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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까망별★(1999-0905@hanmail.net)
창작실: 20대나래창작Ⅰ
제목: 해프닝(happening)
편수: 4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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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해프닝의 유혹-
정현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시연은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정현이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곳 아이들 하나하나 다 소중했지만 정현이는 더 신경이 쓰였다. 자신과 많이 닮
아 있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애착이 가는게 사실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시연을 보고 아이들
이 달려들었다. 시연은 그런 아이들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정현이 곁으로 갔다. 땀을 흘
리며 잠들어있는 정현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시연의 등뒤로 원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열이 많이 내렸어. 밤엔 어찌나 열이 끓던지… 감기라는 구나. 그리 걱정 안 해도 될 거
야."
"네…"
정현의 머리맡에 약과 물을 내려놓은 원장님은 정현의 머리를 다시 한번 짚어 보았다.
"아이들이 아플 때면 내가 잘못 돌봐 그런 것 같아 죄를 짓는 기분이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런 생각하지도 마세요."
아이들은 정현이만 보는 시연에게 매달려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더 어린 아이
들은 책을 읽어달라기도 하고, 공부를 가르쳐 달라며 노트를 가져오기도 했다. 원장님은 그
런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시연은 아이들에게 정현이 약 먹이고 책을 읽어준다
며 건너 방에 가 있으라 말했다. 아이들은 시연에 말에 신나서 모두 건너 방으로 달려갔다.
시연은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정현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시연의 체온을 느낀 건지 정현
이가 눈을 뜨고 시연을 본다. 시연은 그런 정현이에게 말없이 웃어 주며, 약 먹자며 일으켜
앉혔다. 쓴 가루약을 인상도 쓰지 않고 먹는 정현이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시연이 어렸을
때도 저처럼 표현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정현이 늘 안타까운 시연이었다.
"더 자."
"언니 갈 거야?"
"아니야. 밤까지 있을게."
"그럼 자구 가."
"그래 그럴게. 내일 일요일이고 하니까… 걱정말고 어서 자."
정현은 누워 두 눈을 감았다. 시연은 그런 정현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할 때까지 옆을 지켜
주다 건너 방으로 왔다. 몇몇 아이들은 시연을 기다리다 잠들었는지 책을 펴두고 쓰러지듯
누어 있었다. 시연은 그런 아이들을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고는 깨어 있는 아이들을 모
아 책을 읽어 주었다. 조금 큰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거나 학교 친구들과 놀고 있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동화책을 세 권 째 읽어 가는 데 창문 밖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지
나간다.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색 고급 세단이 보육원 마당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건 중년의 부인과 젊은 남자였다. 트렁크에서 쉴새없이 무언가 내리는 모
습이 보육원 후원자인 것 같다. 시연은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시연이 밖으로 나가
자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보육원 안으로 큰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시연은 마당으로 나가
중년부인과 원장님이 계신 방향으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중년부인의 옆에 선 남자가 시연
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뜻밖의 인물이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이다. 상대 또한 시연
을 알아 봤는지 놀란 눈이다. 서로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원장님이 시연을 부른다. 시연은
아이들을 때어 놓고 중년부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 냈다. 그리곤 원장실로 가자는 말을 뒤
로하고 아이들과 있겠다 말했다. 중년부인 또한 자신의 옆에 선 남자에게 함께 들어가자 했
지만 보육원을 둘러본다며 자리에 남았다. 어색하게 둘만 남아 서있다 시연이 먼저 돌아섰
다. 시연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향했다. 멍하니 서있던 남자 또한 시연이 움직이는 방
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은 아이들에게 안으로 들어가 씻을 준비
를 하라며 들여보냈다. 마지막 아이까지 안전하게 들어가는 걸 지켜본 후에야 시연도 발길
을 땠다.
"시연씨!"
지훈의 부름을 무시한 채, 보육원 안으로 들어간다. 지훈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달려
가 시연의 손목을 잡는다. 놀란 시연은 지훈을 돌아봤다.
"뭐 하는 거예요?"
"얘기 좀 해요."
"전 그쪽하고 할 얘기 없어요. 이거 놔요."
"미안해요. 그 날은 내가 많이 취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놓으라구요."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요. 아니면 욕을 해도 다 들을게요."
"이거 놔요. 애들 목욕 시켜야 해요."
"그럼 같이해요."
시연은 지훈의 말에 살짝 지훈을 노려봤지만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연보다 먼저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시연은 그런 지훈의 모습을 보고 깊게 한숨을 내 쉰 뒤, 어떻게 할까 망설
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시연이 욕실로 향하는 바닥엔 지훈이 입고 옷 가디건이 놓여 있고,
문은 닫혀 있었다. 시연은 욕실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들을 본 뒤 욕실 문을 열었다.
"뭐해요?"
"깜짝야, 뭐하긴요 애들 씻겨요. 남자아이가 두 명 많네요. 여자 애들은 시연씨가 씻겨요."
정장바지는 양말 안으로 넣고, 와이셔츠는 걷어올린 채, 한 명도 씻기지 않았는데 땀이 비오
듯 한다. 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욕실 문을 닫았다. 시연은 다른 욕실로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가 씻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모두 씻기고 난 시연은 물기를 잘 닦아주고 드라이어
로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한참 아이들 머리를 말려주는데 남자아이들과 지훈이 방으로
들어왔다. 바지는 물에 다 젖고, 윗도리는 땀에 다 젖어 있었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힐끔
보고, 다시 아이들 머리 말려주기에 집중했다. 지훈이 뭘 해야할지 몰라 서있자 명연이가 서
랍에서 드라이어를 가져와 지훈에게 쥐어준다. 지훈은 그런 명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아이들 모두의 머리를 말려주고 잠옷으로 갈아 입히고
자리에 눕혔다.
"안 가세요?"
"자고 갈 거 에요."
"여기서 봉사활동 하신지 오래 되셨어요?"
"………"
"시연이 누나."
"응?"
"누나 정현 누나랑 잘 거야?"
"응. 정현 누나가 아프잖아. 명연이 잠이 안 와?"
"아직 7시밖에 안됐는데? 우리 밥도 안 먹었어."
시연은 당황해서 시계를 봤다. 정말 시간은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저녁
들도 먹지 않은 시간이었다. 원래 저녁은 큰 아이들 때문에 7시 30분이나 8시에 먹게 되 있
었다. 더 어린애들은 가끔 먼저 먹기도 하지만 아직 저녁이 안된 모양이다. 시연은 지훈 때
문에 정신이 없어서 밥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시연은 아이들에게 놀고 있으라 하고는 식
당으로 향했다. 어느 틈에 따라 나온 건지 지훈이 옆에 서있었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놔 둔
채, 식당에 들어가 아주머니를 도와 밥 준비하는 것에 속력을 붙였다. 지훈은 그런 시연을
보고 수저통을 가져와 식탁에 깔아 놓았다. 수저야 아이들이 가져다 먹지만 시연은 말하기
싫어 그냥 지훈이 하는 대로 놔두었다. 얼마 후, 식사가 다 차려지고 아이들을 부르러 가는
데 원장님과 중년부인이 나왔다.
"지훈아 가자."
"지금 가실 거 예요?"
"가야지. 너 저녁 먹고 갈려고 했어?"
지훈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에 말했지만 어머니는 내심 놀란 눈치 셨다.
"전 오늘 여기서 자고 갈게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내일 하루 더 놀아주려 구요."
"피곤하지 않겠어? 어제도 밤새고 오늘 바로 따라나선 거잖니."
"괜찮아요."
지훈은 어머니를 배웅하러 나갔다. 물론 원장님과 함께 시연도 따라 나섰다. 지훈의 어머니
차가 멀어지자 지훈은 돌아서 시연을 보고 웃었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외면 한 채 들어가
아이들을 데리고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대충 몇 숟가락 뜨고 난 시연은 영양사가 만들어준
죽을 가지고 정현이가 있는 방으로 갔다.
"잘 잤어? 죽 좀 먹자."
"언니 나랑 잘 거야?"
"음… 언니 오늘 그냥 집에 가야 할까봐. 할 일도 있고… 정현이 아픈 것도 괜찮아 보이고
해서…"
"많이… 바뻐? 안가면… 안되는 거야?"
시연은 서운해하는 정현이를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시연을 보고 정현은 죽을 한
수저 먹으며 자기는 괜찮다며 바쁘면 가보라고 웃어 보인다. 시연은 그런 정현의 모습이 안
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정현이 다 먹은 죽 그릇을 들고나오
자 문 앞에는 지훈이 서 있었다.
"앗, 깜짝야! 뭐예요!"
"애들 식사 다 끝내고 방에 데려다 놨어요."
"근데 어쩌라구요?"
"이제 더 할 일 없으면 이야기 좀 해요."
"애들 동화책 읽어줘야 해요."
지훈은 자꾸 자신을 피하는 시연을 말 없이 쫓아 다녔다. 시연이 자신에게 기회를 줄 때까
지 쫓아다닐 생각이었다. 지훈은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좋기만 했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이번이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는 생각에 최대한 시연을 건들이지 않는 한도에서 움직였다. 존재감은 들어내되 귀찮게는
하지 말자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시연의 모습과 목소리를 듣고 있는 지
훈은 너무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목소리에 취한 건지 자신도 모르는 새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밖이 깜깜해져 있을 때였다. 핸드폰을 열어 보니
시간이 벌써 12시가 넘어 있었다. 지훈은 자신에게 덮여 있는 이불을 한번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이 죽을 가지고 갔던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하지만 안에는 그 아이와 다른
아이 2명만 더 있을 뿐 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혹시 자신이 잠든 사이 시연
이 간 건 아닐까 해서 밖으로 나왔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지훈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
는 시연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가가 시연의 옆 그네에 앉았다.
"잠 안자고 뭐해요?"
지훈의 말에 놀란 시연은 지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시연의 팔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 용서 안되는 거 알지만… 용서 해줘요."
"………"
"나 그쪽 생각 많이 했어요. 나, 나 좋다는 사람한테도 참 냉정한 놈인데, 시연씨 한테는 그
게 잘 안되더라구요. 말로는 싫다고 하고 매번 떠올리고… 그렇게 아픈 말 죄다 쏟아 내고
괴로워서 몇 날 몇 일 술만 퍼마시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나
너무 좋아요."
시연은 지금 지훈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연은 지훈을 뚫어져라 바라
봤고 지훈 또한 그런 시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연은 지훈의 눈에 다시 마음이 흔들렸
다. 왠지 모를 전과는 다른 듯한 눈이 시연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시연은 지훈
의 팔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그런 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 졌다. 이미
마음에 들어와 있는걸 안 이상 이대로 물러 날수는 없었다. 지훈은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이
떠올라 인상을 썼다. 저 여자에게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다시 쓰려왔
다. 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 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꾀 맑고 별도 보였다.
"별이 참 많네… 인공위성인가? 풋…"
지훈은 예전에 시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
시연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아이들의 식사준비를 도왔다. 영양사와 일을 도와주시는 아주
머니들은 가서 쉬라 했지만 시연은 괜찮다며 일을 도왔다. 식사시간이 가까워 져서 모두 일
어나 있었다. 어느새 지훈도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며 일을 도왔다. 모두 식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했다. 몸이 한결 좋아진 정현이도 함께 나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모두
식사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져 밖에 나가 놀기 바빴다. 조금 나이가 있는 아이들은 숙제를
하거나 컴퓨터를 하곤 했다. 시연은 뒷정리는 아주머니에게 맡긴 채,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자기 전, 이불을 꼭 밟아 빨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서였다. 큰 다라이를 가지고 와 꺼
내온 이불들을 담궜다. 한번에 두 개씩 밟아 빨기로 한 시연은 비누를 풀고 통에 들어가 이
불을 밟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해요."
어느새 나타난 지훈이 바지를 걷어올리고 다라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보
고 인상 썼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봐 온 결과, 뭐라 말해도 절대 듣
지 않을 것 같아서 였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빨래 하긴 그만이죠? 오늘 언제 갈 거예요? 갈 때 나 버리지 말고
가요. 이야∼ 이 이불 다 빨면 점심시간 넘겠네요. 힘들면 나 혼자 할게요. 나가 앉아 있어
요."
"어머, 왜 이래요. 그쪽이나 자꾸 거치적거리지 말고 비켜요."
"시연씨가 나가있어요."
"그쪽이 나가라니까요."
"어∼어∼ 넘어지겠어요! 엇!"
풍덩…
"앗 차가워!!"
결국 함께 넘어진 두 사람은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두 사람은 고등학생인 비슷한 체격의
애들 옷을 빌려서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각자 샤워를 마치고 나와 한 방에 앉아 머리를 말
리던 두 사람은 보이지 않게 웃고 있었다. 머리를 다 말리고 옷을 가장 볕이 잘 드는 자리
에 널어놓고 빨래를 하던 자리로 다시 갔다. 하지만 이미 그 곳에는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빨래를 하고 계셨다.
"제가 할게요!"
"됐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이불 빨려고 했어. 들어가서 쉬어. 오랜만에 와서 왠 일을 그렇
게 해. 아이들하고 더 놀아 주던가 해. 저 총각도 좀 쉬게 해줘야지. 내내 시연이만 쫓아다
니는 구만…"
"죄송해요… 일은 제가 다 벌려 놓고…"
"됐으니까 가서 쉬어."
시연은 아주머니들에게 미안했지만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게 했기에 그냥 돌아섰다. 시연
은 보육원 뒤쪽에 자주 가던 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던 지훈 또한
옆에 가서 앉았다.
"옷이 꾀 잘 어울리네요."
"그래요? 이런 색 트레이닝복은 안 입어봐서…"
"학교 체육인 모양이에요. 자주색인 거 보니. 나보고 여기 봉사활동 다닌지 오래 됐냐고 물
었었죠?"
"네."
"저… 이곳 출신이예요. 갓난아기 때 버려졌던…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
요. 좋은 원장님 밑에서 이 만큼 컸으니까요. 난 이대로가 좋아요. 절 그냥 두세요."
"난… 싫어요. 이제 내가 말할게요. 나. 이시연씨 좋아해요. 도망가지만 말아요. 이제 내가
갈게요. 시연씨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곳 출신이란 거 난 상관없어요.
난… 더욱 그래요."
.
.
저녁이 되어 시연과 지훈은 보육원을 나섰다. 좀 나아진 정현이의 모습이 제일 앞에 보였다.
시연은 정현에게 이제는 그렇게 의젓하게만 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아프면 아프
다고 소리쳐도 되고,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고, 웃고 싶으면 마음놓고 웃어도 된다고, 마음
을 표현하며 살라고 했다.
"오빠!!!"
정현이가 가는 지훈을 잡더니 귓속말을 하고는 다시 뛰어 간다.
"정현이가 뭐래요?"
"비밀 이예요."
지훈은 웃으며 시연을 쫓아 길을 걷는다.
.
.
"오빠. 우리 시연언니 울리면 안돼요. 행복하게 사랑 많이, 많이 해주세요."
-22.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
"아암∼"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시연이 다급히 팔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들
이 하나 둘씩 교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제 집으로 돌아와 쉴 틈
도 없이 문제 출제를 하다 날이 밝아져 오는 것을 보고 새벽부터 출근을 한 시연이였다. 그
덕에 오늘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프린트 물은 완벽하게 정리되었고, 수업 준비도 끝냈다. 시
험 문제만 10문제 정도 출제하면 일은 다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시연은 회의를 하기 전,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나 전화는 받지 않았다. 아침 회의가 시작되고 선생
님들이 모두 모였다. 오늘은 운동장 조회가 있어 간단한 회의였다. 시연은 교감 선생님 말씀
을 듣다가 준성을 보았다. 준성의 얼굴이 어두웠다. 교무수첩에 고정된 시선이 한번도 움직
이지 않은 채, 회의를 마쳤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만
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생님들이 다 일어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 모습이었
다. 시연은 그런 준성에게 다가가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그냥 어색하게 한번 웃어 보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침 조회가 시작된다는 방송과 함께 아이들이 운동장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시연도 아이들과 함께 줄을 섰다. 강당 놔두고 밖에서 조회한다며 투
덜대는 아이들의 볼멘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온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길어질수록 아
이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커져간다. 장작 1시간에 걸친 조회가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온 시연
은 수업에 들어가기 전, 다시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 그냥 교실로 향했다. 시
험 총정리에 들어간 수업 시간은 아이들의 눈을 빛나게 만들었다. 고3… 공부하기를 죽기보
다 싫어하는 녀석들도 대학이라는 이름에 약해지는 지, 총정리에는 열심히다. 첫 시간이 담
임시간이라 그런지 더 열심히 하는 듯한 아이들 모습에 시연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퍼졌
다. 총정리를 마치고 난 후 20분 가량 남은 시간은 자율학습을 하도록 했다.
똑, 똑, 똑.
"여기 이시연 선생님 계시나요?"
"제가 이시연인데요. 누구시죠?"
"택배입니다."
택배회사에서 배달 왔다고 말한 남자는 수업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들어와 시연
에게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시연은 놀라서 꽃만 보고있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난감
해 하는 시연에게 사인을 해달라며 펜을 내미는 남자…
"누가… 보낸 거죠?"
"카드 있다고 하던데요."
