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 勝熱婆羅門 --- 第九 法王子住善知識
1. 善財童子의 請法
(1) 無勝幢解脫의 法力
爾時에 善財童子가 爲菩薩無勝幢解脫所照故로 住諸佛不思議神力하며 證菩薩不思議解脫神通智하며 得菩薩不思議三昧智光明하며 得一切時熏修三昧智光明하며 得了知一切境界皆依想所住三昧智光明하며 得一切世間殊勝智光明하야 於一切處에 悉現其身하야 以究竟智로 說無二無分別平等法하며 以明淨智로 普照境界하며 凡所聞法을 皆能忍受하야 淸淨信解하며 於法自性에 決定明了하며 心恒不捨菩薩妙行하며 求一切智하야 永無退轉하며 獲得十力智慧光明하며 勤求妙法하야 常無厭足하며 以正修行으로 入佛境界하며 出生菩薩無量莊嚴하며 無邊大願이 悉已淸淨하며 以無窮盡智로 知無邊世界網하며 以無怯弱心으로 度無量衆生海하며 了無邊菩薩諸行境界하며 見無邊世界種種差別하며 見無邊世界種種莊嚴하며 入無邊世界微細境界하며 知無邊世界種種名號하며 知無邊世界種種言說하며 知無邊衆生種種解하며 見無邊衆生種種行하며 見無邊衆生成熟行하며 見無邊衆生差別想하니라
(2) 菩薩道의 修行法
念善知識하야 漸次遊行하야 至伊沙那聚落하야 見彼勝熱이 修諸苦行하야 求一切智호대 四面火聚가 猶如大山하며 中有刀山이 高峻無極이어든 登彼山上하야 投身入火하고 時에 善財童子가 頂禮其足하며 合掌而立하야 作如是言호대 聖者여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而未知菩薩이 云何學菩薩行이며 云何修菩薩道리잇고 我聞聖者는 善能誘誨라하니 願爲我說하소서
2. 勝熱婆羅門이 說法
(1) 投身火聚
婆羅門이 言하사대 善男子야 汝今若能上此刀山하야 投身火聚하면 諸菩薩行이 悉得淸淨하리라
(2) 善財童子의 疑心
時에 善財童子가 作如是念호대 得人身難이며 離諸難難이며 得無難難이며 得淨法難이며 得値佛難이며 具諸根難이며 聞佛法難이며 遇善人難이며 逢眞善知識難이며 受如理正敎難이며 得正命難이며 隨法行難이니 此將非魔와 魔所使耶아 將非是魔의 險惡徒黨이 詐現菩薩善知識相하야 而欲爲我하야 作善根難하며 作壽命難하야 障我修行一切智道하며 牽我令入諸惡道中하며 欲障我法門하며 障我佛法가
지금 승열 바라문의 소개를 받은 거예요. 이 분은 불구덩이에 자기 몸을 집어던지는 그런 바라문이에요. 외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선재동자가 의심을 하게 됩니다. ‘아, 이 사람이 진짜 선지식인가? 내 몸뚱이를 불구덩이에 집어던져 넣어서 없애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별별 망상을 다 하게 하는 그런 선지식이 바로 승열 바라문이에요.
열 번째 선지식인데 십주(十住)로서는 제 아홉 번째 법왕자주 선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선재동자가 법을 청하지요. 무승당해탈에 대한 법력을 청하는데 앞의 선지식한테서 배운 그런 무승당해탈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동안 이 사람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시(爾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위보살무승당해탈소조고(爲菩薩無勝幢解脫所照故)로, 그때에 선재동자가 보살의 무승당해탈소조가 된 고로,
무승당해탈이 비추어 준 바가 된 까닭에
주제불부사의신력(住諸佛不思議神力)하며,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 신통력에 머물며
증보살부사의해탈신통지(證菩薩不思議解脫神通智)하며, 또 보살의 부사의 해탈 신통지를 증득하며
득보살부사의삼매지광명(得菩薩不思議三昧智光明)하며, 보살의 부사의한 삼매 지혜광명을 얻으며,
득일체시훈수삼매지광명(得一切時熏修三昧智光明)하며, 일체시에 삼매지를 훈수하는 그런 광명을 얻으며
득요지일체경계개의상소주삼매지광명(得了知一切境界皆依想所住三昧智光明)하며, 일체경계를 요지해서 의상소주, 생각에 의지해서 머무는 삼매지광명을 다 얻으며,
득일체세간특수지광명(得一切世間殊勝智光明)하야, 또 일체 세간 수승지 광명을 얻어서
어일체처(於一切處)에 실현기신(悉現其身)하야, 일체처에 그 몸을 전부 나타내어
이구경지(以究竟智)로, 최상의 지혜입니다. 마지막의 지혜로써
설무이무분별평등법(說無二無分別平等法)하며, 둘도 없고 분별도 없는 평등한 법을 설하며
이명정지(以明淨智)로 보조경계(普照境界)하며, 밝고 깨끗한 지혜로써 경계를 널리 비추며
범소문법(凡所聞法)을 개능인수(皆能忍受)하야, 무릇 들은 바 법을 다 능히 인수한다.
