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천하(天下)
너덜너덜한 옷에, 흑립(黑笠)으로 얼굴을 가리고, 팔자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하나 있다.
책 꾸러미 하나를 들쳐 메고 팔자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는 아주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여기 왔다. 나를 버린 천하로… 훗훗, 나를 버린 천하로 내가 다시 왔다!"
느긋하게 내딛는 걸음.
거보(巨步)가 천산만봉(千山萬峯)을 압도한다.
누구의… 어디로 가는 걸음걸이인가?
헌칠한 키를 가진 청년.
그는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가슴 가득 받으며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었다.
"패배를 모르는 자는 내 손에서 유형되리라! 모든 천하제일이 내게… 굴복하리라!"
저벅… 저벅… 저벅…….
아아… 산(山)이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
조양(朝陽)의 하늘 아래 그가 걸어간다.
목비린, 그가 드디어 길에 오른 것이다.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강호의 길에…….
고도(古都) 낙양성(洛陽城).
사통팔달한 거리마다 분설(粉雪)이 날리고 있다.
망년지정에 취해, 조금은 느슨해진 사람들이 두툼한 겨울 옷을 걸치고 바쁘게 움
직이고 있다.
공자대부(公子大夫)도 있고, 사농공상(士農工商), 평상적인 나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유녀(遊女)도 있고 걸인(乞人)도 있다.
하늘을 마신 듯 푸른 낙수(洛水) 가의 고도.
머지않아 태탕한 봄이 시작될 것이고, 이 지긋지긋한 겨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
리라.
그 때가 되면 도화(桃花)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리라.
지금, 낙양 하늘 높이 날아오른 달처럼 화려한 빛으로 낙양성 동쪽의 도화꽃은 날
아오고 날아가서 누구의 집에 떨어지나?
규방의 아가씨는 얼굴빛을 아끼고 우두커니 낙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누나.
올해도 꽃이 지면 얼굴이 달라지리니
다음 해 꽃이 필 때, 누가 지금의 그 얼굴 그대로 있겠는가.
이미 보았거니,
소나무 잣나무는 꺾여져 땔감이 되고, 상전벽해가 됨을 들었노라.
옛 사람이 한번 가면 낙양성 동쪽으로 다시 오는 이 없고, 바람에 지는 꽃을 옛
사람이 보듯이 지금 사람이 보고 있고해마다 피고 지는 꽃은 그 모습이 같으나,
해마다 사람들의 얼굴은 달라진다.
古人無復洛陽東 今人還對落花風
年年歲歲花相以 歲歲年年人不同
고도 낙양은 불야성(不夜城)으로 달빛을 무색케 했다.
거리거리에서 비파소리가 들려 왔고, 유곽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주인이 기루(妓樓)에서 나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말 곁에 서 있는 작은 종
자아이의 콧등에는 서리가 엉키고, 거나하게 취해 휘청거리며 가는 파락호(破落戶)
들의 큰 목소리가 골목골목 메아리를 만든다.
낮도 밤도 없이 흥청거리는 낙양성 깊은 곳.
다른 곳과는 달리 정적에 뒤덮인 고택(古宅)이 하나 있다.
현판(懸板)도 달려 있지 않은 거대한 문.
문의 좌우에는 빛이 흰 사자상(獅子像)이 하나씩 서 있다.
입을 딱 벌리고 포효(咆哮)를 하는 사자상 근처에는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살기.
내가고수라면 그 기운을 느끼고는 손을 검자루에 갖다댈 것이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장원!
그곳 일대는 수많은 눈빛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자야(子夜)!
지금 달은 핏빛 달무리 속으로 감춰졌다.
핏빛 구름에 숨은 달과 검은 물감처럼 번지는 어둠…….
잔설(殘雪)을 흩날리게 하는 귀기 어린 바람…….
노인, 그는 제 그림자를 인공호수(人功湖水)에 담가 놓고 그것을 오랫동안 응시하
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째.
물 위에는 그의 얼굴 이외에도 가산(假山)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겨울에도 얼지 않은 중수호(重水湖)!
그 물은 내공을 연마(練磨)하는 데 탁월한 위력을 발휘한다.
즉 물 속에 들어앉아 비공(鼻空)만 물 밖으로 내민 채 운기조식하다 보면 막강한
내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중수로 검을 만들면 검기(劍氣)가 아주 날카로워진다.
체구가 당당한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오래도록 호숫가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밤 화마(火魔)에 타 죽는 악몽을 꾸었다. 으음, 어이해 그런 악몽을 꾸었는지
… 무슨 천기(天機)인지……."