시연이 엉겁결에 사인을 하자 택배기사는 인사를 하고 교실에서 나갔다. 아이들은 누가 보
낸 거냐며 물어보기 바빴다. 시연은 꽃바구니 안에 있는 카드를 열어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지희를 바라보았다. 지희가 자신을 보는 선생님에게 의아하단 표정을 보이자 그제 서야 정
신을 차린 시연이 얼른 고개를 돌린다. 그리곤, 꽃바구니를 탁자에서 내려놓은 뒤, 흥분해
있는 아이들을 진정 시키고 창문 쪽으로 가 섰다. 창 밖에는 첫 시간부터 뛰는 아이들이 보
였다. 2, 3학년의 체육을 도맡아 하고있는 준성은 수업시간이 거의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3
학년은 공부만 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여 올해부터 교장선생님이 체육시간을 넣으라 해
생겨났다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3학년 체육시간은 그냥 아이들의 머리 식힘 정도로 수
업을 진행하는 듯 했다. 남자아이들은 농구를, 여자아이들은 피구를 시켜두고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준성을 보고 있자 수업 종료 종이 울린다. 시연은 반장의 인사를 받고 바
구니를 들고 교실을 나왔다. 쉬는 시간, 복도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의 질문을 무시하고 교무
실로 향한 시연은 몇 선생님들의 질문을 간단히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바구니를
보이지 않게 책상 아래로 밀어 넣고, 카드만 꺼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지훈-]
시연은 카드를 다시 한번 펴 본 뒤, 누가 볼 새라 교무수첩에 껴 넣었다.
수업이 끝나고 준성이와 얘기 좀 해볼까 해서 찾았지만 어느 틈에 사라진 건지 준성이는 보
이지 않았다. 시연은 조금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의 스쿠터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어
제 저녁에 배가 고파 밥 좀 먹으려 했더니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던게 생각나서 였다. 마트
에서 이것, 저것 사가 지고 스쿠터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집에서 밥을 해먹으려니
좀 어색한 것 같았다. 시연은 사온 재료들을 늘어놓고 오므라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맛있
는 냄새가 솔솔 풍기자 윌리가 시연의 옆에 착, 붙어 연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므라이
스가 완성되고, 윌리에게도 조금 나누어 준 뒤, 식사를 했다. 식사를 다하고 정리까지 마치
고 나서야 학교에서 가져온 바구니가 눈에 보였다. 현관문 앞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바구
니를 보고는 들고 방으로 들어와 화장대에 올려 두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바구니기에 화장대
에 올려놓아도 좋았다.
지훈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일도 술술 풀리기 시작했고, 시연과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고백에 대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그것으로 만족했다. 시연을
만나고 와서부터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한 거 같아 고마움의 표시로 크지 않은 꽃바구니를 보
내 주었다. 일부러 수업시간에 보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무슨 짓이냐며 따지는 전화라
도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그것도 과한 욕심이었나 싶다. 그런 조금 서운한 마음도 잠시, 쏟아
지는 서류뭉치에 정신 없이 일을 시작했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서류와 씨름하
기 시작한지 얼마 후, 짧고 간결한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부탁한 자료 가져왔어."
"어. 고맙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뭐… 그냥."
"민경이 주말에 니네 집에 갔더니 너 없다 더라. 어머님이 후원하는 보육원에서 잤다며?"
"응. 그냥 그렇게 됐어."
"그래… 그럼 수고해라."
"그래."
태종의 얼굴을 본 지훈은 마음이 무거워 졌다. 통 잠을 못 자는 듯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태종이 사무실에서 나가고 2시간 후, 민경에게 전화가 왔다.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음성이 들어왔다. 음성을 들은 지훈은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지훈이
전화를 받지 않자 오늘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로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지훈은 인상을 깊게
써 보인 뒤, 민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지훈에게 밥 사달라고 전화했다며
지훈이 전화한 것에 매우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지훈은 그런 민경에게 다음에 먹자했지만,
오늘 안 사주면 회사로 오겠다는 말에 지훈은 결국 약속을 정했다.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안경을 다시 쓰고 서류를 들여다보는 지훈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는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다가왔다. 벌써 약속시간에 가까워 진 것을 안 지훈은 옷을 챙겨 입고 사무
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있는데 태종이 옆에 와 섰다.
"퇴근해?"
"응. 니 동생 밥 사주러 간다."
"그래? 맛있는 것 좀 사줘라. 공연 준비한다고 꾀 고생했어."
"알았다. 니 부탁이라면 야, 못 들어 줄 것도 없지."
피식 웃어 보이는 지훈의 어깨를 두들기며 어색하게 웃는 태종…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각자
길로 가는 태종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늘 웃고만 있어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 무표
정을 유지하니 꾀 차가워 보인다. 차를 몰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지훈은 미리 와있는 민경을
보고 다가가 앉았다. 지훈이 와서 앉는 모습을 보고 행복하게 웃는 민경의 모습과 태종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음식을 주문해 두고 기다리는 사이, 민경이 쉴새 없이 이야기를 한다.
"오빠. 내 얘기 듣고 있어?"
"대충…"
"어제 보육원 갔었다며? 나중에 나도 같이 가자. 아이들이 얼마나 예쁘길래 자고 왔어?"
"그냥 다 예뻐."
"그래… 오빠…"
"응."
"오빠 어딘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는 거 알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달라졌어. 뭔지 모르지만… 확실히… 달라졌어…"
식사를 마친 민경은 간단하게 한잔하고 들어가자 했지만 지훈이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민경
은 더 이상 조르지 않고, 지훈을 보내 주었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지훈을 한사코 그냥 보
낸 민경은 멀어지는 지훈의 차 뒤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지훈이 데려다 준다고 할걸 안 민
경은 자신의 차를 가져오지 않았지만, 조금 걷고 싶다는 생각에 지훈을 먼저 보낸 것이다.
지훈은 민경과 헤어지고 시연네 집 쪽으로 향했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불이 켜져 있는지
아직 안 들어와 집이 어두운지 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지훈의 차가 시연이네 근처에 도착하
자 멈춰 섰다. 저 멀리 시연이 집 앞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태종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은하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흐릿한 눈앞이 점점 선명해 지며 주변의 사물
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링겔 병 하나가 보인다. 은하가 두 눈을
다시 꼭 감자,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냈
다. 은하를 향해 일어났냐고 물어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된 거예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래. 과로도 있고… 니 파트너가 사색이 됐더라. 방금 갔어."
"네… 미안해요. 아빠…."
"녀석…."
오후가 되자 병실문이 거칠게 열리고 준성이 들어온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게 엘리베이터가 느려 뛰어 올라온 모양이다. 준성은 들어오자 마자 은하의 아버지께 인사
를 하고는 은하 곁에 다가와 은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야, 뭘 그렇게 열심히 뛰어와."
"괜찮아? 괜찮은 거야? 왜 그렇데? 검사는 다 해 본 거야?"
"숨 좀 쉬어. 나 안 죽어."
"죽긴 왜 죽어!!!"
"깜짝야∼ 내가 언제 죽는데? 안 죽는다고 그랬지. 그냥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데."
"후∼ 다른 데는 괜찮고?"
"응!"
준성은 그제 서야 안심이 된건지 한숨을 푹∼ 내 쉬며 빈 옆 침대에 걸터앉는다. 한참을 준
성의 말에 대꾸해주던 은하는 잠시 잠이 들었다 깼다. 한 시간 가량 잠들었던 모양이다. 옆
에 의자에 앉아 은하의 손을 꼭 잡은 채 엎드려 있는 준성의 모습이 보인다. 은하가 깨어
난 걸 안 준성이 다시 한번 괜찮냐 물어오고 은하는 괜찮다 말한다. 은하를 걱정스레 보는
준성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똑똑.
짧은 노크소리와 함께 시연이 들어온다. 수업을 마치고 온 시연의 표정이 걱정으로 한결 어
두워 보인다. 시연에게 준성이 좀 데려가라 했지만 오히려 볼멘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시연
과 아빠가 돌아 간 뒤, 둘만 남은 병실 안은 조용했다. 오랜만에 침대에 오래 누워있다 보니
허리가 아팠지만 인상쓰고 앉아있는 준성 때문에 쉽사리 나가겠다는 말도 못하고 있는 은하
였다. 결국 밤이 될 때까지 꼼짝 안고 누워 있다보니 하는 일이라고는 내 자는 일 뿐이었다.
계속 잠만 자다 허리가 아파 일어난 은하는 잠든 준성을 보고 슬쩍 웃어 보이며 링겔 병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만 나와도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
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밤거리는 한적해서 은하처럼 환자복을 입은 사람 한 두 명 빼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은
하는 좀 더 있다 들어가고 싶었지만, 행여 준성이 깨서 화라도 낼까봐 얼른 병실로 올라갔
다. 병실로 돌아가는 복도… 은하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 였다.
차트를 뒤적이며 걸어오던 남자는 은하를 보지 못한 채,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은하는 멍하
니 서있다 몸을 천천히 돌려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모습이 완전하게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병실로 돌아왔다. 은하가 들어오는 소리에 깬 준성이 은하에게 다가
왔다.
"어디 갔다와?"
"준성아…"
"응?"
"퇴원하자."
"뭐?"
"지금."
준성은 멍해져 들어온 은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
하지 않은 채, 계속 퇴원만 하자는 은하였다. 준성은 그런 은하를 간신히 진정 시킨 후, 아
침 일찍 퇴원하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 은하는 새벽같이 퇴원하자 난리 였고, 결국 퇴
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말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누워있는 은하를 보고
답답해하면서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은하 곁을 지키는 준성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그런
준성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준성은 밥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는 은하를 위해 은
하가 좋아 할만한 먹거리를 사러 나갔다. 어둑어둑 해진 시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워
만 있던 은하가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입원했던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실로 올라온 은하는 그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 여기 민국현… 의사선생님 계시나요?"
"아, 민선생님이요? 여기 안 계시고 10층에 계실텐데요."
"10층이요?"
은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0층으로 향했다. 간호사실에 물어보니 복도 맨 끝에 위
치한 의국에 있다고 한다. 은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 문 앞에 서 노크를 했
다. 안에서 짧은 대답이 들려온다. 은하는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쓱, 닦아 낸 뒤, 문
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안에는 국현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
은 국현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 그때… 맞죠? 괜찮아요?"
"왜… 왜 날 모르니…?"
"네?"
"금방 돌아온다 했잖아. 점심시간 지나서 온다고 그랬잖아. 와서 뽀뽀해 준다고 했잖아. 나
몰래 사온 반지 손에 껴준다 했잖아. 왜 약속 안 지켰니? 왜 그런 모습으로 서서 그런 눈으
로 날 보고 있니? 정말 모르는 거야? 어느 날 기억이 돌아왔다고 옛 기억 찾고 날 잊어버
린 거야? 날 모른다고 하는 거야? 아니면 다 기억나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조건 좋은
사람 생겨서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살려고!? 이 나쁜 자식아!!! 어떻게 날 잊을 수가 있
어!? 어떻게!!! 내가 널 얼마나 찾아 다녔는데!!!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난 그림도 포기한
채, 너만 찾아 다녔는데!! 어떻게 내 앞에 날 모른다는 얼굴로 나타날 수 있냐고!!!"
"무슨…"
"흑… 나쁜 놈… 너… 완전 최악이야……"
쾅!
은하가 의국에서 나간 뒤, 국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국현은 느릿하게 발걸음을 움
직여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를 둘러보아도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국현은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지만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의국으로 돌아온 국현은 한참을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하나 하나 생각했다. 생각을 할수록
머리만 아파 올뿐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가운을 벗고
옷을 챙겨 입고 집으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 두근 울린다… 점점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 귓
가에 울린다. 집에 도착한 국현은 다급하게 방으로 올라가 잠겨있는 책상 서랍을 떨리는 손
으로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시계와 지갑, 열쇠가 들어있다. 국현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
어 보았다… 그녀다… 사진 속 국현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
국현을 만나고 온 은하는 다리가 풀려 집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
에선 자꾸만 눈물이 흐르고 숨이 가빠왔다. 얼마나 울고 있었을까…? 문득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갔다와? 핸드폰도 안 가져가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어디 다녀 온 거야. 괜찮
아? 무슨 일…… 은…하야…"
"흑…흑… 어엉…"
준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성에게 안긴 은하는 목놓아 울어 버렸다. 준성은 그런 은하를
안아 다독여 주다 은하의 말에 은하를 안고있던 팔이 풀어졌다. 세상이… 눈앞에서 무너지
고 있었다……
"그 사람을… 찾았어…흑…흑…"
-23.조각난 기억과 추억-
찰칵, 찰칵 찰칵.
"반장님. 거의 흔적이 없는데요."
"더 꼼꼼히 살펴봐. 샅샅이 잘 뒤져."
오전 9시. 간밤에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은하는 어딘가 모르게 멍해 보인다. 사람이
죽어있는 현장. 날카로운 눈빛, 추리를 하는 머리, 제 빠른 현장검증만 필요한 이 시점에 나
사가 한, 두 개 쯤은 빠진 듯 멍한 눈으로 사체를 내려다본다. 피해자는 20대 중반 가량의
여성이다. 칼에 찔리고, 손목을 그어 주위에 피가 흥건하다. 자살은 아닌지 주저흔이 없이
한번에 깔끔하게 그어져 있다. 은하는 그저 여자의 얼굴을 볼뿐이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눈
물 자국이 묻어 보인다. 순간 눈앞에 어제밤 일이 스친다. 귓가에 맴도는 말…
[울지마. 그런 자식 때문에 내 앞에서 울지 말란 말이야!! 나도 좀 봐라. 왜 이렇게 둔해. 내
마음 정말 안 보이는 거야? 니가 사랑하는 사람 말고, 널 사랑하는 나도 좀 보란 말이야!!]
은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강 선배님. 뭐하세요?"
".....응? 으응… 이 여자… 죽기 전에 울었던 것 같아."
"네?"
"눈물자국이 있잖아."
"흠…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감식반에 말할까요?"
"됐어. 진짜 울었다면 감식반이 먼저 알아 낼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는 현장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집 밖으로 나오자 따가운 햇살이
은하의 눈에 쏟아져 들어온다. 인상을 쓰며 자연적으로 손을 올려 햇볕을 가린다. 눈부시게
맑은 햇살을 올려보던 은하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건물 안쪽으로 몸을 피한다. 환한 그
햇살이 밝히고 있는 세상이 싫었다. 모두 자신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듯 몸이 따가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한치 앞조
차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사무치게 그리워 졌다. 멍하니 서있던 은하의 정신을 깨운
것은 선배 형사였다. 정신을 놓고있는 은하의 어깨를 치더니 머리나 식힐 겸 순찰이 나 돌
고 오라며 은하를 차 쪽으로 밀어 주었다. 은하는 그의 말에 말없이 차로 다가가 시동을 걸
었다. 은하의 차가 현장에서 벗어나려 할 때, 은하의 파트너가 혼자 가는 은하에게 같이 가
자 소리쳤지만 먼저 서로 가자며 다른 선배가 그를 끌고 간다. 말이 순찰이지 거의 드라이
브 수준이었다. 주위는 살피지 않은 채,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귓가에는 자꾸만 준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고, 가슴으론 국현 때문에 쉴새없이 아파 왔다. 한참
을 달리던 은하는 차를 멈춰 세우고는 전화기에 단축 번호를 눌렀다.
"나야. 점심이나 같이 먹자. 응. 아니! 둘이서만… 그래. 학교 앞 버스정류장으로 와."
언제나 시연과 함께 했던 은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생각나는 건 시연밖에 없다. 은하는 시연
과 준성이 근무하는 학교 앞으로 갔다. 건너편에 학교가 보이고 은하는 차에서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갑판대에서 음료수를 하나 산 은하는 갑판대 앞쪽에 놓여진 신문
에 사진을 보고 신문을 집어 들었다. 스포츠 신문에 나와있는 국현의 약혼녀… 유명한 영화
감독의 작품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는 신문 기사였다. 은하는 신문 사진 속 여자를 뚫
어져라 바라봤다. 자신과 닮은 곳이라고는 한 군대도 없는 화려한 여자였다.
"살거유? 이봐! 사서 읽어."
"아, 죄송합니다."
은하는 황급히 신문을 내려놓고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 마침 건널목에 시연이 건너오
고 있었다. 은하는 왠 일로 학교까지 왔냐는 시연의 말을 웃음으로 넘기고 차에 태웠다. 학
교에서는 조금 벗어난 음식점으로 들어간 은하는 음식을 시키고 나서도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런 은하의 행동에 익숙한 시연은 조용히 은하를 바라볼 뿐, 보채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해물이 잔뜩 들어간 칼국수가 두 사람 앞에 놓여지고, 행복한 표정으로 칼국수를 한 젓가락
먹은 시연은 맛있다면서 은하에게 어서 먹으라 말한다. 젓가락으로 면만 휘휘 젓던 은하가
칼국수를 한 입 가득 넣은 시연에게 입을 열었다.
"현빈이 찾았어."
"콜록 콜록… 미안, 미안.… 근데 너 뭐라고?"
너무 놀라 입안 내용물이 튀어나온 걸보고 다 급히 손으로 가린 뒤 휴지에 입안에 있던걸
모두 뱉어낸 시연이 은하에게 다시 묻는다. 은하는 그런 시연의 행동에 칼국수를 세 가닥
집어먹으며 다시 대답한다.
"현빈이 찾았다고. 살아 있더라. 역시 내가 맞았어."
"찾았어? 어디서? 어떻게? 뭐 했데? 뭐 하는데 연락도 못 한 거래? 지금 어딨어? 야! 너 지
금 칼국수 먹을 때야!"
"먹어야 일하지. 그리고, 준성이가 나 좋아한다더라."
"사랑 아니고?"
"너! 알고 있었어?!"
"………"
"뭐야? 진짜야? 걔 욱해서 그런 거 아니고?"
자신의 따가운 시선을 피한 채 칼국수를 다시 집어 들어 먹는 시연을 보고 은하는 시연의
젓가락을 잡는다.
"알고 있었냐고?!"
"응. 놔, 먹게."
"지금 칼국수가 넘어가?"
"먹어야 일을 하지."
