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 Jon Bon Jovi - Destination Anywhere http://www.youtube.com/watch?v=c8mtECOS-mA
제목 : 겨울바다로 가는 열차
1. 겨울바다로 가는 열차
12월 초 겨울밤, 청년 데드맨은 0시 행 열차를 기다린다. 정확한 목적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콘크리트 향 가득한 도심의 그 자리에 계속 멈춰 있는다고 하면 온 육신이 밀랍인형처럼 꽉 굳어버릴 것만 같아 무작정 떠나기로 작정했다. 커다랗지도 작지도 않은 짙은 갈색가죽가방을 한 손으로 꽉 움켜쥐고 또 한 손은 외투에 달린 깊숙한 주머니에 콕 찔러 넣었다.
밤 열차를 기다리는 사이 하늘에서는 빗발이 날린다. 문득 비를 맞고 싶어진다. 내리는 비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 대합실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차가운 비가 날린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바람에 강한 사선을 그리며 날리는 비에 두 손바닥을 내밀어 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는 비가 눈으로 바뀌길 염원하며 내민 손을 천천히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다음 비빈다.
"후우-"
진한 한숨이 나왔다. 입술을 굳게 닫고 손을 거둬들인다. 바닥에 놓인 가방손잡이를 움켜쥔다. 그때, 목적지가 생겼다. 흩날리는 빗줄기에 마음이 흔들려 데드맨은 목적지를 바다로 정했다. 장님여인을 찾으리라 마음먹는다. 빗속에서 장님여인이 그를 불렀다. 데드맨이 갈구하는 장님여인, 그녀는 바닷가에 살았다.
장님여인은 겨울바다를 움직인다. 삐걱거리는 낡은 목재의자를 바닷가모래사장위에 놓고 앉아,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은 맑고 선하지만 앞을 볼 수 없다. 그녀는 안경 따위는 끼지 않는다. 안경은 그녀의 눈을 가려 겨울바다를 감추게 한다. 그녀는 가슴이 시린 자를 기다려 겨울바다를 펼친다. 아마도 데드맨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밤 열차가 출발하는 역사 주변은 언제나 쓸쓸하다. 경직되고 딱딱한 세상과 선을 그은 채 한풀 더 울적한 기운이 역을 덮는다. 사람들의 눈망울도 쓸쓸하다. 요란한 기적소리는 찾을 수 없지만 아직도 열차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댕긴다. 그들은 내색하지는 않지만 저마다 그 누군가를 소망한다. 열차를 기다리면서, 열차에 오르면서, 마음속에 끌어 오르는 불을 그 무엇인가가 진화시켜주길 고대한다.
데드맨은 열차에 오른다. 탑승계단에 발을 얹는 순간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코끝이 찡해진다. 열차에 들어선다. 열차 안에 승객이 얼마 없다. 사람들의 숨결이 가장 희미하게 날리는 열차 뒷켠의 한 좌석을 골라 앉는다. 가방을 선반에 넣어놓고 창가를 바라본다. 차갑고 검은 창에 빗방울이 맺혀있다.
언제나 평화롭길, 빗속에서 평화롭길 기원한다.
열차가 달린다. 바퀴가 돌아 열차 칸이 덜컹덜컹 꿈틀거릴 때마다 데드맨의 가슴도 함께 요동친다. 한참동안 턱을 괴고 차창 밖만 바라본다. 그때서야 긴장을 풀어도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데드맨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지금 달리는 이 열차뿐이다.
달리는 열차는 눈물을 심어준다. 데드맨은 울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열차를 탔지만 쉽지가 않다. 눈물이 폭발할 것 같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칸을 연결하는 통로로 나간다. 덜컹거리는 열차바퀴 소리가 가슴을 때린다. 울컥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인지 더 부추기는 것인지 모르게 달리는 열차 소리는 데드맨의 폐부 깊숙이 박힌다.
데드맨에게 밤 열차는 추억이었고 가슴 쿵쾅대는 설렘이었다. 이제는 그 추억과 설렘이 증오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내리는 밤비를 향해 기도한다.
*
데드맨이 만든 곡을 도둑맞았다. 소규모 클럽가를 전전하는 언더그라운드 헤비메탈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곡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다. 수 년 간 피땀 흘려 작업해왔던 곡들을 절친한 친구였던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곡들이 담긴 데모테이프를 그들이 악용했다. 곡은 데드맨의 인생이었다. 그들은 데드맨이 만든 곡으로 데뷔했고, 유명세를 타게 됐다. 4인조 밴드의 주축이었던 데드맨을 밀어내고 자칼을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기용해서 레코드사와 계약했다. 함께 클럽가를 전전하다 인연이 된 자칼은 데드맨의 친형과 같은 사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밴드의 베이시스트인 아이유는 데드맨의 연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어온 그녀가 데드맨의 피땀 어린 곡들을 가로챈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지금 그녀는 유명해져 있다. 이후 데드맨을 만나지도, 만나주지도, 만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배신행위였다.
