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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에 가까운 진돗개을 소개합니다.
안양의 애견가님들께 전합니다.
☞ 1978년도 한남동 황돌이 ( 일산서 자연으로 돌아감)
우리나라 섬
우리나라의 섬의 총수: 3,153개(現 4천4백여 개로 등록예정)
주요 섬에 대한 자료 올립니다.
참고
섬을 말 할 때 도= 초목이 있는섬 (島)
여= 초목이 없는 바위섬"여"는 순 우리말로 항상 水中에
잠겨있는 水中 여와 썰물때 드러나는 干出 여 가있다.
초= 물속에있는 岩礁로 구분 한다고 함
우리나라 10대 섬
1. 제주도(제주) 1832.12 ㎦ 2. 거제도(경남) 379.52 ㎦ 3. 진도(전남) 367.80 ㎦
4. 강화도(인천) 303.14 ㎦ 5. 남해도(경남) 302.77 ㎦ 6. 안면도(충남) 113.46 ㎦
7. 완도(전남) 98.36 ㎦ 8. 울릉도(경북) 73.21 ㎦ 9. 돌산도(전남) 70.78 ㎦
10.거금도(전남) 63.57 ㎦
사회과 부도나 지리부도 뒤쪽 통계자료 부분에 나옵니다.
백 령 도
면적 45.83㎢, 인구 4,329명(1999)이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4km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본래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 속했으나 광복 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곡도인데,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날으는 모습처럼 생겼다 하여 백령도라고 한다.
처음에는 옹진반도와 이어져 있었으나 후빙기에 해면이 상승하면서 평원에 돌출되어 있던 부분이 수면 위에 남아 형성되었다.
한국에서 14번째로 큰 섬이었으나, 최근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막는 간척지 매립으로 면적이 늘어나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1월 평균기온 -4.5℃, 8월 평균기온 25℃, 연강우량은 755.8mm이다.
진촌리 조개무지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일찍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며,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두무진과 세계에서 두 곳뿐인 사곶 천연비행장으로 유명하다.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으며 1999년 10월에는 2층 규모의 심청각 전시관이 준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심청이의 효심을 배워가기도 한다.
까나리액젓·참다래(키위)·흑염소엑기스·전복·해삼·멸치·약쑥·가리비·농어·우럭·
놀래미 등의 특산물이 있다.
관광지로도 유명하여 섬 북서쪽의 두무진은 고려시대의 충신 이대기가
《백령지》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표현했을 만큼 기묘한 절경을 자랑한다.
대표적인 관광코스는 백령도 선착장 → 사곶 천연비행장 → 심청각 →
물개바위 → 담수호 관광 → 두무진 관광 → 콩돌해안 → 백령도 선착장이다.
강화도
면적 302.14㎢, 남북길이 30㎞, 동서길이 12㎞, 해안선길이 99㎞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가장 큰 섬으로, 최고점은 마니산(摩尼山:468m)이다.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던 400년경에는 혈구(穴口)·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였고, 신라에 귀속된 뒤에는 해구군(海口郡)·혈구진(穴口鎭) 등으로 개칭되었다.
939년 강화현, 1895년 강화군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 교동면과 통합되었다.
1973년 강화면에서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본래는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오랜 침식작용에 의해 구릉성 섬으로 분리되었다가, 한강·임진강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쌓이면서 다시 김포반도와 연결되었다.
그 후 염하(鹽河)가 한강에서 분류하여 김포와 강화 사이에 해협을 이루면서 다시 섬으로 독립되었다.
기후가 온화하여 남서부에 동백나무·초피나무·비목나무(보얀목)·탕나무 등의 난대림 자생한다.
지질은 결정편암과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니산·고려산·낙조봉·혈구산 등산지가 있으나 험준하지는 않으며, 간척사업으로 인해 곳곳에 넓은 평지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활발하다.
