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골프의 독특한 역사
100여 년이 된 우리나라 골프문화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 골프문화와 달리 독특한 양상을 띠고 발전해왔다.
100년 된 우리나라 골프문화는 독특한 양상을 갖고 있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 골프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골프가 특권적 지배세력이 즐기던 운동에서 시작해
이제는 바야흐로 다양한 국민계층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국민들에게 골프는 부자들의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골프는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성장과 국민경제 향상에 따라
내용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골프는 예전에는 아무나 즐길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었다.
골프는 한 마디로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었다.
골프 3요소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골프는 재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운동이었다.
그동안 골프가 어떤 운동이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박정희를 비롯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하던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골프는 그야말로 대통령의 운동이었다.
대통령이 골프를 하니까 장관, 국회의원, 군 장성 등
이른바 권력층들은 골프채를 잡고 권력을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을 선언, 한국 정치사에 역사적인 장을 열게 했던 곳도 골프장이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골프 이야기, 골프장에서는 정치 이야기’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재벌 회장들과 부동산 등으로 ‘졸부’가 된 신흥 재력가들을 중심으로
돈과 명예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골프가 활용되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시절 전국 골프장 수는 40여 개가 채 되지 않아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서민들에게는 ‘금단의 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대중화 발판 마련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우리나라 골프는 본격적인 대중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6월 골프장 인허가 업무가 청와대인가에서 각 시도 전담제로 바뀌었다.
골프가 관광객 이용시설업으로 교통부 관할이던 것이 ‘체육시절 이용에 관한 법률 및 규정’에 의해
체육 청소년부(현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된 데 따른 조치이다.
이로 인해 전국에 골프장 건설 붐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골프장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돼버린 것이다.
6공 말기에는 골프장 수가 100개를 넘었으며 골프장 사업 승인을 받은 업체는 무려 139개소나 달했다.
멤버 모집만 제대로 하면 기업들이나 개인 사업가들이 골프장을 손안에 넣을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10월 인천 전국체전 공개행사에서
‘골프는 이제 중산층, 서민층 누구에게나 좋은 스포츠’라 밝히며
‘골프는 더 이상 특권층만의 스포츠일 수 없다’고 대중화를 선언,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또한, 때맞춰 박세리, 김미현 등이 미국 여자프로골프에서 잇달아 우승하면서
국민의 골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렇듯 한국골프 역사는 정치, 경제, 스포츠의
가장 중심에서 싹을 틔우고 오늘과 같은 결실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