여기 인(忍) 자가 참을 인(忍) 자인데 우리가 법문을 아무리 들어도 별 표정이 없잖아요. 법문이 얼굴에 써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속으로 어떤 법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어떤 공덕을 닦았던지 간에 겉으로는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큰 공덕을 누리지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여기서는 인수(忍受)라고 합니다. 참을 인(忍)자, 받아들일 수(受)자이지요. 다른 데는 진리라고도 표현하는데, 진리 그 자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忍)자를 쓰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개능인수(皆能忍受), 다 능히 받아들여서
청정신해(淸淨信解)하며, 아주 훌륭하게 믿고 이해하며
어법자성(於法自性)에 결정명료(決定明了)하며, 법의 자성에 있어서 아주 확실하게 밝으며
심항불사보살묘행(心恒不捨菩薩妙行)하며, 마음은 항상 보살의 묘행을 버리지 않으며
구일체지(求一切智)하야 영무퇴전(永無退轉)하며, 일체의 지혜를 구함에 영원히 물러서지 않으며
획득십력지혜광명(獲得十力智慧光明)하며, 또 열 가지 힘의 지혜 광명을 획득하며
근구묘법(勤求妙法)하야 상무염족(常無厭足)하며, 부지런히 묘법을 구하여 항상 싫어함이 없으며
이 참 어려운 일이지요.
상무염족(常無厭足), 항상 싫어하거나 만족하다는 생각을 아니 하며
이정수행(以正修行)으로 입불경계(入佛境界)하며, 바른 수행으로써 부처님의 경계에 들며
출생보살무량장엄(出生菩薩無量莊嚴)하며, 보살의 무량장엄을 출생하며
무변대원(無邊大願)이 실이청정(悉已淸淨)하며, 끝없는 큰 서원이 다 능히 청정하고,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이무궁진지(以無窮盡智)로 지무변세계망(知無邊世界網)하며, 다함이 없는 지혜로써 무변세계의 그물을 다 알며
이무겁약심(以無怯弱心)으로, 겁이 없는 마음으로써
그러니까 ‘불법 그것을 어떻게 배워, 화엄경을 어떻게 배워.’이런 마음을 겁약심이라고 해요. 불교에서는 그런 마음을 겁을 잘 내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런 마음이 공부하는 데는 방해가 되지요.
도무량중생해(度無量衆生海)하며, 한량없는 중생의 바다를 제도하며
요무변보살제행경계(了無邊菩薩諸行境界)하며, 또 무변보살제행의 경계를 요달하며, 다 안다는 거지요. 깨달아 알고
견무변세계종종차별(見無邊世界種種差別)하며, 또 무변세계의 종종차별을 보고
견무변세계종종장엄(見無邊世界種種莊嚴)하며, 무변세계의 가지가지 장엄을 또 보고
입무변세계미세경계(入無邊世界微細境界)하며, 무변세계의 미세한 경계에도 들어가고
지무변세계종종각호(知無邊世界種種名號)하며, 무변세계의 가지가지 명호를 다 알아서,
여기는 뭐라고 부르는지 동네이름, 사람이름을 다 안다는 거지요. 이 세상에는 물건 이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모든 것, 무변세계의 가지가지 이름이라는 이름은 다 알며
지무변세계종종언설(知無邊世界種種言說)하며, 또 무변세계의 가지가지 언설을 다 알며,
여러 세계의 말도 다 알지요.