그들의 노래 상당 수가 데드맨의 곡이란 사실을 밝혀낼 마땅한 증거가 없었다. 더욱이 데드맨은 굳이 그런 사실을 밝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단지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애초에 신념으로 여겼던 헤비메탈을 버리고, 색이 다른 장르로 편곡해서 앨범을 발표했다. 헤비메탈을 배신하는 길이 더 빠른 성공의 길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영리한 선택이었다.
지난해 10월의 마지막 밤 날, 데드맨은 밴드의 리드싱어 hellmut과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hellmut은 그의 고교시절부터 절친한 후배이자 동생이다.
뮤직바에 앉아 그들은 밴드의 진로에 관해 논의 중이었다.
"형! 이제 정말 그만 곡을 발표하고 데뷔하자고. 레코드사에서 관심도 보이고 아무리 봐도 지금이 적기야!"
hellmut의 말에 데드맨은 회의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조금 더 다듬어야 한다. 이 상태로는 아직이야."
"우리 모두 이제 시간도 없고 견뎌낼 여지도 없어. 모두 굶어 죽을 판이야. 정말 견뎌낼 수 없을 지경인 거, 형도 잘 알잖아."
"아직은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야."
"언제나 형은 반복된 말만 해왔어. 형은 성공을 일부러 미루고 있는 거야.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데드맨은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날 hellmut과 헤어졌다. 완벽한 헤비메탈의 구현을 위한 그의 고집이었다. 결국, 그날로 그들은 서로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
올해 10월의 마지막 밤 날, 데드맨은 선배 아이언주다스를 만났다. 아이언주다스는 넉 달 전 만취상태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넘어져, 바닥에 삐져나온 철사에 오른쪽 눈동자가 깊숙이 찔려 실명됐다. 데드맨이 애초에 술꾼에다 애꾸까지 된 아이언주다스를 만난 이유는 한가지였다. 최소한 그가 자기를 배신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데드맨의 사정을 들은 아이언주다스는 격앙했다.
"어떻게든, 니가 만든 곡을 찾아야지. 양심도 없는 비열한 사기꾼 새끼들!"
"곡이야 뭐 다시 쓰면 되는 거고..."
대답하는 데드맨의 말은 힘이 없었다. 그것은 사실상 빈말이었다. 한두 달 작업도 아닌 삼 년간의 모든 노고가 담긴 곡을 날리고 다시 시작하기란 정말 앞을 가늠할 수 없이 힘겨운 일을 넘어 피를 쥐어짜내야 하는 고통이 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데드맨은 피우려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몇 분 째 입술에 비비고만 있었다.
"걱정마라, 데드맨. 우리들 삶이란 건 언제나 헤비함과 펑키함을 잃지 않는 거잖냐. 그렇게만 살아가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힘내라." "꽈당!"
아이언주다스는 그날 그렇게 최후의 말을 마치고 쓰러졌다.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진 이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소주 세 병 반에 정신을 잃은 아이언주다스를 그대로 두고 데드맨은 술집을 나왔다.
'죄의 삶을 살지 말자고 약속한 그녀야, 언젠간 돌아오리라 믿어.'
***
열차의 바퀴소리는 경쾌하지만 쓸쓸하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는 바퀴는 그 쓸쓸함이 더한다.
'다시, 다시 모든 걸 미뤄야하나. 또 얼마나 가슴태워야하나.'
음악 : Queensryche - Silent Lucidity http://www.youtube.com/watch?v=LniY0pDQGaE
2. 겨울바다 위의 헤비메탈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하얀 눈을 타고 바다 속에 스며들었다
열차는 진한 입김을 내며 달린다. 찬바람을 탄 그 입김은 겨울의 세상을 휘젓는다. 헛기침 소리 하나 내지 못할 침묵의 밤이 돌아올 때면, 데드맨은 가슴이 뛴다. 평정심을 유지하기위해 약하고, 강하고, 연하고, 진한, 여러 가지 한숨을 교차해보지만 평안함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 틈에, 어느새 열차는 검푸른 바다를 가로지른다.
데드맨은 환각의 세상에 기댄다. 붉고 굵은 열매가 하늘에서 끝도 없이 우두두 떨어져 내린다. 열매는 쉽게 깨져 온 세상이 피투성이가 된다. 열매를 따라 막대한 양의 피 묻은 돈이 온 도심에 뿌려진다. 고층빌딩에서 뿌려지는지, 아파트옥상에서 뿌려지는지, 하늘에서 날리는지 알 수 없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돈을 수거하는 커다란 트럭위에 올라선 한 남자가 확성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사람들에게 지시한다.
"피 묻은 돈을 꽉 움켜쥐어라! 벌거벗은 상반신이 콘크리트 바닥에 긁혀 상처가 날지라도 놓치지 마라!"
