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27회 동기회 충북 괴산군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5월3일 보슬 보슬 봄비가 소리없이 나리는데 서부정류장 ‘구 대교주유소’ 앞에 도착(7:20)하니, 아직은 시간이 이른지 곽정숙, 배순연 두 사람만이 나와 있다. 연이어 2~3분 간격으로 김상활, 박재도, 곽순옥, 곽태순, 김춘자, 정매희 등이 차례 차례 도착하고 7시30분이 조금 지나서 차천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하여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여쭌다.
부산, 창원, 유가면, 대구시내 등에서 모인 친구들이 모두 26명이다. 서울 방면서 오는 친구들(7명)은 화양구곡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동시에 출발을 하는데, 초등학교 동기들은 고향 친구들이기도 하고 대부분 혈연관계(血緣關係)나 일가(一家)들이 많아서 언제 만나도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대부분 6학년 6반을 넘기고 있는 나이라 머리는 반백을 넘어서고 성미 급한 친구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다. 차는 신나게 달려서 ‘칠곡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준비한 돼지고기와 입가심으로 간단히 술 한잔을 나누고 출발한다.
아포(牙浦)에서 상주로~ 다시 화서면, 화남면을 거쳐 구~불~ 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을 돌아 충북 괴산군(槐山郡) 청천면 화양구곡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계는 거의 11시가 다 되어간다.
연이어 청주에 우담바라(우중현 회장)님이 많은 준비물을 싣고 도착하여 서로간에 인사를 건네고, 서울서(6명)는 별도 차를 대절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서 필자를 비롯한 다섯명(이우태, 박재도, 이재철, 김광호)이 먼저 ‘화양구곡’으로 출발합니다.
2005년 8월에 도명산을 등산한 후로 꼭 11년만에 다시 와보는 곳이라 감회가 새롭고 숲그늘도 훨씬 자라고 짙어서 보행길이 오히려 어두울 정도다. 보슬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하여서 아예 비무장(非武裝)으로 나섬니다.
매표소 바로 옆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마을의 풍요와 안태를 비는 곳으로 낟가리 모양의 돌무더기에 파란 이끼가 덕지 덕지 끼어있고, 그 옆으로 아람드리 고목이 역사와 전통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제1곡은 경천벽(敬天壁)인데, 지금은 근처에 넓은 주차장이 들어선 건너편에 높은 바위벽으로 “하늘을 떠 받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접근하기가 용이치 못하여 그냥 지나치고, ‘조각공원’을 지나 ‘화양2교’로부터 답사가 시작된다.
사진을 찍다보니 세 사람은 언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뒤쳐진 광호에게 툭~ 터진 계곡을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어 주고는 그림 같은 천변(川邊)을 따라 쉬~엄~쉬엄 여유를 부리면서 나아가니, 계곡을 가로지런 보(洑)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수량(水量)이 넘쳐나고 있어 보는 눈이 다 시리고 가슴이 후련합니다 그려!
넓은 계곡에 맑은 호수를 바라보면서 몇걸음을 나아가니, 건너편 절벽에 “거울처럼 맑은 물에 구름이 제 모습을 비춘다”는 제2곡의 “운영담(雲影潭)”이 눈앞에 다가온다. 운영담 주위로는 계곡내에서 가장 넓은 곳으로 약간의 모래사장이 쌓여있어 여름에 물놀이 하기에는 적격(適格)한 곳이다.
연하여 우측 산기슭에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으며, 그 안에 만동묘(萬東廟)가 근세에 잘 복원되어 있다. 화양계곡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계곡의 수려(秀麗)함도 있겠지만 이 곳에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숙종15년(1689)에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논쟁 끝에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20년(1694)에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되었으며, 이 후 전국 각지에서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많이 세워졌고, 또 그의 문하생인 권상하 등 유생들의 노력으로 세원진 ‘화양서원’은 사림(士林)의 중심이 되었다.
2005년도에 왔을 때는 빈 터 였는데~ 그사이 말끔히 복원되어 낯선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 주심니다. 광호와 함께 좁은 돌계단을 올라 이 곳 저곳을 돌아보며 역사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만동묘 비각에는 비문의 글씨가 모두 훼손되어 알아볼 수 가 없으며, 일제 때의 만행이라 적혀있다.
우리들의 역사를 지워 조선인을 야만국으로 만들겠다는 음흉한 간계에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 까지, 아니 만대의 후손들 까지도 역사의 피해자를 만들고 있으니~ 그들의 만행은 천인공노(天人共怒) 할 일이로다!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과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하던 사당이다. 송시열의 유촉(遺囑)에 따라 숙종 30년(1704)에 권상하 등이 화양서원 내에 건립하였고,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글에서 처음과 끝자를 따 온 것이라 한다.