노인은 지난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그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몸이 불에 휩싸여 까맣게 타 죽는 꿈이 그것이었다.
앞쪽에서 바람이 불며 그의 누런 옷자락이 펄럭거린다.
"강호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벌써 오 년이 되었건만… 그분을 위해 이뤄야 할
것 중 십분지이밖에 이루어 놓지 못했다! "
노인은 착잡히 중얼거리며 먼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하늘 가에는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뇌까렸다.
"그분은… 하늘을 좋아하셨지. 지금도 그러실지……."
그의 목소리가 여운(餘韻)을 맺을 때였다.
"그렇소. 나는 아직도 하늘을 좋아하오, 나후지존(羅侯至尊)! "
대체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일까?
바람소리일까?
황포노인은 일순 멍청해지고 만다.
"으음, 아무래도… 나의 번뇌가 너무 심한 듯하다. 아아, 주인을 위해 오천 정예고
수를 기르느라… 너무 피로해졌다. 헛소리를 듣다니!"
노인이 그렇게 말한 후였다.
"그럴 때에는… 죽엽청(竹葉淸)이 좋소. 그 날 북경야(北京夜)에서 마신 그런 죽엽
청을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오!"
대체 누가 말하는 것일까?
황포노인의 머리카락이 칼날처럼 빳빳이 곤두섰다.
"설… 설마… 벌써 속하를 찾으셨단 말이오? 왕야(王爺)? "
황포노인의 눈가는 시뻘겋게 충혈이 되었다.
가산 기슭에 홀연히 나타난 청년이 하나 있었다.
책 꾸러미 하나를 들고 얼굴을 흑립으로 가린 청년.
아주 강한 선(線)의 턱과 싱긋 웃음짓고 있는 매력적인 입매.
목비린(木飛鱗).
그가 낙양 깊은 곳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철노(鐵老)! 시장하구려. 쉬지 않고 삼천 리를 달려왔더니… 훗훗!"
"오오, 이럴 수가… 벌써 출관하시다니!"
황포노인은 결국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나후지존 철무극.
전전대(前前代)의 근위대장(近衛隊長)이고, 승명제의 명에 따라 목비린의 평생 시
종으로 붙여진 사람이다.
그는 나후백팔위(羅侯百八衛)의 총수이고, 목비린의 강호행(江湖行)에 필요한 세력
구축에 선봉이 된 사람이었다.
이곳은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을 한 장소였다.
백팔 명의 나후호법은 오 년 전 여기 모였다.
그들은 각 오십 명씩의 직전제자들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은 불철주야 무공연마에 매진했다.
태사의(太獅椅).
편안한 의자에 앉기는 꽤 오랜만인 듯했다.
목비린은 여전히 흑립을 쓰고 있었으나, 걸치고 있는 옷은 파의(破衣)가 아니라 아
주 깨끗한 흑삼이었다.
그는 목욕물을 다섯 통이나 구정물로 만들어 버린 후에야, 본래의 관옥(冠玉) 같은
용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대전(大殿).
이곳은 지상에서 십 장 아래에 있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어 사자후(獅子吼)를 터뜨려도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는다.
이곳은 놀랍게도 승명제의 생시에 세워졌다.
승명제는 훗날 서왕 구룡이 유배될 수도 있으리라 여기고, 미리 하나의 거처를 마
련해 둔 것이다.
대전이며 전각들은 귀문자(鬼門子)라는 상고이인이 남긴 도해(圖解)에 따라 건축이
되었다.
지금 오십사 명의 위사들이 목비린의 눈 안에 들고 있다.
나후백팔위들은 문무쌍반(文武雙班)으로 나뉘어 있다.
그들은 강호 각지로 흩어져 천하정세를 모으고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지금 목비
린을 맞이한 것이다.
'눈빛이 저리 밝으시다니…….'
'아아… 내공을 지닌 흔적이 전혀 없다니… 실망이 든다. 그러나 들키지 않고 이
안까지 잠입한 것으로 보아 필경 천의무봉한 무공을 지니셨을 것이다.'
'태산의 기도다. 항거하지 못할 기도를 지니고 계시다!
중인은 술이 식는지도 몰랐다. 홍소육(紅燒肉)이며, 온갖 기름진 요리가 식는지도
…….
목비린은 모든 사람과 술을 일 순배씩 나눠 마셨다.
이 술은 바로 죽음과 삶을 함께 한다는 혈맹(血盟)의 술이다.
술을 마신 자는 이제 목비린의 수족(手足)이라 할 수 있다.
나후지존 철무극.
