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에서 아니 우리 한국현대시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위상은 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크다. 옥천을 흔히 문향이라고 하는 것도 시인의 마을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지용 시인 덕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우리는 위대한 시인을 가졌노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한 명의 시인을 더 추가하고자 한다. 정지용 시인의 위상만큼은 아니고, 옥천 토박이 출신도 아니지만, 누구보다 어머니가 계신 옥천을 하염없이 그리고, 고향에 대한 애정과 농촌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 시인의 시는 풀뿌리 민초들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원 구장터 풍경, 옥천읍 삼청리 대림선원에서 쓴 시와 고향 묘목을 가져다 심은 일, 금강의 풍경 등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농촌과 자연에 대한 서정적인 향수보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점에 녹아들고 있다.
그의 스승인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그의 시를 두고 신경림의 '농무'나 백석의 '사슴'에 비견되고, 어쩌면 더 진일보한 시라고 평한다. 아픈 상처 때문에 어머니와 외갓집이 있는 이원면에 대한 향수가 누구보다 깊었던 윤중호 시인을 옥천 주민들에게 소개한다.
◆시인은 반쯤 걸쳐져 있었다 옥천과 영동의 사이에서, 도시와 시골의 사이에서, 한강과 금강 사이에서 방황하고 배회하는 그의 일상은 주옥같은 시들을 여기저기 뿌렸다. 윤중호,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고향이 옥천과 영동이라고 혼재되어 있다. 그는 엄밀히 말하자면 1956년 2월5일 영동군 심천면 심천리에서 태어나 2004년 9월3일 일산 한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작고했다. 유족으로는 일산에 사는 부인 홍경화씨와 두레와 결 두 아들이 있다.
심천초등학교 4학년때 대전으로 이사를 갔고, 68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원면으로 다시 이사를 했고, 얼마 있다가 다시 대전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 신흥초등학교와 충남중, 충남고, 숭전대(현 한남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잡지사 기자생활도 하다가 출판사도 했다가, 기획사도 만들었다가 문학동인지 생활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마흔 여덟 많지 않은 나이에 금강과 고향, 어머니 등에 대한 시를 많이 남기고 간 시인은 현재 매년 영동에서 기일에 맞춰 추모문학제를 하고 있다. 이원면 구장터에서 오리쯤 떨어진 구미집에서 행상을 하러 신발이 다 헤지게 걸어다녔다는 윤중호 시인의 어머니 박유순(74)씨를 이원면 신흥리 금강연립에서 만나고, 시인이 불두화란 시에서 쓴 '20년 전 말없이 출가한' 여동생 대림선원(옥천읍 삼청리) 연탁스님을 만나고 나서 어쩌면 그가 간절하게 그리던 고향이 어머니가 있는 옥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일찌감치 아버지가 대전에 나가 다른집 살림을 하면서 어머니는 친정인 이원면으로 다시 돌아왔고, 대전으로 같이 따라간 윤종호 시인은 그런 어머니가 너무도 보고싶어 한달음에 기차를 타고, 이원면을 여러번 찾기도 했다.
"20년 전 무서운 아버지를 피해/ 저녁차를 타고 외가에 사시던 엄니한테/ 도망쳤던 날 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며 엄니는 우셨다/별이 아득하게 보이던 밤을 뜬 눈으로 지새고, 나는/ 다음날 새벽기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공부해서 성공을 해야한다고/ 눈물 바람으로 쥐어주시던 천원은/ 오랫동안 내 호주머니에 구겨진 채 있었다" '새벽기차를 타며' 중
"중호가 그렇게 여러번 왔어요. 꼭 품에 끌어안고 동네 이원초등학교 보내 곁에 있고 싶은 맘 왜 없었겠어요. 그 소같은 눈으로 눈물 그렁그렁하며 우는데, 맴이 찢어졌지요. 그래도 그 때는 대전에서 공부해야 대학도 가고 그러는 줄 알아서 회초리 때리며 쫓아내듯 다시 보냈지요."
