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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시조(金氏始祖) 김알지(金閼智)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탈해왕(脫解王)9년(65) 어느 봄날.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가다가 시림(始林)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고,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어서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으로 가서 그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혁거세(赫居世)의 옛일과 같으므로 그 선례를 따라 알지(閼智)라 이름했다.
또 금빛 궤짝에서 온 것에 연유하여 성을 김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된 장소인 시림을 고쳐 (鷄林)이라 하고 이로써 국호로 삼았다.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는 길에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했다. 뒤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를 파사(婆娑)에게 사양하고 즉위하지는 않았다. 그의 7세손이 미추왕(味鄒王)이며, 이때부터 신라 왕족으로서 김씨가 등장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우리 나라 최고의 정사(正史)라고 일컬어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탈해(脫解)왕조(王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의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서기 65년) 3월, 왕은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빛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를 열어 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거두어 길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람에 따라서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 났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음을 연원(淵源)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또한 시림(始林)을 달리하여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
三國史記原文(卷一新羅本紀 第一脫解尼師今條)
九年春三月. 王夜聞金城西, 始林樹間. 有鷄嗚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小檀掛樹技, 白鷄嗚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檀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
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檀 姓金氏, 改始林名鷄林,
因以爲國號
알지는 석탈해왕의 아들 각간(角干) 강조(康造)의 딸(탈해왕의 손녀)을 배필(配匹)로 맞이하였으니, 이가 곧 마정부인(摩貞夫人) 석씨(昔氏)이다.
석탈해왕은 당초에 알지를 수양(收養)하면서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 후 알지는 벼슬이 대보(大輔;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는 首相)에 이르렀고, 탈해왕은 왕위(王位)를 알지에게 전수하려 하였으나, 알지는 굳이 사양하여 파사왕(姿娑王) 박씨(朴氏)에게 양보하였다.
왕위를 사양한 연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으나, 추측하건대 당시 국정상(國情上) 왕위를 양보하는 것이 곧 국익(國益)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충정으로 그렇게 결단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7세손 미추대(味鄒代)에 제12왕 해(解)로 왕위(王位)에 오르니 金氏가 나라를 둔 처음이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고려사에 이르기를 "경주는 원래 신라의 옛 도읍인데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개국건도(開國建都)하여 호(號)를 서야벌(徐耶伐)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노(斯盧)라 하고 후에 신라(新羅0라 칭(稱)하였으며 탈해9년(脫解九年)에 시림(始林)에 닭의 이채(異彩)로 인하여 다시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인(因)하여 국호로 하다가 기림왕10년(基臨王十年)에 다시 신라(新羅)로 호(號)하다."
동국통감(東國通監)의 기록
동국통감에 이르기를 "옛날 탈해가 계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궁중에 길러 대보공(大輔公)을 삼다."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시림 가운데 돌을 3자 높이로 쌓았다."라고 하였으며
속담에 전하기를 "알지를 해태할 때에 깎은 돌이 있는데 칼자국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최해(崔瀣)가 이르기를 "김씨가 귀족이 된 것은 대개 신라 초에 일어 났는데 속담에 전하기를 금궤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므로 성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원류고증(源流考證)
대보공(大輔公)의 금궤의 說은 탈해왕 당시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진흥왕 六年에 비로소 거칠부 등을 명하여 나라 史記를 짓게 하였으니 대보공 생년까지 상거가 벌써 四百四十餘年이니 생각하건대 문헌이 모두 자세한 고증이 어려우며 진흥왕 시대에는 佛道만 전혀 숭상하였으므로 漆夫(칠부)의 학설은 편벽되게 믿어서 神人의 출생은 보통 사람보다 다른 까닭에 옛날에도 새알이나 큰 발자국의 일이 있었고 우리나라 전설의 흰닭 금궤도 어찌 없다고 단정하겠는가? 그리하여 드디어 사책에 기록하였는데 그후 김부식(金富軾)이 三國史를 편찬하는데 와전된 것으로 지금까지 허망한 것을 벽파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대체로 사람이거나 물건은 출생한 그 근원을 따져보면 무두 化生인데 벌써 種族이 있은 다음에는 단연코 단군 기자 이후로 人文이 벌써 개발된 뒤인데 어찌 이런 化生하는 일이 있으리오. 여기에 가락 사람 金濟學(김제학)이 펴낸 新羅 世祖王本紀와 忠州金氏窮源錄(궁원록)의 기록된 것을 다음과 같이 쓰는데 鷄林圖(계림도)와 고이제설(考異諸設)은 삭제하지 않고 곧 세조왕본기와 궁원록으로 定한 것은 일이 오래 되었으므로 신중을 뜻하는 까닭이다.