그는 목비린의 무공수위를 알아보고 싶었으나, 목비린이 무공에 대해서는 한 마디
도 않기에 침묵만 지켰다.
'여전하시군. 저 고집스럽고 자신만만한 표정은…….'
나후지존은 목비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한순간 입술을 떼
었다.
"나머지 오십사위(五十四衛)는 십 주야(晝夜) 안에 모두 당도할 것입니다. 그 때
진짜 큰 연회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십 주야?"
"예! 비합전서구(飛盒傳書鳩)로 소식을 알린다면… 오악구주(五嶽九州)에 흩어진
나머지 위사들이 모일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예?"
"훗훗, 술이나 한 잔 더……!"
목비린은 제 손으로 주담자를 기울여 술을 한 잔 따라 마신다.
술잔 바닥이 마를 때까지…….
몽롱하게 퍼지는 주향(酒香).
그리고 모든 사람의 눈빛은 목비린에게 집중되었다.
목비린은 잇따라 세 잔의 술을 비운 다음,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내가 강호를 정복(征服)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될
것이 아니라, 강호의 정세를 회복하는 데 힘쓰게 될 것이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목비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검을 갈던 사람들 앞에서…….
"그…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설마… 속하들과 떨어져 단독적으로……?"
모두 깜짝 놀라자 목비린은 태연자약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나의 길을, 그리고 이곳 강호무정궁(江湖無情宮)은 또 나름대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오!"
"아아……!"
"왕야! 어이해 그런 말씀을……!"
"말도 아니 되십니다……!"
중인이 혀를 내두를 때, 목비린의 어조가 조금 커졌다.
"만에 하나, 여러분들 가운데에서……."
마치 비수(匕首)가 중인의 고막을 꿰뚫듯이, 그의 목소리는 찰나적으로 다른 사람
들의 목소리를 거둬 버렸다.
"나의 일지(一指)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말을 번복할 수도 있소!"
"일지(一指)라니……?"
나후지존 철무극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십만대산에서 어떤 기연이 있었기에… 이리도 광오한 말씀을 함부로 하신단 말인
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공이 일 갑자 이상의 고수인데…….'
나후지존이 어이없어 할 때였다.
목비린의 눈길이 오른쪽으로 힐끗 돌려졌다.
그는 아까부터 한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쾌영(快影).
그는 나후제이위(羅侯第二衛)였다.
그는 눈빛이 가장 강하고 기도(氣度)가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목비린에게서 삼 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검을 등에 메지 않고 우측 허리에 매달고 있었다.
나이 이미 구십.
한 자루 마검(魔劍) 쾌영(快影)과 함께 평생을 험난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
쾌영위(快影衛)는 목비린의 눈빛을 받고 멈칫했다.
"훗훗, 기도(氣度)가 남다른 노인이군. 훗훗, 노인이 대표로 나의 말을 시험해 보지
않겠소?"
목비린은 입매의 선을 야릇하게 흩트렸다.
"왕야…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쾌영위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훗훗, 노인의 검이 너무도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군?"
"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훗훗, 내가 보기에… 해남도(海南島)에서 유래된 절풍무영일탄검(絶風無影一彈劍)
은 절학(絶學)이 아닌데… 노인에게는 절학으로 여겨지는 모양이군?"
절풍무영일탄검(絶風無影一彈劍)!
그것은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마검초이다.
그리고 쾌영위가 나후지존에 이어 나후백팔위의 제이인자로 앉게 한 절학이기도
했다.
'이럴 수가? 나후지존에게도 나의 검학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왕야가
나의 검초를 정확히 알고 있단 말인가?'
쾌영위는 혀를 내두르며 목비린을 바라봤다.
목비린은 지금 술을 쭈욱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검을 쥔 자세만 보고도 상대의 특기를 알 정도인가?
그는 꽤 많은 술을 마셨으나 취기를 흘리지 않았다.
그는 상아배(象牙杯)를 탁자 위에 놓은 다음 천천히 팔짱을 꼈다.
"도전하지 않는다면… 졌다고 하겠네!"
"으음, 속하로 하여금… 왕야의 선혈을 보게 재촉하지 마십시오. 어이해 속하의 검
법 이름을 아셨는지 모르나, 그것은 피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검(劍)에는
눈이 없습니다!"
쾌영위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오 년 전, 처참한 상태가 되어 친왕부를 버리고 유배되어야 했던 목비린.
그가 지금 절세고수 앞에서 격장세를 쓰고 있는 것이다.
"훗훗, 나는… 한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네. 그것은… 나보다도 나후지존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네. 내가 버릇없는… 고집쟁이라는 것은……!"