돌축대는 간격이 좁고 경사가 심하여 오르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중문을 지나 제일 위쪽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며, 운영담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안산(案山)이 지근(至近)한 거리에서 적당한 높이로 우에서 좌로 잘 휘감아 주고 있다. 연하여 그 아래 화양천(華陽川)이 같은 방향으로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르니, 과시(果是) 명당이요! 학문을 닦기에는 더 없는 곳이로다!
산책로 바로 옆에는 “괴산 화양서원 묘정비(槐山 華陽書院 廟庭碑:충북기념물 제107호)”가 서 있으며,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으로 서원이 철폐되면서 땅속에 묻혔던 것을 광복이후에 다시 찾아 세웠다고 적혀있다.
華陽書院은 세워진 이래로 그 세력은 실로 막강해서 영조 때 송시열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자 나라에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드 높아졌다. 인하여 노론 관료나 유생들이 기증한 토지를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제수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각 고을에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보내고 이에 응하지 않는 수령은 통문을 돌려 축출하자는 공론을 일으켰다고 한다. 심지어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이 앞을 지나다가 유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했다고도 하며, 결국 고종 8년(1871)에 화양서원은 철폐되었다.
그 옆으로 개울가에는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이 널찍하고 평평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바위면에 구멍이 숭~ 숭~ 뚫려서 여러 곳에 파여져 있다. 일설에 송시열은 돌아간 효종(1649~1659)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기일(忌日)에 이 바위에 올라 서울 쪽을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약간의 물굽이를 돌아 제4곡 “금사담(金沙潭)”은 화양구곡에서 제일 손 꼽히는 곳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미끈 미끈한 바위들이 질펀하고 수려(秀麗)한 암벽(巖壁)에 경관이 빼어나다!
그 위쪽 절벽에 “제비집모양”으로 “암서재(巖棲齋)”가 지어져 있고, 송시열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독서(讀書)하며 후학을 양성한 곳이라 한다. 아울러 화양구곡이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뜬 것처럼 암서재도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뜬 것이라 한다.
오래 전에는 개울을 건너 암서재 일대를 답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접근 금지다. 이 모두가 답방객들의 무질서와 소중한 문화유산을 함부로 훼손했기에 우리 스스로 받아야 하는 대접이다.
렌즈를 멀리서 당겨 보지만 시원치 않아서 과거의 답사자료를 참고하면 바위벽에는 많은 글들이 있는데, 金沙潭(금사담)을 비롯하여 忠孝節義(충효절의),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 등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창오산은 구름이 끊어지고 무이산은 비어있다.”고 한 것은 창오산은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고, 무이산은 주자가 살던 산이다. 곧 명이 스러지고 ‘오랑캐’ 청이 서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선조 40년(1607)에 태어나 인조, 효종, 현종, 숙종대에 걸쳐 활동한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날 밤 그의 부친의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와서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라’고 하는 꿈을 꾸었다 한다.
인하여 어릴적 그의 이름은 ‘성뢰(聖賚:성인이 주신 아들)’였고, 여덟 살 때부터 송이창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후에 사계 김장생(1548~1631)과 그의 사후(死後) 아들 신독재 김집(1574~1656)에게 배웠다.
그후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경릉 참봉에 제수되었고 이어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사부가 되었으며, 효종9년(1658)에 왕의 부름을 받아 이조판서에 임명된 그는 효종이 진행한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1659년에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예송(禮訟)문제로 논쟁 끝에 낙향 했으며, 숙종 15년(1689)에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어 국문(鞠問)을 받으러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평생 조정으로부터 109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26차례 응했다고 하며, “조선왕조신록”에 그의 이름이 삼천 번이 넘게 언급되었다고 한다.(이상 우암집 및 안내책자 참조)
보슬비는 오락 가락 오는둥~ 마는둥~ 이끼 낀 돌담을 돌아 화양3교에 이르니, 박명련과 성계화가 다리 난간에 앉아 심각하게 전화를 하고 있다. 궁금하기도 하지만 여쭐수도 없어 잠시 뒷산을 올려다 보니 제5곡 첨성대(瞻星臺) 자연돌탑이 우뚝하게 다가온다.
조물(造物)의 작품이 기이(奇異)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리를 건너와 전망대(展望臺)에서 첨성대를 배경으로 두분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잠시 아름다운 대자연을 감상합니다. 옛 싯귀에 “유수무현천년금(流水無絃千年琴)(유수는 거문고 아니라도 천년의 거문고라!)”이라 드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외다.