연근해에서는 민어·밴댕이·새우 류·꽃게·어패류 등의 해산물이 많이 잡히고, 지역 특산물로 인삼·화문석·순무 등이 유명하다.
보물 제10호인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수십 점이 넘는 국가지정문화재와 지방지정문화재들이 있으며,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78)·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79)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마니산과 신선놀음·손돌풍·성토닦기 노래 등 많은 설화와 민요가 전해지며, 시선뱃놀이·용두레질놀이·씨름굿·안택굿·별신굿 등의 민속놀이와 의례가 행해진다.
1998년 옛 강화교 북쪽 100m 지점에 4차로의 강화대교가 개통되어 차량들이 운행되고 있다.
덕적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德積面)에 딸린 섬으로, 면적 20.87㎢, 해안선길이 37.6㎞이다.
덕적군도(德積群島)에서 가장 큰 섬으로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75km 해상에 위치하며, 최고점은 국수봉(314m)이다. 덕
적도라는 이름은 '큰 물섬'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이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다가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 유역을 번갈아 점령함에 따라 소속이 바뀌었다.
1486년(조선 성종 17)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 이속되었으며,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어 면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73년 7월 1일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황해 해상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수군을 두어 지키게 했고, 말을 기르는 국영 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산세가 가파르고 임야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농경지는 전체 면적의 10% 미만에 불과하지만 개펄이 발달되어 바지락·굴·김 등을 양식한다.
한때는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연평도 조기어장의 전진기지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해산물 외에 산더덕·흑염소·포도·칡엿·표고 등의 지역 특산물을 많이 생산히고 있다.
또한 서포리해수욕장을 비롯한 2개의 해수욕장과 1개의 자갈해변이 있는데, 경관이 뛰어나 앞으로 관광소득이 주민의 주요 소득원이 될 전망이다.
1995년부터 인천항에서 덕적도까지 50분대에 주파하는 고속여객선이 취항하고 있다.
월미도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北城洞)에 있는 육계도(陸繫島)이다.
지명은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져 있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1900년대 초까지 부천시 영종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9월 1일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원래는 인천역에서 서쪽으로 1km 거리에 있는 면적 0.66㎢의 섬이었으나, 1920년대 초 돌축대를 쌓아 내륙과 연결되면서 세관검역소·측후소·무선전신국을 비롯한 각종 기관들이 들어섰다.
현재 해안도로에는 놀이시설과 유흥시설이 늘어서 있으며, 1987년 7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문화예술 공연과 월미축제 등 각종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현재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內港) 북서쪽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이 섬은 역사적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1895년 영국 순양함이 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군인 448명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으며, 1904년 2월 9일 소월미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전함이 일본 전함과 부딪쳐 침몰하면서 러일전쟁의 발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인천항의 개항 전후로는 외세의 각축으로 수난을 겪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지였으며, 1950년 이후 오랫동안 국제연합군이 주둔하였다.
188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인천 앞바다에 정박했던 프랑스 함대의 대장 이름을 따서 한때 외국 지도에 로즈섬(Rose Island)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영종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동에 속한 섬이다.
2001년 4월 현재 인천국제공항 건설에 따른 부지확장공사로 인해 면적은 공사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63.81㎢이고 3,470여 세대에 8,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서쪽과 서남쪽으로 신도(信島)·시도(矢島)·삼목도(三木島)·용유도(龍遊島)·무의도(舞衣島)와 마주하며, 삼목도·용유도와는 연륙도로로 이어져 있다.
원래 이름은 제비가 많은 섬이라 하여 ‘자연도’(紫燕島)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 소속 영종진으로, 1875년 인천부로 이속되었다가 1914년 부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인천광역시 중구로 편입, 영종동으로 개칭되었다.
섬 중앙에 솟은 백운산(白雲山:255.5m)에는 1,300여 년 전인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 용궁사(龍宮寺)가 자리잡았으며, 개펄 등 자연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학생해양탐구학습장이 유명하다.
