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리
略史
명월리가 분리되기 이전에는 현재의 상명리, 동명리, 금악리를 포함한 마을이었다. 명월리의 설촌유래에 대해서는 김영돈(제대교수 1977) 민속촌 지정보존에 따른 지정대상 촌락개요 및 보존방안에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다.
명월성내에는 500년전 제주고씨(濟州高氏)가 거주하였으며 다음 진주진씨(晋州秦氏)가 지금의 명월하동에 처음으로 입주하였다고 전승되고 있다.
잇달아 16세기 후반에 군위오씨(軍威吳氏)가 아라리(我羅里)에서 중동(中洞)으로 입주하여 명월리의 주성을 이룩하게 되었다는데 이러한 설촌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군위오씨(軍威吳氏) 성을 가진 이가 이 마을에 장가들었다.
사냥을 버릇처럼 즐기는 그인지라 그 날도 말을 타고 꿩사냥을 나섰다. 들판과 밀림을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한 노인(진주진씨)이 아름드리 나무를 베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나무를 베어 무엇을 하겠느냐는 군위오씨의 물음에 집을 지으려 한다는 진씨(秦氏)의 답변이었다. 더불어 살고 싶으니 좀 나눠 줄 수 없겠느냐고 오씨가 간청하며 성씨가 군위오씨라 하니 물 맑은 이 지경은 오씨가 차지해 살아야 마땅한 땅이라면서 서로 도우며 이웃해 살자고 벤 나무를 나누어 주었다.
이런 이유로 군위오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점차 그 자손이 번창하여 오늘날 13세대 약 400년에 이르고 있다.
그 나무를 베던 이 진주진씨(晋州秦氏)가 이미 터전을 마련한 곳이 하동이요 군위오씨(軍威吳氏)가 새로 설촌한 곳이 중동이니 지금의 명월리는 하동 중동 상동으로 잇달아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명월리 중동 강승하씨)
중동의 명월교는 일제시대인 서기1931년 3월(昭和 6年 3月)에 축조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아치형 다리 축조기술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 행정의 중심지
서기 1300년 고려 충렬왕 26년에 제주에 동서현을 설치하였을 때 명월현이 되었는데 서기 1608년에는 현촌제를 폐지하고 방리제가 설치되자 명월은 우면(지금의 한경면, 한림읍, 애월읍) 소재지가 되고 면장직제로서는 명월도약정이었다가 그 후 명월풍헌(현 읍장직위)으로 바꾸어 졌다.
17세기초(서기 1623년) 금이악(현 금악)이 분리되어 나갔으며 18세기초(서기 1732년) 독포(독개 : 현 옹포리)가 분리되었다.
서기 1879년에는 우면이 신우면(현 애월읍)과 구우면(현 한림읍과 한경면)으로 분할됨에 따라 명월은 구우면 소재지가 되었다.
풍헌시대에는 풍헌자택에서 집무하다가 면장제로 바꾸어지게 되자 명월성내의 사환곡창 일부를 면사무소로 썼었다.
서기 1928년 임창현 면장이 면사무소를 옹포리로 이전하였으며 또한 서기 1936년에는 김창우 면장이 한림리로 옮겼으니 명월리는 사실상 오랜 세월을 통한 제주서부의 행정 중심지 였던 것이다.
나. 교육과 문화의 본산
명월은 교육문화의 본산이었다. 일찍이 인종원년(1545)에는 목사 박형수(朴亨秀)가 벽지 자제의 교육을 위하여 명월성 서쪽에 월계정사를 건립(월계정사 명월성서)하여 서학이라 했었으니 이는 김녕포구 위에 건립된 김녕정사와 아울러 동서상응의 주요교육기관이었다.
이 월계정사에서는 그 근처에 거주하는 자제들을 모아 교육시켰는데 교사는 고을사람 중에서 학문이 뛰어난 자를 가려 사장(師長)으로 삼았었다.