지무변중생종종해(知無邊衆生種種解)하며, 또 무변중생의 가지가지 이해를 다 알며,
견무변중생종종행(見無邊衆生種種行)하며, 무변중생의 가지가지 행을 다 보아
견무변중생성숙행(見無邊衆生成熟行)하며, 무변중생의 성숙한 행, 어떤 이루어진 성공한 행을 다 알며
견무변중생차별상(見無邊衆生差別想)하니라, 가없는 중생들의 차별한 생각까지를 다 보게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저 앞쪽, 비목구사 선인에게서 얻은 무승당해탈삼매의 덕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살도(菩薩道)의 수행법(修行法)이라,
념선지식(念善知識)하야 점차유행(漸次遊行)하야, 선지식을 생각하며 점차 남행을 하지요. 저 앞에서 승열 바라문을 찾아가라고 했으니까 승열 바라문을 생각하면서 점차 점차 남쪽으로 유행해서
지이사나취락(至伊沙那聚落)하야, 이사나라고 하는 마을에 결국은 왔지요.
견피승열(見彼勝熱)이 수제고행(修諸苦行)하야 구일체지(求一切智)호대, 가서 물었겠지요. 승열 바라문이 어디에 있느냐, 승열 바라문한테 이제 갔어요. 그런데 그 분이 고행을 닦아서 일체지[모든 것을 다 아는 지]를 구하는 것을 보니, 어떤 식으로 하는가 하니
사면화취(四面火聚)가, 사면에 타오르는 불 무더기가
큰 불무더기가 있는데 산과 같아요. 산만한 불구덩이를 지펴놓고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유여대산(猶如大山)하며, 큰 산과 같아요.
중유도산(中有刀山)이, 그 중간에는 칼산이 나 있어서
고준무극(高峻無極)이어든, 끝없이 끝없이 높이 솟아 있거든
등피산상(登彼山上)하야, 그 산 위에 올라가서
투신입화(投身入火)하고, 몸을 던져서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고 있더라는 거지요. 희한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바라문이라는 거지요.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정례기족(頂禮其足)하며, 그때 선재동자가 정례기족하고,
좀 이상하거나 말거나, 그렇거나 말거나 선지식이니까, 선지식이라고 앞에서 지시를 했으니까 선재동자가 나가서 예배를 올렸지요.
합장이립(合掌而立)하야 작여시언(作如是言)호대, 합장하고 서서 말하되
성자(聖者)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성자시여. 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으니,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긴 했는데
이미지보살(而未知菩薩)이 운하학보살행(云何學菩薩行)이며,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지 모릅니다.
운하수보살도(云何修菩薩道)리잇고, 또 어떻게 보살도를 구체적으로 닦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아문성자(我聞聖者)는 선능유희(善能誘誨)라 하니 원위아설(願爲我說)하소서. 듣건대 성인께서는 잘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나를 위해서 좀 설명을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제 요청을 하지요.
그러니까 이 다음부터는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의 설법(說法) 입니다.
투신화취(投身火聚)라, 그럼 몸을 불구덩이 속에 던지라고 해요.
바라문(婆羅門)이 언(言)하사대 선남자(善男子)야, 바라문이 말하되 선남자야,
여금약능상차도산(汝今若能上此刀山)하야 투신화취(投身火聚)하면, 너는 지금 만약에 능히 이 칼산에 올라서 이 몸을 저 불구덩이에다 던질 것 같으면
제보살행(諸菩薩行)이 실득청정(悉得淸淨)하리라, 보살행을 완전히 성취할 것이다.
이렇게 이제 가르치는 거예요. 이 참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던지면 그 순간 다 타버리고 죽을텐데도 그렇게 가르쳐요.
이 선지식은 가르치기를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라’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재동자는 의심(疑心) 을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의심 안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작여시념(作如是念)호대, 그때 선재동자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되
득인신난(得人身難)이며, 사람 몸을 얻기 어려운데 나보고 저기 뛰어들라네.
사람 몸을 타고난 덕분에 이렇게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공부도 하는데, 한 번 밖에 못 얻는 이 몸뚱이 집어 던지면 마지막인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득인신난(得人身難)이지요.
인생난득(人生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그러지요. 사람 몸 얻기 어렵고 거기다 불법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하지요. 우리 불자들은 그걸 알아야 돼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사람 몸 받기가 어렵고, 거기서 불법 만나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해요. 득인신난(得人身難)이지요.