은하는 시연을 한껏 노려보고 손을 놔주고는 자신의 칼국수에 집중했다. 둘은 정말 아무 말
도하지 않은 채, 칼국수 한 그릇을 뚝딱 했다. 점심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기다란 쇼파에 함께 앉았다. 시연에게 고개를 기댄 은하는 조곤, 조
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연히 찾았어… 그렇게 찾아 헤맬 때는 코빼기도, 그림자도 안 보이더니, 우연히 내 손에
그 사람 주민등록증이 들어오더라. 그러더니 몇 시간도 안 지나서 당당하게 TV에 나오는
거야."
"TV에? 왜? 사람 찾는 그런데?"
"아니… 연예정보 프로그램."
"거긴 왜? 연예인이래? 아니지… 본적이 없는데… 고새 연예인이 됐나?"
"너, 전세아 알아?"
"전세아? 영화배우? 알지. 아직 건재하잖아 데뷔한지도 꾀 됐는데 말이지. 빽 그라운드가 좋
다는 소문도 있고."
"그 여자… 결혼상대자로 나오더라."
"뭐?!!!"
은하의 말을 들은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은하를 내려 봤다. 수척해진 얼굴로 덤덤한
듯 말하는 은하가 너무 애처로웠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지금 심정이 어떨지 예상도 못 하는
시연이었다. 시연은 자신의 손을 잡는 은하를 보고 다시 앉았다.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은하
의 얼굴을 보고 살짝 인상을 써 보이는 시연을 보고는 점심시간 다 끝나 간다며 계산서를
가지고 먼저 일어선다. 시연을 학교 앞에 내려 주고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 경찰서로
돌아왔다. 서에 돌아오자 마자 파트너가 잡아온 날치기 범 취조를 맡게된 은하는 사람이 많
아 정신 없으니 취조실로 들어가 조서를 꾸미라는 반장님 말씀에 파트너에게 가해자를 취조
실 안에 데려다 놓으라 하고, 은하는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은하가 들
어오자 신 형사는 밖으로 나갔다. 날치기 범은 뭐가 그리도 당당한지 수갑을 찬 채로 다리
를 쫙 벌리고 앉아 못 마땅한 듯 은하를 아래, 위로 훑어본다. 은하는 그런 그의 시선에 아
랑곳하지 않은 채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다 마신 은하가 종이컵을 내려놓고, 조서를 꾸미려
심문을 시작했다. 삐딱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범인과 늘 하던 일을 하는 은하… 아무 탈 없
이 조용히 조서를 잘 꾸미던 은하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멈춘다. 그리고는 범인을 뚫어져
라 바라본다. 은하의 시선이 못 마땅한 듯 범인이 은하를 향해 낮게 욕설을 퍼붓는다.
"욕했지?"
"흐음!……"
"괜찮아. 안 들려. 지금은 니 욕이 내 귀까지 닿지 못한다. 그리고 내 귀에 맴도는 말은 가
슴까지 닿지 못하고… 가슴에 남은 말은… 언쳤는지 답답하기만 하고 내려가질 않네…"
"시 쓰슈? 얼른 얼른 하고 끝냅시다."
"내 친구가 국어 선생이거든. 야, 그러지 말고 너라도 내 말 좀 들어라… 흠! 시작한다. 그
사람을 찾기는 했는데 말이지… 모르겠어. 처음 내게 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거
든. 가족도, 직업도, 집도, 이름도, 나이도, 친구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은 가족도, 직업도, 집도, 이름도, 나이도, 거기다 약혼녀까지 생겼더라고… 전엔 그 사람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짜 모르겠어. 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 건지조차 모르겠어. 나도, 나와의 시간도 모두 잊은 그 사람 찾은 게 찾지 않았
을 때 보다 더 아프네……"
"형사님. 형사님은 나 같은 놈들 잡느라 TV도 못 보슈? 나는 할 짓 못 할 짓 다 해도 드라
마나 영화 봐서 알겠구만. 뭐 있잖아요. 그 뭐냐… 뭔 충격으로 원래 기억을 찾으면 현재 기
억을 까먹어 버리는 그런… 하여튼 그런 거 있다드만. 만날 다 똑같은…."
"그래? 그런게 있데? 그럼 기억 영영 못 찾나?"
"결국엔 다들 기억 찾고 주인공끼리 잘 되더만."
"그래…? 내가… 주인공… 일까…?"
상담인지 취조인지 모를 시간을 마치고 나온 은하는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집중되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뛴 신 형사를 보고 뭐냐고 물어보던 은하는 신 형사
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하가 그 쪽을 바라보자 그 자리에 앉아있던 국현이
스르륵 일어선다. 은하는 국현을 보자 몸이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은하가 다녀 간 후, 늘 넋을 놓고 다니는 국현이었다. 시간이 날 때면 주머니에 챙겨온 사진
을 늘 꺼내보게 된다. 하지만 도통 떠오르는게 없어 답답할 뿐이다. 사진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과 은하가 너무 생소했다. 사진 속의 자신도 그녀도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순
수하고 맑게 웃는 모습은 이제 없다. 그냥 순수 할 수만도, 그냥 티 없이 맑을 수만도 없었
다. 그러기엔 시간이란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었다. 몇 일 사이에 꼬깃해진 사진을 보던 국
현이 사진을 손바닥으로 쫙쫙 편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터져 하던 걸 멈추고 사진을 주머
니에 다시 넣었다. 오랜만에 당직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던 국현은 우연히 지나다 한 남자를
보고 차를 멈춰 세웠다.
"저기요!!"
"저요?"
"네. 저 혹시… 저번에…"
국현의 설명을 들은 남자는 알았다는 듯이 웃어 보인다. 그리고는 국현이 알고 싶어하는 것
에 대답을 해주었다. 국현은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각자 갈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알아본 건 그녀가 있는 곳과 그녀의 이름이었다. '강력계 형사 강은하' 사진을 다시
꺼내 본 지훈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직업에 한숨이 섞인 숨을 내쉰다. 집으로 일찍 돌아
온 국현은 거실에 있는 세아를 보고는 옷 갈아입고 내려온다며 방으로 올라왔다. 옷을 갈아
입기 전,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어두고 겉옷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국현이 옷을
갈아입자마자 노크소리와 함께 세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던 국현은 자
신의 옷을 받아 들고 국현 대신 정리하는 세아를 보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
부터 친구로 지냈고, 당연히 결혼도 세아와 하는 걸로 알고 자란 덕에 떨림이나 사랑의 감
정을 느끼지 못했던 세아에게 이제와 다른 여자 때문에 답답해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국현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과 몸
이 그렇게 되지 않는 다는걸 태어나서 처음 느끼고 있었다. 국현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현의 옷을 다 정리한 세아가 국현의 등을 끌어안는다.
"나 좀 안아 주라. 오늘 너무 피곤했어."
국현은 세아의 말에 돌아서 세아를 안아준다.
"음∼ 편하다. 역시 내 남자 품이 제일 이야. 오늘 나만큼 힘들었어?"
"응…"
"응? 지금 '응'이라고 했어?"
국현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세아가 국현을 올려다보며 다시 묻는다. 국현은 그런 세아를 보
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조금…"
"어허∼ 조금이 아닌데? 처음 들어. 내가 만날 나만큼 힘들었냐고 물으면 '너보다는 안 힘들
었어. 니가 더 고생이지.'라고 말 했었잖아."
"그래서 서운해?"
"아.니. 걱.정.돼. 괜찮은 거지?"
"응…."
한글자 또박, 또박 말하는 세아에게 웃으며 대답해 주는 국현을 본 세아는 다시 국현의 품
에 안긴다.
다음날. 일찌감치 진료를 마치고 치프의 허락을 구하고 퇴근한 국현은 남자가 말해 주었던
경찰서로 향했다. 국현이 서로 들어서자 국현을 알아본 남자가 반갑게 맞아 준다. 그리곤 은
하는 조서 쓰는 중이라며 기다려 달라고 한다. 국현이 경찰서 한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
남자에게 누구냐며 사람들이 눈짓을 한다. 남자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은하가 모습을 들어냈다. 얼마 후, 국현을 발견한 여자는 굳어졌다. 잠시 후, 국현 앞으로 걸
어온 여자는 더듬, 더듬 무슨 일로 왔냐며 묻는다.
"잠시 시간 괜찮으시면 얘기 좀 했으면 해서요."
멍하니 서있는 은하를 다시 깨운 건 중년의 남자였다. 바쁜데 멍하니 서있지 말고 나갔다
오라는 말과 함께 국현과 안면이 있는 남자가 은하의 자켓을 챙겨와 은하 어깨에 걸쳐 주었
다. 은하는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리고 나가자며 황급히 밖으로 나갔고, 국현은 모두에게 인
사를 하고 은하를 따라 나섰다.
-24.사랑은 잔인하다-
조용한 선율이 흐르는 커피숍 안… 은하는 자꾸 손바닥에 맺히는 땀을 바지에 닦아내며 앉
아 있었다. 앞에 앉은 국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찻잔만 들었다 놨다 한다. 답답한 은
하가 결국 먼저 입을 연다.
"무슨 일로…?"
"아, … 그냥… 궁금한게 많아서요. 혼자 끙끙대느니 그쪽한테 물어보는 편이 나을 듯 해서
요."
'그쪽'… 한순간 마음이 다시 무너진다. '혹시나'를 기대했던 은하는 '역시나'가 되어버린 상
황에 좌절했다. 한층 굳어진 얼굴로 궁금한게 뭐냐고 묻는 은하를 본 국현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입을 다물고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은하는 그런 국현을 보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본다. 부재중 7통에 문자 1통… 준성이 전화를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핸드폰에 뜬다. 문자를 확인한 은하는 바쁘냐 묻는 말을 보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
다.
"저 한가하지 않아요. 할 일이 산더미예요."
"아… 네 죄송해요. 후∼"
숨을 한번 크게 내쉰 국현은 망설이며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은하 쪽으로 슬쩍 민다. 은하는 그 사진을 보고 울컥하려는 마음을 간신히 다 잡으며 이
를 악물었다. 국현이 내민 사진은 은하의 지갑에 있는 사진과 같은 것이 였다.
"2003년도에 대구에 갔었어요."
덜컹, 은하의 심장이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왜… 그곳에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고, 달력은 1년이란 시간을 뛰어
넘은 듯, 2002년이 아닌 2003년이라 적혀 있었어요. 무작정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제 기억엔 지난 1년이란 시간이 사라져 버리고 없더군요. 가지고 있던 거라고는 지갑과 시
계와 열쇠였어요. 그리곤… 제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기 바빠서… 지난 3년 여간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기억나지 않는 1년을…사고를 당했던 것과 깨어나 보니 흐른 시간… 제겐 그쪽에
관한 기억이 없어요."
"기억하려 고는 해봤나요?"
"…사실, 처음 몇 일은 그랬지만… 잊고 지냈습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궁금하신 거죠?"
"몰라서 묻는 건가요? 그쪽이 나타났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 속 당신이요. 기억도 안
나고, 기억을 찾을 방법이 없던 때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은하는 더욱 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잠시 생각했다. 모두 말을 한다면 자신에게로 돌아올
까? 지금의 약혼자를 버리고? 지난 1년의 추억을 말한다고 생각이 날까? 달라질 수… 있을
까?? 은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국현을 바라본다.
"처음엔… 떡볶이를 사들고 나오는 나를 계속 쫓아 오길래 같은 방향인가 보다 라고 생각
했어요. 그런 당신이 날 쫓아 우리 가게로 들어왔을 땐, 혹시 나한테 수작이라도 걸려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비디오를 고르는 척 나를 보는 눈을 모르는 척하며 난 매운 떡볶
이만 먹었죠… 그러다 당신이 쓰러지고 집으로 데려왔었고, 깨어난 당신한테 라면을 끓여줬
어요…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그리곤 갈곳 없다는 당신에게 방을 내어주고 함께 지냈어
요. 처음엔 분명 그냥 방만 내주었는데… 어느 샌가 제 마음의 방도 내어 줬더군요… 당신
은 멀지 않은 보육원에서 아이들 공부를 도와줬고, 전 그림을 그렸어요. 봄에는 꽃구경도 가
고… 여름엔 작은 계곡에 발도 담그러 가고, 가을에는 약수터에 앉아 단풍도 보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손도 잡아주고, 첫눈도 함께 보고… 다음에……"
창 밖을 보고 이야기를 하던 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라 고개를 돌려 국현을 보
았다. 꼭 다른 이야기 듣듯이 아무 표정이 없는 국현을 보고 은하는 말을 멈췄다. 국현의 얼
굴을 보고있던 은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저 바빠서 이만 들어가 봐야겠네요. 안녕히 가세요."
"저기!"
국현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뛰어 나가는 은하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카페 문을
나선 은하가 멍하니 앞에 서있는 모습이 창을 통해 보인다. 울고 있는 건지 계속 손으로 눈
가를 닦아내고 서있다. 국현은 그런 은하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울리는 전화를 무의식 중으
로 받았다.
"어디야? 병원에서 일찍 나갔다며? 무슨 일 있는 거야? 나 오늘 스케줄이 바빠서……"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세아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시선은 은하에게서 한시도 때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겨 돌아서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다. 머리가 멍해진다.
"내가… 저 여자한테 뭘… 한 거지?"
"응? 국현아. 여보세요? 국현아!"
국현은 들고있던 핸드폰 손을 떨궜다. 세아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들려
오는 핸드폰 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일 순간 조용해 졌다.
***
늦은 저녁 퇴근을 해서 들어오던 시연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다. 은하를 만나고 온 뒤, 준성
을 살피느라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자신이
윌리 다음으로 아낀다는 스쿠터를 학교에 두고 걸어올 지경이었다. 멍하니 걷다 보니 은하
네 비디오 가게 앞이다. 시연은 한참을 비디오 가게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연에게
보이는 건 은하 아버지의 등이었다. 책을 읽고 계신 건지 고개를 숙이신 채 앉아있는 뒷모
습을 보고만 있다 가게를 지나쳤다. 시연이 천천히 걸어가자 은하의 아버지가 돌아본다. 멀
어지는 시연의 모습을 한참을 물끄러미 보시다 다시 책을 읽으신다. 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벅, 터벅 집으로 향하다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끌려가 어느 남자 품엔가 안기고 말았
다. 그리고, 시연이 서있던 자리에 한 차 한대가 쌩∼ 하고 지나간다. 시연은 얼른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머리를 정리하면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차가 얼마나 빵빵댔는데."
"여긴… 왠 일이세요?"
"보고싶어서요."
"네?"
"시연씨가 보고싶은데 방법이 없더라구요. 사진도 없고, 보고싶다고 아무 때나 만나주지도
않을 테고… 사실, 몰래 보고 가려고 했는데 너무 정신을 놓고 다니시 길래… 시연씨한테
안 들키자고 위험한데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시연은 능청스럽게 말하는 지훈을 바라봤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웃음이 많
아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이 조금 얄미워 보였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두고 다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커피 한잔 안 줄래요?"
휙! 돌아서 지훈을 한껏 째려보는 시연을 보자 뜨끔해진 지훈이 시연의 눈을 피해 슬쩍 몸
을 틀어 돌아섰다. 그런 지훈을 보고 다시 걷는 시연의 뒤를 쫓으며, 지훈이 말한다.
"그럼. 소주한잔?"
우뚝, 시연이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지훈의 걸음도 멈췄고 '아차'하는 생각에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런 지훈을 향해 돌아선 시연이 지훈을 한껏 째려보며 말을 한다.
"그쪽을 우리 집에 들여놓을 일도. 함께 술을 마실 일도 절대 없을 거예요. 그만 돌아가 주
시겠어요?"
"절대란 말은 없는 거예요."
"나한테 왜 그래요? 나 가지고 노는게 재밌어요?"
"저 사람 함부로 가지고 놀거나 하는 사람 아닙니다."
"네. 그러시겠죠. 저는 그런 여자라 잘 모르겠네요."
지훈은 홱, 돌아서 들어가는 시연의 모습을 보고 또 실수했다는 듯 인상을 써 보이고는 빠
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시연의 앞으로 달려가 막아섰다. 놀란 시연은 뭐하는 거냐고 비키라
며 화를 냈다. 지훈은 시연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연의 팔목을 잡아 손을 펴게 하고 작
은 선물상자를 시연의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웃으며 '잘자'라 말하고 돌아서 갔다. 시연은
손에 들려진 상자를 던져 버리려 손을 높이 올렸다 결국 버리지 못하고 집으로 가지고 들어
왔다. 가방과 선물상자를 쇼파에 던져버리고는 냉장고에서 물을 한잔 꺼내 마시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리모콘을 들어 TV를 켜고 쇼파에 앉던 시연은 엉덩이에 딱
딱한 것이 깔려 손을 넣어 빼보았다. 아까 들어올 때 던졌던 지훈의 선물상자였다. 그런데
뚜껑이 열려 있고 속은 텅 비어있었다. 빈 상자를 보고 주위를 살피던 시연은 바닥에 떨어
져 있는 카드를 보고 집어 들었다.
[지희가 윌리 주려고 사두고 못 줬다고 늘 아쉬워 하길래 보내 드립니다. 그리고… 저 좀
용서해 주면 안될까요?]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배를 잡고 웃고 있는데 웃음소리에 집에
서 나온 윌리 입에 개 껌이 물려 있다. 시연은 그런 윌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TV에 시
선을 고정했다.
***
시연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두었던 차를 몰고 집에 도착한 지훈의 기분이 좋아 보
였다. 차를 세워두고 내리자 지훈을 향해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춰진다. 잠시 후, 불빛이 사
라지고 차에서 익숙한 사람이 내린다.
"오빠∼"
"어디 다녀와?"
"응! 민경 언니랑 밥 먹고 와. 오랜만에 포식했어. 오빠 일찍오네?"
"지희 넌 먼저 들어가."
"음. 알았어. 언니 그럼 조심해서가. 오늘 고마웠어∼"
"그래. 잘 들어가고 어머니께 안부 전해드려."
지희가 집으로 먼저 들어가고 민경과 둘이 남은 지훈은 민경의 차 쪽으로 다가간다.
