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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장불입 시인 옆 버들치 시인 | |
[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
지난번 지리산의 ‘낙장불입’ 시인의 이야기는 내가 시국이 엄청 흉흉할 때 혹시 위안이 될까 싶어서 아껴둔 것이었는데 -이제 시국이 이 이상 흉흉해지지 않아야 할 텐데 흑!-지난번 글이 실린 후 여러분이 그 시인의 삶 자체에서 위로를 얻으셨나 보다. 나는 친구를 잘 둔 덕에 인사도 많이 받았다. 인터넷판의 댓글도 훈훈했다. 이건 자랑인데, 나에게는 그런 비장의 친구가 몇 명 더 있다. 아마도 이 글의 원고료를 받고 나면 정말 한번 지리산에 내려가 따뜻한 술이라도 사야 할 텐데 밀린 원고는 많고 찾는 사람은 집안에 세 명, 집 밖에 삼십 명쯤 우글거리고 있으니 걱정이다.
독한 소주잔에서도 매화는 피어나고 낙장불입 시인의 옆 동네에는 버들치 같은 눈을 가진 시인이 산다. 지난번 낙장불입 시인이 오토바이라도 타고 다닌다면 이 버들치 시인은 그냥 걸어 다닌다. 그의 집에서 읍내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약 25분(솔직히 나는 그 길을 걸어 내려와 본 적이 없지만). 그는 연세 50만원이 아니라 무료로 거기에 산다. 지난번 시인의 집이 아내까지 있는 방 두 개에 거실 하나, 목욕탕 하나인 집이라면 이 버들치 시인의 집은 거의 원룸이다. 화장실은 그의 비료제조소이고 말이다. 오년 전, 몇 번의 칩거와 이혼을 겪고 거의 탈진 상태에 있는 내가 염치없이 옛 친구들을 찾자 친구들은 공지영의 “사교계 리필 파티”를 한다고 나를 그리 데리고 갔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섬진강변의 매화 구경을 하러 간다며 들떠서 그들을 따라갔다.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백화점 바겐세일도 가지 않는 나는 유명한 매화 관광지에서 사람 구경만 하고 지쳐 있었다. 그날 밤의 숙소가 그 집이었다. 친구들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내 사교계 리필이 아니라 자신들의 잔에 소주를 리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피곤한 밤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니 시인이 쟁반에 하동 녹차를 우려서 햇볕 따스한 집 뒤 언덕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와아…! 그곳에는 오십년은 되었을 매화나무가 한 그루 아침 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시인은 지난봄 갈무리해 둔 매화 봉오리를 냉동실에서 꺼내 와서 각자의 찻잔에 넣었다. 그러자 30초 후쯤 놀랍게도 비췻빛 찻잔 속에서 매화 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그냥 두고 볼 내 친구들이 아닌지라, 그들은 어젯밤 먹다 남은 소주를 가져와 잔에 따르고 거기에 매화 꽃봉오리를 넣었다. 그러자 그 독한 소주잔에서도 매화는 피어나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남도의 따스한 봄 햇살 아래서 소주를 마시는 동안 우리의 머리칼 위와 소주잔에 떨어지는 분분한 매화 꽃잎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섬진강변에서 은어 천렵을 벌이게 되었다. 그날따라 왠지(?) 은어가 안 잡혀서 그들이 준비해 온 커다란 도마와 칼이 좀 무색한 판이었다. 입은 많은데 은어 수가 적어서 우리는 엄격히 자신의 입으로 들어갈 은어의 수를 나누고는 고추장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은어의 배를 다 가르기 전 말이 없던 시인이 갑자기 결연한 어투로 나섰다. “내 몫이 몇 마리나 되지?” 먹는 욕심 없는 사람이 웬일이지 싶었지만 우리가 세 마리쯤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비닐봉지에 섬진강 물을 넣고는 아직 살아 있는 은어 세 마리를 거기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니들 참 잔인하다, 이렇게 이쁜 것들을 어떻게 먹을 수 있니?” 그는 결국 자신의 집 뒤에 조그맣게 파놓은 연못에 그걸 넣었는데 내가 다음번에 고추장을 싸 가지고 그의 집을 방문해 보니 은어는 없었다. 두고 보자며 입맛을 다시던 사람이 나뿐은 아니었다는 이야긴가 보다.
