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조경 유형별 정비방향 | |
1 | 개관 |
① 문화의 발전과 소멸은 터를 잡고 있는 자연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형, 기후 등의 여러 요인에 의해 인간의 삶과 생각하는 사고가 달라 그 지역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동쪽에 위치(북위 33˚6”~43˚, 동경 124˚11”~131˚52”)하고 있으며, 면적은 22만㎞²이다. ②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백두대간이 국토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으며, 동고서저 지형으로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은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산지가 국토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강, 금강, 영산강 등 큰 하천은 서해로 흐른다. 이러한 하천의 하류 주변에는 평야(김포평야, 호남평야, 나주평야 등)가 형성되었다. 또한 삼면이 바다로 연결되어 다양한 해안 지역과 많은 섬 등이 독특한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다. ③ 한반도의 기후는 4계절이 뚜렷하고 일교차가 크며, 여름엔 고온다습하고 겨울엔 춥고 건조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00~1,400㎜ 정도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우리 선조들은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불렀다. ④ 이러한 우리만의 풍토(환경, 지형 등), 기후, 정서, 생활 문화가 선사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월지(안압지)에서 한국전통조경이 꽃피웠다. 경주 월지의 특징적인 요소인 수직으로 쌓은 장대석(바른층쌓기),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낙하 방법 등은 경주 불국사 구품연지, 창덕궁 애련지, 부용지, 경복궁 경회루 등에서 조성 시기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고 나타난다. 이러한 한국적 전통 조경의 집약적인 공간이 창덕궁 후원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창덕궁이 세계 유산 등재로 한국적 전통 조경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 |
2 | 한국 전통조경 형성 |
첫째, 자연 환경 강수량 기후 등 이 전통 조경 문화를 나누는 중요한 요소다, 강수량(동양 벼농사; 강수량이 1,000㎜이상, 서양 밀농사; 1,000㎜ 이하), 기온, 자연지형 등에 따라 인간이 살아가는 의식주 문화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전통 조경 공간도 그에 맞도록 만들어졌다. | |
둘째, 건물의 형태가 전통조경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다. 서양에서는 흙(벽돌 등)이나 돌이 건축재로 사용되면서 외부에서 침입 등의 보안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당, 담장 등과 같은 구조가 불필요했다.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창문을 크게 낼 수 없어 건물 안에서 밖을 보는 매력은 떨어지고 밖에서 건물과 조경공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그에 맞는 정형식 조경 문화가 발달했다. 한국에서는 목재가 건축재료 사용되면서 개방적인 공간이 만들어져 외부와의 공간 분리를 위해 마당, 담장 등과 같은 공간과 시설물이 설치됐다. 한국의 건물은 창문이 크고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져 자연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차경(借景)수법이 발달했다. 이는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 원경(遠景, 산・강 등) → 중경(中景, 나무 마을 등) →근경(近景, 마당) →축경(縮景, 마루・방에 산수화나 풍경화 배치)의 경관으로 개방성이 강하다. 또한 건물의 경사지는 화계(花階)를 처리하고 건물의 뒷산은 후원의 기능을 했다. 이는 내부와 외부가 하나가 되는 공간 형태이다. | |
셋째, 자연재해(지진 등)가 건물의 구조와 조경의 형태를 차별화 시켰다. 일본은 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건물은 다다미 방 등의 형태로 주거 문화가 형성되었고, 연못은 자연석을 들여쌓기 형태로 만든 회유임천형(廻遊林泉形)으로 발전했다. 한국은 지진의 발생과 강도가 적어 온돌을 사용하는 주거 문화가 형성되었고, 연못은 장대석 등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 형태로 만든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으로 발전했다. | |
넷째, 한국 전통조경은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의 입지, 구성, 배치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 신선사상(神仙思想), 음양오행(陰陽五行), 유교(儒敎) 등을 믿고,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의 명당지에 건물을 짓고 전통조경 공간을 만들어야 길흉화복(吉凶禍福)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러한 사상에 따라 연못 등 조경시설물과 수목 등을 배치하고 구성했다. |
3. 유형별 전통조경 복원정비 | ||
(1) | 연지(연못) | |
가 | 동궁과 월지 | |