"타."
"혼자 갈 수 있어. 번거롭잖아."
"데려다 줄게."
지훈은 민경에게서 차 키를 뺏어 들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민경이
옆 좌석에 올라탄다. 민경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 한 후에야 천천히 차를 움직인다.
민경의 집으로 가는 동안 민경은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집에 도착해 지훈이
시동을 끄고 내리자 민경도 따라 내린다. 자동차 키를 민경에게 건내 준 지훈은 조심해서
들어가라며 돌아선다. 그런 지훈의 뒷모습을 보고있던 민경이 달려와 지훈의 등을 끌어안는
다. 지훈은 그런 민경의 손을 조심히 풀고 돌아선다.
"미안하다."
지훈의 진심 어린 사과에 민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해져 자신을 보는
민경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지훈은 민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 지훈은 어린 민
경의 머리를 종종 쓰다듬어 주고는 했었다. 다른 마음으로 지훈을 보기 시작한 민경을 알고
난 뒤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지훈이었다.
"니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오…빠…"
"너 아프게 해서 벌받고 있으니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오빠 설마… 정말 누가 생긴 거야?"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는 지훈을 보고 민경은 다리가 풀려 휘청 거렸다. 그런 민경을 부축
해 대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다시 한번 인사를 건내고 돌아선다. 민경은 멀어지는 지훈을
불러 세우지도 달려가 잡지도 못하고 입을 막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제길!!!" 퍽,
준성은 쉼 없이 신호음만 흐르는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어제 이후 전화도 문자도 모두 무
시만 당하고 있었다. 늘 뒤에서 바라만 보고, 기다려야 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언
제나 한결같이 자신을 모르는 척 하는 은하에도 화가 났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다시
은하 앞에 나타난 그 녀석에게 화가 났다. 준성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차라리 이 세상 사
람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랬었다. 자신의 긴 사랑에도 꿈쩍 안 던 은하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남자.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은하를 떠나 버린 남자. 준성은 도저히 화가 삭혀지지 않았
다. 벌써 방안에는 술병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던져버린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안… 나야."
"어… 왠 일이야?"
"서운하다. 우리가 무슨 일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야?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닌가 몰라."
"편애는… 안자고 뭐해?"
"너 술 마셨어?"
"술은…"
"야, 술 냄새 여기까지 나. 오늘 은하 만났어. 혼란스러운 모양이야. 조금 시간을 줘."
"얼마나 더 시간을 줘야 할까?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글쎄다… 그 복잡 미묘한 사람의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내 마음도 모르겠는걸…? 술 그만
마시고 자. 너 그러면 은하 더 힘들어해."
"그래… 너도 잘자."
시연의 전화를 끊은 준성은 맥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설마 은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씁쓸하게 웃던 준성은 남은 술병을 비우
고 쓰러지듯 누웠다.
'은하야… 은하야… 힘들텐데 나까지 보태서 미안해… 그런데… 너무 커져버린 사랑을 더
이상 혼자 들고 있다가는 정말 내려 놓을까봐… 시작도 못하고 포기할까봐…'
-25.달콤한 봄밤의 향기-
시연은 중간고사로 좀 일찍 끝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그냥 들어가기 뭐해서 준성이와 함
께 가까운 여의도라도 놀러가려 했지만 다음에 가자며 먼저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봄 꽃 향
기라도 맡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분이 아닌지 시연의 말에 다음
에 가자며 가버렸던 것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온 시연은 밥도 해 먹
기 귀찮고 해서 윌리를 데리고 은하네 비디오 가게로 갔다.
"아버지∼"
"책 가지고 온 거야?"
"헤헤… 그 책 아직 다 못 읽었어요. 누가 찾는 사람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아직도 못 읽었어? 바빴던 모양이구나. 그럼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일찍?"
"아∼ 오늘 애들 중간고사라 일찍 끝났어요. 근데 혼자 밥 먹기 싫어서요. 아버지∼ 저 요새
왕따 당하고 있어요. 준성이도 안 놀아주고 은하도… 그렇고…"
"그래. 그 녀석이 요새 좀 그렇긴 하지…"
"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시연은 윌리에게 챙겨온 사료를 주고, 은하 아버지와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자장면을 먹으
며 학교 이야기, 날씨 이야기, 얼마 있다 가게될 소풍 이야기에 스승의 날 이야기까지… 오
랜만에 한껏 수다를 떨었더니 기분이 좋아 졌다. 은하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바빠도 시
연과 은하의 이야기는 꼼꼼히 들어주셨다. 늘 범인 잡기에 바빴던 형사 시절에는 은하 오빠
가 둘을 챙겨주었었지만, 형사를 그만 두시고 나서는 은하 오빠가 미국 지사로 발령 나 곁
에서 더 챙겨주시게 되었다. 현빈이 사라지고 은하가 형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가
장 반대했던 사람도 은하 오빠였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설득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아직도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먼 타국에서 늘 은하 걱정이 산더미인 그런 오빠
다. 물론 시연에게도 전화가 오고, 엽서나 편지가 온다. 은하네 가족은 시연에게 제 2의 가
족이었다. 어려서는 보육원 가족들이 있었고, 커 가면서는 은하네 가족이 시연 곁을 지켜주
었다. 시연은 한참 수다를 떨다 윌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
욕실에서 윌리의 발을 닦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다 울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한쪽 어깨에 받쳐 받으며 윌리의 발을 마저 닦아주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윤태종입니다."
"아∼네. 어쩐 일이세요?"
"식사 하셨어요?"
"네 먹었어요."
"일찍 드셨네요?"
"오늘 퇴근을 일찍 했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그냥 식사나 할까 하구요… 식사는 이미 하셨다고 하고… 차라도 한잔하실 래요?"
"저… 오늘은 좀…"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봬요."
"네… 들어가세요."
시연은 태종의 전화를 끊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가깝게 지내면 이 사람이 더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걱정이 돼서 였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아는데 자꾸 만
나고 하다보면 더 아플테니까…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있는 걸레들을 다 가져와 청
소를 시작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쓸고,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하며 구석, 구석 먼지들을
닦아 냈다. 몸은 힘들어도 깨끗해진 집안을 둘러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
태종은 시연의 전화를 끊고서도 멍하니 시연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차마 집 앞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종은 자신의 손에서 울리는 진동음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내
보니 지훈이었다. 그제 서야 올려다보던 시연의 창에서 시선을 때고 전화를 받았다.
"술 한잔하자."
태종은 간단한 지훈의 말에 차를 가지고 지훈이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지훈에게 가는 내내
태종의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 몇 일 전날 밤, 민경이 울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지훈에
게 생긴 여자가 누구냐며 따져 물었었다. 그때 태종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우는
민경을 안아 다독여 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이 만약 "그녀"에 대해 말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술집에 도착한 태종은 차를 세워두고 술집으로 들어
갔다. 조용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조금 구석진 곳에 지훈이 앉아있다. 태종은 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 왔어? 앉아."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무슨 일 있어?"
"일은…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할말이 있다는 지훈의 말에 태종의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지훈이 술잔을 채워주고 건배를
한 뒤, 가득 담긴 술을 한번에 다 비워버렸다. 그 후 몇 번의 술잔이 오고가도 지훈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지훈의 모습에 태종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매사 신중한 녀
석이 사람을 정하는 일이라고 쉬울리 없었다. 더구나… 태종이 아는 한 지훈에겐 처음이다.
지훈의 입에서 시연의 이름이 나올까 듣기 두렵지만 지훈의 입을 통해 나오는 여자 이야기
라면 진심일 것이다.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다.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시연…씨?"
"………"
대답이 없는 지훈을 보고 태종은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표정 관리를 한다. 그리고 웃으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땐다.
"축하한다."
"축하는… 민경이 녀석한테 미안하다… 너한테도…"
"나한테 미안할게 뭐 있어. 민경이 걱정은 너무 하지마. 그나저나 언제 그렇게 된 거야?"
"글쎄… 아직 된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 여자한테 큰 실수를 했거든…"
"큰 실수? 니가 실수를?"
"응. 굉장히 큰… 요새 그거 만회하려고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며 웃는 지훈을 보고 태종은 다시 술잔을 비워 냈다. 미묘하게 웃는
지훈을 보며 태종의 마음이 쓰려왔다. 지훈과 술집에서 나온 태종은 지훈을 먼저 집으로 보
내고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 술을 마셨다. 독한 술을 거의 다 마신 태종은 비틀거리며 술집
을 나와 걸었다. 웃다… 속상해 하다… 보니 어느덧 다시 시연네 집 앞이다. 아직 불이 꺼지
지 않은게 잠이 들지 않은 모양이다. 태종은 1번 단축키를 길게 눌렀다. 얼마 후, 시연의 목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시연씨… 나 사실 시연씨 집 앞인데……"
발음은 꼬여도 정신은 말짱했다. 미칠 것 같이 맑은 정신에 주체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힘들게 서있자 시연이 뛰어 내려온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달려나온다… 달려와 자신의 앞
에 서, 자신을 걱정한다. 태종은 금새 얼굴이 환해졌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요? 정신 좀 차려봐요."
"저… 안 취했습니다. 정신은 말짱해요… 딸꾹."
"똑바로 좀 서 봐요. 여기 택시도 안 오는데… 잠시만요. 콜 택시 불러 드릴게요."
시연이 자신을 두고 돌아서려 하자 태종이 가는 그녀의 팔목을 잡아 그녀를 끌어 당겨 안아
버렸다. 갑작스런 태종의 행동에 놀란 시연이 태종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술에 취했어도
남자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한참을 발버둥치던 시연은 태종의 목소리에 움직임 잦아
들었다.
"잠시만요 시연씨…. 이제 정말… 좋은 친구가 되어 줄게요… 두 사람 내가 지켜줄게요…"
.
.
시연은 멀어지는 택시를 보며 서있었다. 데려다 주겠다해도 끝까지 혼자 갈 수 있다며 가버
린 태종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할 땐 언제고 돌아갈 땐, 환하게 웃으며 손
을 흔들어 보인다. 시연은 그런 태종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가 탄 택시가 사라져 보이지 않
을 때까지 지켜봐 주었다.
♪♩∼♬…
집으로 들어오자 탁자에서 요란하게 울던 핸드폰 소리가 끊어진다. 시연은 핸드폰을 열어
부재중 번호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부재중 7통… 그 사이 지훈이 전화를 7통이나 한
것이다. 핸드폰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온 시연은 탁자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침대에 누우려
하자 핸드폰이 다시 울린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시연은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휴∼ 이제야 받네요? 역시 7전 8기의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니까."
"또 무슨 일인데요?"
"내일 시간 좀 내줘요."
"왜요? 저 내일 바빠요."
"지희한테 물어보니까 시험이라 일찍 끝난다면서요.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줘요."
"약속 있어요."
"저 시연씨 만나려고 내일 할 일 오늘 미리 밤샘 작업한단 말이예요."
"무슨 일인데 내일 일까지 당겨서 하고 만나요?"
"만나요? 알았어요. 제가 내일 학교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럼 내일 봐요."
"저기!! 이봐요!!! 김지훈씨!! 우씨∼"
시연은 끊어진 전화기를 째려보고 핸드폰을 탁자에 탁, 소리나게 올려두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 버렸다. 그런데 잠은 안 오고 계속 내일 뭘 입어야 할지 만 고민되는 것이었다. 시연은
신경질 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가 찬물을 한잔들이 켰다.
"뭘 입긴 뭘 입어! 청바지 입고 가!"
시연의 목소리에 놀란 윌리가 귀를 쫑끗하며, 시연을 본다. 시연은 그런 윌리를 보고 "자!"
라며 다시 한번 소리 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시연은 새벽같이 떠진 눈에 샤워를 하고 공들여 화장하고 치마 정장을 차려
입고 나왔다. 치마를 입어 스쿠터도 타지 못하고 버스에 찡겨 학교에 도착한 시연은 머리를
매만지며 혼자 조용히 툴툴거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게 뭐야! 옷은 이게 뭐야? 화장은 왜 그렇게 공들여서 하며, 머리까지 곱게 피
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야! 뭘 그렇게 중얼거려?"
"어?! 아니야!"
"놀래긴… 어? 너 치마 입었다? 몇 년만이야? 선이라도 보러 가? 아님 데이트?"
"데이트는 무슨! 야, 시험시간 늦겠다."
시연은 준성의 말에 괜히 찔려 허둥대며 시험지를 챙겨들고 교실로 향했다. 시연이 교무실
을 나가 교실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시험 시작종이 울렸고, 종이 치자마자 들어온 시연을
보고 아이들이 마구 화를 낸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한걸 보려던 아이들은 시연의 등장에 인
상을 쓰며 책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교실을 돌아다니던 시연은 교실 뒷
편에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에 입은 치마가 어색해 보
여 잔득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복도를 나오자 지희가 교실에서 나오
며 투덜거린다.
"뭐야. 난 시험 보느라 수고한다고 맛있는 거라도 사주는 줄 알았더니, 그럴 것도 아니면서
끝나는 시간은 왜 물어봐!"
시연은 투덜거리며 시연에게 인사하는 지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당황해 어색하게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로 왔다. 걷어온 답안지를 정리해 두고 아이들 종례까지 마치고 모든
선생님들이 퇴근할 때까지도 시연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준성이 다가온다.
"뭐해? 안가?"
"어? 너 먼저가. 나 일이 좀 남아서…"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어∼"
시연은 준성까지 나가는 걸 확인하고 교무실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 교문이 보이지만 사람
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연은 그 뒤로도 30분 정도 더 있다가 교무실에서 나갔다. 뒷문
으로 나갈까 하다 죄 진 것도 없는데 왜 이러나 싶어 그냥 당당히 정문으로 향했다. 교문이
가까워 져도 아무도 보이지 않자 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교문 주위를 둘러보다 돌아섰다.
막상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가 같아 놀랐다.
"미쳤어. 미쳤어…"
"누가요?"
"어머!!! 깜짝야!!!"
"미안해요. 놀랐어요?"
"뭐예요 갑자기!!!"
"지희 볼까봐 차에 있었어요. 한참 기다려도 안 나와서 잠깐 졸았던 모양이에요. 많이 잔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아무도 없어서 그냥 간줄 알았는데."
시연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시연이 놀란 모습이 귀엽
다는 듯이 웃고 있는 지훈을 보자 시연의 표정이 한껏 더 새침해 졌다. 시연은 지훈이 차에
타라는 말에 차를 왜 타냐고 정색하면서도 지훈이 끌자 못 이기는 척 차에 올랐다. 시연이
옆자리에 앉은 걸 본 지훈은 환하게 웃더니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건다. 그리곤, 출발한다고
말한 지훈이 벨트를 풀고 시연에게 다가와 팔을 뻗는다. 시연은 그 모습에 점점 눈이 커지
면서 자신의 몸을 팔로 가린다.
"뭐 하는 거예요!!!"
"아, 안전벨트요."
"네? 안전… 벨트?"
"벨트 매드릴게요."
"됐어요! 제가 할게요."
지훈의 몸이 제 자리로 돌아가자 얼굴이 빨개진 시연이 다급히 벨트를 맨다. 시연이 벨트를
안전하게 매는 것까지 확인한 지훈은 그제 서야 차를 출발시킨다. 시연은 어디로 가는지 묻
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창 밖만 들여다 보고있던 시연은 차가 고속도로로 빠지자 놀
라서 지훈을 돌아봤지만 지훈은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운전만 할 뿐이다. 시연은 입을 앙
다문 채 창만 바라보다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시연이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꾀 흘러
있었다. 차는 멈추어져 있고 지훈의 겉옷을 덮은 채, 혼자 차안이다. 시연은 지훈의 자켓을
들고 차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자 팝콘 같이 새하얀 꽃송이들이 가득한 벚꽃나무가 길게
늘어져 있다. 시연은 그 풍경에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서있었다.
"깼어요? 자, 이거 마셔요."
시연은 지훈이 건 내준 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시연에게서 자신의 옷을 가져가 입은 뒤, 차
에서 작은 바구니 와 돗자리를 꺼내고 차 문을 잠그고 시연과 함께 걸었다. 길게 늘어선 벚
꽃은 활짝 피어 바람에 꽃잎을 떨구고 있었다. 따뜻한 눈이 내리는 듯 한 잎 한 잎 시연과
지훈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한참을 걷다 보니 호수가 나온다. 호수 앞에 마련된 벤치 앞으
로 간 지훈은 돗자리를 깔고 바구니를 올려 논다. 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지훈이 웃으
며 시연에게 손짓한다. 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주춤 주춤 다가가 앉자 지훈이 자켓을 벗어
시연의 무릎을 덮어 준다. 시연은 지훈 덕에 편하게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연인들과
가족들이 보인다. 호수에 떠있는 오리 보트와 벚꽃 풍경이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그 멋진 풍
경에도 시연의 배는 큰 소리로 요동치며 소리를 낸다. 아침, 점심 모두 거른 덕택이었다. 창
피해진 시연이 헛기침을 하자 맛있는 냄새가 시연의 코를 자극한다. 시연이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언제 준비해 온 건지 바구니에서 음식을 한 가득 꺼내 돗자리에 펴놓았다.
"배고프죠? 먹어요."
"언제 이런 건 다 준비했어요?"
"음… 사실 만든 건 아니고 사왔어요. 나중엔 진짜 만들도록 해볼게요. 먹어요."
시연은 지훈이 건내는 나무젓가락을 받아들며 미소지었다. 차에 탈 때부터 두근거리는 심장
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그렇게 긴장이 되는데도 이상하게 잠이 쏟아져 잠이 들고
말았었다. 김밥과 샌드위치, 주먹밥까지 다양하게도 챙겨온 지훈은 시연이 맛있게 먹자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밥을 먹는 동안 이곳이 전주를 지나 진안이라는 곳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얼마 안 잔 것 같은데 3시간 넘게 소요된 거리였던 것이다. 가장 늦게 피는 벚꽃장소를 찾
다 이곳을 알고 시연을 데리고 온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날이 벌써 꾀 어두워 졌다.