특산물로는 신선한 어패류와 영지버섯, 쌀과 태양고추가 있으며 굴·백합의 양식업과 염전업(鹽田業)도 이루어진다. 2001년 3월 29일 인천국제공항이 개항되어 영종도와 수도권을 연결하는 공항전용 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석모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三山面)에 딸린 섬으로, 면적은 42.841㎢, 해안선길이 41.8km이다.
강화도 외포항에서 서쪽으로 1.5㎞ 해상에 위치한다.
고려시대 말엽까지는 석모도·송가도(松家島)·어류정도 사이에 조수(潮水)가 드나들어 선박이 왕래하였는데, 주로 예성강(禮成江)과 한강을 드나드는 화물을 수급하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교동군에 속하였다가 1910년 강화군에 편입되었다.
남동쪽 끝의 해명산(海明山:327m)과 중앙의 상봉산(316m)으로 인해 중부와 남부는 산지를 이루고, 북부와 서부의 간척지는 평지를 이룬다.
평지에서는 서해안으로 작은 시내가 흐르는데, 그 유역의 토지가 기름져 경작지 또는 취락으로 이용된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항다.
주요 농산물로 쌀·보리·콩·감자 등이 생산되며, 근해에서는 병어·새우류·숭어·꽃게 등이 잡힌다.
넓은 간석지를 이용한 굴양식이 활발하며, 삼량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한다. 지역 특산물로 섬쌀·순무·밴댕이젓갈·새우젓·천일염 등이 유명하다.
섬 중앙부의 낙가산(洛伽山) 기슭에 자리잡은 보문사(普門寺)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27호인 보문사 석실(普門寺石室)과 제29호인 보문사 마애석불좌상(普門寺磨崖石佛坐像), 기념물 제17호인 보문사 향나무, 민속자료 제1호인 보문사 맷돌이 있다.
섬에서 유일한 민머루해수욕장은 썰물 때면 개펄이 드러나 자연학습장으로도 이용된다.
외포항에서 석모도 석포항 사이를 운항하는 배가 평일에는 30분 간격으로 다니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수시로 다닌다.
영화 시월애의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대청도
면적 12.63㎢, 해안선길이 24.7㎞이다.
최고점은 삼각산(343m)이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 옹진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 거리에 있으며 백령도(白翎島)·소청도(小靑島)와 함께 군사분계선에 근접해 있다.
황해도 장산곶과 불과 19㎞ 떨어진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원래의 이름은 포을도(包乙島)였으며, 고려 초기에 대청도(大靑島)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1406년(태종 6) 옹진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경 다시 장연현에 소속되었다.
1793년(정조 17) 주민의 입주와 경작이 허락되었으며, 1799년(정조 23) 대청도와 소청도를 수원부로 편입시키고 두 섬에 각각 진(鎭)을 설치하였다. 1894년 황해도 장연군에 속하였고, 1928년 백령면에 예속되었다가 1974년 대청면으로 승격한 이후,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산지이며, 해안선은 대체로 단조롭다.
북쪽은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경지율이 낮아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며, 일부 주민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업하는 전형적인 어촌 지역으로 1980년대 말까지는 홍어잡이가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병을 완쾌시켰다는 상기생(桑寄生)을 비롯하여 약초 100여 종이 자라고 있으며, 최북단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청도의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천연기념물 66)이 있다.
유물·유적으로 중국 원나라의 발라태자(勃喇太子)와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가 귀양 왔을 때 살았다는 집터로서 거택기(居宅基)와 깨진 기왓장이 남아 있다.
연안부두에서 3종의 쾌속선이 1일 1회 왕복 운항한다.
용유도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의 주도(主島)로, 면적 13.603㎢, 해안선길이 48.2km이다.
인천 서쪽 16.5km 해상에 있으며, 최고점은 관악산(冠岳山:172.5m)이다.
