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이순(耳順)에 맞이한 순교여 홍주읍성의 원 씨 형제
한수산 소설가. 세종대 국문학과 교수.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오늘의 작가상',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왜 이렇게 늦게야 이곳을 찾게 된 것일까. 홍성으로 향하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홍성에서 해미 순교성지는 멀지 않다. 아름다운 읍성과 그곳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분들을 그리며 얼마나 많이 그곳을 찾았던가. 언젠가는 눈발이 쏟아지는 해미성지를 나오는데, 저녁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두 분 수녀님을 뵌 적이 있었다. 제방길을 걸어가는 수녀님들의 앞을 가리며 통곡처럼 쏟아지던 눈발…, 홍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갈매못 성지도 있다. 그곳엘 가면,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핏빛으로 저녁바다가 물드는 갈매못의 황혼을 잊지 못해서였다. 마치 그 모래밭에서 숨진 다섯 성인의 피가 바다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그곳의 돌 하나에도 순교자들의 핏물이 배어 있는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청양의 다락골 성지도 있다.
그렇게 많이 홍성 주변을 맴돌면서도 어쩐지 홍주읍성으로는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었다. 아마 그곳엘 가도 마음 붙일 그루터기가 없어서는 아니었을까. 홍성읍내가 온통 순교지인데도 거기에는 현양비 하나, 기도할 수 있는 곳 하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 수많은 순교자, 이름도 남지 않고 사라져 간 믿음의 용사들뿐, 거기에 간들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런 서글픔이 먼저 배어나곤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나들목을 나와 29번 도로를 타고 홍성읍으로 향했다. 열차 편을 이용한다면 장항선 홍성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홍성 버스 터미널에서 순교 현장인 홍주 읍성까지는 15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다. 서울을 떠나 두 시간 남짓, 시내로 들어서며 홍성문예회관 앞을 지나자니 멀리 바라보이는 도시 외곽의 아파트들이, 읍이 아니라 ‘홍성시’가 아닌가 싶게 도시의 규모를 꽤 큰 것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시내로 들어서면 좁고 구불거리는 길이 옛날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옥이 있었던 검찰청 자리, 북문 건너편의 사형장 터, 신자들을 신문하고 때려 죽였던 동헌 터(군청 자리) 등 천주교 신자들의 성지(聖趾)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홍성은 예로부터 최 영 장군, 만해 한용운,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사육신 성삼문 등을 길러 낸 뜻 깊은 고장이다.
군청 앞에 서니, 오래된 나무들이 소리 없이 전해 주는 세월이 박해의 역사를 성큼 다가서게 하며 가슴을 무겁게 한다. 저 나무들에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 와 묶여 있었다는 기록들을 읽었기에 더욱 그렇다. 내포의 여러 곳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저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맞아 죽거나 옥에서 굶어 죽은 시체들은 성 밖으로 버려졌다. 그 핏물의 현장에 지금 서 있는 것이다.
군청 정문 옆 건물에 아직도 붙어 있는 홍주아문(洪州衙門). 고종 7년(1870) 목사 한응필이 정청의 정문인 홍주아문을 만들 때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써서 하사한 현판이다. 홍주아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문에는 1.7미터의 장초석을 놓아 위엄을 더하게 했다. 당시 순교자들이 묶였던 기둥과 나무들, 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을 흙도 지난날을 말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순교지를 알리는 비석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군청 입구 전광판에서는 무심하게 세금납부를 독촉하는 안내 글자들이 흘러 가고, 1인 시위를 하는 젊은이가 가슴에 항의의 글을 달고 군청 수위실 앞에 돌처럼 서 있을 뿐이다.
어두운 마음으로 고개를 젖혀 나무들을 둘러보다가 조양문(朝陽門)으로 향했다. 군청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 나가다가 왼편길로 들어서면 쉽게 만나게 되는 조양문. 예전에는 홍주성으로 들어오던 동서남북에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동문이었던 조양문뿐이다. 이 문도 1975년에 해체한 후 복원한 것이다. 조양문의 현판에도 흥선대원군의 친필을 새겼었는데 도난을 당해 지금 걸려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차들이 줄지어 돌아가는 조양문 옆은 택시승차장이 되어 있다. 빈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고 손님을 기다리는 기사들이 모여 앉아 한가롭다.
다시 홍주읍성으로 향했다. 읍성은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아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는 구별된다. 읍성은 부(府), 목(牧), 군(郡), 현(縣) 등 행정구역에 따라 그리고 주민의 수에 따라 그 크기의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 말기까지 건재했던 것들도 일제강점기의 읍성 철거령에 따라 대부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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