목비린은 중얼거리듯 말했고, 쾌영위는 나후지존을 힐끗 봤다.
나후지존도 그를 보고 있었다.
나후지존은 쾌영위가 도움을 바라자, 슬쩍 입술을 떼었다.
'약간 상처만 내게. 왕야께서… 너무 자신있어 하시니… 가벼운 패배를 안겨 주어
강호의 넓고 광활함을 뼈저리게 느끼시게 하게나!'
그는 의어전성으로 말했고, 쾌영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목비린 쪽으로 시선을 돌
렸다.
목비린은 다시 술을 들고 있었다.
오랜 폐관의 여독을 두주(斗酒)로 풀겠다는 듯…….
그는 주담자를 벌써 열 개나 비웠다.
정적(靜寂)!
오십사위는 모두 목비린을 보고 있다.
비검위(飛劍衛) 사마천군(司馬天軍),
폭화위(爆火衛) 능천행(凌天行),
등천위(騰天衛) 갈용추(葛龍鎚),
언월위(焉月衛) 송원(宋遠),
만보위(萬寶衛) 천무화(天無華),
금갑위(金甲衛) 웅철심(熊鐵心)…….
각기 하나씩의 절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꽤나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목비린을 바라봤다.
'여전히 철이 없으시다!'
'아직도… 강호의 비릿함을 모르고 계시다.'
'쾌영위는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한 사람인데, 하필이면 그를 골라 비무(比武)를
청하시다니…….'
모든 사람이 우려할 때였다.
"그럼… 해 보지요!"
쾌영위는 목례를 올린 다음 허공을 바라봤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눈을 천천히 내리감는다.
순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쾌영위의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잔폭한 기운에 쓸리며
몸을 으시시 떨었다.
빙굴(氷窟)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운 같은 냉기가 흐르며…채앵- 챙-!
오오, 이럴 수가!
오십다섯 개의 술잔 안에 담겨 있는 술이 냉기로 인해 꽁꽁 어는 것이 아닌가?
손, 노련한 검사의 손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다.
그는 허점(虛點)을 노리고 있는 상태였다.
정적(靜寂)이 시작된다.
목비린은 팔짱을 낀 채, 중인의 얼굴을 하나 하나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죽음조차 불사할 사람들이다.
이들의 힘을 빈다면 한 달 안에 일성(一省)을 장악하는 강호의 세력을 얻을 수 있
다.
그러나 그는 여기 오기 이전 그러한 계획을 포기했다.
'절대절정(絶代絶頂)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다. 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까
지 그 혹독한 시련을 줄 수는 없다. 이들에게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뒤따를 것이
다. 나는 천하 모든 무사의 적이 되는 가운데 나의 검을 단련할 것이고, 이 사람들
은 무너진 정파를 위해 무공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목비린은 숨을 자연스레 쉬고 있다.
어디를 봐도 허점 투성이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출수(出手)를 해야 하는 쾌영위는 어느 한 곳도 노릴 수 없다
는 절대적 한계에 빠지고 말았다.
'벽(壁)도 아니고… 산(山)도 아니다…….'
쾌영위는 노릴 대상을 찾지 못했다.
'무(無)다. 아아… 가장 강한 것을 뒤덮는… 무의 힘이다.'
쾌영위의 머리카락이 땀에 축축이 젖어들었다.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다.
태산(泰山)에 깔린 듯이…….
땀이 어찌나 많이 흐르는지, 방석마저 물기에 젖을 정도였다.
그의 표정은 점점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일순, 답답한 탄식이 토해졌다.
"졌소이다, 왕야. 철저히 패했소이다!"
지다니?
싸움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지다니……?
쾌영위는 고개를 떨어뜨렸고,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지다니… 쾌영위사! 어인 일이오?"
"왜 발검(發劍)도 하지 않고 졌다고 하는 것이오?"
중인은 기(氣)와 기(氣)의 싸움을 느끼지 못했기에 어처구니없어 했다.
사람들이 어이없어 할 때 목비린은 빙그레 웃다가 나후지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철노, 내가 갖고 온 십육경(十六經)을 주시오!"
"경전이오?"
나후지존의 얼굴은 밀랍처럼 희었다.
쾌영위의 검이 그를 배반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자신이 쓰러질 경우, 자신을 대신해 목비린을 보필해 줄 쾌영위가 단 일 검도 쓰
지 않고 패배를 자인할 줄이야…….
쾌영위는 가장 포악하고, 가장 괴팍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나, 쾌영위라면 쉽사리 남에게 승복을 하지 않는다.
