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노식의『조선창극사』에는 판소리사를 수놓았던 89명의 소리꾼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명창으로 꼽는 데 손색이 없는 소리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소리꾼을 판소리 명창으로 부
를 수 있을까? 동리 신재효가「광대가」에서 제시한 판소리 명창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법례(法例)인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와 각 시대를 대표할 만한 대명창들의 면면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다
음과 같은 조건을 두루 갖추어야 명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판소리 기량이 탁월해야 하고,
둘째, 그 소리는 정통성과 역사성이 있어야 하며, 셋째, 내세울 만한 개성적인 더늠이 있어야 한다. 넷
째, 판소리 향유 층의 폭넓고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고, 다섯째, 판소리 발전에 뚜렷하게
공헌한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춘미(春眉) 박록주야말로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박록주는 판소리에 일생을 바치며 치열한 예술적 삶을 살다간 판소리 거장이다. 20대부터 장래가 촉
망되는 소리꾼으로 주목을 받았고,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0세기의 판소리, 특히 해방 후의 판소
리사의 중심에 서서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이화중선, 배설향, 김초향, 김추월
등 적지 않은 여류 명창들이 판소리로 명성을 얻었지만 박록주만큼 명문의 법통 소리를 고루 익힌 정통
파 소리꾼은 드물다. 그리고 김소희, 박귀희, 박송희, 한애순, 조상현, 한농선, 성창순 등 이 시대의 판
소리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자신의 개성에 맞게「흥보가」를 새로 다듬었으며, 열
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여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사실 등
에서 오늘날의 판소리에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이가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록주는『한국일보』에 연재된「나의 이력서」에서 1905년 1월 25일(음)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번지에서 아버지 박중근(朴重根)과 어머니 권순이(權順伊) 사이의 셋째 딸(命伊)로 태어났고, 농사
를 많이 짓는 편이어서 먹고사는 걱정이 없었으나 부친이 한량이어서 집안일은 어머니가 감당했으며
자신도 집안일을 많이 도왔다고 했다. 그런데 호적에는 1905년 2월 15일생, 부 박재보(朴在甫), 모 박
순이(朴順伊)로 되어 있고,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선산의 고로(古老)들은 한결같이 박재보는 무업에 종
사하였고, 소리선생도 하였다고 한다.
박록주는 부친에게 토막소리를 배우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험난한 예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박록주가 본격적으로 판소리 학습에 나선 것은 1916년 그의 나이 12세 때이다. 선산에 온 협률사 공연
을 본 부친이 목소리가 쟁쟁한 딸을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때 마침 선산군 해평면의
도리사(桃李寺) 부근에 머물고 있던 박기홍 명창에게 보냈던 것이다. ‘녹주(綠珠)’라는 예명도 이때 부
친이 지어준 것이다.
박기홍이 누구던가? 동편제의 법통을 혼자 두 손바닥 위에 받들어 들고 끝판을 막다시피 한 종장(宗
匠)이요, 가신(歌神)·가선(歌仙)이라는 평을 받던 절세의 명창으로 일찍이 대원군과 고종의 두터운 총
애를 입어 참봉의 직계를 받았다. 그는 소리금을 정하고 소리하였을 정도로 예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
단하였고, 죽어도 비굴하게 살지 않는다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선산 군수는 박기홍이 인
사를 오지 않자 몹시 괘씸하게 여겨 오만한 버릇을 고친답시고 박기홍을 불러서 소리를 시켰는데 트집
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적벽가」의 관운장의 호통소리에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오히려 망신만 당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박록주는 박기홍에게 두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20시간 이상 소리공부에 매달려「춘향가」
전 바탕과「심청가」일부를 배워 동편제 소리의 기틀을 닦았고, 또한 예술인이 가져야 할 자세도 배웠
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박기홍에게 배운 소리와 예술가로서의 정신은 훗날 박록주가 명창으로 우뚝
설 수 있게 한 밑거름이자 명창의 길을 올곧게 걸어 갈 수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다.
소녀명창으로 이웃 고을인 김천, 왜관, 상주 등의 잔칫집에 불려 다니던 박록주는 1918년(14세) 선산
에 온 김창환의 협률사를 따라다니며 김창환과 김봉이에게 단가와 토막소리 한두 개를 배우게 된다. 그
후 대구 앞산에 있는 절에서 두 달 동안 강창호에게「심청가」의‘초앞’부터‘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와 단가「고고천변」을 배웠다. 이어 대구의 샘 밖 골목에 있던 행수기생 출신 앵무의 달성권번에 다
니며 춤, 시조, 소리를 배우는 등 기생수업을 했고, 1919년에 다시 대구의 권번에서 김점룡, 임준옥, 조
진영에게 남도민요「육자배기」와「화초사거리」를 배웠다. 박록주는 이때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
가는 명창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1921년(17세)에 원산 명창대회에서 원산 부호인 남백우와 만나 살림을 차렸고, 1923년(19세)에 서울
로 올라가 송만갑에게 단가「진국명산」과「춘향가」의‘사랑가’에서부터‘십장가’까지 배웠다. 우미관
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서울에서도 명창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한남권번 소속으로 본격적
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창환에게‘제비노정기’를 배운 것도 이 무렵이다. 1926년(22세) 가을에 송만
갑, 김해 김록주와 진고개에서 녹음하면서 음반 취입(일동축음기주식회사)을 시작하였고, 그 후 콜럼비
아, 빅타, 오케, 폴리돌, 시에론, 다이헤이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또한 1926년 9월 16일 경
성방송국 국악방송에 처음으로 출연한 이래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하였다.