또한 서기 1831년(순조 31년)에는 지방자제 교육기관인 우학당이 명월리에 세워졌으니 이는 세화리의 좌학당과 함께 목사 이예정이 건립했던 것이다.
시대의 변천과 현대식 학교 교육제도의 시행에 따라 서기 1914년에 수업년한 4년제인 보명숙(사숙장 임창현 : 당시 구우면장)이라는 개량서당이 명월성내 서재실옥에 설립되어 운영되다가 서기 1921년 사립 구우면 보통학교로 개칭되고 이어 서기 1923년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가 설립인가되니 사립구우면 보통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구우공립보통학교는 명월리에서 개교하여 10여년이 지난 서기 1934년 7월 20일에 한림리(현 위치)로 이설 하였으나 근래까지 명월리는 이 일대 교육문화의 본산으로서 찬연(燦然)했던 것이다.
다. 군사요새지
삼별초란때 삼별초군이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여몽연합군과 공방전을 벌이던 고려 원종 11년(1270 11월 삼별초의 위장 이문경이 명월포에 상륙하여 관군과 싸워 이겨 제압함을 기점으로 하여 명월진의 기능이 두드러져 일찍부터 군사요새지로 군림하였다.
공민왕 23년(1374년) 원의 목자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당대의 명장 최영장군이 이들을 토벌코자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천명을 이끌고 명월포로 상륙하였고 목자들이 3천여 기마병으로 이 포구에서 항거하자 대군이 진격하여 패주(敗走)하는 목자들을 토벌한후 이곳으로 다시 귀환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명월진성을 석축으로 개축하고 또 연변에 배가 닿을 수 있는 곳에 보를 다 쌓았으니 더욱 견고한 요새지가 되었으며 서기 1800년경에는 수군총감(현 해군경비사령관)이 주재 하였던 일도 있어 이곳은 제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새가 되는 곳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사회 교육뿐 아니라 우리의 경제를 지배하고 그들의 식량정책은 우리의 농촌을 비참하게 했다.
서기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우리에 대한 국정이 더욱 심하여 전시동원태세를 강요하고 창씨제도라는 괴이한 제도까지 마련하여 우리의 성명조차 지니지 못하게 하고, 모든생활을 그들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희생하였다. 강제적 징병제에 농민들이 피땀흘려 생산한 곡물의 강제공출이 무자비하게 시행되었으니 농촌생활은 빈궁해 질 수밖에 없었다.
- 주민
명월리와 동명리의 행정단위 구역은 광복이전과 지금하고 달라진 곳이 없다. 인구수에 대한 당시의 자료가 없어 인구수를 밝힐 수는 없으나 명월리는 오씨, 강씨, 김씨, 양씨, 홍씨, 진씨, 고씨 등이 主姓이고 동명리는 양씨, 김씨, 변씨, 강씨, 문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는데 명월리와 동명리는 약 70년 전까지 제주도 서부지역의 교육문화의 중심지였으니 주민들의 의식속에는 언제나 반촌(班村)이라는 긍지를 갖고 생활하였다.
- 의생활
집집마다 물레가 있어서 솜으로 실을 만들고 베틀로 무명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어 대부분 자급자족했다.
평상복으로는 고장중이, 소중기, 단중기, 소개저골, 적삼을 입었는데 무명옷(목금복)이다.
외출복 또는 예복으로는 치마저고리, 두루막, 관디, 장옷 등이 있었고 노동복으로는 갈중이, 굴중이, 갈적삼이 있었는데 평상복으로도 입었다.
노동복으로는 애용된 갈옷은 목금복(木錦服)에 생감을 빚어 감물을 들여 갈황색으로 만든 옷인데 비로 외관상으로는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남녀가 가리지 않을뿐 아니라 땀이 묻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 식생활
식량작물로는 수도(水稻), 육도(陸稻), 관맥, 맥주맥, 대두, 고구마 등을 주로 재배했다. 수도의 생산량은 전체 생산량의 5% 정도에 불과하여 백미는 관혼상제때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소비되고 잡곡을 주식으로 했다.