"오리보트는 못 타 겠네요. 하긴, 시연씨가 치마라 시간이 됐어도 힘들었겠네요."
"저 여기 데려 오려고 밤새신 거예요?"
"네. 봄이 가기 전 벚꽃은 봐 야죠. 왠지 못 봤을 것 같아서요."
"고마워요. 흐음∼꽃향기가 참 좋아요."
"전 시연씨가 참 좋아요."
"또 그러신다. 진짜 왜 그래요?"
"후회해요. 당신 고백 받아주지 않았던 거. 후회해요. 당신한테 상처 준거. 후회해요. 당신을
조금 더 빨리 만나지 못 한 거. 그리고… 진작 사랑하지 못한 거…"
벚꽃 잎이 떨어진다… 한 잎… 두 잎… 진심으로 후회하는 듯한 지훈의 목소리가 시연의 가
슴속에 내려앉는다. 그의 사랑이 내려앉는다. 시연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요동친다.
-26.묘한 빗소리-
은하는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은하가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잠
에서 깼던 아버지는 다시 눈을 감는다. 녹초가 되어 들어온 은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누워
버렸다. 눈을 감자 눈 앞 가득 현빈이 떠오른다. 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돌아 누었다. 현빈이 다녀간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궁금하고 보고싶어도, 어디있는
지 전화번호가 뭔지 이제 다 알아도 연락을 해 볼 수조차 없다. 은하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
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몸을 뜨거운 물에 맡기고 나니 조금 안정을 되찾
을 수 있었다. 지난 일주일 간 준성에게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
지금은 준성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 은하는 미친 듯이 울
려 대는 핸드폰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받았다.
"여보세요…"
"아, 죄송해요 주무시나 봐요."
"아니 예요!"
전화 목소리를 확인한 은하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갑자기 소리치는 은
하 목소리에 놀란 건지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입을 때고… 다시 은하
에게 만나자고 한다. 은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점심때
잠깐 서로 오겠다는 말에 허둥지둥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와 다르게 신중히 바
지를 고르고 하얀 셔츠에 검은 자켓을 걸쳐 입었다. 깔끔히 차려입고 나서는 은하를 보고
아버지가 나오신다.
"밥 먹고 나가지."
"아냐. 배 안고파."
"아빠. 나 이뻐?"
"그럼! 우리 딸이 제일 이쁘지."
"그래? 히히… 나 다녀올게."
"웃으며 만나고 와. 너무 상처받지 말고."
"……응 아빠."
은하는 아빠의 말에 환히 웃어 보이며 집을 나선다. 대문을 나오자 멀리 준성의 모습이 보
인다. 은하는 살짝 인상을 썼다 표정을 풀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준성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은하는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모습은 평소와 같이 깔끔했지만
한눈에 봐도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다. 은하 앞에 멈춰 선 준성은 힘들게 웃어 보인다.
"오랜만이야."
"그래. 늦었네?"
"응… 나가는 길이야? 새 구두 신었네?"
"어? 어… 아픈… 거야? 아프지 마. 건강 잘 챙겨."
"…그래……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다치지 마."
"나 가봐야겠다. 너도 어서 가봐."
웃으며 돌아서는 은하의 뒷모습을 보는 준성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은하를 붙잡
지도, 놔주지도 못하는 준성은 그저 멀어지는 은하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은하는 등뒤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걸었다. 준성에겐 한없이 미안하지만 지금 은하
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빠르게 골목을 벗어나 서에 도착하자 경찰서 동료들이 의아하
게 바라본다. 사실 오늘 은하는 쉬는 날 이었다. 현빈이 경찰서로 온다는 말에 쉰다는 말도
못 하고 그냥 나온 것이다. 은하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현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점심시간
이 되자 현빈이 찾아왔다. 내심 걱정하던 은하는 현빈의 모습이 보이자 안도했다. 혹시나 또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던 것이다. 둘은 경찰서를 벗어나서도 말 없이 어색하
게 서 있었다.
"저… 식사 안 하셨으면 식사라도 하시죠."
"그럴까요?"
음식점에 들어간 둘은 주문을 하고 나서도 말이 없었다. 현빈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는
은하는 현빈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그 날… 마음에 걸려서요…."
"네?"
"전 기억이 안나 답답할 뿐이지만, 그 쪽은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생각 못했어요. 사과할게
요. 미안합니다."
"………"
"기억을 잃은 사람이야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그 추억을 모두 가진 사람은 얼마나 힘
들겠어요. 그게…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사랑했던…… 과거형이네요."
"네? 제가 또… 실수를 했네요."
식사가 나오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은하의
화난 얼굴을 보고 쉽사리 말을 할 수 없는 국현은 답답하기만 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
데… 자신이 나타날 때마다 상처를 받는 은하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렵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은하는 국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 낸다. 국현
은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가 멀어지는 은하에게 달려가 팔목을 잡았다.
"나 이러려고 온 거 아니 예요. 은하씨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왜 자꾸 상처받
는 거예요. 그런 슬픈 눈으로 보지 말아요. 자꾸… 마음 한켠이 아프잖아요."
"왜 상처 주기 싫은데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결혼하실 거죠?"
"………"
"그럼 내가 상처받든 말든, 슬픈 눈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요. 슬픈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가슴은 아플 수 있어요."
국현의 손이 힘없이 은하의 팔목을 놓는다. 은하는 그런 국현에게서 돌아서 간다. 눈물이 흐
르는 걸 닦아내며 국현에게서 멀어졌다.
"그래… 정신 차리자. 저 사람은 이제 '나현빈'이 아니라 '민국현'인 거야."
집으로 가려다 발길을 돌려 서로 돌아온 은하는 한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행에 강도가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했다. 한 은행에 무장강도가 은행을 점령하고 있었다. 공범이었던
자가 도주하고 있다는 소리에 은하는 무전을 확인하고 경찰 몇 명과 그 곳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추격 한 끝에 범인을 검거했고, 저녁 7시가 되서야 상황이 종결되어 범인들이 서로
옮겨졌다. 다행히 큰 부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은행 안에 있던 청원경찰과 인질 몇 명이
외상을 입었다. 서로 돌아온 은하가 범인을 잡고 조서를 꾸미려 하자 반장님이 은하를 불렀
다.
"강 형사. 들어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쉬는 날이잖아. 들어가."
"하지만…"
"말 안 듣냐? 너 일주일만에 집에 들어갔었어. 근데 반나절도 안돼 나오냐? 들어가."
은하는 인상을 벅벅 쓰시는 반장님을 보고 꾸벅 인사한 뒤 소지품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
다. 어느새 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있다. 경찰서 밖으로 나와 잠깐 서있다 움직이려는데 발
이 아프다… 은하는 돌계단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발뒤꿈치가 다 까져 피가 흘렀던 게 굳
으며 떡이 되어 있었다. 은하는 어떻게든 다시 신발을 신어보려 했지만 발이 너무 아파 인
상이 저절로 써졌다. 그때, 누군가 은하의 발목을 잡고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냈다.
"새 신발 신었어요? 이거 신고 범인 잡으러 뛴 거 예요? 많이 까졌네…."
"괜찮아요."
"앉아 봐요."
일어서려는 은하를 다시 앉히고는 피를 닦아내다 대뜸 등을 돌린다. 은하는 그런 국현의 모
습에 당황해 눈만 멀뚱, 멀뚱 뜨고 있다.
"업혀요."
"뭐라고요?"
"업히라구요."
"왜요?"
"내 차에 소독약 있어요. 차로 가서 치료해야겠어요."
"됐어요."
"나 의사예요. 말 안들을 거예요? 그 상태로 두면 곪아서 진짜 오래 고생할지도 몰라요."
"그럼… 그냥 걸어갈게요."
"신발 벗고요? 비도 오잖아요. 얼른 업혀요. 다리 저려요."
은하는 결국 국현의 등에 업혔다. 처음엔 조금 망설여지고 어색했지만 금방 편안함이 느껴
졌다. 얼마 만에 업혀 보는 건지… 은하는 예전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내가 예전에 업어준 적 있어요?"
"………"
"있구나…. 왠지… 그랬던 것 같아서요…"
뭉클… 은하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차에 도착한 국현은 은하를 보조석에 앉혀두고
트렁크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와 치료하기 시작했다. 소독약이 닿을 때 어찌나 따갑던지 자신
의 발 앞에 무릎꿇은 채 치료하고 있는 국현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국현은 그런 은하를
올려다보자 시선이 부딪힌다. 은하가 국현의 시선을 피하고, 국현은 다시 은하의 발을 치료
한다. 약을 정성스레 발라주고 호호 불어가며 상처를 보듬어 준다. 거즈까지 붙이고 나서야
국현이 일어선다. 구급상자를 다시 트렁크에 넣어두고 온 국현은 은하에게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차에 타라한다.
"됐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맨 발로요? 타요. 어디로 안 끌고 갈 테니까."
은하는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차가 움직이고 은하가 설명한 방향대로 가는 국현…
"근데, 거기 왜 있었어요?"
"네?"
"거기서 뭐했어요? 설마, 아까 안 갔어요?"
"발이 안 떨어 져서요… 저 아마 병원 들어가면 벌 당직서야 할거예요. 그래도 그 덕에 은
하씨 다친 거 치료해줘서 마음은 편해요."
웃는다… 그가 은하를 보고 웃는다… 예전과 다름없는 미소로… 차가 집 앞에 멈춰 서자 국
현이 먼저 내려 은하의 차 문을 열어준다. 은하는 고맙다고 말하고 먼저 가라고 하고, 국현
은 그런 은하를 향해 다시 한번 웃어 준다. 잘자 라는 인사까지 빼먹지 않고 차를 타고 사
라 진다. 은하는 국현의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들어왔다.
"만나기는 잘 만나고 온 것 같은데. 다리는 왜 그래?"
"새 구두 신었더니 다쳤어."
"녀석이 치료해 준거야?"
"응. 하나도 안 아파. 걱정하지마."
"어련하려고… 어여 올라가 쉬어."
"네∼"
은하가 집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멀어지
는 준성을 바라본다.
***
은하가 오기를 내내 기다리던 준성은 낯선 차가 은하네 가게 앞에 멈추자 심장이 빠르게 뛰
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린 남자를 보고 대번에 표정이 굳어진 준성은 자리에서 스윽∼ 일어
섰다. 웃으며 은하에게 이야기하는 남자… 그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은하는 들어가지 못 하
고, 한참을 차 뒤를 바라본다. 다리를 다쳤는지 쩔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준
성은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자리를 뜬 준성은 포장마차로 가 술
을들이 붓기 시작했다. 소주를 병째로 5병이나 들이킨 준성은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하야∼ 은하야∼ 나 죽을 거 같아. 그르지 마라. 응? 그르지 마∼"
"술 마셨어? 어디야? 야, 박준성!"
한참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있던 준성이 고개를 들었을 때, 앞에는 은하가 앉아 있었다. 안타
까운 듯이 자신을 보는 은하를 보고 준성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술병을 잡고
마시기 시작하자, 은하가 병을 뺐는다.
"왜 이래. 그만 마셔. 많이 취했어."
"그래. 취했어. 내가 지금 취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겠냐. 응? 어떻게?"
"준성아-"
"아줌마 여기 소주 더 줘요!!"
"아니 됐어요."
쾅!!! 파악!
"야!!!"
준성은 빈 소주병을 테이블에 내려 쳐 깨버렸다. 소주병이 깨지면서 유리 조각이 손을 파고
들어 피가 나고 있었다. 놀란 은하는 당황해 준성의 팔을 잡고 손을 펴, 깨진 유리병을 때어
내려 하자 준성이 거칠게 은하의 팔을 뿌리친다.
"놔! 됐어."
비틀 비틀 일어나 돈을 테이블에 던지고 포장마차를 벗어나 걷던 준성이 바닥에 넘어진다.
그런 준성을 따라나온 은하가 준성을 잡지만 은하를 뿌리치고는 혼자 가겠다며 빗속으로 나
간다.
"유리 빼야해. 가만히 좀 있어. 응?"
"됐어. 이까짓 거 하나도 안 아파!"
짝!
"너 왜 이래. 정말 왜 이러냐고!!! 후∼ 약국 가자. 응?"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은하를 보는 준성…
"내가 다쳐서 마음이 아프니? 걱정은 되니?"
"당연하지. 마음이 왜 안 아프고, 왜 걱정이 안 되겠어. 왜 이렇게 못 나게 굴어."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걱정되는데, 사랑은 아니다?"
"준성아…."
"넌 왜. 니 사랑 밖에 못 보니? 난 내 사랑도, 니 사랑도 다 보여 이렇게 아픈데… 넌 왜 니
사랑만 보이는 거냐고!!"
비가 내리고 있지만 은하는 알 수 있었다. 준성의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이 아닌 눈물
이라는 것을. 은하의 마음이 아파 왔다. 자신의 아픔을 핑계로 준성을 보지 않는 동안 준성
은 혼자 곪아터지고 짓물러 고름도 나고 피도 나고, 다시 상처가 터지고 찢어지는 걸 반복
하고 있었나 보다. 은하는 그런 준성을 안아주지도, 잡아주지도 못한 채, 그저 안타깝게 바
라보고 있었다.
***
세아는 몇 일째 연락도 잘 안되고, 만나기도 힘든 국현에게 불안해져 있었다. 오늘은 무단으
로 병원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의국에 앉아있던 세아는 밤늦게 서야 비를 맞아 젖은
채로 들어오는 국현을 보고 인상을 쓴다. 국현이 서서히 다가서자 술 냄새가 풍겨져 온다.
"무슨 일이야? 요새 통 통화도 안되고, 병원도 잘 비우고.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언제 왔어? 밥은 먹었어?"
"말 돌리지마. 우리 결혼식 이제 3개월도 안 남았어. 준비할게 얼마나 많은데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왜 그래∼ 응?"
"후∼"
"국현아∼"
"세아야… 우리. 결혼식 조금 미루면 안될까? 이상하게… 비가 마음을 적신다… 저 빗소리
가… 가슴을… 울린다…."
-27.서로 다른 목걸이-
1996년 8월 15일 목요일. 날씨는 정말 무더웠다. 황금 같은 빨간 날. 매일 운동장을 뛰어 다
니거나 책을 읽는 준성에게 작은 변화가 일어난 날이다. 전 날, 반의 반장이었던 녀석이 하
루종일 분주하게 교실을 들락거리며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부탁을 했지만 잘 되지 않는지 내
내 인상만 쓰고 있었다. 결국 그 부탁은 준성에게까지 오고 말았다.
"저기… 우리가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음…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처음 하는 부탁이고,
어쩌면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고…"
"부탁이 뭔데?"
"미팅을 하는데 한 명이 부족해."
"미팅??"
준성은 단 두 글자에 그 부탁을 거절했지만, 반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미팅을 하기로
했다. 그냥 앉아 있다만 오면 된다는 말에 하기로 한 것이다. 반장, 준성, 그리고 반장과 친
한 친구 한 명. 주선자까지 모두 도착하고, 기다린 지 20분만에 여자 셋과 여자 쪽 주선자까
지 같이 자리에 앉았다. 준성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서 시켜놓은 주스만 마시고 있었다. 그
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준성 앞쪽에 앉은 여자 둘이 준성과 마찬가지로 미팅에는 관심
이 없다는 듯이 둘이서만 신나서 웃고 있었다. 준성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둘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했
다. 어제 밥을 먹다 개그 프로그램을 봤는데 너무 웃겨서 웃느라 밥을 못 먹어 밥을 두시간
이나 먹었다는 이야기를 너무 신나게 하고 있었다. 준성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귀여워 웃
음이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준성이 웃자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이 준성을 보더니 웃음을 멈
춘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앉아 미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준성은 그 모습을 보고
민망해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주선자만 뚫어져라 바라보려 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한 여자
아이에게 쏠렸다. 시간이 지나 짝을 정하게 되고, 준성은 누구를 택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앞
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가리키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았다. 내내 둘이 떠들던 여자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준성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
게 그 애를 선택했다. 같이 떠들던 여자아이는 결국 짝을 정하지 못한 채 미팅이 끝나 버렸
다. 짝이 정해진 준성은 그 여자애와 무엇을 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여자의 목소
리가 준성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난 바빠서 먼저 가봐야 겠다. 미안해 잘가."
준성이 그 말을 듣고 당황해 멍하니 서있자 여자 애는 활짝 웃으며 미팅 내내 함께 떠들던
아이와 저 만치 멀어져 갔다. 준성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 버렸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휴일 날 깔끔하게 차이고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 준성은 반장
에게 그 여자애 학교를 물어 교문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수업이 다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그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준성은 조심스럽게 교문 안쪽에 발을 들여놓으며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자신의 학교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운동장.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떨리
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 시키고는 한발, 한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운동장 한켠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준성은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
고 다가갈수록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화폭에 색색의 물감으
로 색칠하고 있는 여자와 쉼 없이 떠들고 있는 여자 아이… 너무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이
웃고 있다.
"어? 넌 어제 미팅 남?"
준성을 먼저 발견한 여자아이가 준성에게 다가와 앞에 섰다. 쌩글쌩글 웃으며 무슨 일이냐
는 호기심 어린 눈빛… 준성은 순간 당황해 할말을 잃었고, 말 없이 계속 그림을 그리는 여
자아이만 바라봤다.
"오라∼ 은하 때문에 왔구나? 이야∼ 강은하. 인기 좋다."
"진짜 나보러 왔어?"
"어…."
"오∼"
멍하니 바보처럼 대답한 준성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무 그늘아래 앉은 그애의 머리
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하얀 머리띠를 하고 투명한 피부에 붉으스름 한 볼과 빠알간 입술.
