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3주년을 맞은 뉴욕한국일보는 한인사회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뉴욕의 한인이민사회는 70-80년대의 정착 및 성장기, 90년대 이후 롤러코스트와 같은 변동기를 겪으면서 성장해왔다. 지난 40여년간 뉴욕시의 생활상을 통해 한인사회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 60년대 후반
뉴욕한국일보가 창간된 67년 당시의 100달러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현재의 680달러다. 즉 당시에 주급 100달러를 받았다면 현재 수준으로 연봉 3만 5,000달러 정도를 버는 셈이다. 당시의 평균 주택가격은 1만5,500달러, 평균 소득은 8,540달러였다. 60년대 후반은 미국과 소련과의 경쟁으로 각종 기술이 발달하고 이때 개발된 기술들이 70년대 이후 실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광통신, 디지털 비디오의 핵심 기술인 CD, 인터넷, 컴팩트 디스크 등이 이 시기에 선보였다.
당시 새 차의 평균 가격은 3,270달러였다. 폭스바겐 비틀이 1,760달러, 포드 머스탱이 2,360달러에 팔렸다. 3베드룸에 풀 베이스먼트를 갖춘 동북부의 주택이 1만5,000달러에 거래됐다. 마트에서 오렌지 24개는 89센트, 베이컨 1파운드에 79센트, 바나나 1파운드에 10센트, 계란 12개의 가격은 55센트였다. 여전히 최대의 오락은 영화 감상이던 이 시기에 평균 극장 티켓은 1달러 50
센트였다.생필품 가격은 인플레를 감안하면 현재와 큰 차이가 없지만 비교적 비싼 품목은 전자제품이었다. 26인치 컬러 TV는 379달러였으니 요즘 가격으로 2,000달러 이상. 50인치 대형 HD 가격과 맞먹었다. 같은 크기의 흑백 텔레비전은 270달러, 당시 유행하던 9인치 포터블 TV는 100달러에 달했다. 지금은 거의 사용안하는 전기재봉틀은 60달러였다.
뉴욕한국일보가 창간한 시기는 뉴욕에 본격적으로 한인상권이 형성된 시기였다. 당시 한인들은 유태계와 인도계가 쇠퇴하던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초기 한인업체들은 대부분 가발과 관련된 업종으로 사무실 내에서 주로 영업하는 형태였다. 가발은 당시 수입업자, 도매상, 소매상의 유통과정을 거치는 동안 상당한 마진을 얻을 수 있었고 한국내 생산업체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자본력이 부족했던 한인들에게 좋은 아이템으로 꼽혔다.
20센트 토큰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60년대 후반 뉴요커들
■70년대
70년대 들어서면 당시 100달러는 현재의 520달러 수준으로 가치가 줄어든다. 당시 연봉 2만달러 소득자는 현재의 10만달러 이상 소득자에 해당한다. 70년도의 평균 소득은 9,350달러에서 10년후인 79년에는 1만7,550달러로 두배 가까이 상승했다. 70년대 가장 큰 경제적 사건은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로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 70년에 갤런당 36센트던 개솔린 가격은 79년에 86센트를 기록했다. 79년 평균 새 주택 가격은 5만8,500달러였는데 10년 사이에 두배 넘게 상승한 가격이다. 70년 후반 평균 새 차 가격은 5,770달러. 도요타 코롤라가 3,700달러, 대중적인 소형 세단이었던 닷선과 콜트는 4,00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70년대는 이른바 강력한 성능과 화려한 외관을 가진 수퍼카들이 줄줄이 시장에 나온 시기기도 했다.