黃帝後로 거舟輿(兄弟 八人이 우리나라에 와서 星山에 居하니 卽今 漆谷(칠곡)이다. 八거 村于이라고 自號하니 入거한 자는 거의 八族이다.)
斯干大王(사간대왕) (舟輿(주여)의 玄孫) 世祖閼智(세조알지) (斯干大王의 玄孫)
대보공 사실(大輔公 事實)
성조(成祖) 김알지공(金閼智公)의 탄강(誕降)
인류가 도구를 발명하고 역사를 창조한 이래, 인간의 행위를 처음에는 신(神)이 하셨다하였고, 차츰 인지가 계발되면서 인간이 한 일을 초인적 인간의 행위로 설명하였으며, 그 이후부터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한 그대로 인류사는 기록했다. 이를 통털어 신격화시대, 초인격화시대, 인간 역사의 시대순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우리 민족사에서는 단군시대나 고대의 건국되던 일들은 건국신화로 신성시 했다. 신라 박혁거세는 백마의 알에서 탄생하였고, 석탈해는 까치의 보호아래 뗏목속에서 나왔는데, 김씨 시조는 금궤속에서 축복을 받으며 탄강하였으니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3대 석탈해왕 9년(AD65년) 3월(삼국유사에는 AD60년 8월로 기록됨)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본즉 큰 빛이 숲속에서 나왔는데 자색구름은 하늘에서 땅에 내리비치었고, 구름속에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어 그 빛이 금궤에서 나왔으며 나무밑에서는 흰 닭이 울더라 함으로 왕은 행차하시어 금궤를 열어본 즉 사내아이가 누워있다가 일어나는데 그 자용(姿容)이 기위(奇偉)했다. 왕은 기뻐하며 "이는 후사가 없는 나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왕자가 아니겠는가?"하고 안고 어가를 타고 궁궐로 오는데 이때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서 날뛰었다. 왕은 애기를 궁중에서 키우며 혁거세(赫居世)처럼 밝고 지혜로워 알지(閼智)라고 이름지으니 알지란 우리말의 '아지'란 칭호였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하고 대보공(大輔公)으로 삼았고, 파사왕(婆娑王)의 뒤를 잇게하였으나 김알지는 사양하여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씨라하고 또 시림을 고치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여 국호로 삼았다. 그리고 알지공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아도는 수류(首留)를, 수류는 욱보(郁甫)를,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아 이어졌는데 구도는 신라김씨 1대왕인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이다."
이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각각 조금씩 다른점이 있으니 두 문헌을 종합해서 옮겼다. 이 설화에서 김씨(金氏) 시조는 오색 찬란한 축복속에서 탄생하되 왕위를 사양한 겸양의 미덕을 은축하신 시조로 탄강하여 장차 김씨 왕이 겸양과 애민의 왕업과 서광을 보이는 설화로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계림세묘(鷄林世廟 경주 황남동)에 모시고 춘분에 제향하고, 유적으로 계림유허비와 비각(사적 19호)이 경주시 교동에 있다.
지정번호 - 사적 제19호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1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1936. 2. 21)
지정면적 - 7,273m²
계림(鷄林)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 또는 신월성 - 사이에 있는 숲으로서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게 서 있으며 신라왕성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과 관계 깊은 숲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김알지 탄강신화는 다음과 같다.
탈해왕 4년(60)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 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 있었다.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숲속을 밝히는 그 광명은 황금궤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고 그 나무아래에는 흰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은 궁궐로 달려가서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은 즉시 시림으로 거동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다. 이 아이를 「알지(閼智)」라 이름하니 알지란 곧 우리말로 「아기」를 뜻하는 것이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귀환하는데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일 왕위를 파사(婆娑)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후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또는 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는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올라 신라 13대왕이 되었다.
