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출(趙靈出)
본명 : 조명암(趙鳴岩)
1913년 충청남도 아산 출생
1935년 보성고보 졸업
1941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 졸업
1945년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 역임
1948년 월북
205.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눈 쌓인 허허 벌판
피ㅅ방울 흘리며 걸어간 발자욱
세찬 바람에 쏠리는 눈보라야
너는 이 발자욱 앞에 네 광란을 멈춘 일이 있었드냐.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
피 눈물 방울 흘리며 떠나간 발자욱
서슬이 푸른 아수라*의 별들아
너는 이 발자욱 뒤에 네 체포를 멈춘 일이 있었드냐.
오오 슬픈 압제의 밤은
가슴을 찔러 흐른 피에
사상(思想)이 꽃처럼 피다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
마음의 광채
금ㅅ줄을 띠운 토방(土房)의 등불마다
강보의 어린 울음이 터져 올랐다.
님은 가고
여기 어린 생명은 살고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
이 어린 목숨이 살어
지금 오오 지금
이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보라 저 푸른 하늘
저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흰 비둘기
붉은 태양
오호 붉은 태양아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
* 아수라(阿修羅) : 불교에서 이르는,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
([예술운동], 1945.12)
해방 이전 대중극(大衆劇)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대중가요의 가사를 창작하기도 한 대중예술인
조영출은, 해방 직후에는 [연간조선시집], [횃불] 등의 시집에 다수의 시를 발표하다가 월북하여,
우리의 문학사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로 남아 있다.
이 시는 해방의 아침을 맞는 감격을 새 생명의 탄생과 대응시켜 영탄조의 호흡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과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슬픈 압제의 밤’으로 규정하고, ‘오오 지금’의 ‘흰 비둘기’ 날고
‘붉은 태양’ 빛나는 해방의 아침과 대비시킨다. 과거 ‘눈 쌓인 허허 벌판’과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을
‘피ㅅ방울 흘리며’ ‘피 눈물 방울 흘리며’ 헤매면서도, 시적 화자로 대유된 많은 투사들의 항쟁에 의해
‘슬픈 압제의 밤’에서도 ‘사상이 꽃처럼 피’어 나고, 비록 그들이 죽더라도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와 ‘마음의 광채’는 ‘강보의 어린 울음’으로 살아난다. 그리하여 비록 ‘님’은 가도 ‘어린 생명은’
감시의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서도 ‘목숨이 살어’ 지금 해방의 새 아침을 맞는다.
‘푸른 하늘’에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 흰 비둘기’가 날고 ‘붉은 태양’이 빛나는 환희의 새 아침이지만,
그럴수록 지난날에 대한 회한은 가슴에 사무친다.
오늘의 청(靑), 홍(紅), 백(白)의 색채 이미지가 선명하게 제시될수록 눈[雪]과 피로 제시되는 과거의
시각적 대비도 한층 뚜렷해진다. 그리하여 결코 시적 화자는 그러한 우리의 역사를 잊을 수 없어,
과연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고 자문(自問)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영탄적 어조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그 감격이 단순한 환희의 찬사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는 ‘슬픈 역사’의 반추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자기 비판적 성찰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행의 의문에 대한 긍정적 해답이 여전히
불투명한 해방공간의 현실에서 시인은 결국 월북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이 또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