지명은 섬의 형태가 바다에서 노니는 용의 모습을 닮은 데에서 유래되었다. 부근에 신불도(新佛島)·삼목도(三木島)·영종도(永宗島)·대무의도(大舞衣島)·장봉도(長峰島)·모도(茅島)·시도(矢島)·신도(信島) 등이 있으며, 이전에는 영종도와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두 섬 사이가 매립되었다.
빗살무늬토기, 마제석부(磨製石斧)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부터는 말을 기르는 국영목장(國營牧場)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목장의 확대로 주민 수가 늘어나면서 행정구역도 세분화되었다. 1895년 인천부 영종면에 속하였다가 1910년 용유면이 신설되었다.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인천광역시 중구로 편입되었다.
섬은 중앙의 지협(地峽)을 중심으로 동서 구릉지가 연결되었으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의 혼합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약 10ha의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남서쪽 해안에는 을왕리해수욕장· 왕산리해수욕장· 마시란해수욕장이 있다.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더불어 대규모 종합관광단지로 개발되면서 국내 최초의 해상관광호텔·카지노호텔·위락단지·골프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승봉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紫月面)에 딸린 섬으로, 면적 2.22㎢, 해안선길이 9.5km이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2km, 덕적도(德積島)에서 남동쪽으로 14km 해상에 있다.
370여 년 전에 신씨와 황씨라는 두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이들의 성을 따서 처음에는 신황도라고 하였는데, 그후 이곳의 지형이 봉황의 머리를 닮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 수주(수원)에 속군 되었고, 그 뒤 인주(인천)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속하였고, 1895년 인천부 덕적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경기도 부천군 덕적면에 속하였다가 1966년 영흥면 자월출장소에 속하였으며, 1983년 옹진군 자월면에 편입되었다.
전체적으로 구릉의 기복이 많으나, 중앙부는 분지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된다.
선착장 뒤편에는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섬의 남쪽 백사장 뒤편에서 북동쪽으로 수령 20∼30년의 곰솔이 우거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이며, 연안에서는 우럭·꽃게·노래미 등이 많이 잡힌다.
개펄에는 소라·고둥·바지락 등이 풍부하고, 낙지잡이도 가능하다.
길이 1.3㎢, 너비 40m의 이일레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붐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北島面)에 딸린 섬으로, 면적 6.92㎢, 해안선길이 16.1km이다.
인천광역시에서 북서쪽으로 14km, 강화도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최고점은 구봉산(九峰山:178.4m)이다.
지명은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성실하고 순박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진짜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진염(眞鹽)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와 유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이래로 강화도호부(江患護府)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특수 마(特殊馬)를 사육하던 국영 목장으로 이용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 때 강화군 제도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천군 북도면으로 편입되면서 1922년 11월 5일 모도(茅島)에 있던 면사무소를 신도 구로지(九老池)로 이전하였다.
1971년 7월 1일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구봉산 정상에서는 영종도(永宗島) 등 황해의 섬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며, 1992년 시도(矢島)까지 길이 579m의 연도교(連島橋)가 설치되었다.
섬의 북쪽과 남쪽에 2개의 산지가 솟아 있고, 남서부에 큰 만입(灣入)이 있으며, 섬 주위를 넓은 간석지가 둘러싸고 있다.
경지면적이 비교적 넓어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해변에서는 망둥어·맛조개 등이 많이 잡히며, 당도가 뛰어난 포도가 재배된다.
동쪽에 평촌(坪村), 남서쪽에 고남리(皐南里), 남서쪽 해안에 구로지(九老池) 등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어업기지 구실을 한다.
시도·모도와 함께 노랑부리백로와 괭이갈매기 등 희귀조류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연평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延坪面)에 딸린 섬으로, 대 연평도와 소 연평도로 이루어져 있다.
