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 엣지 TV에서 막 시작한 드라마가 있는 걸 알고 본방사수에 들어갔다. 2021년 8월 ‘자이언트’, 2022년 1월 ‘파리의 연인’에 이어 또다시 색다른 TV 보기를 한 셈이다. 엣지 TV가 3월 10일부터 2주간 방송한 ‘코리아 게이트’는 SBS 창사5주년특별기획 드라마다. 1995년 10월 21일부터 같은 해 12월 23일까지 방송한 20부작 정치드라마이기도 하다.
무려 28년 전쯤 일이라 당시 왜 ‘코리아 게이트’를 보지 않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제4공화국’과 방송 시간대가 겹친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해볼 수 있다. ‘제4공화국’은 MBC가 1995년 10월 18일부터 1996년 1월 15일까지 방송한 30부작 정치드라마다. ‘장세진의 텔레비전 째려보기’(신아출판사, 2005.1.31.)속 ‘정통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을 잠깐 들춰보자.
“1995년 벽두를 떠들썩하게 했던 TV 드라마가 SBS ‘모래시계’였다면 같은 해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은 MBC의 ‘제4공화국’이 아닐까 한다. SBS ‘코리아 게이트’와 맞물려 힘겨운 시소게임을 벌이긴 했지만, 지난(1996년-인용자) 1월까지 ‘장수’했을 뿐아니라 전국을 가시청권으로 하는 MBC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물론 꼭 봐야할 프로가 겹치면 녹화라든가 재방송 등을 통해 보기도 했지만, ‘코리아 게이트’는 그럴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과 다른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원거리 자가용 출퇴근의 중학교 국어교사를 하고 있을 때라 드라마 두 편 보기가 여의치 않을 수도 있었을테니까. 내내 잊고 있던 ‘코리아 게이트’를 새삼 본 것은, 그러나 남아도는 시간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오래된 ‘코리아 게이트’를 본 것은 정치드라마여서다. ‘코리아 게이트’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주연을 베풀다 김재규(김흥기) 총에 맞아 숨진 박정희(독고영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시작한다. 이후 전두환(정종준) 등 신군부가 자행한 12ㆍ12쿠데타, 5ㆍ18광주민중항쟁, 제5공화국 출범이 이어진다.
윤필용사건과 하나회를 다룬 9~10회 이후론 박정희정권 사건들이 펼쳐진다. 가령 1ㆍ21사태, 3선개헌, 10월유신, 핵무기개발, 박동선사건 등이다. 19~20회에선 다시 김재규 이야기로 돌아와 박정희와의 인연, 사형 집행 등이 드라마 대미를 장식한다.
‘코리아 게이트’는 한마디로 박정희ㆍ전두환 다시 보기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일반 드라마처럼 스토리가 쭉 이어지는 구성이 아니라 흡인력이나 집중도가 떨어지고, 다소 산만한 전개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군사쿠데타의 두 주역인 박정희ㆍ전두환을 소환해낸다는 점에서 정치드라마로서의 의미는 ‘제4공화국’ 못지 않아 보인다.
다시 ‘정통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을 잠깐 들춰보자. 무엇보다도 ‘제4공화국’의 의미는 국민의 알 권리를 상당량 충족시켜준 데 있다. 알만한 사람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특히 5공이라는 사생아 정권이 태어나는 과정이라든가 군사정권의 대부라 할 박정희 독재의 명암 등은 수많은 당사자들의 생존 내지 활동과 상관없이 역사 알기에 진일보한 시도라 아니 할 수 없다.
‘제4공화국’에 대한 이런 평가는 ‘코리아 게이트’에도 딱 들어맞는데, 보는 내내 들어찬 생각은 12ㆍ12 쿠데타가 막을 수 있었던 반란이란 느낌이다. 가령 최규하(김진태) 대통령이라든가 노재현(나영진) 국방장관이 본분을 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또 아군끼리 충돌을 우려해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은 걸로 묘사된 이건영(서상익) 3군단장도 그렇다.
그는 최근 세상을 떴는데, 살아생전 “12ㆍ12를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한 데서 보듯 어떻게 일개 부대가 육군본부ㆍ수경사ㆍ특전사ㆍ국방부 등을 기습 점령하는 게 가능했는지 안타까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미 아는 것들이지만, 새삼 치가 떨리는 하극상의 쿠데타 실상이다. 10ㆍ26과 12ㆍ12때 6수 만에 들어간 대학 1, 2년생이었던 나는 데모와 함께 전두환 화형식에도 참여했지만, 물론 그 당시엔 그걸 알 수는 없었다.
12ㆍ12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과 그의 친구 노태우가 2021년 세상을 떠났지만,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최근 전두환 손자 전우원이 “할아버지는 학살자”라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벌어진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단 이 말은 전두환 일가중에서 처음으로 5ㆍ18광주민중항쟁 유혈진압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우원은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리고 추징된 비자금 2,205억 원은 절반 남짓 환수에 그쳤다. 그래서 전두환 자녀들이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업체와 부동산 등도 그 원천이 비자금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왔다.
반면 12ㆍ12 당시 전방의 9사단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킨 9사단장 노태우는 그 아들이 5ㆍ18 묘지를 찾아 사죄했을 뿐아니라 추징 비자금도 다 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다고 12ㆍ12쿠데타와 5ㆍ18 학살의 죄가 면죄되는 게 아니지만, 전두환과 다르게 용서의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다.
아무튼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이들이 대통령인 나라의 국민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소름을 오싹 돋게 한다. 오싹 소름이 돋는 건 박정희시절 국민이었던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10월유신이 자행되던 1972년 나는 국회의사당에서 유신의 밑그림 ‘풍년사업’을 최초 발설한 최형우 의원이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야만의 시대인 줄 모르던 고2 학생이었다.
한편 조국근대화란 미명 아래 박정희 미화가 은근히 부각되는 듯해 다소 보기 불편한 점도 있다. 이와 다른 웃기는 것도 있다. 1부에서 대통령 경호원 안재송으로 나온 성동일이 11부에서 김신조로 살아 돌아오는 일이 벌어져서다. 대형 시대극인 정치드라마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따른 해프닝일 수 있지만, 캐스팅 실패는 또 다른 문제다.
가령 전두환 역의 정종준, 김영삼을 연기한 이영하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호연 유무와 별개로 정종준은 전두환에 비해 너무 뚱뚱하다. 이영하는 김영삼보다 훌쩍 큰 키라 그렇다. 15부에선 정부기관 고위층이란 사람이 ‘저희 나라’라고 해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가끔 스포츠스타들이 인터뷰에서 ‘저희 나라’라고 하는 걸 볼 수 있기도 한데, ‘우리 나라’라고 해야 맞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코리아 게이트’는 당초 32부작이다. “유신시대의 정면 해부를 다짐했던 정치극의 큰 줄기를 외면했다”는 지적 등을 받으며 시청률이 급락하자 20부작으로 축소 종영했다. 또 “시청률을 의식한 지나친 흥미 위주의 제작으로 시청자들의 역사인식을 그릇되게 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방송위원회로부터 ‘TV 드라마에 대한 일반권고’ 조치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