끊임없이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피 묻은 돈을 꽉 움켜쥐어라- 놓치지 마라- 놓치지 마라- 말 많은 그의 주둥이에 총알을 박고 데드맨은 그 돈을 빼앗아 왔다. 그의 삶의 자유를 박탈하고 돈을 챙겼다. 데드맨은 돈으로 영혼을 샀다. 거대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열차의 티켓을 사기위해 돈이 필요했다. 피가 묻은 그의 돈이 필요했다.
데드맨은 자유를 외친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열차의 창을 활짝 열고 크나큰 소리로 외친다. 이 야 호- 나는 헤비메탈이다!
종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바다에 희망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그라지나 싶더니 이내 다시 종소리는 들려온다. 반대로 세월은 어둡고 차가운 겨울바다 속에 저물어 희미해진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일구어진 세월이 저물어 가고 있다.
차가운 바람, 차가운 가슴, 차가운 눈동자, 차가운 바다가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버린다. 더불어 열차도 함께 멈춘다.
데드맨은 열차에서 내려 바다에 선다. 그는 바다 위의 카우보이가 되어 두 팔을 쫙 펼치고 한껏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고 싶어 한다. 저물어진 삶을 살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 양쪽 허리춤에 총을 찼다. 그대(연인, 헤비메탈)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데드맨은 노래하는 카우보이, 노래하는 총잡이,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총잡이, 피 묻은 돈을 움켜쥔 총잡이다.
데드맨은 솜털구름 속에 숨어있다 아스라이 추락하는 깃털이 되는 꿈을 꾼다. 눈송이보다 가벼운 새하얀 깃털이 되어 바다 위로 떨어진다. 살랑- 살랑- 아련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삶, 바다위에 떨어뜨려진 삶은 가라앉지 않고 떠다닌다. 그러다 차차 퇴색된다.
데드맨은 바다 위에서 위스키를 마신다. 불꽃이 꺼져가던 가슴이 쓰디 쓴 위스키로 달구어진다. 지난 시절, 지난 아픔, 붉고 쓰디 쓴 위스키 한잔으로 불타버린다!
****
바닷가모래사장에서 목재의자를 놓고 앉아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데드맨은 약간은 떨리는 가슴으로 그녀의 옆에 다가섰다.
장님여인의 목소리가 차분히 울렸다.
"삶을 정리하려 이곳에 온 것이로군요."
데드맨은 침착히 되물었다.
"삶의 정리라면 죽음을 말하는 것인지?"
"당신이 탔던 열차는 인생의 축소판이자 최종 마무리였던 겁니다."
"그건, 마치 죽기 전에 마지막 안식이었다는 말 같이 들리는군요."
"꼭 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죽는 건 아녜요. 죽는다고 약속할 필요는 없죠. 그 약속의 대상이 자신이 됐건 타인이 됐건... 당신은 열차를 타면서, 아니면 열차를 타기 전부터 죽음을 준비했던 거죠. 직접 죽음을 떠올리진 않았지만..."
"죽음을 위한 절차의 끝을 통과했다는 말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당신을 결코 죽을 수 없어요. 하하. 이제 당신이 죽지 않게 불꽃을 태워야겠네요. 자, 불을 지피지요. 삶의 불을 말예요..."
장님여인은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인 모래사장위에 준비한 장작더미에 불을 지폈다.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모닥불이 어느새 활활 타오른다. 모닥불에서 피어나는 불꽃들이 까만 밤하늘을 타고 올라 총총한 겨울 별들과 마주한다.
"불을 쬐세요."
장님여인의 권유에 데드맨은 모닥불에 다가가 손을 내민다. 장작이 타면서 나는 '탁탁' 소리와 피어오르는 연기 냄새가 좋았다. 데드맨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장님여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녀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실크 드레스와 유려한 얼굴이 장작불에 비쳐 은은한 빛깔이 더했다. 그녀는 쓸쓸해보였다. 아마 언제나 그럴 터이다. 그녀는 가슴이 시린 자들에게 모닥불을 지펴주지만 뻥 뚫린 자신의 가슴은 돌보지 않는다. 이제 알게 되었다. 그녀는 헤비메탈의 여신이다. 그녀는 헤비메탈에 불꽃을 지핀 것이다. 그녀가 다시 헤비메탈을 바다로 불렀다.
불을 쬐던 데드맨이 문득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방을 열고 그 속에서 두툼한 털목도리를 꺼냈다.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두르세요. 따듯할 거예요."
데드맨은 Judas or Sabbath 글자문양이 특별한 목도리를 그녀의 목에 둘러주었다.
투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의 작은 미소, 작은 환희의 의미는 컸다. 그것은 환호성으로 이어졌다.
"자, 여기 다시 기타를 잡으세요!"
헤비메탈의 여신은 준비해두었던 기타를 그에게 주었고,
깊어가는 겨울새벽 바닷가에 데드맨이 울리는 헤비메탈기타 소리는 깊이깊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갔지만 헤비메탈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끝>
첫댓글 헤비메탈의 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