관맥은 주작물로써 생산량은 식량작물 전체량의 50%를 넘겨 주식량이 되었으며 광복전 일제 시기에는 작물의 강제공출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고생하기도 했다.
- 교육
옛 교육인 유교교육을 살펴보면 일찍이 인종원년에 목사 임형수가 명월성 서쪽에 월계정사를 건립하여 벽지자제를 교육시켰는데 교사는 고을 사람 중에서 학문에 뛰어난 자를 가려 수장으로 삼았다. 또한 순조 31년(1831년)에는 지방자제 교육기관인 우학당을 세화리의 좌학당과 함께 명월리에 건립하여 운영케 한바 있고 고을에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는 자택에 글방을 두어 지방자제의 교육에 힘쓴 분도 많은바 특히 향교 훈장 월간선생, 오인호의 교학 활동은 유명하다.
명월지 수군만호 시대에는 명월성내에 서재실을 설치하여 이 지방 유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였으며 현대식 교육제도의 시행에 따라 1914년에 보명숙(개량서당)이 설치되었는데,
1921년에 구좌면 사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1923년에 사립보통학교가 해체되면서 구우공립보통학교가 동소에서 개교를 보았으나
1934년 7월 한림리로 학교가 이설됨을 끝으로 광복후인
1955년 7월 23일 한림초등학교 명월분교장이 개교될 때까지 현 명월교 학구 내에는 공교육기관이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명월교 학구 출신 자제들은 한림초등학교로 취학하여 원거리 통학을 하게 되고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황국신민의 서가와 일본신사참배 등을 강요받았으며 우리글과 우리역사교육이 금지된 가운데 우리말 사용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 통신 수송 기타
현대적인 교통 통신시설이 전무해서 전보나 우편이용은 한림까지 가야했고 버스 운행도 없었다. 식수 운반은 물허벅이 이용되었고 화물과 농산물의 운반은 가축(우마)과 인력에 의존하였으며 일부 농가에 우마차가 있었다.
곡물도정은 몰방애(연자마)를 이용하고 제분은 맷돌을 이용했다.
마. 광복이후
1) 4·3사건 발생과 부락주민의 수난
서기 1948녀 4월 3일 4·3사건 발생을 중산간 부락에 대한 치안이 어려워지자 명월리 상·중·하동과 동명리의 문수동, 한천동, 남문동 주민들은 군작전상의 필요에 의하여 한림리와 옹포리로 소개되고 명월리 상동 등 일부 부락가옥은 소실되어 부락은 폐허가 되었다.
생활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피해는 막대했으나 역사적 불운과 무질서의 와중에서도 주민들은 온갖 어려움을 내핍과 인내로 꿋꿋이 버티어 나갔으며 1949년에는 마을 복구 제건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재건사업이 시작되는 초기에는 벽과 지붕만이 있는 가건물에서 한때 집단 생활을 면치 못하는 고생을 겪기도 했다.
2) 새마을운동과 근대화 물결
서기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회의에서 농어민의 잘 살아 보려는 의욕과 자조적인 노력을 불러 일으키도록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시에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이곳 농촌에서도 활기차게 추진된 바 주민들이 쏟아온 땀과 의지는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면에 있어서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해 놓았다.
이러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오직 선조들의 오랜 생활속에서 단합된 근면 절약 자조하는 삼대정신이 새마을정신으로 밀착 승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결과라 하겠다.
3) 주민의 생활수준
1960년대 초기까지의 생활사정은 식량문제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 봄이면 보릿고개(춘궁기)라고 해서 절량농가도 있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진행과 새마을 운동은 농촌개발을 가속화시켜 명월리와 동명리의 주민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1960년대 말 부터는 각종 비료가 넉넉하게 공급되어 농산물의 생산과 농가소득을 점차 증대시키고 1970년대 초에는 상수도와 전기도 가설되어 근대적인 문화생활을 가능케 했다.