①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676년에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신라 말기에는 승려 도선이 중국에서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였다. 그 후 풍수지리설은 우리나라의 도읍, 주택, 무덤 등의 외부 환경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② 동궁과 월지는 1963년 359,042m²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궁은 월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 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③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월지의 서(西)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월지로 추정하고 있다. ④ 문화재 관리국에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에 걸쳐 학술적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발굴조사 보고서 ‘안압지’가 간행되었다. 이 안압지는 통일신라(7세기~ 10세기)시대의 유적으로 고려, 조선시대를 데려오면서 새로운 조영이 없었기 때문에 신라의 조경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수 만점의 출토유물은 모두 신라 당대의 생활유물로 고려나 조선시대 유물층이 없어 교란되지 아니한 유적임을 발굴 조사 과정에서 확인했다. 따라서 월지는 7세기 한・중・일의 조경문화 비교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⑤ 월지는 건물이 있던 서쪽과 남쪽은 장대석을 높이 쌓아 건물을 배치했다. 그러나 서쪽과 북쪽 그리고 조산과 세 섬의 호안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인데 길이가 20~50cm, 높이가 15~20cm 정도의 것으로 성채를 쌓듯이 눕혀 쌓았다. 못과 및 호안의 못 바닥에 괴석단을 설치하여 괴석이 배치되어 있다. 괴석의 치석 기법을 보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리될 수 있다. 특치(特置), 산치(散置), 군치(群置), 첩치(疊置)이다. 이들 괴석은 돌부리를 땅 속이나 물 속에 묻히게 하여 암산의 봉우리나 절벽과 바위섬 같은 상징적 조형물을 형성하고 있어 바다 속의 선산(仙山)같이 만든 것이다. 이러한 7세기 신라의 치석 기법은 일본 고산수식(枯山水式) 석정(石庭)의 조형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⑥ 월지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⑦ 월지 발굴 당시 일본의 공영방송과 언론에서 일본조경 전문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일본의 ‘아스카지’와 거의 같은 모습의 석조. 호안 등이 월지에서 발굴되었다고 소개하면서 이는 일본의 아스카지가 한반도 경주 월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소개했다. | ||
조경정비 방향 | ① 50년이 된 현재 시점에서 1973~1975년 발굴조사 보고서와 복원공사 내용을 검토하여 잘못 복원된 지역 등을 보완 정비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조경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시행 ② 3개의 섬, 무산 12봉, 괴석 등이 잘못 배치한 수종과 인접해 크게 자란 나무 등으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어 이를 정비 ③ 넓게 번식되어 있는 개연・수련 등은 제거하고, 발굴해서 나왔던 연함을 복원하여 연꽃을 일부 공간에 식재 ④ [삼국사기] 등의 기록(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으로 보아 사계절 피는 화목류와 초화류를 식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크게 자란 교목류와 넓게 번져버린 대나무 숲(현재 제거된 상태) 등을 정리(이식, 제거 등)하고 월성과 계림 등 현재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적 내 오래된 수목을 조사하여 식재 ⑤ 보호책 및 시설물을 디자인하여 동궁과 월지의 경관에 부합도록 정비 ⑥ 동궁과 월지(입수구, 출수구 등) 관람 동선 재정비 | |
나 | 경복궁 향원지, 향원정 | |
①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이다.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 때 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에서 따온 싯구(詩句)로써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유하던 침전의 후원으로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등 원림(苑林) 공간이 된다. ②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본래 세조 2년(1456)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③ 향원지는 4,605m² 넓이의 방형(方形)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④ 향원지의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⑤ 향원정에 들어가는 다리인 ‘취향교(醉香橋)’는 본래 목교로서 1873년에 향원정의 북쪽에 건천궁(乾淸宮)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취향교는 건천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으나, 6.25 전쟁 당시 없어졌으며, 그 후 1953년에 지은 다리가 향원지 남쪽에 서있었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m, 폭 165cm)이다. ⑥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성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다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함화당(咸和堂), 집경당(緝敬堂)이 위치해 있다. | ||
