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수지에서 용인시 모현면 능평리를 잇는 43번 도로변은 서울 근교에서 이름난 능역으로 손꼽힌다. 특히 풍덕천 사거리에서 외국어대 용인캠퍼스로 이어지는 길은, 매재라는 나지막한 언덕길을 넘어서면 마을 이름들이 능원리, 능평리 등, 능묘와 관련되어 있고 통 털어 능골이라 불려온다. 초입에 해주오씨 시조인 오인유(吳仁裕)의 묘역과 사당이 있고, 능원리 안골로 들어서면 하마비와 함께 포은(圃隱)정몽주의 묘와 사당이 들어있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 정승들의 묘 10여기가 골마다 한자리씩 자리잡고 위세를 누리고 있다. 분당과 수지에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발길이 뜸한 오지로 가려져 있던 맑은 계 곡이다.
능역 주변은 옛 모습들을 그대로 잃지않고, 분당과 수지를 중심으로 서울근교 나들이코스로 손색이 없다. 또 돌아나오는 길에 수원쪽으로 잠시 발길을 돌리면 조선 중종 때 개혁사상가 정암(靜庵) 조광조의 묘와 심곡서원도 만날 수 있다. 특히 포은의 묘는 주변경관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고 경기도 지정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분당과 수지에서 각각 10여분 거리로 잠시 산책을 겸한 나들이코스로 더할 나위 없다.
* 정몽주묘
고려말 공민왕 9년(1360년)급제하여 벼슬에 오른 후 유학을 진흥하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불려온다.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부합하지 않고, 신하의 도리를 다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이곳에 안장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개성 선죽교에서 변을 당하고,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운구가 옮겨지던 중, 지금의 풍덕천 사거리 근처를 지날무렵, 갑작스런 회오리바람이 불어 선생의 명정을 하늘 높이 날려 이 곳에 떨구었다는 것이다. 기이하게 여긴 일행이 숙의 끝에 이 자리에 묘를 안치하고 향리에 사당과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수백년 가꿔 온 묘역답게 원시림처럼 들어선 수림대와 카페트처럼 포근한 잔디가 사계절 맑고 아름다운 경관을 펼쳐보인다.
* 조광조묘
1650년(효종 1) 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론에 의거,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현면(慕賢面)의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한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하였다가, 이 서원이 설립되면서 위패를 옮겨 왔으며 양팽손(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한다.
같은해 ‘심곡(深谷)’이라는 사액 (賜額)을 받았다. 효종 원년(1650)에 세워졌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 서원의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고 서원 옆에는 경기도 보호수인 5백년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