어머니 박유순씨는 그 때의 안타까움을 생생하게 말을 하며 눈가에 눈물이 촉촉히 맺힌다. 2004년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 칠순 잔치를 해준다며 잔치 기획도 손수 하며, 어머니에 관한 시를 그토록 많이 쏟아냈던 그의 어머니는 유고시집 '고향길' 언저리마다 쓰여 있다.
어머니 박유순씨는 친정인 이원면 현리에서 나와 이원면 신흥리 구미집(현 이원신협 건물)에서 접방살이를 하며 태평양 화장품 방문판매를 40년 동안 다니면서 이원면 곳곳을 다녔다.
"외갓집이 있는 구장터에서 오리쯤 떨어진 구미집 행랑채에서 어린아우와 접방살이를 하시던 엄니가 아플 틈도 없이 한 달에 한켤레씩 신발이 다 헤지게 걸어다녔던 그 막막한 행상길---강안개 뒹구는 이른 봄 새벽부터 그림자도 길도 얼어버린 겨울 그믐밤까지 끝없이 내빼는 신작로를, 무슨 신명으로 질수심이 걸어서, 이제는 겨울바람에, 홀로 센 머리를 날리는 우리 엄니의 모진 세월/ 덧없어 참 덧없어서 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친 행상길" 유고시집 고향길 첫 시 '시'
윤중호 시인은 중고등학교, 대학교 이후까지 그는 틈 날때 마다 이원에 있는 어머니를 찾는다. 명절에도 그는 홀로 남아있는 어머니한테 가족들을 이끌고 오곤 했다. 작고하기 전 그는 옥천읍 삼청리에 여동생인 연탁스님이 있는 대림선원에서 20일 남짓 요양을 한다.
"췌장암인 것을 알고, 공기 맑은 곳에서 조용히 쉬고 싶어했어요. 지금은 없어진 감나무 아래 쪽방에서 생활했는데, 이 곳에 와서도 사람들이 참 많이 찾아왔지요. 어머니한테는 참 잘했어요. 아들 두레와 결이한테도 할머니한테 잘 해야한다고 어찌나 가르쳤는지, 지금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몰라요. 참 착한 사람이었지요."
연탁스님은 윤중호 시인의 시가 실린 책 두어권을 꺼내 준다. 이원초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박창오 교장은 '외갓집에 아흔 가차운 외할머니와 국민핵교 교정선생님인 큰 오삼춘'으로 시집에서 쓰여있다.
"중호가 고집이 셌지요. 정의감이 불탔고, 그래서 안면도 가서 누동학원이라는 야학을 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키워냈지요."
윤중호 시인의 절친한 친구로 대전환경운동연합 전 의장으로 조폐공사 감사를 지낸 김광식씨는 "중호가 쉬는 날이면 이원면 금강가에 가서 천렵을 하자고 졸라 같이 가서 고기도 잡고 신나게 놀기도 했지요. 어쩌면 태어난 고향 영동보다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 옥천을 더 그렸을 지 몰라요. 어머니라면 끔찍했거든요"라고 말한다.
▲ 윤중호 시인 어머니 박유순씨가 윤중호 시인의 사진을 끌어안고 회상에 잠기고 있다.
◆신경림-백석 시인의 뒤를 이어 그가 '정규 앞골목 사부님, 근본주의자'라고 칭한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그의 숭전대(현 한남대) 영문학과 시절 은사이다. 김종철 발행인은 그의 유고시집 고향길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윤중호가 이토록 아름답고 깊고 애절한 절창을 남겨놓고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게는 이번 유고시집은 한국 현대시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드물게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백석의 '사슴'이나 신경림의 '농무'의 맥을 잇는 세계이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그 시집들보다도 한 걸음 나아간 진경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한겨레 10월17일자 칼럼 '염치에 대하여'에서 "4년 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시인 윤중호는 지독히 고향을 사랑한 사람이었다.---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고향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만, 이 시인은 우리 모두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임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 따위란 무의미한 것이며 정말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이룬바 없이' 흔적없이 살다가 돌아간 수많은 민초들의 삶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윤중호 시인은 자신을 키워준 시골 농촌에 대한 미안함과 겸손함을 시로 표현하곤 했다.