한데, 그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어 고개를 떨구다니… 다시는 검을 쥘 의욕조차
잃어 버린 듯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
나후지존은 고개를 휘휘 젓다가 자리를 떴다.
얼마 후, 목비린이 무문왕부 십만서고 안에서 꺼내 온 열여섯 권의 고서(古書)가
목비린 앞에 한 층으로 쌓였다.
맨 위, 표지조차 없는 고서가 한 권 있는데 그 안의 글은 정말 잘 쓴 글이었다.
목비린은 그것을 쳐들며 말했다.
"이것은 달마친필(達磨親筆) 나한보경(羅漢寶經)이오. 이것은 소림사(少林寺)에 돌
려주시오! "
오오, 이럴 수가… 달마친필경전이라니……?
"달… 달마조사의 경전?"
"아… 아니? 그것이 현존한단 말인가?"
오십사위의 입이 딱딱 벌어졌다.
그리고 그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삼풍비전(三豊秘傳) 연형진경(練形眞經) 현문강기편(玄門剛氣編)아미수미진경(峨眉
須彌眞經),
개방(蓋幇) 만상대유경(萬象大柔經),
전진비전(全眞秘傳) 허허무상보(虛虛無相譜)…….
열여섯 권의 경전은 하나같이 구파일방의 실전절학이었다.
사천사제가 구파일방에서 빼앗아 온 경전.
그것이 목비린을 통해 강호에 되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구파일방에 되돌려주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구파일방을
도와야 하오. "
목비린은 팔짱을 꼈다.
그의 눈길은 이미 천장 쪽으로 돌려졌다.
알 만한 사람은 그런 자세를 보고도 다 알 것이다.
목비린의 말을 누구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강호는 곧 회오리를 만날 것이기에… 훗훗, 한 명의 미친 자로 인해
정사 균형이 송두리째 깨질 것이기에… 훗훗- 그리고… 그 와중에 이제껏 힘을
잃었던 백도는 세력을 정비할 것이고……."
"……!"
"……!"
"그로 인해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세력은 격하게 준동할 것이오. 물을 흐리게 해서
고기를 잡듯이… 훗훗, 돌을 하나 던져… 만마(萬魔)를 일시에 강호계에 끌어내려
하는 것이오!"
실로 엄청난 발상이 아닌가?
목비린이 아니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대계!
그는 겉으로는 천하를 적으로 삼고, 뒤로는 백도를 도와 천하정세가 안정을 찾게
하려는 것이다.
새벽, 나후지존 철무극은 차(茶)를 들고 있는 목비린을 보며, 지난 오 년간 알아낸
모든 것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안개는 창을 통해 정실 안으로 흘러든다.
강호무정궁(江湖無情宮)!
이곳은 이제 목비린의 장원이다.
구룡친왕부에 비하면 백분지일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는 구룡친왕부에는 없는 자유로움이 있다.
정원의 정경이며 전각의 구조, 모든 것은 목비린의 마음에 흐뭇함을 안겨 주었다.
나후지존은 침방울을 튀겨 가며 말을 했다.
"오 년 전만 해도 정사 중간의 십천무맹과, 흑도의 오대결사(五大結社)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삼 년 전부터… 삼대세력이 나타났습니다!"
"……!"
"첫째는 녹림맹(綠林盟)의 세력입니다. 그들은 철화(鐵花) 여비홍(呂飛紅)이라는 여
종사(女宗師) 휘하에 뭉쳤는데 가장 거대한 세력입니다!"
"흠……!"
"본시 녹림은 일통되기 힘든 세력이나… 일통이 되었습니다. 철화 휘하에 마뇌헌
(魔腦軒)과 마검헌(魔劍軒)을 두고 있는데, 마뇌헌에서는 녹림이 분열되지 않는
계략을 꾸미고… 마검헌에서는 녹림의 반대자들을 처단합니다!"
"대단한 계집이군!"
"예."
"계속하시오!"
"녹림은 본시 칠십이장로회(七十二長老會)에 의해 상호 균형을 이루며 어지럽게
발전되다가… 녹림맹으로 뭉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파와는 싸움을 하지 않
기에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녹림맹, 수적으로는 가장 거대한 조직이다.
'명단(名單)에 적을 만하군! 여비홍(呂飛紅)이라…….'
목비린은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을 귀담아들었다.
"두 번째 세력은… 정검장로회(正劍長老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대의(大義)를 따
르는 의사(義士)들인데… 가장 약합니다. 게다가… 쌍대세력으로부터 연일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쌍대세력?"
"하나는 용천후(龍天吼)라는 자가 이끄는 십천무맹, 그리고 또 하나는 가장 신비한
세력으로 등장한 남북검회(南北劍會)입니다!"