하늘에서 자주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거나 알(卵)대신에 금궤가 등장한 것 등을 모년 계림의 김알지신화는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이자 난생설화(卵生神話)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김알지 탄생일은 탈해왕 9년(65)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삼국유사와는 약간 다르지만 시림에서 태어난 알지 기록은 역시 같다. 계림이란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하며 후에 국명으로도 되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계림」이라는 문자나 박제상이 왜왕에게 「鷄林」 운운하는 점, 신당서(新唐書) 백거이전(白居易傳)에 보는 계림과 송(宋)나라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 오식의 계림지(鷄林志) 왕란의 계림지 등 여러 가지 예를 감안 해 볼 때 계림은 신라의 국명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시림은 신라의 신성림(神聖林)이었고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도 모두 위와 같은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약 100여주의 고목이 우거져 있으며 조선 순조 3년( 1803)에 세운 비가 서 있다.
대보공 휘 알지 탄강계림 유허비명(大輔公 諱 閼智 誕降鷄林 遺墟碑銘)
신라(新羅)에 사기(史記)가 없다하나 사기(史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역사를 읽지 않는 까닭이다. 신라가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姓)이 나라를 세운 것이 천년(千年)이 되었고 계림(鷄林)은 알지(閼智)가 탄생(誕生)한 땅이니 지금 영남(嶺南)지방(地方)인 경주부(慶州府)에 속한다. 세상에서 김(金)으로 성(姓)을 삼은 사람은 모두 다 알지(閼智)로 시조(始祖)를 삼는데, 나라 동쪽 사람이 지금까지 그 땅을 전하되 그 세대와 연혁이 역사책에 기재된 것은 혹 상세치 아니하나 이제 그 비문을 자료로 하여 대략 알게 된 것이다.
처음 탈해왕(脫解王) 시대에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를 얻어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왕(王) 거두어 양육(養育)하니 이름은 알지(閼智)라 하고 성은 김씨(金氏)라 하며, 그 수풀을 이름하여 계림(鷄林)으로 고치었다. 7세손(七世孫) 미추(味鄒)에 이르러 조분왕(助賁王)의 사위가 되었는데 첨해왕(沾解王) 아들이 없어서 미추(味鄒)가 대를 이어 왕이 되어 이사금이라 칭호(稱號)하였다.
미추(味鄒)로부터 내물(奈勿)과 실성(實聖)을 지나 눌지(訥祗)에 이르러 이사금을 마립간(麻立干)으로 칭호(稱號)하고 백성을 가르치고 의복제도와 우차(牛車)의 사용법을 가르치었다. 눌지(訥祗)가 훙(薨)(왕 제후의 서거(逝去)를 말함)하고 아들인 자비(慈悲)가 마립간이 되었다.
자비(慈悲)가 죽고 아들 소지(炤智)가 마립간이 되어 시장(市場)을 개설(開設)하고 전방(지금의 상점)을 열어 사방(四方)의 물화(物貨)가 서로 통하게 하였다.
소지(炤智)가 죽고 아들 지증(智證)이 마립간이 되어 사람의 순장(殉葬)(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따라 매장시킴)을 금하고 주(州).군(郡)에 명(命)하여 농사(農事)를 권장(勸奬)하고 비로소 소를 사용하여 전답(田畓)을 갈게 하고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정(定)하고 방어(方語)인 이사금, 마립간(麻立干)을 고치어 왕(王)이라 호칭하게 하였고, 상복(喪服)을 제정하였다.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니 시법(諡法)(사후에 정하는 호)이 이때부터 시행(施行) 되었다.
지증왕(智證王)의 아들 법흥왕(法興王)이 법률을 반포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고,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진흥왕(眞興王)과 진지(眞智)를 지나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서 선덕(善德)여주(女主)가 왕위(王位)에 나아가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국학(國學) 세우기를 청하였다.
선덕(善德)여주(女主)가 죽고 진덕(眞德)여주(女主)가 즉위하니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외숙)인 국반(菊半)의 딸이다. 처음으로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고 관복(官服)을 만들었고 사신(使臣)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百濟)를 파(破)할 것을 보고(報告)하였으며, 왕이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문의로 짜서 당(唐) 고종(高宗)에게 드리니 칭찬하였으며 중국의 연호를 비로소 행하였다.