대 연평도는 면적 7.01㎢로, 1999년 12월 말 현재 450세대에 1,17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소 연평도는 면적 0.24㎢로, 39세대에 8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38선과 인접하며, 지명은 평평하게 뻗친 섬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출토된 토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황해도 백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조기 어장이었으나 현재는 꽃게 잡이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으며,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섬에는 임경업장군각(林慶業將軍閣)이 있어 주민들이 출어에 앞서 풍어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
대 연평도의 동쪽에는 방파제(856m)가 설치된 2종항인 연평도 항이 있고, 남쪽 끝에는 등대가 있다.
한편, 소 연평도에서는 함철품위(含鐵品位) 50.4%인 티탄 자철광상이 발견되었다. 1999년 6월 북한 어선이 계속 이곳 앞바다를 침범함으로써 6·25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의 해군 함정이 최초의 교전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연평도는 한동안 뉴스의 초점이 되었고 꽃게잡이가 금지되면서 주민들이 생계를 위협받기도 했다.
제 주 도
제주도 역사의 기원은 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打製石器), 골각기(骨刻器)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후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도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주의 옛 명칭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들 명칭 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 나라' 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三姓)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라고 하는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현재의 삼성혈) 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 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 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 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등을 갖고 목 함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온 삼 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그 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入朝)하여 '탐라'(제주도의 옛 명칭) 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 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관계는 그후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면서 탐라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1105년에는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바뀌었으나, 왕자의 지위는 그대로 존속되어 실질적인 탐라의 통치자 역활을 하였다.
【 제 주 도 연 혁 】
상고시대 ∼ 삼국시대 탐라 (탁라)국
938년 (고려태조 21년) 탐라국 태자 고말로, 고려입조
1105년 (고려숙종10년) 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고려고종년대(1192∼1259)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 (충열왕 원년) 탐라국으로 회복,총관부 설치
1294년 (충열왕 20년) 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 (태조년대) 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 (태종 16년) 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1864년 (고종 1년) 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 (고종 32년) 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 (광무 10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 (융희 4년) 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 (일제시대) 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 도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81년 7월 1일 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
2004년 (현재) 2시·2군·7읍·5면·31개동
안면도
면적 87.96㎢, 인구 1만 390명(2001)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 째로 큰 섬으로, 태안반도 중간에서 남쪽으로 뻗은 남면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랍국, 고려시대에는 안면소· 광지향, 조선시대에는
안상면· 안하면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뒤에 안면소·안면곶이라고 하였다.
1895년에는 태안군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상면·안하면이 안면면에 병합되어 서산군에 속하였다.
1980년 안면면이 안면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서산군에서 태안군이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안면읍은 본래 곶 으로서 육지인 남면과 연륙되어 있었는데,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이 불편하자 조선 인조 때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절단함으로써 섬이 되었다.
현재는 연륙교로 육지와 이어져 있다.
북쪽에 솟은 국사봉(107m)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진다.
1월 평균기온은 -2.7℃, 8월 평균기온은 25.6℃, 연강수량은 1,155㎜이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농산물로 쌀·보리·콩·고구마·고추·마늘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고추와 마늘은 생산량이 많아 상인들과의 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연근해에서는 남방붕장어·우럭·낙지 등이 잡히며, 김·굴·새우류·바지락·백합 등의 양식과 천일제염이 이루어진다.
유적으로 신야리에 조개무지, 고남리에 고인돌(지석묘)이 있으며, 승언리에 안면도의 모감주나무군락(천연기념물 138)이 있다.
단일 소나무 숲으로는 세계 최대인 자연휴양림과 영목항·황도포구 등의 볼거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14개교, 초등학교 분교 1개교, 중학교 3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으며, 안면읍사무소와 고남면사무소를 비롯한 우체국·파출소·농업협동조합·보건지소 등이 있다.
독 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딸린 섬.
면적 0.186㎢이며. 독섬 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m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m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 있다. 동도를 암 섬, 서도를 수 섬이라 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 섬으로 변하였고, 독 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리 앙쿠르(Li ancourt)',
영국에서는 '호넷(Hornet)'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
섬은 동도와 서도 사이의 형제 굴, 동도의 천장 굴 등을 비롯한 해식동굴과 해식대 및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바위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간이선착장을 만들었으며, 여러 곳에서 수질이 좋은 용천(湧泉)이 발견되어 식수 문제도 해결되었다.
