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제목: 黑崎自敍傳
구로자끼 자서전
출판 일자: 1978년 3월
28일
편집 겸 발행인: 이종기
출판사: 세종문화사
정가: 1,150원
오랫동안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을 오늘 마침내 읽었다. 제목은 흑기자서전(黑崎自敍傳)이다. 흑기라는
이름을 일본어로는 구로자끼라고 한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분이다.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책 중에 구로자끼가 쓴 신약성서 주석집이 있다. 그 책들과 함께 저자의 자서전을
물려받았다. 이렇게 오래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신선하고 뭔가 고문서를 대하는 느낌이다. 그의 신약성서 주석을 가끔 읽어보았는데 오래 전에 기록된 책이지만 상당히 건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곁에 두고 볼 생각으로 표지도 새로 만들어 비닐로 포장을 해 두었다.
지난 주에는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의
책, 구안록(求安錄)을
읽었다. 이 책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의 일본인 버전이다. 우찌무라
간조가 어떤 학식과 신앙을 가졌는지를 잘 드러낸 소책자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와 영어, 그리고 독일어에도 능통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기까지의 신앙여정을 학문적 성찰을 통해 잘 표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만난 다양한 종류의 신앙인들을 보면 평안을 찾아 떠나는 그의 신앙여정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큰 유익이
된다.
구로자끼는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다. 그에게서 감화를 받았으며, 그를 선생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추천을 받아 독일에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그를 따라 전도인으로 훈련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성서강연회를 이어간 무교회주의자 전도인이다.
나는 청년 시절에 무교회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경계하는 말을 들으면서 교회 안에서 지내왔다. 그런데 무교회주의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그저 교회를 부정하는
자들이라고만 알았다. 그것은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주장하는지 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제 돌이켜보면 참 이상하기도 하다. 청춘 시절 나의 신앙은 그저 담임목사의 말을 따르는 것과 그 분들의 설교에 감동을 받는 것 이상으로 자라지
못했던 것 같다.
구로자끼 고우기찌(黑崎幸吉)는
일본의 동북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1868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18년 뒤인 1886년에 구로자끼는 출생했다. 그는 몰락한 무사도 가문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가난했다. 우리나라의 몰락한 양반들이 가난해도 선비정신을 지키면서 살고자 했던 것처럼 구로자끼의 아버지는 무사도를 소중히
여기면서 유교적 전통에 충실하게 살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배우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자라났다는 구로자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유교문화권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던 그는 소학교와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에 진학하였고 거기서 우찌무라 간조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삶은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던 이야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 아내를
잃은 이야기, 유망한 직장을 버리고 전도인으로 살 것을 결심한 이야기,
그리고 유럽으로 떠난 유학생활은 하나의 영화처럼 나의 생각에 그려졌다. 우리나라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짓밟던 시절 일본의 지성인 그리스도인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된다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구로자끼가 유럽의 독일에 유학을 떠났을 때 독일은 패망직후라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동양인의 눈으로 독일인들의 열악한 삶을 보고 그린 이야기는 매우 실감났다. 일본 돈 1만엔으로 2년 반 동안의 유학생활을 넉넉하게 하고도 남았다니 독일의
화폐가치가 그렇게 폭락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일본이 패망했을 때 구로자끼의 가정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하도 어려워
출판할 종이를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정말 인생은 새옹지마다.
자서전은 자신의 삶을 자기가 적은 글이다. 출생에서부터 글을 쓴 때까지의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 그리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나 살아간 일본인이 일본의 동아시아 침공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읽는다는 것은 한국인인 나에게는 매우 신선했다. 현 세종대학교 교수인 호사카 유지 교수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상식적이고 기독교정신에 투철한 일본인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처럼 어려운 시절에도 기독교 월간지 영원한 생명을 출간하여 일본의 지성인들에게 기독교정신을 보급하려고
힘썼으며, 성서강연회를 통해 젊은이들의 마음에 불을 댕긴 그는 우찌무라 간조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그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우찌무라 간조는 재림신앙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 무교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다고 한다. 그런 진실함과 인류애가 그의 추종자들의 가슴 속에 면면히 흐르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몇 년 전에 천로역정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2014년 6월 13일). 그 때의
소감을 나는 이렇게 남겼다:
http://cafe.daum.net/Wellspring/8SB1/99
존 번연이 고민하던
주제는 죄에서부터의 해방과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온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만고불변이다. 특히 청교도들처럼 그리고 유교적 가르침에 젖은 사람들처럼 양심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이
정도임을 배우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완전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는 정말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바울의 한탄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최고의 은혜와 최종의 결론이 될 것이다. 루터도 오직
은혜를 외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른 시대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있다.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시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엄숙주의나 유교적
예의범절을 따르는 것은 숨막히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기준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다가 절망의 늪에 빠지고 거기서 건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뿐이라는 것이 지나간 시대의 복음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절망이 크고 깊은 만큼 대속의 은총은 절절한 감사와 해방의 선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느끼는 과제나 절망의 이유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들은
목사같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그들이 보기에 목사는 일종의 사업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차라리 구도자가 될지언정 성경지식을 팔아 생계수단으로 삼는 것은 도무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는 종말이 중요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세계평화가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일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한계와 세상의 부조리로 인한 염세주의에서 오는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면,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뿐인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바칠만큼 가치 있는 일을 찾는 일이 중요한 문제일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제들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나타날 수도 있고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달리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구로자끼의
아버지는 유교적 세계관에 철저하게 헌신한 분이다. 그리고 일본의 봉건주의 시절에 살았던 분으로 영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라고 믿었다. 유교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지키고 살다 보면 마침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달라고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서양 기독교는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 구로자끼는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그
과정에서 갈등하고 고민했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우리는 시대와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바울도, 루터도, 칼빈도, 우찌무라 간조와 구로자끼도 다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았던 분들이다. 그들의 고민이 있었고 그들의 시대가 넘어야 할 과제도 있었다. 그 안에서 양심과 신앙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들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과제가 우리에게도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려고 씨름한 이야기가 우리 앞에 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고 우리들도 우리의 양심과 신앙에 근거하여 이 씨름에 임해야
한다. 그것이 구도자의 바른 길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후배들은 우리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씨름과 고민을 이해하고 거기서 힌트나 용기를 얻어 자신들의 과제를 해결할 것이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선배가 되기 위해서 오늘도 구도자의 길을 성실하게 걷고자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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