나후지존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눈길을 돌렸다.
왜 이리 눈빛이 떨리는 것일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사람처럼…….
"남북검회(南北劍會)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목비린은 손을 입가로 갖고 간다.
그의 손은 무사의 손치고는 너무도 흰 손이다.
"남북검회는… 한 명의 군사(軍師)로 인해 거대하게 자라났습니다. 패왕궁이 주도
하는 십천무맹은 그들을 눈의 가시로 알고 처단하려 하나, 그들 세력은 너무도 신
비하고 강하기에 절대 꺾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누가 군사요?"
"허… 허무서생(虛無書生)입니다!"
"허무서생?"
"자칭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 칭하는 자입니다. 그는… 천년삼혼(千年三魂)이
라는 세 명의 여비(女妃)와 더불어 남북검회에 입회했습니다."
허무서생(虛無書生).
그는 현재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몇 사람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날이 유명해지는 이름이다.
머릿속에 번천지복할 병법을 지녔고, 두 손에는 백 장 밖 거석을 모래로 만드는
신공을 지닌 자.
언제나 세 명의 미녀를 종으로 거느리며 입가에 늘 허무한 미소를 드리우고 있는
자.
"허무서생은 남북검회를 일으킨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남북검회주를
찾아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후지존의 눈빛이 조심스러워졌다.
"내기……?"
목비린이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십 년 안에 천하를 주겠다! 그러니… 너를 다오!
' 그런 내기 조건이었다고 합니다! "
나후지존은 고개를 떨구었다.
"모를 일이군. 천하와… 한 사람이라니? 남북검회의 주인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으음……."
나후지존은 좀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대체 누가 회주로 있기에…….
"아실 필요 없으십니다!"
나후지존이 오랜만에 말했다.
"훗훗,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오? 허무서생이란 자를 군사로 삼고 천하정복을
시작한 사람이……."
목비린의 입가에는 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웃음은 나후지존이 고개를 끄떡이는 찰나, 싸늘히 거둬졌다.
나후지존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신비한 세력이라는 남북검회!
정사의 모든 기인들을 하나하나 끌어들이며, 십천무맹에 비견될 만한 세력으로 자
라나고 있는 거대한 조직.
그곳의 임자가 목비린과 면식이 있는 사람이라니…….
"아시면… 괴로우실 것입니다!"
나후지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핫핫! 누가 남북검회의 회주로 있기에 그러하오?"
목비린이 낭랑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나후지존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말
을 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을… 왕야께 이러한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남북검회의 회주!
그는 누구란 말인가?
"설운고 낭자입니다. 남북검회의 회주는… 남북검회는… 남북십대거상(南北十大巨
商)이 주도하는 세력입니다. 그러하기에… 뿌리가 깊고, 십천무맹이라 하더라도…
꺾기 힘든 것입니다."
"설, 설운고!"
목비린의 손이 멈칫했다.
명경지수처럼 맑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흐릿해졌다.
설운고!
그 때 그녀는 십칠 세였다.
자신이 거부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그녀는 마차를 몰고 구룡친왕부로 들
어왔었다.
요요(妖妖)한 걸음걸이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리고 그녀는 파혼확인서를 든 채 속으로 울며 구룡친왕부를 떠나갔던 것이다.
"그… 그녀가 무림에 투신했다고?"
목비린이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전과는 달리 매우 표독하고 잔혹해졌습니다. 더욱이… 그녀와 동맹한
허무서생이 부추기는 통에……."
"으음……."
"설장계 노인이 와병(臥病)에 든 후, 설운고는… 설장계의 상속자 자격으로 천하상
권을 움직였습니다."
"……!"
"십천무맹에 꺾였던 많은 고수들이 속속 남북검회에 입회했고, 강호의 기라성 같
은 고수들이 설운고에게 매혹되어 남북검회에 들었습니다."
"……!"
목비린의 눈빛은 흐릿해졌다.
"심지어… 오공자(五公子)마저……."
나후지존은 말을 차마 잊지 못했다.
오공자!
이들은 바로 오대세가(五大世家)의 신가주(新家主)들이다.
철기린(鐵麒麟) 하후표(夏侯豹),
풍운행(風雲行) 위지당(尉遲當),
만서뇌(萬書腦) 사공기(司空奇),
천화취(千花醉) 사마야(司馬爺),
백검장(百劍將) 공야군(公冶軍).
이들 다섯은 목비린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이다.
이들은 목비린을 주군으로 삼고 천하를 제패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목비린에게 크게 실망해 친왕부을 떠났던 바 있다.