1930년(26세)에 한성권번 소속으로 조선음률협회 주최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남백우와 헤어지고,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무렵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나중에「봄봄」,「 동백
꽃」의 소설가가 된 김유정의 끈질긴 구애사건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김유정은 거의 매일 구애편
지를 보냈고, 환심을 사기 위해서 비단 치맛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도 박록주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혈서를 보내는가 하면 직접 찾아가 죽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김유정은 박록주와의
일을 단편소설「두꺼비」(1936년)와「생의 반려」(1937년)로 남겼다.
권연 하나만 피워도 멋만 찾는 이놈이 자전거를 타고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일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
이나 그러나 제말이면 으레히 복종할 걸로 알고 나의 대답도 기다리기 전에 달아나는 건 썩 불쾌하였
다. 이것은 이놈이 아직도 나에게 대하여 기생오래비로서의 특권을 가질랴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사실
놈이 필요한 데까지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하였다. 더는 싫다, 생각하고 애꿎은 창문을 딱 닫힌 다음 다시
앉어서 책을 뒤지자니 속이 부걱부걱 고인다. 하지만 실상 생각하면 놈만 탓할 것도 아니요 어디 사람
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났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것두 서루 눈이 맞어서 달떴다면이야 누가 뭐래랴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
를 그리 대단히 녀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하니까 놈이 이 기미를 알고 나를 찾아와 인사를 떡 붙이고는 하는 소리가 기생을 사랑할랴면 그 오래
비부터 잘 얼려야 된다는 것을 명백히 설명하고 또 그리고 옥화가 즈 누이지만 제 말이면 대개 들을 것
이니 그건 안심하라 한다. 나도 옳게 여기고 그담부터 학비가 올라오면 상전같이 놈을 모시고 다니며
뒤치다꺼리하기에 볼일을 못 본다. 이게 버릇이 돼서 툭하면 놈이 찾어와서 산보 나가자고 끌어내서는
극장으로 카페로 혹은 저 좋아하는 기생집으로 데리고 다니며 밤을 패기가 일수다. 물론 그 비용은 성
냥 사는 일 전까지 내가 내야 되니까 얼뜬 보기에 누가 데리고 다니는 건지 영문 모른다. 게다 즈 누님
의 답장을 맡어 올 테니 한번 보라고 연일 장담은 하면서도 나의 편지만 가져가고는 꿩 구어 먹은 소식
이다. 편지도 우편보다는 그 동생에게 전하니까 마음에 좀 든든할 뿐이지 사실 바루 가는지 혹은 공동
변소에서 콧노래로 뒤지가 되는지 그것도 자세 모른다. -「두꺼비」에서-
박록주는 유정이 죽은 후 평생 동안 그의 사랑을 매정하게 뿌리친 것을 후회하였다.
1931년 초에 김성수의 부친인 김경중의 배려로 남원 주천면에 있던 김정문을 찾아가 20여일 동안
「흥보가」‘( 초앞’부터‘제비 후리러 나가는데’)와「심청가」전 바탕을 배웠다. 남원에서 소리를 배우고
돌아 온 5월 초 복잡한 집안 문제와 신용희와의 애정 문제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4년(30
세) 호남 갑부 우석 김종익과 만났고, 이 무렵을 전후한 시기에 송만갑에게「적벽가」, 정정렬에게「춘
향가」와「숙영낭자전」, 유성준에게「수궁가」를 배웠다. 1934년 5월에 창립된 조선성악연구회 회원으
로 각종 명창대회와 창극에 출연하여 이름을 날렸다.
1942년(38세) 조선음악단의 일원이었고, 1944년(40세) 조선이동창극단의 일원이었다. 1948년(44
세) 봄 박귀희·김소희·임춘앵·정유색·임유앵·김경희 등 30여명의 여류명창을 규합하여 여성국
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창극「( 옥중화」,「 햇님 달님」)을 무대에 올렸다.
1950년(46세) 정남희 등의 월북 강요로 고초를 겪었고, 1.4 후퇴 때 오태석·신숙·이용배·조농
옥·김세준·한농선 등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대에 입대하여 1952년 초까지「열녀화」로 군위문공연
을 다녔다.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게 된 것은 1952년 3월의 일이다. 1953년(49세) 대구에서 강태홍, 박
춘흥, 박연자, 박병두, 한영순, 나경애 등 40여명으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여「열녀화」로 동부전선
에 위문공연을 다녔다.
박록주의 유랑극단 생활은 1960년 초 급성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하면서 끝나게 된다. 1960년(56
세) 서울국악예술학교에 나가는 등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4년 12월 24일 김연수·김소
희·김여란·정광수·박초월 등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3년 11월 5일 판소리「흥보가」보유자로 다시 지정되었다. 국악 발전에 끼친 그간의 공이 인정되어
공로상(1964년)과 문화재공로상(1968년) 등을 수상하였고, 1969년(65세)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
서 가진 은퇴공연을 끝으로 공식적인 무대활동을 마감한다.
박록주는 1971년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1971∼1973)
을 맡아 판소리유파발표회를 열었다. 판소리유파발표회는 1971년 명창 권삼득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
는 제1회(7.5, 국립극장)가 열린 이래 2002년 제32회가 열려 정통 판소리 보존의 터전이 되고 있다.
1978년 제자발표회(5. 18)와 고향 선산 공연을 마지막 무대로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면목동의 단칸 셋방에서 영욕으로 점철된 한 많은 소리꾼의 삶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