이제난난(離諸難難)이며, 그 가운데 모든 어려움을 떠나기도 어려워요. 이 참, 사람 사는 것을 보면 어느 집안 치고 완전한 집안이 없어요. 그 나름대로 다 문제가 있어요. 한쪽 구석이 괜찮은가 하면 이 쪽 구석이 탈이 나고, 그쪽 구석 고쳐놓으면 이쪽 구석이 또 탈이 나요.
이제난난(離諸難難)이지요, 모든 난을 떠나기가 어려워요. 사바세계 중생이 사는 모습을 여기 다 소개해 놨어요.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어려운 현상들을 여기다 다 소개해 놨어요.
처음에 사람 몸을 받기가 어려워요. 사람 몸 받고 나니까 모든 것이 고생이고 인생은 서러운 것이고 한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 향가 중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뭐든 사람이 다 운반을 하잖아요. 경주 시내에 장육금신이라고 큰 불상이 있었어요. 큰 불상을 만드는데도 흙을 날라야 되고, 담을 쳐도 돌을 날라야 되고 흙덩이를 날라야 되지요. 기와집을 지어도 신도들이 나와서 전부 울력을 했어요.
울력을 하는데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일하기 좋도록 향가를 아주 단순하게 지어서 가르친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그 향가를 지으신 분은 양지스님이라고 아주 신통이 대단한 분이예요.
그 분은 어느 시주집에서 시주를 좀 받고 싶으면 주장자를 이렇게 던져버려요. 그러면 주장자가 그 집으로 가요. 가서 주장자가 “떨렁떨렁”해요. 그러면 그 집에서 ‘아이고, 우리 양지스님이 오셨는가’하고 그 주장자에다 쌀을 한 푸대 걸어주면 주장자가 양지스님이 계시는 석장사로 날아간답니다. 주장자가 시주를 잘 해 온다고 삼국유사에 보면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아주 간단하게 시주를 받아요. 아, 그 정도 신통력이 있는데 시주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당시 분위기가 또 한창 불교가 성할 통일신라 때인가 그 무렵인데 너도 나도 시주를 하려고 할 판에 그런 도승이 있으니 시주가 저절로 되지요.
그런 스님이 신도들에게 울력을 시키면서 향가를 부르도록 지어 줬는데 그 내용이 아주 간단해요.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딱 그것 뿐이야.
‘오다 오다 오다’, 과거에도 왔고 현재에도 왔고 미래에도 올 것이고 우리 인생은 계속 돌고 도는 거예요. 그렇게 끊임없이 이 인생을 받아서 오지만, 와 보면 결국 서러운 거예요.
‘오다 서럽더라’, 고해다 이거지요. 사바세계는 고해이고 화택이지요. 항상 문제투성이지요. 이제난난(離諸難難)이지요.
어려움 없기가 어려워요.
‘참 우리집 같이 어려울라고’ 천만에요. 다른 집도 똑 같이 어려워요. 다른 집에도 그만한 문제는 다 있다고요. 다 있어요. 따지고 보면 똑 같아요.
‘아이구, 우리집은 우환이 있어요.’ 다른 집도 우환이 다 있어요. 그래 알고 살아야 돼요. 그게 사실이에요. 서로가 안 알리고 서로 특별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서 그래요.
‘오다, 서럽더라’ 와 보니 서러운 거예요. 전생에도 서러웠고 금생도 서럽고 내생도 서러워요. 인생은 고해예요.
고해에다 화택이라는 말을 ‘서럽더라’는 말로 표현한 거예요. 힘들다는 표현이지요.
‘서럽더라 우리네여’ 우리 모두가 다 서럽지 누구만 복이 없어서 서러운 것도 아니고, 복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집만 특별히 부처님께 밉보여서 고통 받는 게 아니라고요.
‘서럽더라, 우리네여’ 우리 모두가 서러운 거예요. 다 고통 속에서 살아요. 그런 현실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공덕 닦으러 오다’ 우리는 선행 하고 선근 심고 좋은 일 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거지요.
현실은 고통이지만 좋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공덕 닦으러 오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공덕 닦는 일이라는 거지요.
간단한 넉 줄 향가 속에 다 들어 있지요. 세어보면 낱말이 몇 개 안 됩니다. 여섯 개인가 밖에 안 돼요.
‘오다 오다 오다’ 그래봐야 하나지요.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이지요.