조경정비 방향 | ㉮ 경복궁 향원지(香遠池), 향원정(香遠亭), 취향교(醉香橋) 등을 3년간의 복원을 거쳐 2021년에 정비 완료 ㉯ 취향교는 이번에 원래의 자리(향원정 북쪽)를 찾아 복원. 이전에는 석교 교각에, 목재 난간을 갖춘 평교형태였다가 이번에 아치형 목교로 제 모습으로 복원 ㉰ 향원정의 6개 기둥 중 동남 방향 초석(礎石)에 대한 조사를 통해 건물 기울어짐의 주요 원인이 초석을 바치는 초반석의 균열로 인한 초석 침하현상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져 완전 해체하고 복원 ㉱ 향원정은 목재 연륜연대조사를 통해 1881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채된 목재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어 향원전 건립 시기는 1885년으로 추정 ㉲ 이번 복원 작업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구들의 구체적인 형태와 연도(煙道)의 위치 등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유구를 그대로 활용하여 향원지 호안석축 외부와 연결된 낮은 형태의 굴뚝을 복원하였고, 배연 실험으로 아궁이에서 연도를 통해 연기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것도 확인 ㉳ 복원 과정에서는 전통 방식의 말뚝기초 시공을 통해 지반을 보강(시행 과정에서 연약 지반으로 콘크리트를 타설해 복원하자는 의견이 제시. ㉴ 향원지는 방지원도의 장대석 이완지역 부분 보수 ㉵ 연지 준설(수련 등 완전 제거) 후 연함을 제작하여 연식제 ㉶ 연지 주변에 버드나무 등 식재하여 경관 개선 | |
다 | 동구릉 숭릉 연지 | |
① 동구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을 쓰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 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 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라는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②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顯宗, 1641~1674)의 비인 명성왕후의 무덤이다. 연지는 숭릉이 조성된 이후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숭릉 홍살문에서 동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숭릉 연지에 관한 기록은 ‘춘관통고(春官通告)’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춘숭릉 연지는 재실 동북편에 자리하며 길이 310척, 너비 30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③ 문헌 기록에서 확인된 조선 왕릉 관련 연지는 19개소이며, 현재 남아 있거나 위치가 파악되는 연지는 11개소이다. ④ 조선왕릉관리소가 발족(2012년) 된 후 2013년에 실시한 구리 동구릉 내 숭릉 연지 발굴 조사(대한문화재연구원)는 조선 왕릉의 연지를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학술 조사로, 연지의 구조와 축조 방식 등 조선 왕릉 연지 시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⑤ 발굴 조사 결과 연지의 규모는 남쪽 제방 48.9m, 북쪽 제방 58.9m, 서쪽 제방 76m, 동쪽 제방 73.53m로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며, 원도(圓島)는 연지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⑥ 연지는 17세기 후반 석축으로 조성되었다가 이후 한 차례 개축(改築)을 거치면서 토축에 가까운 구조로 변화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입수부와 출수부의 구조가 온전한 상태로 확인되어 물길의 흐름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 ||
조경정비 방향 | ㉮ 숭릉 연지 자리는 원래 농업용수로 사용하던 저수지로 활용되고 있었으나, 기록 등을 볼 때 연지가 확실시되어 발굴 조사를 실시 ㉯ 발굴 조사를 근거로 방지원도의 연지를 기존 석축에 사용한 석재(장대석 등)을 최대한 이용하여 복원 - 원도에는 소나무 5주를 식재 - 연지 내에는 연함을 만들어 연을 식재 ㉰ 입수구 출수구 찾아 복원 ㉱ 연지 주변의 기존 활엽수목을 제거하고 휴게 공간으로 조성 - 휴게 의자 등 배치 ㉲ 숭릉은 비공개 지역이었으나 일반에 공개하고 연지를 정비하여 원래의 참배 동선을 찾아 정비 | |
라 | 화성 융릉 곤신지 | |
① 영조 38년(1762)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 묘를 조성했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로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했다. 이후 정조 13년(1789)년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했다. 순조 15년(18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했다. 그 후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3년(1899)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隆陵)이라 했다. ② 공간 구성상의 특이점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지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③ 곤신지는 정조 13년(1789) 현릉원(융릉)이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 자리를 옮긴 후 이듬해 조성한 원형의 연못이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원형으로 조성한 것으로 ‘용의 여의주’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남서방향(곤신방)으로 이 자리가 용릉의 생방(生方, 능묘자리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이기 때문에 연못을 조성했다. ④ 조선시대 관리였던 남경철이 필사본으로 그린 건릉지 지도에는 곤신지의 존재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1980년대 융건릉 일대 항공 촬영한 사진에서 건릉지에 표시된 곤신지와 비슷한 지점에 작은 연못이 있는 것을 보고 그 곳을 당시에는 곤신지로 여겼다. | ||
조경정비 방향 | ㉮ 화성지구관리소(융건릉)과 1998년 여름 폭우로 매립된 융릉 소하천을 준설하면서 폐허된 원형의 곤신지를 직원들이 발견 - 화성 지구 관리소 소장 목을수(풍수지리 전문가)는 당시 습지였던 곤신지를 자체 인력(직원)을 동원하여 조사를 실시한 결과 놀랍게도 장대소로 만든 원형이 잘 남아 있었음 ㉯ 발굴된 장태석과 입・출수구 등은 최대한 원래의 석재를 사용하고, 일부 부재만 보완하여 정비 ㉰ 연지 내에는 연함을 만들어 연 식재 ㉱ 주변에 지반을 넓게 정비 ⇨ 전문적인 발굴 기관을 통해 조사연구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학술적인 자료를 남기지 못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