<지명유래 >
남문동(南門洞)
명월성 남쪽문에 위치한 마을로서 '남문통' 또는 '남문동(南門洞)'이라 한다.
한샘이(漢泉洞)
부락 안에 맑은 샘(湧泉)이 있음으로 '한샘이' 또는 '한천동(漢泉洞)'이라 불리었다.
문수물(汶水洞)
이 부락안에 용천수가 있음으로 일컫게 되었으며, 원래는 효동이었으나 서기 1881년에 동명리에 속하였다.
진근동네(鎭近洞)
이 부락의 남쪽 200M 지점에 명월성을 구축하여 진을 두었던 사적이 있었으므로 진에 가깝다 하여 진근동(鎭近洞)이라 하였다.
명월천 팽나무군락
한림읍 명월리 마을 안을 흐르는 명월천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명월리 아랫 마을에 '돌물'이 있는데 이곳에도 큰 팽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다.
명월천의 팽나무는 사람들이 심어서 자란 것이 아니라 마을이 설촌될 당시부터 있었다 한다. 오씨와 진씨가 먼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할 때 나무가 굉장히 울창했었다. 농지를 개간하고 집을 지으며 수많은 나무들을 벌채했는데 명월천의 나무는 보호하고자 해서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명월리는 삼백년 전에 설촌되기 시작해서 명월천으로 번성했다. 그런데 명월천이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데 풍수지리에 의하면 바로 살수(殺手)라고 한다. 살수가 들면 마을에 큰 화재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전해 오는 말에 의해서 명월천 팽나무를 보호해서 살수를 막았다고 한다.
지금도 팽나무들이 명월천 양쪽에 울창하게 들어서 있고 그늘 밑에는 월대가 있는데, 옛날 양반들이 이곳에서 풍월을 즐겼다고 한다. 명월천 조금 위로 올라가면 홍애라는 무지개 다리가 팽나무 사이에 놓여져 있어 명월천 양쪽 마을의 중요 교통로의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팽나무와 어울리어 명월천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오술생 제보 >
남이 참봉영감
명월리를 개척한 오씨 선조가 큰 부자로 소를 천마리나 기르고 있었다. 그 당시 오씨선조 집에 남이라는 소를 관리하는 큰 복을 타고난 종이 있었다.
명월리 위쪽에 물오름이 누워 있는 형태로 있고 제일 높은 봉우리를 남이봉이라고 한다. 남이라는 종이 소를 먹이며 놀았던 곳이라 해서 남이봉이라 불렀던 것이다.
남이는 매일 소천마리를 몰고 남이봉에 가서 방목을 했다. 소를 여기저기 흩어지게 하여 풀을 뜯게 한 다음 남이는 봉우리 소나무 그늘 밑에서 잠을 청한다. 한참 자다가 소를 모을 시간이 되면 가까이에 있는 소 한 마리를 끌어다 소귀를 잡고 비틀면 소가 아픔을 참지 못하여 큰소리로 울어댄다. 그러면 소들이 풀을 뜯다 소리나는 곳으로 몰려들게 되고 남이는 소의 숫자를 헤아린 다음 소 한 마리를 잡아 마른 나무를 주워다가 구워먹는 것이었다.
하루는 오씨 선조가 남이 종이 어떻게 해서 천마리나 되는 소를 관리하는가 궁금한 생각이 들어 살펴보기로 했다.