‘서럽더라 우리네여’ 우리
그럼 뭐하러 왔느냐?
‘공덕 닦으러 오다’ 공덕, 닦는다.
이렇게 낱말은 다섯 개 밖에 안 돼요. 줄은 넉 줄 밖에 안 돼요.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그렇게 간단하게 지은 향가인데 그 당시 신라 천지에 대유행을 한 노래이지요. 그러니까 고려 때까지 내려와 가지고 일연스님 때만 해도 전부 외우고 노래 부르고 해서 삼국유사에다 기록을 해 놓은 그런 내용이지요.
법화경에서 화택이다, 고행이다, 여러 번 말을 했지요. 물론 거기는 거기대로 표현이 좋지만, 그 스님은 몇 마디로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을 했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 라는 표현까지도 거기에 다 하고 있는 참 좋은 내용이에요.
예전에는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울력을 하고 흙을 져다 나르고 기왓장을 운반하고, 돌 같은 것은 줄을 쭉 서서 인계하고 받아 넘기고 그랬지요.
옛날에 연탄 나를 때 그런 모습을 더러 보지요. 예전에 사찰에 기와를 일 때도 그렇게 했어요.
쭉 서 가지고 기와 한 장씩 주면은 받아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고 그랬지요. 한 열 명이나 스무 명쯤 서 있으면 저 위에까지 쑥 올라가요.
이제는 그런 것도 없어졌지요. 기계가 하도 발달해서 기계에다 올려놓으면 저 위에까지 척척 운반을 다 해버려요. 참 볼만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이제는 볼 수가 없지요.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해서 인생의 현상을 깨닫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치는 이런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에도 인생이라는 것은 어려움 투성이다, 고통 투성이, 서러움 투성이, 한많은 인생이라 이거예요.
여기에서는 선재동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저 불구덩이에 뛰어들면 이제 죽으니 별별 생각이 다 나는 거예요.
사람 몸 받기가 어렵고 우리가 어려움을 떠나기가 어려운데 또 저런 어려움을 만났지요.
득무난난(得無難難)이며, 어려움 없는 것을 얻기가 어려워요. 결국은 어려움 없기가 어려운거지요. 무난(無難)을 얻기가 어려운거지요. 그러니까 다 어렵다 이겁니다. 고난 속에 산다는 거지요.
득정법난(得淨法難)이며, 청정한 법 얻기가 또 어려우며,
그런데 법을 열심히 얻어 공부 잘하고 있는 나를 보고 지금 죽으라고 하니 이 어찌 되냐는 거지요.
득치불난(得値佛難)이며, 부처님을 만나기 어려우며
자기가 만난 것이, 자기가 누린 것이 모두가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이 상황에서 이것들을 다 버려야 하나, 이거지요.
구제근난(具諸根難)이며, 제 근을 갖추기가 어려우며,
기억은 잘하는데 소견이 없고, 소견은 있는 데 기억력은 없는 이런 사람도 있지요.
그리고 노래는 잘 하는데 춤은 못 추고, 하여튼 어느 한 구석 모자람 없이 완전무결하게 다 갖춘 사람은 잘 없어요.
구제근난(具諸根難), 제근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갖춘 온갖 능력을 말할 수 있어요. 온갖 능력을 다 갖추기가 어렵다.
문불법난(聞佛法難)이며, 불법 듣기가 어려워요. 맨날 불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아이고, 맨날 그 소리가 그 소리..’라고 하지만 사실 또 인연 없는 사람들은 그게 또 어려운 일이에요.
우선인난(遇善人難)이며, 착한 사람 만나기가 또 어려워요.
봉진선지식난(逢眞善知識難)이며, 참 선지식을 만나기가 또 어려워요. 곳곳에 선지식이 많지만 진짜 바르게 인도해 주는 선지식이 누구인가 하는 입장에서는 선지식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수여리정교난(受如理正敎難)이며, 이치대로 바르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또 어려워요.
여리정교(如理正敎), 정말 중요한 말이에요. 이치에 딱 맞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귀에 솔깃한 소리는 전부 정교(正敎)가 아니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거의 정교(正敎)가 아니에요. 바른 가르침이 아니에요. 그런데 바른 가르침만 하면 재미가 없거든요. 그저 실실 졸리고 하나도 재미없고 뭔지도 모르겠고, ‘에이 그까짓 거 노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러지요.