"나는 촌놈이다/ 촌놈은 촌에서 살아야 되는데 나는 서울에서 산다/ 서울에서 살면서도 삐까뻔쩍하게 광도 안난다/ (중략) /서울에선 촌놈이고/ 촌에 가면 도시 놈이 되는 그런 삶은 참 재수없는 삶이다"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 중
"일산시민모임에서 땅을 빌려 만들었다는 주말텃밭/쇠비름만 자라는 다섯평짜리 박토지만/ 이름은 어엿한 주말농장/ 글쎄 그런 걸 해도 괜찮은 걸까?/ 무공해 채소가 어떻니, 흙을 밟는 마음이 어떻니/ 이런 막돼먹은 생각을 해도 괜찮을까?" 시 '일산에서'
그는 시집 뿐만아니라 동화책 '감꽃마을 아이들'(그가 작고한 후, 그의 글에다 김재홍씨가 그림을 그려 만든 책이다)과 어린이소설 '지각대장 쌍코피 터진날'과 청소년 소설 '눈먼새 날개펴다'란 책과 문단과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촌평한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도 펴냈다. 인터넷 다음카페에는 '윤중호를 사랑하는 사람들'(http://cafe.daum.net/yoonjoongho) 174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윤중호 시인을 추모하고 있다.
해마다 추모문학회를 준비하는 양문규(영동군 양산면) 시인은 "윤중호 시인은 첫 시집에 스스로 고향을 옥천이라고 기재할 만큼 옥천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초등학교 이후에는 거의 어머니가 있는 옥천에만 갈 정도로 옥천을 사랑했다"며 "내년 추모문학회는 옥천과 영동의 문인과 주민들이 같이 모여 조촐하고 소박하게라도 의미있는 행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 아줌마 아드님이 시인이 었구나,,, 아모레 화장품아줌마 하면 다 알지,,, 우리 엄마도 이 아줌마 화장품 쓰셧거든,,, 그때마다 우리 집에와서 아들 자랑을 했었는데,,,, 그랫구나,,, 가슴이 넘 찡 하다,,, 이 시인 동생이 바로 우리 선배인듯 하군,,, 이 아줌마도 넘 예쁘셨지,,, 광주야,,, 정말 고맙다,,, 오늘 아침 행복하고 콩당콩당 해지네,,,,,
첫댓글 윤중호 시인네 가족 너무 잘아는데 저 사진속의 어머님도 내 어린시절 추억속에 아련하네.. 울 엄마 화장품살때 내가 이것 저것 만저봐도 나무라지 않고 이뻐해주시던 맘씨좋은 아주머니.. 그리고 스님이된 그 예뻤던 언니 .. 모두 궁금하네 지기님 잘 보구 가요
맞아. 이원 신흥리 시장에 살고 계셨지. 1년선배 이름이 생각 않나. 가가호호찾아 다니시며 행상을 하셨지. 나또한 화장품을 처음 접하게 해주신 장본인이셔. 하나의 추억이~~~
1년선배 이름이 아마 윤광호 어렴픗이 기억나네
아~~ 아줌마 아드님이 시인이 었구나,,, 아모레 화장품아줌마 하면 다 알지,,, 우리 엄마도 이 아줌마 화장품 쓰셧거든,,, 그때마다 우리 집에와서 아들 자랑을 했었는데,,,, 그랫구나,,, 가슴이 넘 찡 하다,,, 이 시인 동생이 바로 우리 선배인듯 하군,,, 이 아줌마도 넘 예쁘셨지,,, 광주야,,, 정말 고맙다,,, 오늘 아침 행복하고 콩당콩당 해지네,,,,,
처름으로 미모에 관심 갖을 나이에 울 친구들도 접했을거 같아서 소식을 전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