준성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야, 얘 너한테 완전 반했나봐."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준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세 사람은 언제나 함께였다. 매일 같이 준성을 놀리는 시연이란 아이와 항상 화통
을 어깨에 둘러매고 그 아이의 말에 수줍게 웃는 여자아이. 그때 준성은 첫 번째 실수를 해
버렸다. 매일같이 놀리는 시연의 말에 "은하가 여자로 좋은 게 아니야. 그냥 친구가 하고 싶
어서 그랬던 거야."라고 말해 버린 것. 훗날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런 말 따위
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같이 놀렸던 시연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을 만큼의 큰 안타까
움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처음 만난 이성에 대한 호기심 정도라고 생각했다. 매일 생각나
고, 매일 보고싶고, 그 애를 보면 웃음부터 나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대학교에 들어
가 은하가 미팅을 하고, MT를 가서 선배에게 고백을 받아와 나쁘지 않다며 웃으며 이야기
하고, 누드 모델로 온 남자의 몸이 너무 멋있었다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고 화
가 나곤 했다. 그러다 준성이 입은 옷이 잘 어울린다며 멋있다고 칭찬해 주고, 과제를 도와
달라며 애교부리며 웃어 줄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따뜻함이, 은하만 보면 떨
려오는 심장이,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걸 알았을 때, 준성은 그냥 받아 들였다. 그
냥 그게 맞는 것 같아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늘 관심 없다고 말하는 은하를
알지만, 자신에게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은하가 야속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론 준성도
'남자'였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한 친구라는 이
름 하에 나날이 가슴앓이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행여 친구로도 남을 수 없게 될지 모른
다는 생각에 점점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준성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감춰 둔 채 지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기까
지 얼마나 오래 동안 신중하고 깊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언제나 답은 마음속에 정해져 있으
면서 혹시 자신의 선택이 잘 못 됐을까봐 묻고 또 물었었다.
***
준성은 그 날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몇 년간 내내 품고있던 마음을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몇 일 전부터 반지를 고르러 다녔다. 몇 일간 둘러본 곳 중 가장 맘에 드는 곳으로 가 기존
골라둔 반지에 원하는 약간의 셋팅을 하고, 치수를 맞춰 반지를 주문해두었었다. 수업을 마
치고 반지를 찾아서 은하네로 향하는 준성의 마음은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집으
로 가는 내내 심호흡을 하며 자꾸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은하에게 가고 있었다.
"아버님. 은하는요?"
"집에 있어. 올라가 봐."
"네."
"근데 무슨 좋은 일 있는 거야? 표정이 아주 밝다."
"하하. 성공하면 말씀드릴게요."
"성공? 뭐 도전하는 거야?"
"도전…. 네. 도전이예요. 꼭 성공하기를 바래주세요."
"녀석. 그래 뭔지는 몰라도 꼭 성공해라."
준성은 기분 좋게 은하 아버지의 응원을 받으며 집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 선 채, 크게 심호
흡을 세 번 한 준성은 문을 두드리려다 안에서 소리가 들려 문고리를 잡았다. 문은 잠기지
않은 채 열려 있었고, 준성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밝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은………"
"정말요? 그렇게 맛있어요?"
은하는 거실에 나와 있었다. 어떤 남자와 마주 앉아 그 남자가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
었다. 자신에겐 한번도 보이지 않은 눈빛이었다.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앞에 앉
은 남자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춥지? 어? 박준성. 뭐해 왔으면 들어오지."
"……어?"
"뭐∼해?"
"아니, 근데 누구…야?"
"응? 아∼, 아까 비디오 가게 오셨다 쓰러지셔서 아빠가 집에 눕혀 놨던 분이야. 라면 드시
고 싶다 길래."
자신의 말을 마친 은하는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고정한다. 준성은 그런 은하를 보며 주머
니에 넣어둔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늦은 밤까지 한마디 말도 못한 채 있던 준성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은하네 집에서 나왔다. 어두운 얼굴로 어깨가 축 쳐져 나오는 준성을 본
은하 아버지는 무슨 일인가 싶어 준성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도전한다는 게 잘 안 된 거야?"
"네….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에요."
기운 없이 대답을 마친 준성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 녀석이 그게 뭐야. 어깨 펴!"
준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렇게 한번 놓친 기회
는 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준성은 매일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가게에서 은하가 유난히 밝은 얼굴로 준성을 맞이했다. 준성은 그런 은하의 웃음에 자신도
모르게 행복해져 웃어버렸다.
"준성아! 나 현빈씨랑 사귀기로 했어."
"현…빈?"
"아, 우리 집에 지내는 남자. 내가 이름지어 줬거든. 기억나? '샤워'라는 영화에 나왔던 배우.
내가 잘생겼다고 했었잖아."
"어… 기억나."
"오늘 나한테 이름지어 달라고 하더라고, 내가 부르고 싶고, 내가 원하는 이름으로. 그래서
그 배우 이름 말했더니 그 이름으로 살겠대. 너무 멋지지?"
"그래… 멋있다. 벌써 사랑고백 까지 하고…"
"응?"
"아니야. 나 급한 일이 생각나서 가봐야 겠다. 나중에 보자."
"시연이 온다고 했는데. 바쁘면 가봐."
그때 때 마침 시연이 오고, 준성은 그런 시연을 보지 못했다는 듯 지나쳐 간다.
"뭐야? 이제 난 아는 척도 안 해?"
"바쁘데. 시연아 나 있잖아∼ ………"
은하의 들뜬 목소리가 밖까지 들려온다. 준성은 주머니에 든 반지를 꼭 쥐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걸 간신히 참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소주 두 병을 사온 준성은 방에 들어와 소주
한 병을 열어 마신 뒤, 주머니 속에 든 반지를 꺼냈다. 한참을 망설이다 케이스를 열자 형광
등 불빛을 받아 반지가 반짝여 준성의 눈을 부시게 만든다. 준성은 그제 서야 눈물을 떨궈
낸다. 반지만 쳐다보며 소주 두 병을 모두 비워낸 준성은 쓰러지듯 누었다. 손에는 두 개의
반지를 꼭 움켜쥔 채… 그리고 다음날 목걸이 줄을 사 그 반지를 목에 걸었다. 준성의 두
번째 실수. 결국 그 반지를 전해주지 못한 것. 아직도 그 반지를 목에 걸어두고 그 반지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 매일 같이 기도했었다. 그가 사라지기를…. 그가 없어져 은하의 옆
자리가 다시 비워 지기를 수도 없이 바라고 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그가 사라졌다. 절
망하는 은하를 보며 준성도 죄책감에 한참을 힘들어했었다. 점점 변하는 은하를 보며, 그가
살아 있을 거라 믿는 은하 곁을 지키며 준성은 다시 기도했다. 은하 옆에 자신이 있게 해
달라고, 혹시 은하의 믿음이 맞더라도,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아마… 그 기도는
은하에게 너무도 잔혹한 것이었기에 들어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
리는 거 보니…
***
준성은 지금 자신을 보며 눈물 흘리고 서있는 은하를 보고 있다. 시야가 흐리다… 비가 내
려서 만은 아닌 걸 알고 있다.
"첫 번째 실수. 널 '친구'로 둔 거.…… 두 번째 실수. 너에게 좀더 빨리 내 마음을 보이지
못했던 거.…… 그리고…… 결정적인 세 번째 실수…… 널… 아직도 사랑한다는 거……."
은하는 결국 주저앉아 울어 버린다. 은하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보인다. 준성은 그런 은하를
보다, 너무도 잔인한 하늘을 올려 보고 눈을 감아 버렸다. 가서 안아 주고싶은데… 울지 말
라고 말해 주고싶은데, 발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준성과 은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
다. 비가 그치고 은하를 보내고 난 준성은 또 다시 은하네 집 앞이다. 은하 방을 올려다보던
준성은 작은 방울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꼴이 그게 뭐야. 들어와."
가게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은하 아버지는 준성에게 수건을 건 낸다. 수건을 받아든 준성의
손을 보시곤, 컴퓨터 테이블 아래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열고는 소독약과 연고, 붕대 등을 꺼
내 신다.
"앉아."
"괜찮아요."
"똑 같은 말 두 번 시킬 거냐?"
준성은 그제 서야 은하 아버님 곁으로 가서 앉는다. 유리조각을 빼내고, 소독약이 상처에 닿
자 따가워 순간 움찔거렸다. 은하 아버지는 그런 준성의 상처를 보시곤 한껏 인상을 쓰신다.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이 정도야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얕잡아 봐
서는 안돼. 아프지 말거라."
"언제… 아셨어요?"
"어느 날 인가 한 녀석이 나타나 내 자식만 보면 헤벌쭉 웃기만 하더군."
"제가 그랬어요?"
"그때가 아니었나 싶구나."
"전 그땐 몰랐는데…. 좀 알려주시지 그러셨어요."
붕대로 마무리까지 하신 아버지는 약들을 다시 약상자에 담으시며 이야기 하셨다.
"좀 더 일찍 알려줬으면, 그 녀석 보다 일찍 고백을 했을 거라고? 네 자신이 너의 마음을
알지 못했는데 남이 말한다고 그게 진짜 네 마음이라 할 수 있었을까? 남들이 아무리 사랑
이라고 해봐야 네가 아니면 아닌 거고, 남들이 아무리 사랑이 아니라 해도 네가 사랑이라면
그게 사랑인 거다. 네 마음이 중요한 거야."
준성은 은하 아버지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은하 아버지는 그런 준성의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죄송합니다…. 저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요……"
준성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오늘 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28.시작하는 연인-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안. 매일 보면서도 이렇게 마주 앉은 게 얼마만 인지 기억이 가
물가물한 두 사람이다. 그 사이 준성의 얼굴은 많이 야여 있었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 저녁
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있지만 별 대화는 없었다.
"은하는 만났어?"
"바쁜 가봐. 요새 통 안보이네."
"많이 변했다. 표정이 너무 차가워."
"응. 그래서 은하가 더 보기 힘들어 하나봐."
"그 사람은… 만나봤어?"
"아니. 어디 있는 줄 알고. 그 사람 만나 무슨 말을 하겠어. 은하 맘이 나한테 있어야 당당
하게 만나지 말라고, 다시 사라져 버리라고 말이라도 하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씁쓸하게 웃는 준성의 표정에 안쓰러운 시연이다. 아무래도 준성은 아직 어떤 기사를 보거
나 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 자신은 행복하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결국 시연은 지훈
에 관해 말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시연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준성의 말을
거절했다. 괜히 데려다 줬다가 은하와 마주쳐 또 안 좋아 질까봐서 이다.
지훈과 진안을 다녀 온 후. 저녁을 먹든, 차를 마시든 하루에 한번 늦게라도 만났었는데 요
몇 일은 통 시간이 없었다. 시연은 아이들 성적 발표에, 소풍준비로 바빴고, 지훈은 쏟아지
는 서류와 주식동향 파악에 밤샘 작업이 연이어 져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준성을 만나고
돌아와 청소를 하고 나니 벌써 시간이 10시가 넘었다. 지훈이 저녁은 먹었는지…. 혹시 많이
피곤해 건강을 해치지는 않는 건지 걱정되 전화라도 해볼까 했지만 바쁜데 방해하게 될까봐
꾹 참았다. 결국 시연은 지훈 대신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이 들리고 상대
가 전화를 받는다.
"응…."
"바뻐? 얼굴 잊어 먹겠다."
"그냥, 혼자 바쁘네."
"몸 축나게 왜 혼자 바쁘냐?"
"안 자고 왠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내가 궁금하기는 해? 나 까먹고 사는 거 아니었어? 내 이름은 기억하니?"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나라를 지키다 보니 널 소홀히 했다."
"우끼셔. 나라는 무슨…. 경찰이 막 거짓말해도 되는 거야?"
"왜 그래? 뭐가 불만이야? 너 무슨 일 있구나?"
"싫어. 말 안해줄거야"
"뭔데?"
"아냐. 말못해. 다치지 말고 몸조심해. 니 목소리 들으니까 졸리다. 잘래. 수고해∼"
"이것이! 누군 밤새는데!"
시연은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목을 축이고 자야겠단 생각에 물을 마시고, 침대로 가 누
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더니 막상 누우니 잠이 쏟아진다. 꿈도 꾸지 않은 채, 달게 자고
있는데 자꾸 초인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눈을 떴다. 잠결에 잘못 들었다 생각했는데 정
말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시연은 부시시 거리면 일어나 핸드폰을 열어보니 시간이 벌써 1
시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고는 은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녀석이
아니란 건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시연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초인종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누구…세요?"
"저예요."
시연은 뜻밖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놀라서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 에는 지훈이 서있었다. 피곤해 보이지만 아직 생기 있는 눈이다. 시연은 놀란 목소리로
지훈에게 말했다.
"어쩐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보고싶어서요."
시연은 지훈의 말에 더 멍해져 서있었다. 그러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문을 쾅! 닫
았다. 당황한 지훈은 멀뚱멀뚱 문만 바라보고 서있었고, 시연은 안에서 한참을 분주했다. 세
수를 하고,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문이 다시 열렸다. 그 모습을 본
지훈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인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지…."
시연이 밖으로 나오자 지훈은 미안해져 시연을 안아버렸다.
"미안해요. 지금 안 보고 집에 가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너무 보고싶으니까 얼굴이 생
각 안 나는거 있죠? 그래서, 그냥 막 달려왔어요. 얼굴 보려고…."
말을 마친 지훈은 시연을 더 꼭 안는다.
"얼굴 보고싶다면서요. 이렇게 안고 있으면 얼굴이 안보이잖아요."
"얼굴도 보고싶고… 안고도 싶고… 자, 이제 얼굴 볼까요?"
시연을 품에서 떨어뜨린 지훈은 시연의 어깨를 잡은 채 한참을 뚫어져라 시연의 얼굴을 봤
다. 시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훈의 시선에 민망해져 시선을 이곳 저곳으로 돌렸다. 그런 시
연을 보고 지훈이 피식 웃는다.
"왜…왜 웃어요?"
"이제 다 기억하겠는데 눈만은 덜 기억나겠어요. 잠 깨워서 미안해요. 이제 들어가 자요."
"정신이 이렇게 맑아 졌는데 어떻게 자요?"
"그럼 어쩌죠? 밤새 놀까요?"
"몇 날 몇 일 밤을 새고, 놀아요? 그것도 이 시간에? 얼른 가요."
시연은 지훈을 뒤로 한 채,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지훈은 그런 시연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시연의 뒤를 쫓아갔다. 시연은 지훈의 차 앞에 서서 차 키를 달라고 말했고,
지훈은 얼떨결에 키를 건 내 주었다.
"우리 차안에 앉아서 얘기해요."
환하게 웃으며 운전석에 앉은 시연은 지훈을 향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부
분 학교 이야기였다. 시연의 목소리가 종알종알 지훈의 귀를 간지럽힌다. 시연의 향기가 차
안 가득히 퍼지고 잠이 쏟아진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시연의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연이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나요."
"음…. 미안해요. 깜빡 잠든 모양이에요."
"내려요."
지훈은 시연이 차에서 내리자 주위를 둘러봤다. 지훈의 집 앞이었다. 지훈은 놀라서 눈을 번
쩍 뜨고 차에서 내려 시연을 바라봤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향해 미소지어 보이며 차 키를
지훈의 손에 올려놓았다.
"어서 들어가요."
"그런게 어딨어요. 이 시간에 혼자 간다구요?"
"난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요. 다시 타요 데려다 줄 테니까."
차로 향하는 지훈을 잡은 시연이 지훈의 등을 떠민다.
"이럴거면 데려 다도 안 줬어. 어서 들어가요. 나도 얼른 가서 자게. 대신 나 도착 할 때까
지 버티고 있다 나 잘 들어갔다고 전화하면 그거 받고 자요."
지훈은 절대 안된다 했지만 시연은 이미 돌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은 그런 시연을
보고 서있다.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대문 앞에 서자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의 뒤
를 몰래 쫓았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무서운지 꾀나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지훈은 시연쪽으로 누가 걸어오기라도 하면 바짝 긴장한 채로 시연을 쫓았다. 걱정과 달리
아무 일 없이 집에 도착한 시연은 급히 오피스텔로 올라갔고, 잠시 후 창에 불이 켜졌다.
♪♩∼♬
지훈은 불이 켜진 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잘 들어갔어요?"
"네. 안 잤어요?"
"당연하지. 어떻게 자요."
"헤헤. 이제 그만 자요."
"시연씨도 잘자요."
지훈은 전화를 끊고 시연의 집에 불이 꺼지자 돌아섰다. 몸은 피곤해 무거웠지만 마음은 어
느 때 보다 가벼웠다.
시연은 아침부터 자꾸만 새어 나오는 하품을 막을 수 없어 계속 눈물을 찔끔거렸다. 눈꺼풀
이 내려앉을 만큼 피곤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전 10시. 아이들 소집이
끝나고 놀이동산에 들어와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교복을 입고 오라고 말 했것만. 어디
나 말 안 듣는 녀석들은 있다. 시연은 그런 아이들에게 내일부터 청소라고 말한 뒤, 자유시
간을 줬다. 자유시간은 4시까지고, 4시에 놀이동산 안쪽 무대로 모이게 했다. 4시에 끝나고
는 선생님들 회식이 있어 집에 가서 일찍 쉬기는 힘들 것 같았다. 여기 저기서 시끄러운 비
명 소리가 들리지만 시연의 정신은 여전히 멍해 있었다. 함께 가서 놀이기구를 타자는 선생
님들의 말에 좀 쉬었다 타겠다 하고 자리를 지키던 시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려 받았
다.
"왠 비명소리예요?"
"들려요? 오늘 소풍 왔거든요. 지희가 말 안 해요?"
"아, 어쩐지 아침에 늦잠을 자더니…. 피곤하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게요? 지훈씨는 좀 잤어요?"