바른 가르침은 이렇게 귀에 안 들어온다고요. 재미가 없어요. 귀에 솔깃하고 재미가 있는 것은 거의 사교야, 잘 모르겠거든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이 없어요. ‘아, 이거 재미있는 거 보니 엉터리인가보다, 재미없는 거 보니 이건 진짜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맞을 거예요.
수여리정교난(受如理正敎難), 여기 그렇게 해 놨잖아요.
이치와 같이 설명하는 바른 가르침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거예요. 사실 솔직하게 그렇잖아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고 잘 받아들이고 그러잖아요. 부처님 이야기도 아주 정직하게 그대로 곧이 곧대로 하면 재미가 없는 거예요.
득정명난(得正命難)이며, 정명(正命)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직업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거 정말 정교에 맞는 직책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쉬운 게 아니에요. 어렵지요. 바른 생명을 얻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삶의 수단, 바른 수단으로써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 전에 초파일에 이런저런 농담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옛날이야기입니다.
돈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 앞에 등을 켠다고 그러는데 여기에 정말 깨끗한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정말 깨끗한 돈은 자기도 모르지요. 자기는 깨끗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는 과정에서 어떻게 잘못됐을 수가 얼마든지 있지요. 자기는 물건이 괜찮다 싶어서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물이잖아요. 그런 경우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지요. 그런 경우까지 따지자면 정말 깨끗한 돈은 몇 푼이나 되느냐는 거지요.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정명(正命)이라고 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선재동자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법행난(隨法行難)이니, 부처님 가르침대로 법을 따라서 행하기가 어렵다.
차장비마(此將非魔)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장차 마구니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선재동자가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선재동자가 생각하기를, 사람 몸을 얻었고, 생각해보니 그 모든 어려움을 떠나기가 어렵고...이런 어려운 문제를 그냥 쭉 순식간에 한 번 떠올려 본 거지요.
우리의 삶이란 게 이러한데 나더러 죽으라 이거지요. 그러니 저게 마구니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소사야(魔所使耶)아, 마구니가 덮어 씌어서 그런 게 아닌가?
마구니가 직접 그럴 수도 있고 또 마구니가 덮어 씌어서 마구니가 시키는대로 하는 수도 있지요.
이건 아주 안 좋은 이야기인데 안 하면 좋겠지만 주의하라는 의미로 할테니 들어보세요.
저기 아주 젊은 스님이... 젊지는 않네요, 오십이 넘었으니..한창 활동을 할 스님이야기입니다.
이 스님은 6년 동안 무문관에도 가 있고 그랬습니다. 무문관이 어디인가 하니 기림사 넘어 북안인데 그곳에서 도반 서넛이서 딱 짜가지고 6년 인가 결사를 한 적도 있고 그랬어요.
그렇게 열심히 잘 살던 스님인데 절을 지어가지고서 지장보살을 모시고 천도재를 많이 지네요. 요즘 곳곳에 그것이 유행하잖아요. 그건 문제가 좀 있어요.
지장보살을 모시고 천도를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천도를 하다 보니 어중이떠중이 온갖 유주무주 고혼들이 다 몰려오는 거예요. 천도할 때 축원도 그렇게 한다고요. 한 사람을 천도하면서 유주무주 고혼이 다 이고득락하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주인이 있는 영혼, 주인이 없는 영혼, 동상동하 유주무주라고 하거든요. 이 동네 위에 있는 귀신, 이 동네 아래에 있는 귀신, 이초부목지전영, 나무나 풀, 돌에 붙어 있는 그런 귀신 등 온갖 귀신이란 귀신은 다 천도해지이다, 축원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정작 또 귀신을 많이 천도하는 데는 귀신들이 많이 있나 봐요. 별별 귀신들이 다 모여 와 있는 거지요. 천도 받으려고 그러는지 어쩌려고 그러는지 하여튼 몰려와 있나 봐요.
그 스님이 있는 곳도 지장천도를 많이 하는 곳입니다. 내 상좌하고 도반이라서 부랴부랴 쫓아가서 보고는 나도 이제 충격을 좀 받아서 하는 소리입니다.
어떤 신도님이 스물아홉 먹은 자기 아들이 정신이 약간 이상해서 절에 있으면서 고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날 마침 불공을 마쳤어요.