연못에 키핑해둔 내 은어는 어디 간 거니 그는 한번은 강도를 당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지갑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푸른 지폐 두 장 이상은 아닐 텐데, 그는 지갑을 보고 어이없어하는 강도를 보며 말했다고 한다. “돈이 너무 없어서 좀 거시기한데, 이거라도 가지고 가면 현금서비스는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 얼마 안 되지만 이건 우리 엄니가 나 장가 못 갔다고 해준 금반지고요.” 나는 그 시인이 교회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인 것을 알지만 이쯤 되면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던 예수의 제자들이 울고 갈 일이다. 그 강도는 시인이 보기에도 약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없이 현금서비스를 받고는 그 금반지는 돌려주고 갔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다. 그 시인은 내가 아는 한에서 거짓말을 안 한다.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났다. 지리산 가는 길에 그 시인 집 근처 술집에 앉았는데 낙장불입 시인이 요즘 버들치 시인의 심기가 안 좋다는 말을 전했다. “관 값을 잃어버렸어. 그래서 요즘 거의 죽게 생겼어.” 편당 십만원인 시를 써서 먹고사는 버들치 시인은 봄이면 뒷산에서 나물을 뜯고 여름이면 직접 가꾼 푸성귀를 먹으며 가을이면 제 밭에서 난 무와 배추로 먹거리를 마련하면서 어떻게든 통장에 늘 잔고 이백만원을 남겨 두고 산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그의 관 값. 혹시 혈혈단신인 그가 죽더라도 친구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장례식 비용이라고 했다. 그는 통장의 돈이 이백이 좀 넘어가면 희색이 만면하고 통장의 잔고가 이백에서 좀 떨어지면 사색이 되어 지내는 터였다. 그런데 지리산에 놀러 와 그의 집에 묵었던 이 중 하나가 나쁘게 말하자면 그에게 사기를 치고 그 돈을 빼앗아 가버린 셈이 된 것이다. 강도에게 현금서비스를 받으라고 권하는 시인을 사기 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지리산 어귀 술집에 나타난 버들치 시인은 그래서 사색이었다. 친구들은 정말 그가 그 이백만원 때문에 병이라도 들까 걱정했고 그는 관 값이 없다는 조바심 때문에 술도 거의 마시지 못했다. 우리는 그에게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무진 애를 쓰다가 결국 맹세를 하게 되었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죽으면 우리가 관 값 이백은 모아 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각자 얼마를 낼 것인지를 약속했다. 말뿐이어서 그랬는지 액수는 금방 이백을 넘어섰다. 우리는 시인이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인은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다. “니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야! 내 관 값은 죽어도 내가 만들어!” 이쯤 되면 ‘자립심도 병인 양’한 것이라서 우리는 더는 말을 못했다. 시인은 가끔 내가 그리로 가면 토끼풀로 반지도 만들어 주고 내놓는 나물 밥상 곁에 슬며시 자운영 꽃다발을 내놓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그의 밥상이 예뻐지기 때문이란다. 나는 몇몇 출판사에 이 시인들을 소개하고 각자 자신의 이런 이야기를 쓰도록 하라고 건의를 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들의 소소한 삶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될까 싶어서 말이다. 미국 버몬트에 타샤 튜더가 있다면, 한국 지리산에 이들이 있다고 자랑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의가 있은 지 벌써 오년이 다 돼 가도록 이들은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를 쓸 생각도 안 한다. 그리하여 기다리다 못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 관 값은 죽어도 내가 만든다!”
나는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한다.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도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골치가 아프지 않고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입가 가득한 미소와 감사이다. 지리산 두 분 기다리십시오. 담에 가서 원고료 두 배만큼 술을 살 테니! 공지영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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