한데, 설운고가 그들을 모조리 휘하에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남북십대상이 십대장로(十大長老)가 되었고… 십천무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속
속 모여 백팔화존자(百八花尊者)로 뭉쳤으며, 수만에 달하는 영재들이 꾸역꾸역 모
여들고 있습니다. "
"……!"
목비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는 지금 기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
무문왕부 안에서 있었던 일.
-무엇인가를 봤다면, 그것을 죽이거나 취하라!
그렇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것을 꿈꾸며 떠돌게 될 것이다.
목비린의 뇌리에는 그러한 글귀가 떠돌고 있었다.
설운고, 철의 나비 설운고가 오 년 전부터 큰일을 꾸민 것이다.
그녀는 강호무정궁에 비해 백 배 거대한 세력을 갖고 있다.
그녀는 허무서생의 용병술에 힘입어 세력을 일로 확대시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십천무맹에 저항하며, 또 한편으로는 정검장로회(正劍長老會)를 흡수하
려 노력한다.
천하 도처에 퍼진 남북검회의 분타(分舵)는 설장계 노인 휘하 은장(銀莊) 표국을
기초로 하고 있기에 지극히 뿌리가 깊다.
더욱이 그녀의 곁에는 허무서생이란 자가 있다.
허무서생.
그의 이름은 혁혁하게 드높아도 실상 그를 만나 본 사람은 없다.
"허무서생과 설운고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인즉… 허무서생의 계략대로 설
운고가 천하맹주(天下盟主)가 될 경우……."
나후지존은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불쌍한 도인.
그는 목비린이 얼마나 거대한 야망를 품고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약속이란… 불경스럽게도… 설운고가 천하맹주가 되는 날, 허무서생이 설운고
의 남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흠……!"
목비린은 오랜만에 반응을 보였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마시다 남은 차를 쭈욱 들이켰다.
"재미있는 세상이로군. 후후, 결국… 설운고의 곁에는… 설운고의 재산을 노리는
박쥐 한 마리가 달라붙은 셈이로군."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말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허무서생은… 설운고의 금력(金力)을 철저하게 이용하고자 설운
고에게 달라붙은 것입니다. "
"설장계 노인의 반응은?"
"그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어 꼼짝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주화입마?"
"이 년 전 갑자기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삼위(三衛)를 대동하고 숨었는데… 아무
도 그가 있는 곳을 모릅니다."
"그래서 항간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기도 합니다. 속하 생각컨데…
설장계는 남북검회의 총타(總舵)에 있는 듯합니다."
"그 장소는?"
"완전한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후지존이 고개를 조아리자, 목비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훗훗, 그 정도만 알아내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는 나후지존의 말을 듣는 가운데, 거대한 날개를 펼칠 엄청난 계획을 완성시킨
듯했다.
목비린은 팔짱을 끼며 조금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녹림맹의 대세를 좌우하는 것은… 칠십이장로회(七十二長老會)라고 알고 있는데
……."
"그렇습니다."
"흠, 그 회의가 벌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아시오?"
"글쎄요. 녹림의 존망(存亡)이 걸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칠십이장로회가 거
행될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그런 일이겠소?"
"글쎄요? 마검헌(魔劍軒)과 마뇌헌(魔腦軒)이 부서진다면… 아마도 여비홍이 칠십
이장로회를 개최하겠지요."
나후지존은 말하다가 얼굴을 기이하게 일그렸다.
'설마… 녹림을 건드릴 생각이신가?'
그의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푸른 숲의 세력!
그 세력은 황금알을 연달아 낳은 세력이다.
수륙의 통행이며, 강호제방파의 알력 가운데 부를 신장시키는 세력이 바로 푸른
숲의 연맹이다.
목비린은 그들 거대한 세력을 건드릴 작정을 한 것인가?
"설마… 그들을……?"
나후지존이 조심스레 물었다.
"후후, 이 해가 가기 전… 동정군산(洞庭君山)에서 노인과 술을 즐길 수 있을 것이
오!"
"예에……?"
"핫핫! 너무 놀라지 마오. 핫핫……!"
"왕야, 그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녹림은 가장 큰 세력입니다. 비록… 초절정고수는
남북검회나 십천무맹, 오대결사에 비해 적다 하나… 가장 거두기 힘든 세력입니
다!"
나후지존이 정색을 하였다.
"후후, 그러기에 건드리려 하는 것이오. 그리고… 내게는 꼭 그곳의 보좌(寶座)를
차지해야 할 사연이 있소!"
"네에……?"
"그리 따지고 묻지 마시오. 그러면 점점 더 놀라게 될 테니까!"