대량 낙농기술이 발전하면서 미디엄 사이즈 계란 12개를 25센트에 구입할 수 있는 등 유가공, 축산 제품의 가격은 하락했다. 수퍼마켓에는 베이비 로션이 1달러59센트, 티슈 13센트, 크레스트 치약 77센트, 폴저스 커피 1파운드 1달러90센트, 칠면조 1파운드 1달러79센트, 하인즈 케첩 79센트 등의 가격이 붙어있었다. 전자제품은 여전히 가격이 높아 알람 시계가 요즘과 큰 차이가 없는 13달러, 고급 라디오 기종이 147달러에도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가발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한인들은 업종을 다변화하게 된다. 주얼리와 잡화, 신발 등을 취급하는 도매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에는 40여 개의 한인 도매상이 들어서 한인 상권이 제대로 골격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79년 경제인협회 전신인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번영회가 결성됐고 퀸즈 플러싱 지역은 한인 밀집 주거지역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 브로드웨이에서 열렸던 8.15 경축행사에 참석한 한인 상인들
■ 80년대
풍요와 발전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스트릿이 개봉된 시기답게 뉴욕은 대형 투자은행과 브로커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시에서 금융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커졌다. 80년대와 현재의 돈의 가치는 약 2.5배 차이가 난다. 80년 후반의 연평균 소득은 2만7,000달러, 새집의 가격은 12만달러로 미국의 평균 주택가격이 6자리를 넘어선다. 80년도에 갤런당 1달러19센트였던 개솔린 가격은 89년에 오히려 1달러 밑으로 떨어진 97센트를 기록했다. 기름값 걱정 없이 맘껏 큰 차를 굴리던 호시절이다. 80년도 평균 7,200달러였던 새 차 가격은 89년에는 1만5,400달러로 껑충 뛴다. 미 자동차 산업의 마지막 황금기였고 90년대 들어 조금씩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이클 조던이 등장한 80년대 후반엔 운동화, 진 등 청소년과 젊은층이 애용하는 물품들이 고급화하고 높은 가격이 매겨지던 시기다. 나이키 에어포스는 55달러에 팔렸고 게스 등 프리미엄 진들이 속속 등장했다. 카폰도 등장해 800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팔렸다. 80년대 말 영화 한편을 보려면 4달러가 필요했다. 80년대는 뉴욕 한인 경제사에도 번영의 시대였다. 브로드웨이에는 한때 한인업체가 200개를 넘어섰고 32가를 중심으로 식당을 비롯해 등 소비업소들이 들어서며 최대 호황을 누렸다. 플러싱 역시 80년대 초반 한인 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서면서 메인 스트릿과 루즈벨트 애비뉴를 중심으로 상권이 급속히 퍼져갔다. 유니언 상가의 경우 전체 130여 업소 중 95% 이상이 한인 관련 비
즈니스였다. 한인 상권의 확장은 맨하탄과 퀸즈 뿐만 아니라 브루클린, 브롱스로 범위를 넓혀갔다.
업종 또한 다양화돼 청과상을 비롯해 델리 그로서리, 피시마켓, 세탁소, 네일, 주류판매점, 뷰티서플라이, 잡화점 등 다양한 비즈니스 형태로 뉴욕 경제의 한 축을 이룬 것. 브루클린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플랫부시, 브라이튼 비치, 벤슨허스트·베이릿지, 풀턴 스트릿 등 4개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 상권이 형성됐고 브롱스는 포담을 비롯해 벨몬트, 베드포드 지역에서 한인 비즈니
스가 뿌리를 내렸다.
■ 90년대~2000년대
90년대는 현재와 비교해 돈 가치의 차이가 크지 않다. 20년전 100달러는 현재의 155달러 정도의 가치를 가졌다. 잘 나가던 미국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이 90년대 초반이고 이후 몇 년간의 시차를 가지고 오늘날까지 호황과 불황을 거듭한다. 99년도 평균 주택가격은 13만 2,000달러로 80년대와 큰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90년대 후반 맨하탄을 제외한 기타 뉴욕시의 렌트 가격은 투 베드룸 기준 800~1,000달러 정도에 형성되었다. 조금씩 렌트 가격이 오르긴 했지만 2000년대처럼 급격한 상승을 없던 시기다. 주택시장 버블시기인 2000년대 중반에는 지역에 따라 렌트비가 두배 이상 오르기도 했다.
99년도 평균 소득은 4만800달러였고 개스비는 갤런당 1달러22센트로 20년 이상 개스비가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했다. 평균 새 차 가격은 처음으로 2만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SUV와 밴이 불티나듯 팔리던 시기다. 리바이스 진은 35달러, 수퍼 닌텐도는 159달러, 초기 모바일 폰은 325달러, 스노우보드는 199달러에 팔렸다.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자 한인 상권도 연쇄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도매상가는 점차 경제력이 위축돼 하나둘씩 한인 업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32가 한인타운은 도매상 관련 업소에서 한인 유학생과 관광객을 상대로 한 품목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등 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랬기 때문에 90년대 후반 IMF 상황에서 한인 업소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발전을 거듭하던 플러싱 한인 상권도 위기를 맞았다. 한인 업체끼리 과당 경쟁을 벌이면서 렌트 폭등을 불러왔고 중국인 유입이 크게 늘면서 점차 메인 스트릿 상권을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2007년 이후 금융권과 주택시장의 불안정으로 인한 장기간의 불황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올해들어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며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박원영 기자>
한때 200개가 넘었던 한인 도매상이 많이 철수한 2,000년대의 브로드웨이
<뉴욕시의 주요 물가 변화>
66년 79년 89년 99년
평균소득 8,540달러 1만7,550달러 2만7,210달러 4만810달러
주택 가격 1만5,500달러 5만8,500달러 12만달러 13만1,700달러
신차 가격 3,279달러 5,770달러 1만5,400달러 2만1,100달러
개솔린(갤론당) 35센트 86센트 97센트 1달러22센트
지하철 요금 20세트 30센트~50센트 60센트~1달러 1달러50센트~2달러
■ “20달러어치 장을 보면 우리 가족이 일주일은 먹고 살았죠.”