"그럼요. 그 정도면 엄청 잘 잔 거죠."
"다행이네요. 어? 저 다른 선생님이 불러서 가봐야겠어요."
"그래요. 즐겁게 놀다 와요."
시연은 급히 전화를 끊고 수학 선생님에게로 갔다. 수학 선생님은 사진 찍는걸 유난히 좋아
하셔서 이곳, 저곳 끌려 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찍어 주어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가 아이들과 모여 종례를 했다. 더 놀 사람은 놀고, 집에 갈 사람은 먼저 가도 좋다고 했다.
특히 내일 지각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덧붙이고 나서야 놀이동산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었
다. 학교 근처 식당으로 가 간단하게 회식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벌써 8시였다. 2차를 가자
는 선생님들을 뒤로하고 먼저 온 시연은 집으로 가는 길에 지훈에게 문자를 넣었다. [밥 먹
었어요?] 한참만에 대답이 온 지훈의 문자…. [아니요. 일이 많아서 이따 야식이나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시연은 지훈의 문자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시선을 버스 창 밖으로 돌
리자 마트가 보인다. 시연은 다급히 벨을 누르고 내려 마트로 향해 장을 봤다. 김밥 재료와
샌드위치 재료, 과일까지 사서 한 가득 들고 집으로 온 시연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음식 준
비를 했다. 서둘러서 준비해야 지훈의 야식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2시간 동안 정신
없이 음식을 준비한 시연은 찬합이 없다는 게 떠올라 서둘러 은하네로 달려갔다.
"아버지!!!"
"어?! 무슨 일이야?"
"저 찬합 좀 빌려주세요!"
"찬…합?"
"네. 얼른요, 얼른."
은하네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집으로 올라가 찬합을 가져왔다. 시연은 찬합을
보고 모양이 이쁘지 않다고 투덜대고는 다급히 인사를 한 채 집으로 향했다. 은하 아버지는
그 모습에 의아해 하면서도 조금은 알겠다는 듯이 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준비한 음식
을 통에 예쁘게 담은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윌리에게 인사를 건낸 뒤 스쿠터를 타고 지훈의
회사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이 시연의 얼굴에 와 닿는다. 시연은 그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한 지훈의 회사 앞에 선 시연은 쭈뼛, 쭈뼛 망설이며 회사 안
으로 들어갔다. 경비 아저씨는 어디 갔는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였다. 시연은 엘리베이터
를 기다리며 지훈에게 몇 층에서 일 하냐고 문자로 확인하고 사무실로 찾아 올라갔다. 사무
실 전체에 불이 꺼져 있고, 안쪽 방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연은 천천히… 조심
히…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그 곳으로 다가갔고, 한참을 망설이다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지훈은 갑자기 들리는 노크소리에 문을 바라봤다. 그건 함께 있는 태종도 마찬 가지였다. 지
훈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시연의 얼굴이 보인다.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가 문을 확 열었다. 그 반동에 놀란 시연이 기우뚱해 지훈에게 안겼다. 시연
은 얼른 몸을 추스르고 똑바로 섰다.
"어쩐 일이에요?"
"도시락…"
지훈은 시연이 얼굴 앞까지 쳐든 바구니를 보고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바구니를 받아든 지
훈은 시연의 손목을 잡아 쇼파에 앉혔다. 그제 서야 태종을 발견한 시연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지훈이 도시락 싸 오신 거 에요?"
"예…. 같이 드세요. 넉넉히 싸왔어요."
"네. 그럴 거 에요. 저도 무지 배고프거든요."
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주는 태종에게 고마웠다. 시연이 도시락을 꺼내자 지훈과
태종이 테이블에 늘어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김밥과 샌드위치, 과일에 셀러드… 거기에 음료
수까지 따라지자 두 남자는 놀란 듯 하면서도 좋아서 웃고 있었다.
"이거 직접 싼 거예요?"
"네. 급하게 하느라 맛은 잘 모르겠어요."
지훈이 김밥을 하나 집어먹더니 맛있다고 칭찬이 늘어진다. 태종도 먹어보고는 솜씨가 좋다
며 시연을 칭찬해 줬다. 시연은 정신 없이 먹는 두 사람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빈 도시락
뚜껑을 덮을 때는 그 기분이 두 배로 좋아져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이야∼ 배불러서 잠 올 것 같아요. 할 일은 많은데 큰일이네."
"그러게 나도 그럴 것 같다."
"안돼겠다. 나는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야 겠어. 시연씨 잘먹었어요. 종종 부탁해요. 시켜
먹는 음식하고는 비교가 안돼네."
"네∼"
"'네'는 무슨. 힘들어요. 또 해오지마."
"자식, 좋으면서. 아무튼 얘기하다 가세요. 전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태종은 음료수까지 모두 먹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종이 나가자 지훈은 옆으로 살짝
비켜 앉고서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친다. 시연은 그런 지훈을 보고 멀뚱히 앉아
있다, 지훈이 손목을 잡아 당겨 옆에 앉히자 얼굴이 붉어졌다. 시연의 얼굴이 붉어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지훈이 기분 좋게 웃으며 시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연은 지훈의 행
동에 안절부절 하면서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했다.
"좋다…."
"난 무거운데…."
"머리에 든게 많아서 그래요. 좀 참아 줘. 나 지금 너무 편하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풋…. 시연씨. 허리랑 어깨에 쥐나겠어요. 왜 이렇게 힘을 줘요?"
"몰라요…. 떨려 죽겠어."
"말 안 해도 다 들려요. 에잇∼ 내가 봐줬다. 오늘은 여기까지. 시연씨 심장 터지기 전에 보
내 줘야지."
지훈은 시연에게 기댄 채, 두근거리는 시연의 심장소리가 좋았다. 시연이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귀에 들리는 거라곤 자신의 심장소리가 전부였다.
헌데, 시연의 심장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편안해 졌다. 지훈의 심장소리와 시연의 심장소리가
똑같이 뛰는지 점차 누구의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 나 태종씨한테 식사대접 하고 싶은데."
"둘이서만?"
"네…. 태종씨가 밥 많이 사줬거든요."
"그래요. 맛있는 거 사줘요."
***
희뿌연 연기가 허공에 흩어진다.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오고, 아래에는 수십 만개의 불빛들
이 반짝이고 있다. 사무실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온 태종은 담배하나를 꺼내 폈다. 끊어야 겠
다 결심하면서도 끊지 못 하는 건. 이렇게 답답할 때 한 대 피우면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
은 착각 때문이다. 정말 속을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나쁜 물질만 몸 속에 쌓아 놓는데도 이
작은 한 개피가 왜 이리 위안이 되는지…. 담배 한 개피를 순식간에 피운 태종은 바람을 쐬
다 계단으로 내려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지훈의 성격상 일을 쌓아두고
시연과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을걸 알고 있었다. 층을 다 내려와 비상구 문을 열고 모
퉁이를 돌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지훈과 시연이 보인다. 태종은 자신도 모르게 재빠르
게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시연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지훈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태
종은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벽에 기대 눈을 감
은 채로 서있던 태종은 문자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내일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시
간 괜찮으세요?] 태종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문자에
답을 했다. [영광이죠.]
-29.예감-
시연은 모든 수업을 마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토요일이라 수업이 일찍 끝나 먼저 약속 장
소로 가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오늘은 스쿠터를 타고 오지 않아 버스를 탔다. 버스 밖 풍경
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은 가고 봄이 한참이다. 따뜻한 햇빛이 버스 창을 통
해 시연의 얼굴에 와 닿는다. 시연은 그 빛이 너무 따뜻해 눈을 감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간을 보니 태종을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렀다. 먼저 가 기다
리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라 생각되 영화 한편을 보기로 했다. 표를 끊고 팝콘을 사서 자
리에 앉은 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다 머쓱해 졌다. 전에는 느끼지 못 했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였다. 주말이라 주위에 연인들이 너무 많았고, 짝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애인이
아니면 친구와 함께라도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이 전부였다. 시연은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오늘 따라 전화도 없는 지훈이 미워져 괜히 핸드폰에 분풀이를 하듯 플립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 영화 시작 전 핸드폰을 꺼버렸다. 시연이 택한 영화는 자신과 같은 선생님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물론 현실과는 영 다른 선생님들이 나오는…. 영화가 끝나고 나오자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시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연이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태종은의 모습이
보였다. 시연은 미안함에 살짝 인상을 쓰며 태종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제가 또 늦었네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너무 일찍 도착해서 영화를 한편 봤거든요."
"혼자요?"
"네."
혼자 영화를 봤다는 시연의 말에 태종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웃어 보였다. 음식
을 시키고 식사를 하는 동안 시연은 영화 이야기를 했다. 큰 내용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처
음부터 끝까지 영화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꼭 영화를 본 느낌이 드네요."
"그래요? 제가 너무 세세하게 말했나요?"
"예전엔 시연씨랑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계속 말 붙이고 그랬는데. 이제 시연씨가 이야기하
고, 전 듣고만 있네요."
"그러네요…."
"괜찮아요. 너무 미안해하지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평생 안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러지 말아요."
"네. 이제 그럴게요."
"그럼 우리 식사하고 술 한잔할래요?"
"네?"
"남자랑은 안 마셔도 친구랑은 마실 거죠?"
시연은 환하게 웃는 태종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조금 걷기로 한 두 사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걸었다. 바람이 좋다던가 이제 곧 여름이 올
것 같다는 짧은 대화가 전부였다. 어느 순간 대화가 끊어지고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의 어색
함에 구세주처럼 태종의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어. 응 같이 있어. 그래? 잠시만,"
태종이 전화를 받더니 곧 시연에게 전화기를 건내 준다. 시연은 그런 태종의 전화기를 멀뚱
히 바라보고 있자 태종이 알았다는 듯 말을 해준다.
"지훈이요. 핸드폰 꺼져 있다고 하는데요."
"아!"
얼른 핸드폰을 건 내 받은 시연이 지훈의 전화를 받는다. 시연의 목소리를 듣자 흥분된 지
훈의 음성이 들려온다. 시연이 영화를 보고 꺼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켜지 않아 그 사이 전
화했던 지훈이 꾀나 걱정했던 모양이다. 영화 중간부터 연락을 했는데 되지 않아 태종에게
할까 하다, 혹시 식사가 방해 될까봐 참았다 이제야 전화를 한 것이라고 한다. 시연은 집에
가서 연락한다는 말을 하고, 핸드폰을 켜두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
고 화장품이 묻은 액정을 옷에 닦은 뒤 태종에게 돌려줬다. 태종은 그런 시연에게 이제 술
을 마시러 가자며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어두운 조명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바
(bar)형식의 술집이었다. 시연과 태종은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시켰다. 간단하게 병 맥주를
마시며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다 시연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
굴이 달아올라 화장을 고치고 손을 씻고 나오던 시연은 들어오는 어떤 여자와 살짝 부딪히
게 되었다.
"아,"
"죄송합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후∼. 네… 괜찮아요…."
부딪힌 여자는 술 냄새가 잔득 진동을 하고 있었다. 시연은 여자가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먼
저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자 여자는 비틀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고, 넘어질 뻔한 걸
시연이 붙잡아 주었다. 간신히 몸을 문에 기댄 여자는 조금 풀린 눈으로 시연을 보았다.
"고마워요……."
시연은 여자가 바로 서는 걸 본 후에야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우당탕…
"에이! 뭐야?!"
시연과 태종은 뒤쪽을 쳐다봤다. 한 여자가 취해서 지나가다 다른 테이블 의자에 걸려 넘어
져 있었다. 쉼 없이 죄송하다며 일어나려는 여자에게 일행이 다가와 몸을 일으켜 준다.
"민경아!"
여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태종이 일어나 여자에게 다가간다. 시연은 그런 태종을 의아하
게 바라봤다. 그리고 한 참을 생각한 뒤에야 낯설지 않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 시연은 화장
실에서 부딪쳤던 여자를 다시 자세히 바라봤다. 태종은 그 여자를 가까운 의자에 앉히고 시
연에게 다가왔다.
"시연씨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먼저 가봐야 겠네요."
"누구예요?"
"아, 동생이요."
"동생이요?"
태종이 벗어두었던 옷을 챙겨 입으며 시연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건
지 민경이란 여자가 시연의 앞에 서있었다.
"어∼어? 오빠 애인이야?"
"얌마, 거기 앉아 있으라고 했잖아."
"응? 아까 그 분이네∼ 맞죠. 화장실?"
"네…."
"헤헤…. 맞아, 맞아. 오빠- 근데 어디 가려구?"
"가자 데려다 줄게."
"아니야, 아니야∼ 나 때문에 데이트 망치지 마. 난 혼자서도 갈 수 있어."
"데이트 아니야. 시연씨 저 먼저 가볼게요. 죄송해요."
"아니예요. 어서 가보세요."
태종은 다급히 민경의 팔을 잡고 갈 길을 재촉했다. 한발, 한발 거의 끌려나가는 듯한 민경
이 고개만 뒤로 돌린 채, 웃으며 시연에게 큰 소리로 말을 한다.
"우리 다음에 만나요∼ 다음 번엔 데이트 방해 안 할게요. 미안하니까 내가 나중에 밥 살게
요∼아, 아퍼∼"
태종은 큰 소리로 말하는 민경을 더 빠르게 끌고 나가버렸다. 시연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
고 있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아니에요. 일 다 끝났어요?"
"응. 이제 집에 가려구요. 어디예요? 태종이랑 아직도 같이 있어요?"
"아니요. 방금 태종씨 갔어요."
"그럼 집이 에요?"
"아니요."
지훈은 시연이 집이 아니라는 말에 단번에 달려왔다. 시연은 술집 밖으로 나와 차도 근처에
서 있다 자신의 앞에 멈춰서는 차를 보고 올라탔다.
"태종인 왜 먼저 갔는데요?"
"동생이 취해서요."
"민경이랑 같이 만났어요?"
"아니요. 우연히 만났어요."
지훈은 운전을 하다 시연을 봤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그
런 시연의 얼굴을 보고 말 없이 운전을 했고, 곧 시연의 집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차가 멈
춰 서자 시연은 안전벨트를 풀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지훈은 그런 시연을 보고 있다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흠…."
"응? 왜 그러는데? 뭐 고민 있어요?"
"아니요."
"그럼 속이 안 좋아요?"
"아니요."
"그럼 머리?"
"아니요…."
"그럼 왜 그러는데?"
"지훈씨."
"응."
"그… 민경이란 사람…지훈씨랑 나 때문에 술 마신 거죠?"
"……"
"그냥…신경이 쓰여서요…."
"시연씨 그건…"
지훈이 막 말을 하려 하자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꺼내 보니 어머니다. 지훈은 하던 말을 멈
추고 전화를 받았다. 지훈의 엄마는 지금 집으로 오는 길이면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후, 모임이 있어 나가봐야 하는데 할말이 있으시다는 내용이었다. 지훈은 어쩔 수 없이 알았
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바쁘면 가봐요. 저도 들어갈게요."
지훈은 내려서 손을 흔드는 시연을 보고 차에서 내려 시연에게 다가가 시연을 꼭 안아 주었
다. 시연은 그런 지훈의 품에 안겨 가만히 서있었다 팔을 지훈의 허리에 둘렀다. 잠시 후,
지훈은 시연을 품에서 놓은 뒤, 전화하겠다며 아무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지훈의 차
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집으로 올라온 시연은 욕실로 들어가 물을 받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궜다. 몸이 노곤해지는 게 피로가 몰려왔다.
지훈은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워 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지훈에게 앉으라 말했다.
"여자 생겼다고?"
"어떻게 아셨어요?"
"민경이한테 들었다. 많이 힘들어하더구나."
"……"
"정말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네."
"……그래 알았다."
지훈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에게 나간다며 현관으로
가자 지훈이 어머니께 되물었다.
"다 예요?"
"뭐가?"
"하실 말씀이요."
"응. 그럼 다녀오마."
"네…."
지훈은 조금 허탈한 마음에 다시 쇼파로 가서 앉았다. 지훈은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시
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질 않는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다시 나가 차
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를 출발시키자 태종에게 전화가 왔다.
"시연씨는? 미안하다 내가 데려다 줬어야 하는데."
"괜찮아. 그 보다 민경이는 좀 괜찮아?"
"어…. 잠들었어.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지…."
시연네로 향하던 지훈은 꽃집을 보고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곤 태종에게 월요일 날 보자고
인사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얀 카라 꽃 한 송이를 산 지훈은 향기를 맡아보고는 기분 좋
게 웃어본다. 지훈이 시연의 집 근처에 차를 멈춰 세우자, 시연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지
훈은 시연의 모습을 보고 얼른 시동을 끄고 꽃을 뒤로 숨겨 든 채, 시연의 뒤를 따랐다. 시
연은 가까운 비디오 가게로 들어갔고, 지훈은 안을 들여다보며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
연은 지훈의 전화에 놀랐는지 안쪽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지훈은 그런 시연을 보고 슬
그머니 비디오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시연을 찾았다. 조용조용 말하는 시연의 음성이 지훈
의 귀를 간지럽힌다.
"안 잤어요?"
"그러는 시연씨는 안 자고 뭐해요?"
"전 조금 있다 자려구요."
"집이에요?"
"아니요. 잠깐 나왔어요. 어머!"
시연은 통화중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뒤에서 불쑥 뻗어온
팔의 주인공을 돌아보고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있자 지훈이 꽃을 다시 한번
시연의 눈앞에 들이민다. 시연은 그제 서야 꽃을 받아들고 지훈에게 물었다.
"왠 일이에요?"
"보고싶어서요."
"피-"
"진짠데?"
"거짓말. 나 기분 안 좋은거 풀어주려고 왔죠?"
"아니야-"
"그럼 이 꽃은 뭔 데요?"
"그냥…. 시연씨 닮아서…."
시연은 얼버무리는 지훈을 보고 미소지었다.