"으음……!"
나후지존은 쓴웃음을 삼키며 목비린을 봤다.
목비린의 눈은 아주 맑고 아름다웠다.
과거 검천애에서 광야(曠野)를 보며 야망을 기르던 눈.
그 눈은 지금도 여전히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저 눈만 보면 할 말을 잊을 수밖에…….'
나후지존은 한숨을 억지로 참으며 녹림에 대한 것을 이리저리 생각한다.
'마검헌과 마뇌헌이 방어를 하지 않는 상태라면… 약간의 승산(勝算)은 있다. 어쩌
면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멋진 계략일 수도 있다.'
그가 그렇게 자위하고 있을 때였다.
목비린의 입이 벌어지며 더욱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마검헌… 마뇌헌은… 시작도 될 수 없는 것이오. 사실… 나의 첫걸음은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갈 것이오!"
"녹… 녹림 말고… 다른 세력을 표적(標的)으로 삼으셨단 말씀이십니까? "
"훗훗, 오대결사(五大結社)라면 나의 이름을 천하에 알리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
오! "
목비린은 담담히 말하며 눈길을 창 쪽으로 돌렸다.
"흐으윽! 오… 오대결사……!"
나후지존은 기절초풍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대결사!
그들은 천 년의 뿌리를 갖고 있다.
무상각(無常閣),
유령초혼정(幽靈招魂井),
귀혈사(鬼血社),
인자막(忍者幕),
전풍림(錢楓林).
다섯 세력 모두 살수조직(殺手組織)이다.
이들은 오악(五嶽) 근처에 흩어져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나, 오래 전부터 하나의 세
력으로 뭉쳐져 있다.
그리고 이들은 복수하는 데 철두철미하다.
백 년이 지나도 이들은 복수한다.
소림사라 하더라도 오대결사를 함부로 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를 열로,
열을 백으로 갚는 무자비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인물들이 모인 곳.
한데, 목비린이 그곳을 노리고 있단 말인가?
"아… 아니 되십니다. 속하, 왕야를 점혈(點穴)해서라도… 그 일은 결사 반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후지존이 자지러지며 다가서는데, 목비린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후후, 아는 대로 자세한 지도를 그려 주시오. 그리고… 천하이십대고수의 명단과
거주지를 내게 적어 주시오. 기왕이면… 내가 아침을 들기 전, 모든 것을 마련하시
도록 하오. 그리고… 아침은 내가 왕부에서 즐겨 먹던 음식으로 해 주시오. 오리구
이와 버섯탕… 훗훗!"
목비린은 벌써 뜨락에 있다.
그는 찰나적으로 십 장을 움직였다.
전설로만 알려진 어기비행(馭氣飛行)!
"봄이 되면 여기 금잔화(金盞花)를 흐드러지게 피워 봅시다. 푸핫핫……!"
목비린은 호수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태연자약한 팔자걸음으로…….
저벅… 저벅…….
그는 느릿느릿 정원을 돌아다닌다.
나후지존은 벌레 씹은 표정 가운데, 기이한 흥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미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상황(上皇)의 꿈이… 강호제일인의 꿈이……!"
나후지존의 눈가가 벌겋게 충혈되며, 체통 모르는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지기 시
작했다.
정실(淨室).
목비린은 서적을 펴 보고 있고, 나후지존은 지금 그를 향해 무릎과 머리를 조아리
며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속하가 드리는 것은 꼬옥 지니고 다니셔야 합니다요, 왕야(王爺)!"
"……."
목비린은 책을 쉬지 않고 뒤적거렸다.
나후지존은 며칠 목비린과 생활한 후인지라, 목비린의 뻔뻔스럽고 무정한 모습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목비린은 며칠 머물며 나후위사들에게 여러 가지 절기를 전수했다.
그것은 하나같이 강호의 실전 절학들이었다.
나후위사들은 목비린에게 밀명을 받고, 천하백도로 하나 둘씩 흩어져 간 상태였다.
나후지존 앞, 열 가지 물건이 금반에 담겨 놓여 있다.
그 중 제일 큰 것은 네 자 길이에 달하는 황금검(黃金劍) 한 자루였다.
장홍(長虹)!
검은 그러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황궁비고에서 십여 년 전 유출이 된 십대신병(十大神兵) 중 하나였다.
"이것을 모두 지니고 다니셔야만 합니다. 독보천하(獨步天下)하는 데에는 위험이
많으니… 수많은 병장기로 몸을 호신하셔야만 합니다!"
나후지존이 갖고 온 물건이 바로 십대신병이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