그러니 이 스님이 기가 등등해 가지고는 정신이 이상한 그 청년에게 심하게 뭐라고 꾸중을 했다고 그래요. 아침인가 저녁인가 꾸중을 했다고 그래요. 그렇게 하고는 그 날 이제 불공을 하고 있었다고 그래요. 법당에는 신도님들이 가득 있고 한창 천수경을 치고 있었고, 이 놈도 어딜 가든 항상 어머니가 데리고 다니는데 이날도 어머니가 옆에 데리고 앉아 있었지요.
스님이 천수경을 한창 치고 있을 때입니다. 옆에 있던 보살의 도반이 “야, 너희 아들 밖에 나갔다, 나갔다.” 그러자 그 어머니보살이 “괜찮아, 금방 들어 올거야” 하고 있는데 나갔던 아들이 칼을 가져와서는 그 스님을 찔러가지고 그 자리에서 죽었잖아요.
그런데 나가는 것도 못 붙잡고 칼을 들고 법당에 들어오는데도 전부 입이 안 떨어지더래요. 어떻게 말릴 겨를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스님도 힘이 장골이라, 그런데도 상황이 죽으려고 해서 그런지 전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예요.
어제인가 초재가 있어서 범어사의 어떤 스님이 재에 갔다가 왔다고 해요. 그런 일도 다 있었다고요.
귀신을 자꾸 많이 모으고 하면 그런 일도 벌어져요. 그런 사람은 심하게 꾸짖으면 안 됩니다. 제 정신이 아닌데다 심하게 꾸짖으니까 이걸 제대로 받아들이면 좋지만 못 받아들이면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이성이 없는 거지요. 그런 사람들은 잘 달래야 되지요.
천도한다는 것은 잘 달래가지고 환희한 마음으로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것이지 절대로 공갈을 해서 쫓아 보내는 게 아니에요. 불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돼요.
부처님은 쫓아내는 것이 없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환희한 마음으로 자기가 제 발로 다른 곳을 간다든지 다른 몸을 받도록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구병시식이고 뭐고 전부 그렇게 되어 있지요.
‘옴 아암악’이라는 게 발심 수행 보리 열반 그렇거든요? 발심시키고 수행하고 보리를 증득하여 열반에 들게 하는 그 순서로 되어있어서 어떻게 하더라도 제도하는 형식으로 해야지, 꾸짖거나 위협하거나 쫓아내거나 하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구병시식에 대해서 스님들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구병시식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에요. 부처님 품에서 쫓아내는 건 없어요.
어떻게 하더라도 달래고 교화하고 환희한 마음이 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 정신이지 쫓아내는 것은 없습니다.
잘못 알고는 쫓아내는 형식으로 구병시식을 하는데 쫓아내면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그 귀신은 어디로 가야돼요?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너무나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그런 일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항상 어머니가 지키는데 그 때는 나가는 것을 뻔히 보고도 “괜찮다, 금방 올거다”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다른 때는 안 그러는데 말이지요. 칼을 가지고 들어와도 아무도 말리지를 못하고 입도 안 떨어지고 오금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순간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어쨌든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곳에 갔다 온 스님이 주지실을 잘못 지었느니 그런 소리도 하고 그래요. 주지실이 보니까 요렇게 높이 쌓아 가지고 법당 위에 있더라나 뭐라나 그런 소리도 있고 그래요. 하여튼 살기가 어려워요. 어쨌든.
이치를 좀 알려고 하고,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라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불사가 잘 되고 기가 등등하고 하니까 너무 그런 쪽으로 그렇게 나갔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어요. 너무나 안됐지요.
우리가 어떤 사실에서 손해만 보고 말 일이 아니라 참고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회향이 되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것이 이해가 되어야 되지 않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참고가 되어야 그 스님의 죽음이 헛되지가 않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고 해석을 하고 싶더라고요.
여기 보면 선재동자도 선지식이라고 해서 오긴 왔지만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하니까 이게 마구니인가, 아니면 마구니가 시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거지요.