섬 주변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함에 따라 많은 어족이 모여들어 어장으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1954년 8월에 건설한 등대가 있다.
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등 이곳에 모여드는 희귀조를 보호하기 위해 1982년 11월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로 지정하였다.
을릉도
면적 : 72.56㎢
인구 : 9,944명(2003)
인구밀도 : 137명/㎢(2003)
가구 수 : 3,776세대(2003)
행정구분 : 1읍 2면
군청 소재지 :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206-1
군의 꽃 : 동백꽃
군의 나무 : 후박나무
군의 새 : 흑비둘기
면적은 72.56㎢, 인구는 9,944명(2003)이다.
동경 130˚48′~131°52′, 북위 37˚14′~37°33′에 있다.
동해상에 격리된 울릉도와 그 부속도인 관음도·죽도·독도 및 삼선암· 공암·
죽암· 청도· 북저암· 촉대암 등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졌다.
주도인 울릉도는 울릉군 총면적의 98%를 차지한다.
포항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210km, 죽변항에서 140km 떨어져 있다.
육지(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와 최단거리는 137㎞이다.
행정구역은 1읍 2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다.
도둑· 공해· 뱀이 없고, 향나무· 바람· 미인· 물· 돌이 많은 3무(無) 5다(多)의 섬으로 유명하다.
울릉도는 지질 적으로 제3~4기 초에 걸쳐 동해에 솟아난 거대한 화산의 정상부에 해당하며 현무암·조면암 등으로 이루어진 알칼리성 화산암 지역이다. 해안선이 단조롭고 해안단애가 발달하여 천연의 양항은 없다.
섬의 중앙부에는 울릉도 최고봉인 성인봉(984m)이 솟아 있고, 그 북부 사면에는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나리분지가 있다.
나리분지를 제외하면 울릉도의 평균 경사도는 25°로서 평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주민생활에 불편이 많다.
동서길이 10km, 남북길이 9.5km, 해안선길이 42km의 좁은 섬으로, 지형도상의 하천은 22개에 이르나 물이 흐르는 하천은 13개뿐이다.
그것도 대부분이 단소하여 하천의 면모를 갖춘 것은 태하천(8km)과 남양천·남서천 정도이다.
해안은 현무암의 주상절리가 발달하고 해식작용이 성하여 태하나 학포의 기암절벽과 해식동굴이 즐비하다.
앞바다에는 공암·삼선암 등의 기묘한 바위섬이 솟아 절경을 이룬다.
울릉도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2℃이나 1월 평균기온은 0℃ 이하로 내려갈 때가 없고, 8월 평균기온이 24℃를 넘지 않으며 일교차(5.8℃)도 적어 전국에서 가장 온화하다.
연강수량은 1916.7mm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데 그 중 약 40%가 11∼12월에 눈으로 내린다.
평균 적설량은 1m 내외이나 최고 적설량은 약 3m(나리분지)로 전국 제일의 다설 지역이다.
또한 전국 제일의 강풍지역(폭풍일수 179일)으로 근해의 파도가 거세고 해난 사고가 잦다.
울릉도에는 약 600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어 식물의 보고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섬 잣나무· 솔송나무· 너도밤나무는 울릉도에만 자생한다. 총 39종의 특산식물과 6종의 식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나 멸종 위기에 있는 것이 많다.
파충류· 양서류와, 쥐를 제외한 포유류, 은어를 제외한 담수어류가 분포하지 않거나 그 종류가 매우 적은 것이 특색이며, 독사·맹수·모기 등이 없다.
오륙도
1972년 6월 26일 부산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0.02㎢, 최고점 68m(굴 섬)이다.
예로부터 부산의 상징물이었다.