남이가 소를 몰고 들로 나간 다음 오씨 선조는 뒤를 따라가 숨어서 살펴보았다. 소를 풀어놓은 남이는 한참을 자다 일어나 소 한 마리를 끌어다 목을 비틀어 소들이 몰려들면 수를 헤아린 다음 그 소를 잡아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매일 이렇게 소를 한 마리씩 잡아먹어 버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오씨 선조는 남이를 하루 쉬게 하고 자신이 직접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오씨 선조는 남이 종이 했던 그대로 했다. 잠을 자다 시간을 맞추어 일어나서는 소를 끌어다 귀를 비틀었으나 소는 한 마리도 모여들지 않았다. 소들도 항상 관리하는 주인이 아님을 알았든지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안되겠구나. 소를 한 마리씩 잡아먹더라도 종놈이 관리를 하는 게 낫겠구나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남이 종이 하는 일에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남이 종이 죽자 소들이 주인의 죽음을 알았든지 하나 둘씩 죽어갔다. 남이가 소를 관리할 때 소가 번성했던 것은 남이가 마소 복을 타고났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마소를 사육하는 사람들은 음력 칠월 열흘날에는 남이봉 기슭에 가서 고사를 지낸다.
"남이참봉영감! 제물을 정성드려 올리니 마소 번창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고사를 지내면 마소가 질병에 걸리지 않고 번창한다고 한다. <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오술생 제보 > - 이상 명월리 마을 홈피 참조
팽나무
팽나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9호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의 남부 지방에서는 폭나무, 포구나무 등으로 불린다. 나무가 매우 크게 자라며 옛날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운이 약한 곳을 보태주는 비바림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을 만드는데 많이 심어졌다.
명월 팽나무군락은 북제주군 한림읍 중동마을을 흐르는 시내 양쪽에 위치하며, 팽나무와 푸조나무 1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팽나무군락의 나이는 50년 이상으로 생각되며, 길이 13m, 둘레 5m 안팎의 큰 나무도 10여 그루가 있다. 이 군락에는 산유자나무, 보리밥나무 등이 사이사이 섞여 있어 웅장한 경치를 이룬다.
명월리는 예로부터 선비 마을로 알려져 있어 인근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겨 냇가의 수목들이 잘 보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계곡의 나무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는 명월대가 있으며, 명월대 옆에는 반달모양의 돌다리가 있어 맑은 시냇물과 함께 운치를 돋구어 주고 있다.
명월 팽나무군락은 팽나무가 집단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어 고대 식물상을 추리하는 자료가 되고, 생물학적 가치가 높아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월대
찔레꽃 가수, 백난아의 고향 명월리
찔레꽃향으로 다시 피어난 백난아
국민가수 백난아 자료집 출판기념식, 추모 음악회 열려
2010. 05.17 <한라일보>
'국민가수 백난아' 를 기념하는 자료집 출판식과 작은 음악회가 지난 16일 오후 한림읍 명월리에서 김방훈 제주시장, 지역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행사는 '국민가수 백난아'가 제주출신이면서도 그 동안 제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잊혀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아쉬워한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사업회(회장 양순자)가 어렵게 사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개최하게 된 것이다.
1부 행사인 자료집 출판기념식에서는 국민가수 백난아가 지나온 발자취와 그 동안 자료수집의 어려움속에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경과가 보고되었다.
2부 '찔레꽃향이 흐르는 작은 음악회'에서는 고인을 기리는 추모시 '해마다 찔레꽃은 피는데' 의 낭송과 소프라도 박현주의 '찔레꽃이 불려졌고, 4년 전 제주에 정착한 가수 한상일의 '웨딩드레스'가 행사장에 울려 퍼질 때 이날의 행사는 절정을 이루었다. 이어 백난아의 3녀 이현옥씨는 어머니 못지않은 가창력으로 '갈매기 쌍쌍'을 멋들어지게 불러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날 행사를 주최한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사업회(회장 양순자)는 올해 9월쯤 백난아 가요제를 성대하게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난아 가요제
제1회 백난아가요제가 열린 협재해수욕장 전경. ⓒ제주의소리
제주 백난아가요제에서 열창하고 있는 참가자들. ⓒ제주의소리
(동영상을 들으시려면 상단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꺼주세요~♬)
제주출신 문성욱이 부른 다른 찔레꽃
유명한 장사익의 슬픈 찔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