"시연아- 꽃이 이쁘구나."
"앗, 아버지…."
지훈은 시연이 비디오가게 주인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시연이
지훈의 옷깃을 잡아끌어 비디오 가게 아저씨 앞에 멈춰 세웠다.
"지훈씨. 인사드려요. 우리 아버지예요."
"아…버지요?"
"얼른!"
"네, 안녕하세요."
"잘생긴 총각이구만. 난 시연이한테 애비 소리 듣는 사람이오."
지훈은 푸근하게 웃어주시는 아저씨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아저씨는 악수를 하자 더 이상 아
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셨다. 그저 웃으며 시연이에게 늦었는데 비디오는 다음에 보고 일찍
자라는 말씀이 다셨다. 시연은 지훈과 함께 비디오 가게를 나오다 다시 돌아 들어갔다.
"아버지. 은하한테는 비밀이요!"
"왜?"
"제가 나중에 말할게요."
"녀석…. 알았다. 어서 가봐."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다음에 또 보세."
"네. 안녕히 계세요."
지훈은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시연은 두 손으로 꽃을 들고 향기를 맡으며 이야기 했
다.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사람의 아버지라고. 단 한번도 자신을 친딸과 다르게 대한 적
없으시다며 늘 감사 드리는 분이라고 말했다. 지훈은 시연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뒤를 돌
아 비디오 가게를 봤다. 창에 붙어 서, 시연과 지훈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계시는 아저
씨의 모습에 지훈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훈의 차 앞에 선 두 사람은 멀뚱히 서 있었다.
"가볼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쪽.
달콤한 소리가 지훈의 귓가에 들린다. 방금 스치고 간 시연의 입술 온기가 볼에 남아 그대
로 느껴졌다. 지훈은 갑작스런 시연의 선물에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지훈도 시연의
이마에 입맞춰 주었다.
-30.걸려온 전화-
시연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옷은 간단하게 차려입고, 쇼핑백에 다른 옷과 신발을
챙겨 넣었다. 오늘은 스승의 날. 아이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날이다. 다른 사람들은 선
물도 받고 아이들의 노래도 듣고,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시연은 달랐다. 선생님이 된 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의 장난을 당했던 터라 스승의 날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윌리의
밥을 챙겨주고 나온 시연은 스쿠터 발판에 짐을 올려놓았다. 학교에 도착해 옷을 책상 아래
에 넣어 놓고 교무 회의 준비를 했다. 준성은 시연의 옷차림을 보고 웃었다.
"왜?"
"어째 넌 스승의 날마다 매년 그 옷이냐?"
"이건 왠지 지저분해 져도 아깝지 않아."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좀 살만한가 부지?"
"아니."
시연은 준성의 대답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교무회의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마지
막의 교감선생님께서 늘 하시는 수고들 하라는 말이 오늘 따라 구슬프게 들려왔다. 시연은
수업종이 치자 숨을 크게 들여 마시며 교실로 향했다. 지나는 다른 반 창에 풍선이다 뭐다
해서 잔뜩 걸려 있었다. 시연의 걸음이 느림에도 불구하고 이미 교실 문 앞에 다 달아 있었
다. 시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염과 동시에 몸을 뒤로 뺐던 시연은 위
에서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교실로 들어섰다. 칠판에는 아이들의
감사 메시지가 써져 있고, 풍선장식이 가득했다. 시연이 조심스레 교탁 앞에 서자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연은 긴장했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이들의 노래가 끝나자 폭죽이 터진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시연은 아이들의 큰 함성에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고맙다."
"저희가 장난할까봐 겁나셨죠? 저희 내년이면 20살. 성인이에요. 그런 거 할 나이는 지났다
구요∼"
"그래. 애 취급해서 미안해. 오늘 단축수업해서 좋겠다? 고3들은 정상 수업해야 하는데 말이
야∼"
"저희도 쉴 때가 필요하다구요∼!"
"맨 날 쉬면서 무슨."
시연은 아이들과 즐겁게 대화를 했다. 오늘은 수업을 4교시까지 밖에 하지 않는다. 1교시는
담임 시간이고, 2,3,4교시는 정상 수업이었다. 수업이라도 스승의 날이라는 명분하에 아이들
은 선생님도 쉬어야 한다며 공부를 거부할 것이다. 스승의 날이기보다는 아이들 하루 일찍
끝나는 날로 바뀐 지는 오래였다. 시연은 2교시 수업이 없었던 터라 운동장에 나와 앉아 있
었다. 준성이는 담임을 맡고있지는 않아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아 곳곳에 선물들이 보였다.
준성은 나와 있는 시연을 보고, 아들에게 자유시간을 준 뒤 시연 옆에 와 앉았다.
"수업 없어?"
"없으니까 나왔지. 아무렴 땡땡이겠어?"
"선물은 많이 받았어?"
"그냥 반 아이들이랑 내 추종자 정도? 넌 책상에 빈틈도 없이 선물이 가득하더라."
"내가 인기가 좀 많잖냐. 한 사람한테만 빼고."
"그래도 뭐… 한 사람도, 여러 사람한테도 인기 없는 것 보다 낫잖아."
"그래… 근데, 100명도 1000명도 필요 없으니까 그 사람 마음 하나만 가졌으면 좋겠다."
"얌마, 100명? 1000명? 그 많은 사람이 널 왜 좋아하냐? 연예인두 아니구… 하여튼 쫌 띄워
줬다고 숫자 팍팍 늘리기는."
"이시연. 너 요새 기분 좋다?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이거 봐, 이거 봐.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뭐야? 말해봐."
"야, 그런 거 없어. 야야, 간지러워 찌르지마∼ 나간다."
시연은 자꾸 옆구리를 찌르며 말하라는 준성이를 피해 교무실로 올라왔다. 시연이 교무실로
들어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준성이 들어온다. 준성은 시연이를 장난
스럽게 째려보고는 자리에 가서 앉는다. 시연은 그런 준성을 보고 슬쩍 웃어 보인 뒤, 다음
시간에 있을 수업 준비를 했다. 종이 치기 얼마 전 지훈에게 문자가 와 확인해 보니 일이
일찍 끝날 것 같다며 영화 보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시연은 지훈에게 답장을 해주고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교실로 향했다.
철퍼억!
시연이 5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케이크가 통째로 날아와 얼굴을 덮었다. 케이크 덩어
리들이 옷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옆에서 아이들이 소리지르며 계란과 밀가루, 눈 스프레이
를 가득 던지고, 뿌리고, 폭죽을 터뜨린다. 시연은 멍하니 서서 아이들이 하는 대로 그냥 두
었다. 얼마 후, 아이들의 행동이 멈추고 시연은 얼굴을 손으로 닦아 냈다.
"하하하하하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푸∼. 그래 고맙다. 우선 좀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
"에이∼ 선생님 저희 선물 풀어 보셔 야죠∼"
시연은 혜영이 탁자 앞에 끌어다 놓자 뜨기 힘든 눈을 닦아내며 서있었다. 자꾸만 선물을
풀어보라는 아이들 덕에 손에 묻은 것을 바지에 닦아내고 선물 포장을 뜯었다. 예쁘게 포장
된 상자 안에는 속옷이 들어있었다. 보기도 민망한 끈 팬티와 망사 브라였다. 시연은 속옷을
상자에 다시 넣었다.
"고마워.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잘 입을게."
"그거 입고 남친한테 사랑 받으세요∼."
"그래……. 고맙다. 그럼 이거 교무실에 가져다 놓고 올 테니 자습하고 있어."
시연은 상자를 가지고 교실에서 나왔다. 매년 아이들이 칠판 지우개나 밀가루 정도는 했어
도 오늘같이 심한 적은 처음 이었다. 시연은 비릿한 계란 냄새에 속이 니글거렸다. 화장실에
들려 대충 닦아내고 교무실로 들어서자 수업이 없었던 준성이 보고 달려온다. 시연은 담담
한 얼굴로 상자를 책상에 올려두고 가져온 옷을 꺼냈다.
"야, 아니. 이 선생 이게 다 뭐야? 무슨 냄새야? 애들이 계란 던졌어?"
"그냥…. 오늘 장난이 좀 심하네."
"이 녀석들을 그냥!"
"하지마. 됐어. 옷도 가져왔고…근데, 기분은 별로다."
준성은 그런 시연을 보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주었다.
"이건 뭐야?"
"아니!"
시연이 미쳐 막기도 전에 상자를 열어본 준성은 그 안에 들어있는 속옷을 보고 눈이 커졌
다. 준성은 크게 숨을 들여 마신 뒤, 시연에게 옷이나 갈아입으라고 말했다. 시연은 준성의
말대로 챙겨온 옷을 가지고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더러워진 옷을
챙겨 넣던 시연은 주저앉아 옷을 만지작거렸다.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서러워져 울컥하긴
했지만 눈물을 꾹 눌러 참고 나와 옷을 교무실에 가져다 놓은 뒤, 다시 5반으로 향했다.
"니들은 선생이 우습게 보여?! 장난도 정도가 있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교실로 향하던 시연은 준성의 고함소리에 놀라서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5반 아이들은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손들고 있었고, 준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이들을 훈계
하고 있었다. 시연은 그런 준성을 끌고 나왔다.
"뭐해?!"
"저 녀석들 정도가 있지. 아무리 스승의 날이라도 이게 뭐야?"
"됐어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게."
"애들한테 싫은 소리도 못하면서 알아서 하긴 뭘 해?"
"혼내도 내가 혼내. 니가 왜 그래?!"
"알았다."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준성에게 짜증을 냈고, 준성은 그런 시연을 보고 돌아섰다.
"야 박준성."
"왜?"
"고맙다…. 집에 가서 동전 엄청 넣을 뻔했는데 너 때문에 안 그래도 될 것 같아."
"그래도 혹시 울거면 전화해라. 같이 울어줄게."
시연은 준성의 말에 웃어 보인 뒤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손은 내렸지만 모두 그
대로 책상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시연이 내려 오라 말하자 수업이 끝나는 종이 쳤고, 인사
를 받고 교실에서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수업을 마친 시연은 퇴근준비를 하고, 엉망이 된
옷을 가지고 스쿠터가 있는 곳으로 가자 시연의 스쿠터 앞에 서 지희가 두리번거리며 시연
의 스쿠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집에 안 갔어?"
"네? 아, 그냥… 참, 왜 그렇게 당하고 살아요? 애들이 그러면 뺨이라도 내려치셨어야죠."
"그건 채벌이 아니잖아. 내 감정 조절 못하고 쓰는 폭력이지."
"그런 것들은 맞아도 되요."
"그런 말이 어딨어. 너, 나 걱정되서 안 가고 있었구나?"
"걱정은 무슨! 짜증나니까 자꾸 당하지 말라구요!"
시연은 빠르게 사라지는 지희의 뒷모습을 봤다. 지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스
쿠터에 올라탄 시연은 스쿠터 계기판에 붙어있는 핸드폰 줄을 때어 냈다. 시연의 이름을 영
어로 한 스펠링과 끝에 방울이 달린 핸드폰 줄이었다. 시연은 다시 한번 지희가 사라진 쪽
을 바라보고 웃으며 시동을 걸어 집으로 갔다. 바람에 옷에 묻은 계란 냄새가 사방에 퍼졌
다. 집에 도착해 스쿠터를 세워두고 집으로 올라오자 문 앞에 지훈이 서있다.
"언제 왔어요?"
"음…. 한시간?"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아."
시연이 옷을 뒤로 숨기자 지훈이 쇼핑백을 뺏어 든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옷을 보고는 잔뜩
인상을 쓴다.
"애들이 그런 거예요?"
"올해 좀 심했어. 괜찮아요."
지훈은 괜찮다 말하는 시연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시연은 그런 지훈의 손을 잡고 웃는
다. 시연은 지훈을 밖에 세워둘 수 없어 안에서 기다리라며 차를 끓여 준 뒤 옷을 챙겨 욕
실로 들어갔다. 지훈이 차를 마시고 있자 윌 리가 다가와 다리에 몸을 부벼 댄다. 지훈은 그
런 윌리를 들어올려 안고 집 이곳, 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부엌과 거실을 보고 방으로
들어간 지훈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두리번거리던 지훈은 자
신이 준 꽃이 보여 화장대로 다가갔다. 꽃을 보고 있다 물방울 모양의 저금통을 보고 손으
로 만져 보았다. 그때 마침 시연이 샤워를 마치고 들어와 온 방에 비누 향을 풍긴다. 지훈은
윌리를 내려두고, 뒤를 돌아 시연을 보고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동전… 많이 모았네요."
"아…그거 내 눈물이에요."
"눈물?"
"울고싶을 때마다 동전을 채워 넣거든요. 저금통이 가득 차면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갔었는데…. 이번엔 지훈씨 맛있는 거 사줄게요."
시연의 말에 시연을 보고 돌아선 지훈이 천천히 다가와 시연 앞에 선다. 그리곤 시연의 볼
을 쓰다듬는다.
"싫어. 울고싶은 일이 저 저금통 가득 생기는 거 나 싫어요. 맛있는 건 내가 사줄 테니까 울
일 만들지 마요."
지훈은 시연의 눈을 바라보다 입술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시연의 입술에 입 맞
추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이 보다 달콤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지훈은 시연의 얼굴을 부드
럽게 감싸고, 시연은 그런 지훈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있었다. 길고도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눈을 뜨자 부드러운 미소가 두 사람 얼굴에 퍼진다.
"오늘 애들이 속상하게 해서 동전 넣을 거예요?"
"아니요…. 친구랑 지훈씨가 위로해줘서 안 넣어도 될 것 같아."
지훈이 시연을 품에 안자 시연이 지훈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거봐. 내가 그랬잖아. 절대란 없다고. 나 지금 시연씨 집에 들어와 있어요."
"의그∼"
시연은 지훈의 가슴을 밀치고 품에서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극장으로 가 표를 끊고, 두 손
꼭 잡은 채 영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시연은 모르는 번호를 보고 받
을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기. 실례지만 이시연씨 핸드폰인가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태종 오빠 동생이요. 술집에서 봤던."
시연은 상대방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뜬눈으로 지훈을 봤다. 지훈은 그런 시연을 보지
못하고 영화 팜플렛을 보고 있다.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네. 알아요."
"혹시 지금 바쁘세요? 나중에 전화할까요?"
"아니요. 그냥 말씀하세요."
"제가 그때 너무 실수가 많았죠? 밥 사고 싶어서요."
"아니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러고 싶어서요. 참, 저희 오빠한테는 비밀이에요. 오빠가 번화 절대 안 알려 준다는 거
제가 몰래 보고 전화 드리는 거거든요."
시연은 민경과 전화를 끊고 멍하니 있다 화장실에서 나왔다. 영화 입장이 시작된 건지 저
쪽에 선 지훈이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한다. 시연은 지훈의 웃는 얼굴을 보고 마음을 가다듬
고 지훈에게 걸어갔다.
***
은하는 몇 날 몇 일째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미제사건 파일을 뒤져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사건을 두 건이나 해결했다. 동료들은 그런 은하를 보고 기쁜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신 형사 나가자. 어딨는지 알 것 같다."
"네."
"야, 신 형사. 나가다 은하 저녁 좀 먹여. 쓰러지겠다."
"네 반장님."
은하는 반장님을 한번보고 웃었다. 대포 차를 추적하고 단서를 캐내 던 중 살인 용의자를
찾아내 쫓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뛰던 은하는 앞에 뛰는 신 형사를 보다, 옆길로 빠져 뒤
에서 기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범인과 신 형사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은하의 뒤쪽에서 나타난 범인은 어디서 난 건지 각목으로 은하의 머리를 내
려 쳤다. 신 형사가 달려와 놈을 제압한 뒤, 무전으로 지원 요청을 했다. 잠시 후 팀원들이
오고, 구급차가 와 은하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응급실에 들어선 은하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
다. 검사가 시작되고, 당직인 의사가 내려와 은하의 차트를 보며 신 형사에게 물었다.
"어쩌다 다친 거죠?"
"범인 잡다가 각목에 맞았어요."
그제 서야 의사는 고개를 돌려 은하를 봤다. 그리고는 한 동안 멍하니 서있다 은하에게 달
려들어 이곳, 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CT촬영하고, MRI준비해요! 피검사 빨리 해!"
오늘의 응급실 당직은 국현이었다. 국현은 침대에 누운 은하를 보고 흥분해 버렸다. 좀처럼
화를 내거나 소리 치는 일이 없는 국현이 소리치며 일을 시키는 통에 인턴들은 정신이 하나
도 없었다. 검사 결과를 모두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국현은 다리가 풀린 듯 주저
앉았다.
"저기…괜찮은 건가요?"
"아…네. 괜찮습니다. 영양실조에 과로가 겹쳐서 기절했다 그대로 잠이 든 상태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집에 연락은 하지말고. 그냥 푹 자게 둬."
"네 반장님."
병실로 옮겨진 은하 곁에 국현이 앉아 있다. 은하의 파트너인 신 형사는 어느 틈엔가 잠들
어 있었고, 국현은 잠든 은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몇 일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건
국현도 마찬가지 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경찰서 주위를 배외하며 은하를 보고 오곤 했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이렇게 라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
시름 마음이 편해 졌다.
은하는 새벽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곳이 병원인걸 알고는 링겔을 뽑고 옷을 갈아입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정신을 깨운다. 병원에서 나오자 갈곳이 막막해진 은하는 집으
로 갔다. 그리고 불꺼진 집을 올려다 보다 발길을 돌려 약수터로 향했다. 항상 국현과 앉았
던 벤치 앞에 선 은하는 이슬로 젖은 벤치를 손으로 닦아내고 앉았다. 날이 점점 밝아 온다.
운동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은하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터벅… 터벅….
"여기서 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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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완결
20대나래창작 I
[★까망별★] 해프닝(happening) 21~30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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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2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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