영도구(影島區)의 조도(朝島)와 마주보며, 부산만 북쪽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6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뻗어 있다.
이 섬들은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방패섬(2,166㎡)· 솔섬(5,505㎡)· 수리섬(5,313㎡)· 송곳섬(2,073㎡)· 굴섬(9,716㎡)· 등대섬(3,416㎡)으로 나누어진다.
오륙도 라는 이름의 유래는 방패섬과 솔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섬은 아랫부분이 거의 붙어 있어 썰물일 때는 우삭도라고 하는 1개의 섬으로 보이고, 밀물일 때는 2개의 섬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수의 차이에 따라 섬이 5개 또는 6개로 보이기 때문에 오륙도라고 하게 된 것이다.
송곳섬은 작고 모양이 뾰족하며, 굴섬은 가장 크고 커다란 굴이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평탄하여 밭 섬이라고도 하였으나,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등대섬이라고 한다.
등대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섬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12만 년 전까지는 육지에 이어진 하나의 소반도(小半島)였다가 유구한 세월 동안 거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육지인 승두말과 인접한 방패섬과 솔섬의 지질 구성이 동일하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항해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전해진다.
해운대에서 유람선이 이곳을 운항하며, 용호동에서 이곳으로 운항하는 낚시배가 있다.
가덕도
면적 20.78㎢, 해안선길이 36㎞이다.
1999년 12월 말 현재 1,284세대에 3,80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섬으로, 최고점은 연대봉(烟臺峰:459m)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조선시대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확인되며, 기록에 의하면 1544년(조선 중종 39) 이 지역에 가덕진(加德鎭)과 천성만호진(天城萬戶鎭)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914년 창원군 천가면에 속하였고, 1980년 의창군 천가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부산광역시 강서구로 편입되었다.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해안은 동쪽과 남쪽이 단조로운 반면 서쪽은 소규모의 곶(串)과 만(灣)이 연이어져 드나듦이 심하고, 북쪽 해안을 제외한 대부분이 가파른 해식애를 이룬다.
섬 전역이 산지로 이루어졌으나 일부 평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보리·양파·마늘 등을 재배하며, 연안에서는 굴 양식이 활발하다.
주로 숭어·대구·청어 등이 많이 잡히며, 미역·홍합·바지락·조개류 등도 많이 채취된다. 남쪽 끝의 동두말(東頭末)에 있는 가덕도 등대는 남해의 관광명소로 꼽히며, 문화재로 천성진성(天城鎭城:부산기념물 34), 가덕도 척화비(부산기념물 35), 연대 봉수대, 가덕도 자생동백군(부산기념물 36) 등이 있다.
가덕도의 동백은 1993년 2월 1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지정면적은 98,500㎡이다.
가덕도 국수봉(269m)과 남선의 동쪽 중앙계곡들을 중심으로 해안 암벽 위 동남쪽 사면에 동백나무의 군락이 자생하고 있다.
수령이 50∼100년으로 추정되는 2,500그루 정도의 동백나무가 약 6,600㎡의 넓이에 단순림(單純林)으로 있다.
죽 도
면적 0.17㎢, 해안선 길이 2.5㎞, 최고점 62m의 유인도이다.
태안반도(泰安半島)의 이북만(梨北灣) 중앙에 있다.
섬에 참대나무가 많아 우리말로 '대섬'으로 부르던 것이 지명의 한자 표기에 따라 '죽도'로 부르게 되었다.
1989년 1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산군에서 태안군으로 편입되었다.
간조(干潮) 때 물이 빠지면 육지와 도보 왕래가 가능하며, 상주하는 주민 가운데 일부는 육지에 농경지를 가지고 있다.
1990년부터 간척사업이 시작돼 1999년 완공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였으나 2001년 현재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이다.
주요 산업은 조개·꼬막·대합 등의 양식업이며, 낙지와 바지락이 많이 난다.
가 의 도
안흥항에서 서쪽으로 5㎞ 지점에 있다.