장비시마(將非是魔)의 험악도당(險惡徒黨)이, 장차 마구니 험악한 무리들이
사현보살선지식상(詐現菩薩善知識相)하야, 거짓으로 보살선지식의 모습을 나타내어 가지고서
이욕위아(而欲爲我)하야 작선근난(作善根難)하며, 나를 위하는 척 해서 선근 짓기가 어려워
사실 우리가 선근을 짓고 좋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 좋은 일이 잘 안 되잖아요. 선근 하기가 어렵고
작수명난(作壽命難)하야, 수명을 제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어려워,
수명을 짓기가 어렵다는 거지요. 제대로 천수를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이 복이지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큰 복이 무언고 하니 천수를 누리다 가는 거예요.
타고난 생명은 어지간히 팔구십은 그래도 살다 가야 이 땅에 온 보람이 있는 것이지 중간에 가는 것은 제일 안타깝지요. 부모에게도 안타깝고 누가 봐도 안타깝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수명을 짓기가 어려워서,
장아수행일체지도(障我修行一切智道)하며, 나의 일체지도 수행 짓는 것을 장애하고자 하며,
이 마구니가 장애하고자 한다는 거지요.
견아영입제악도중(牽我令入諸惡道中)하며, 나를 이끌어서 저 악도 중에 들어가게 하며,
욕장아법문(欲障我法門)하며 장아불법(障我佛法)가, 나의 법문을 장애하고자 하며, 나의 불법을 장애하고자 함이 아닌가,
저 非자를 여기다 쓰지요.
나의 법문을 장애하고 나의 수행을 장애하고 나의 불법을 장애하고 그러다 악도에 떨어지게 하고,
악도에 떨어지게 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까, 나를 이끌어다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하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이런 별의별 의심을 선재동자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선지식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이들도 선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선재동자가 만나는 많은 선지식 중에서 이런 별별 선지식이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 내 이웃, 내 가족, 내 자식, 우리의 부모, 나 이외의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가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나타난 사람들이라고 하는 자세, 무조건적인 그런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선지식이다, 라고 하는 그런 이가 몇이나 있겠어요
승열 바라문이 여기에서 꼭 그런 의미에서 나타났다기 보다는, 여기는 아직 깊은 뜻이 또 있어요. 불구덩이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뭐겠어요? 결국 우리 몸이 다 탄다는 거예요. 몸은 번뇌덩어리 아닙니까? 번뇌를 다 태운다는 그런 의미도 됩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거예요.
지혜의 불로 번뇌를 다 태운다는 그런 의미가 되겠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 보다는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또 선지식 중에는 얼토당토 않은 이런 일을 가르치는 선지식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선재동자 같이 뛰어난 지혜인도 의심을 일단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종내에 가서는 선지식이구나 알게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을 아무리 선지식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보기에 ‘암만 봐도 저 사람은 선지식 같지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선지식이지요. 지내놓고 보면 선지식이지요.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속 썩이고 그렇게 애 먹이더니 나를 철들게 하려고 그랬구나. 나에게 뭔가 인내를 가르치려고 그랬구나! 한 생각 돌이키고 보면 배울 점이 많아요.
잘해 준 사람보다도 잘 못해준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더 많아요. 따지고 보면요. 두고두고 생각할 꺼리가 있거든요. 두고두고 배울 점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자세가 여기서 우리가 또 한 번 생각해야 할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승열 바라문은 많은 선지식 중에서도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고 삶 자체도 어렵다는 그런 이야기, 그리고 그럼에도 이러한 상황을 연출하는 이 분이 결국은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하는 그런 거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나를 그렇게도 어렵게 만든 그 사람이 결국은 나의 선지식이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첫댓글 신라향가에 대한 설명이 참 인상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연보리님,고맙습니다._()()()_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_()()()_ 오늘 어쩐지 마음이 끌려 이 법문을 읽었습니다. 요즘, 다른 사람은 무엇으로, 어떻게 사나 유심히 생각하고 있었는데....오래오래 음미할 구절을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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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
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연보리님! _()()()_
()()() 감사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철들게 하려고 나에게 인내를 가르쳐주었구나!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를 애먹이고 속썩인 사람은 나를 철들게 할려고 인내를 그랬구나. 잘해준 사람보다 잘못해준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욱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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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 닦으러 오다’ 우리는 선행 하고 선근 심고 좋은 일 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거지요. 현실은 고통이지만 좋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공덕 닦으러 오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공덕 닦는 일이라는 거지요.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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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모든 어려움을 떠나기 어렵고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
離諸難難
得無難難
聞佛法難
遇善人難
受如理正敎難
得人身難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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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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