자료에는 첨성대 암벽에도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玉藻氷壺(옥조빙호)”, “非禮不動(비례부동)”, “萬折必東(만절필동)” 등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다는데, 다 둘러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채운사(綵雲寺)로 향합니다.
綵雲寺! 이름도 아름답다! “비단 구름에 싸인 절”이라! 절 입구에는 제6곡으로 불리워지는 ‘능운대(凌雲臺)’ 바위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마치 채운사를 지키는 수문장 같기도 하고, 위쪽에 올라서 보면 평평하고 널찍하여 참선대(參禪臺)로 활용하기에 아주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인가? 들어가는 길 왼편으로는 오색연등(五色蓮燈)이 많이도 달려 있고, 인적은 없는데 멍멍이는 큰 소리로 짖어댄다. “멍멍아! 조용하세요! 내가 미욱하여 그대의 말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겠구나!”
도량(道場)내 전각의 수는 단촐하여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요사채가 전부다. 대웅전(大雄殿:충북 문화재자료 제30호)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양식이며, 출입문 좌우에는 매화나무, 봉황새, 구름무늬를 서로 바꿔 새겨 놓아서 변화와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여래좌상(木造如來坐像:충북 유형문화재 제191호)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고, 안내문에 효종 4년(1652)에 혜일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숙종 대에 우암 송시열이 암자를 지어 욱장사(煜章寺)라 불렀다고 적혀있다.
법당에 들어 간단한 참배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주산(主山)은 백두대간의 대야산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힘차게 솟아있고, 안산(案山)은 도명산에서 이어지는 용맥(龍脈)들이 지근한 거리에서 외청룡(外靑龍) 역할을 하며 잘 감싸주고 있으며, 그 아래로 좌에서 우로 화양천이 휘감아 흐르고 마주 보이는 곳에 “첨성대(瞻星臺)”가 마치 촛불을 켜 놓은 듯~ 천연(天然)의 장명등(長明燈)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도량을 한바퀴 휘~ 돌아 나오니, 요사채의 현판은 “綵雲寺”인데, 당국에서 세운 안내문에는 “彩雲寺”라고 되어 있어 어느 글이 맞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려!
우거진 숲길을 따라 10여 분을 걷노라니~ 소리 없이 나린 이슬비에 나뭇잎들은 함초롬히 젖어 있어 향기롭기 그지 없으며, 간 간이 산새 소리도 들려서~ 속세를 떠난 깊은 산골이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제7곡 ‘와룡암(臥龍岩)’에 도착하니, 남녀 두분이 휴식을 하고 있어 멀리서 ‘누운 룡’을 디카에 담아서 물러남니다. 울퉁 불퉁한 바위가 길게 누워 있는데 여러군데 홈이 파여져 있으며, 풀숲에 가려져서 그 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슴니다.
몇 걸음을 더 나아가니 제8곡 “학소대(鶴巢臺)”가 저만큼 맞은편 벼랑에 우뚝 솟아 있으며, 늦 봄이라 녹음이 우거져서 많이 가리워져 있어 운치가 반감(半減)되고, 그 옆으로 화양천을 건너는 ‘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바위벽 중간 중간에 소나무가 자라있고, 옛날에는 푸른 학이 깃들어 새끼를 길렀다고 한다. 제9곡 ‘파천(巴串)’은 시간상 일정이 맞지 않아 답사치 못하고 광호와 함께 머뭇거리고 있는데, 서울서 도착한 벗님들과 모두 합류하여 들이 닥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모두들 도착하는 데로 학소대를 배경으로 단체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다시 주차장으로 원점회귀(原點回歸) 합니다. 올 때는 한적 했는데~ 갈 때는 왁자지껄~ 사람 냄새가 난다!
가는 도중에 조각공원에서 몇 몇 분들에게 거대한 자연석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 모두들 주차장에 도착하여 중식은 가은읍 ‘선유동계곡(仙遊洞溪谷)’의 한 음식점에서 총회겸 식사를 합니다.
기다림은 언제 부터인가
헤어질 때는 일년이 멀다 했는데
다시 만나니 엊그제 일세
삶이 덧 없는 것인가
세월이 덧 없는 것인가
억겁(億劫)의 세월도 수유(須臾)라는데
한 생이야 더 말해 무삼하리오
벗님들이여! 우리 늙지 말고
한 백년을 살아보세!
단기 4348년(서기2015년) 5월 3일
유가27회 동기들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