진덕(眞德)이 죽고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왕위에 나가니 진지왕(眞智王)의 손자(孫子)로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百濟)를 멸(滅)하였다. 무열왕(武烈王)이 죽고 아들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여 부녀자(婦女子)에게 명령(命令)하여 중국(中國)의 의상(衣裳)(저고리 치마)를 입게 하고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멸(滅)하였으며, 역법(曆法)(월력 또는 일력의 법)을 반포하고 모든 관인(官印)을 주조(鑄造)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이 죽고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들어보내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하니 칙천황후(則天皇后)가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사(文詞)가 규칙(規則)에 합치(合致)되는 것 50여권을 부지런히 만들어서 주었다.
신문왕(神文王)으로부터 효소왕(孝昭王)을 지나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비로소 누각(漏刻)(물시계)을 만들었고, 효성왕(孝成王)을 지나 경덕왕(景德王), 혜공왕(惠恭王)을 거쳐 선덕왕(宣德王)을 지나 원성왕(元聖王)에 이르러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글을 읽어야 벼슬을 할 수 있는 법)을 정하고,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소성왕(昭聖王), 애장왕(哀莊王), 희강왕(僖康王), 민애왕(閔哀王),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경문왕(景文王),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 진성왕(眞聖王), 효공왕(孝恭王)을 지나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고려(高麗)에 넘겨주는데, 왕자(王子)가 불가(不可)하다 하니 왕(王)이 이르시기를 "과인(寡人:내가)이 외롭고 위태하여 지탱할 수 없으니 죄 없는 백성을 비참하게 죽게 함을 내 차마 못하리라"하시고, 시낭(侍郎) 김봉휴(金封休)를 고려(高麗)에 보내서 글을 올리어, 신(臣)이라고 칭하여 국조(나라의 지위) 드디어 끊어지니 김씨가 38세(三十八世)로 626년이다. 대개 박씨, 석씨를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후 나라를 누림이 가장 길었으니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이로부터 차차 일어났고, 신라로부터 비로소 당나라와 서로 우호국이 됨에 중국(中國)의 사관(史官)의 법(法)이 마련함이 이미 오래 되었으나 동국(東國:우리나라)이 떨어지고 고루하여 사적은 많으나 문장(文章)이 없어서 전하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고려(高麗)의 김부식(金富軾)이 신라사(新羅史)를 편찬하는데, 그 글이 대략 갖추었으되 학자(學者)가 동사(東史)를 전문적(專門的)으로 다루지 않았고, 또는 그 판본(板本)이 오래되어 훼손(毁損)되었으므로 세상에 남아 잇는 것이 얼마 없으니 군자(君子)가 매우 두려워하던 바, 공철(公轍)이 경상감사로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 때에 참봉(參奉) 김성걸(金成杰)이 경주(慶州)에 와서 계림(鷄林)의 기적(紀績)의 글을 청하니 잘하는 일이로다.
근본(根本)을 추앙함을 멀리하니 땅은 진실로 전해 졌으되 일이 땅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어찌 글을 쓰지 않으리오! 공자(孔子)께서 주(周)나라에서 탄생(誕生)하시었으되, 구(丘:나)는 은(殷)나라 사람이라하여 스스로 미자(微子)의 자손(子孫)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하(夏)나라의 예(禮)는 내가 잘 말하겠으나 기(杞 : 주나라 시대의 국명, 하나라 우왕의 자손의 영토는 현금의 기현:杞縣)나라는 족히 고증(考證)을 하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는 능히 말할 수 있으나 송(미자가 세운 나라로써 하남성 남구현)나라는 족히 고증(考證)치 못하는 것은 문헌(文獻)이 부족한 때문이다."라 하셨으니 이제 김씨(金氏)가 사방(四方)에 흩어져 사는 것이 무려 천백(千百)집이 되나 모두 신라(新羅)로 조상(祖上)을 삼으니, 공자의 은나라와 다른 것이 없다. 어찌 하은(夏殷)의 예(禮)가 기송(杞宋)의 문헌의 고증(考證)이 못되는 것만을 탓할까? 뒤에 이 비문(碑文)을 잘 읽으면서 거의 사기(史記)에 빠진 것을 보충(補充) 함이 있으리라. 명(銘)에 이르기를 울창한 저 계림(鷄林)은 왕업(王業)을 일으킨 터전이로다. 누가 감히 존경하지 않을까? 나의 이 명문(銘文)을!
