉구하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 [39] 현재 그 자리에는 4.19 혁명기념도서관이 설립되었다.
- [40] 현재 그 자리에는 김구 동상이 서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개신교계와 보수세력, 뉴라이트들이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물론 실속은 영...
- [41]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여서 당시 총격의 한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는 1977년에 폐교되었으나 2001년 강북구 번1동으로 자리를 옮겨 재개교했다.
- [42] 물론 일설에 의해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국민학생들의 자발적인 시위는 아니었고 교사들이 먼저 협의하고 교사의 인솔하에 거리로 나온 것.
- [43] 당시 국민학생이였던 이들은 현재 60대다.
- [44] 어떤 만화에서는 끝까지 버티려 하다가 도움을 줄 거라 예상했던 주미대사관의 직접적 압박에 의해 현실을 직시하고 비서에게 자신이 말하는 대로 적으라고 했으며 비서가 무슨 내용을 말하실 거냐고 묻자 사임서를 쓰겠다고 말하는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
- [45] 재미있는 것은 당시 서울시내 치안 유지를 계엄군 외에도 각급 학교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4월 27일, 허정 내각수반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시민들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이같은 조치를 요청했고 예컨대 시경과 종로경찰서는 동국대학교가 담당했다.
- [46] 하지만 일가족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지만 확실한 것은 불명. 야인시대에서는 일단 영상으로는 이승만에 양자로 들어갔던 큰아들 이강석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걸로 묘사했으며 나레이션을 통해서 타살이라는 설도 있음을 밝혔다.
- [47] 박정희는 4.19 1주년이 되면 1주년 기념 시위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쿠데타를 준비하였지만 그날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수틀려버려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
- [48]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4.19 정신 계승' 문구는 시민의 저항권에 대한 근거 내용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 [49] 때문에 5.18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들의 의의를 어떻게든 깎아 내리려는 우익세력들도 4.19만큼은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4.19에 대한 부정은 곧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대한 부정으로 직결되므로
- [50] 이들은 2014년 현재 70대다.
- [51]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조선일보나 뉴라이트, 뉴데일리가 주도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오래 전부터 이승만 재평가에 앞장섰는데 이미 90년대에 솔빛조선 미디어라는 사업부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라는 시디를 내서 팔기도 했다. 더불어 이승만이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고 한기총까지 동상 건립을 시도하고 있으나 개신교계에서도 찬반이 워낙에 엄청나서 갈등이 크다고 한다.
- [52] 자식이 없던 이승만은 양아들이던 이강석(이기붕의 큰 아들)이 자살했기에 하와이에서 당시 30대인 이인수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
- [53] ...인데 사실 '금남56번' 이라는 버스의 번호를 바꾼 것이다(...)
- [54]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 16대 국회의원(용산).
첫댓글 국가적 대재앙 대참사 앞에서 조용하게 글로서 추모합니다 부정선거를 국민의 힘으로 민주적 힘으로 몰아내신 4.19 민주열사 분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