60년대 유학생 조태환.김종원 씨 부부
1963년 한국을 떠나 로드아일랜드 대학과 조지아 여대에서 각각 유학생활을 시작한 조태환(71), 김종원(70)씨 부부. 1966년 뉴욕 큐가든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갓 학업을 마친 풋풋한 20대였던 이들이 40여년의 이민생활을 거치며 기반을 이루고 어느새 1남1녀의 자녀, 4명의 손주를 두었다. 조씨는 CPA로 김씨는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했으나 김씨는 위생 컨설턴트로 각종 세미나와 시 행정 모임에 참석하는 등 여전히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드은 40여년간 이민생활을 거치면서 뉴욕이민사를 몸소 체험한 산증인이다.
64년 선배의 소개로 첫 데이트를 할 당시 이들의 메뉴는 차이나 타운의 자장면이었다. 김씨는 “한인 유학생들이 가던 차이나타운의 식당에 자장면이 등장했고, 가격은 98센트였다”며 소박한 첫 데이트를 회상했다. 데이트였지만 영화보기가 부담스러웠다고. 조씨는 “당시 유학생들은 한국에서 웬만큼 잘 살았다고 해도 미국에서는 고학생 신분을 벗어나기 힘들었다”며 “접시닦이를 가장 많이 했었는데 최저 임금인 1달러25센트를 받으며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당시 갤런 당 개솔린 가격은 29센트. 영화관람료는 2달러였다.
60년대 한인식당은 맨하탄 43가와 브로드웨이-6 애비뉴 사이의 ‘삼복’과 56가의 ‘아리랑’ 단 두곳 뿐이었다. 조씨는 “삼복의 당시 비빔밥 가격이 3달러99센트였다”고 회상했다. 이들 부부의 주급은 당시 200달러 내외. 식구가 늘면서 60년대 후반 맨하탄에서 브루클린 3베드 코압으로 살림을 옮겼다. 김씨는 “당시에는 삼복이라는 한인 식당이 수퍼마켓을 함께 하고 있었다”며 “한인상권은 물론 한인마트도 제대로 없던 시절, 차이나타운에서 배추와 당면을
사서 불고기를 만들고 삼복에 가서 식품을 사는 정도”라고 말했다. 조씨는 “60년대말만 해도 현재 32가 코리아타운의 10분의 1은 빈 가게로 한산하고 죽어가는 지역”이었다며 “70년대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상권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렌지 16개가 29센트, 3베드룸 아파트가 300달러이던 시절이지만 지금보다 비싼 물품도 있었다. 바로 열대과일. 김씨는 “망고는 한 개에 5달러, 키위는 2달러로 미국 사람들도 못 먹었다”고 말했다.한인들이 몰리면서 주거지역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60년대 말 일본인들과 백인들이 몰려 살던 플러싱은 70년대 히스패닉계가, 80년대 한인들이 몰려 자리를 잡다가 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는 중국타운으로 바뀌는 등 변화를 겪었다. 이들이 75년 구입한 3층짜리 더글라스톤 주택은 당시 7만2000달러였지만 현재 90만달러로 그 가치가 달라졌다.
70년대 맨하탄과 브롱스, 브룩클린 등에 뿔뿔이 흩어 살던 한인들도 일요일이면 지금처럼 매주 교회에 모여 친목을 다졌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맨하탄 감리교회를 비롯, 브룩클린 한인교회, 브룩클린 중앙교회, 브롱스 교회 등 한인교회는 4곳이었다. 조씨는 “1970년대 영주권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민자들이 급증했지만 한인들은 유학생을 비롯, 이미 교육수준이 높은 편”이라며 “이민 역사가 40년이 넘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제 남은 것은 정치 리더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정치력 신장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뉴욕 한국일보] 최희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