병서 순묘 계해 이월 입(幷序 純廟 癸亥 二月 立)
가의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대순찰사대구도호부사 규장각직제학지제교남공철 찬
(嘉義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巡察使大邱都護府使奎章閣直提學知製敎南公轍 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
계림의 옛일을 생각하다[雞林懷古]월과(月課)
풀과 나무 구름에 연한 옛 강산에 / 連雲草樹舊江山
화표주 우뚝하게 시문을 눌러 있는데 / 華表亭亭壓市闤
늙은 포어석은 아직도 조각이 남아있고 / 石老鮑魚猶片段
텅 빈 반월성은 절로 활등처럼 둥그렇도다 / 城空半月自彎環
누가 외침이 주 나라를 경시하게 했던고 / 誰敎外侮輕周鼎
끝내 항왕이 한 나라의 문을 두드리었네/ 終見降王叩漢關
천고에 금오산이 흥폐 존망 겪었는지라 / 千古金鰲閱興廢
한 섞인 석양 빛이 산 비탈에 가득하구나 / 夕陽和恨滿孱顔
신라김씨 : 김알지계 (新羅金氏 : 金閼智系)
신라 김알지계 김씨(新羅 金閼智系 金氏)는 경주 김씨를 대종으로 하고 대소 수십본으로 나뉘어 있다.
경주 김씨측이 58년에 편찬한 <김씨대종사>에 따르면 김알지의 후손은 신라.고려.조선에 걸쳐 전후 600여 본관으로 분종(分宗)되었는데, 동서(同書)는 그 중 266본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비교적 세계(世系)가 분명한 종파로 김성(金姓) 50여본과 동원이성(同源異姓) 7성씨(七姓氏)를 들고 있다.
경주 김씨계의 원조(元祖)인 김알지는 신라 왕실의 박(朴). 석(昔). 김(金) 3성 중 김성(金姓)의 시조인데, 알지의 탄생에 대하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알지가 나왔으므로 성을 [金]이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왕실 계통을 보면 역대 56왕 중 박씨가 10명, 석씨가 8명, 나머지 38왕이 김씨인데, 김씨왕으로는 제13대 미추왕(味鄒王)이 시초요, 그는 곧 알지의 7대손이 된다.
이러한 박.석.김 3성의 왕실 교체는 곧 신라 6촌(六村: 6개 부족) 중에서 우세한 3개 촌의 부족에 의하여 통수(統帥)의 자리가 세습되었음을 뜻한다.
그 중에서 김씨는 사량부(沙梁部) 고허촌(高墟村)의 씨족이고 김이란 성은 군장(君長). 대인(大人)의 존칭인 간(干). 한(邯). 금(錦) 등에서 취음(取音)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김알지의 후손이 수 백 본관으로 분파했다. 그 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50여 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50여 본 가운데서 광산 김씨(憲康王系). 강릉 김씨(武烈王系). 영동 김씨9神武王系)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가 경순왕의 후손으로 되어있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으로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귀부(歸附),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후비로 맞았다.
<경주김씨상계세보(慶州金氏上系世譜)>에 따르면 경순왕에게는 아들이 9명 있었는데, 그 중
장자 일(鎰; 麻衣太子)과 차자 황(湟)만이 경순왕이 왕위에 있던 죽방부인(竹房夫人)의 소생이며, 나머지는 고려에 향속된 뒤 후비로 맞은 낙랑공주의 소생이라고 한다.
이들 아홉 아들의 분종(分宗)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자 일(鎰)• • • 부안(扶安) 김씨‧ 부령(富寧) 김씨
② 차자 황(湟)• • • 나주 김씨‧ 경주 김씨
③ 제3자 명종(鳴鐘) • • • 경주 김씨
④ 제4자 은열(殷說) • • • 경주 김씨
⑤ 제5자 석(錫) • • • 의성 김씨
⑥ 제6자 건(鍵) • • •
⑦ 제7자 선(鐥) • • • 언양 김씨
⑧ 제8자 추(錘) • • • 삼척 김씨
⑨ 제9자 덕지(德摯) • • • 울산 김씨
이 중에서도 제4자 은열(大安君)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안동(舊) 김씨, 청풍 김시, 금년 김씨, 도강(강진) 김씨, 전주 김씨, 양근(楊根) 김씨, 영광 김씨, 안산 김씨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며, 나머지는 [경순왕 후손]임을 일컬을 뿐 어느 아들의 후손인지는 그 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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