옛날 중국의 가의라는 사람이 이 섬에 피신하여 살았으므로 가의도라고 하였다는 설과 이 섬이 신진도에서 볼 때 서쪽의 가장자리에 있어 가의섬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안흥1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서산군 근흥면 가의도리가 되었다가 1989년 태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전체적인 지형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주변에 죽도·목개도·정족도 등의 섬이 있다.
최고봉의 해발고도는 183m로 섬 중앙에 솟아 있으며, 전체 면적의 90%가 산지이고, 동백나무·소나무 등이 많이 자란다.
북서쪽에 높은 절벽이 많고, 대부분의 해안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다.
취락은 섬 중앙에 주로 분포하며,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연안 일대에는 대륙붕이 넓게 발달해 있으며, 봄과 여름에 제주난류가 북상해 참조기·새우류·멸치·삼치·전복·우럭 등이 많이 잡힌다. 지역 특산물로 멸치와 까나리가 유명하며, 그밖에 돌김 채취와 해삼·미역 등의 양식업도 활발하다.
부근의 해역 일대는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순회관광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문과 수정바위·사자암 등이 볼 만하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분교 1개교가 있으며, 선착장 2개소와 경찰초소·우체국·교회 등이 있다.
안흥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여름에는 1일 2회 운항된다.
위 도
면적 11.14㎢, 인구 1563명(1999)이다.
해안선 길이는 36㎞이며, 최고점은 망월봉(望月峰:255m)이다.
섬의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았다 하여 '고슴도치 위(蝟)'자를 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섬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으며,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해상에 있다.
산지가 많아 경지율이 낮고, 해안선은 북서쪽에서 굴곡이 심한데, 특히 동북부의 진리만(鎭里灣)이 규모가 커서 연안에 취락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만 동쪽 끝 딴시름에는 방파제가 구축되어 있고, 만 안쪽 정금도(井金島)와의 사이에는 방조제가 조성되어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근해는 연평도(延坪島)·신미도(身彌島) 근해와 더불어 서해안의 3대 조기 산란장으로 유명하며, 4∼5월 산란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어선이 모여 파시(波市)가 선다.
김·굴 양식이 성하며, 근해는 서해의 고기떼들이 집결하는 청정해역으로서 우럭·노래미·농어·감성돔 등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다.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1993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이후 위도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 2000년까지 관광순환도로, 위도해수욕장, 4개의 여객선터미널, 3개의 방파제, 4개의 선착장이 완공되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 등 천혜의 경관이 살아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문화재로는 위도관아(지방유형문화재 101)가 있으며, 민속놀이에는 마을의 태평과 풍어(豊魚)를 비는 위도띠뱃놀이(중요무형문화재 82)가 있다.
상 마 도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삼마리에 딸린 섬.
면적 0.39㎢, 해안선길이 약 3.2㎞이다.
해남반도 남부와 진도 사이에 위치하며, 중마도·하마도와 함께 삼마군도를 이룬다. 삼마군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섬으로, 섬의 형태가 말과 같다 하여 상마도라 한다. 옛 이름은 ‘마루섬’이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마뢰도’로 표기되었다.
원래는 완도군 보길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마도리, 중마도리, 하마도리, 죽도를 합하여 삼마리라 하여 해남군 화산면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 유배지였다고 하며 1600년대에 함평에서 평강최씨가 들어와 정착하였고, 그 뒤 김해김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최고점이 60m이며 섬 전체가 대부분 저평하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많고, 북쪽 해안의 만 일대에 취락이 밀집해 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고 눈이 많다.
1월 평균기온 1.8℃ 내외, 8월 평균기온 25.6℃ 내외, 연강수량 1,216㎜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근해에서 숭어·바지락 등을 어획하며 김 양식도 활발하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콩·마늘·고구마 등이 소량 생산된다. 초등학교 분교 1개교가 있었으나 2000년에 폐교되었다. 육지와는 나룻배로 왕래한다.
하 마 도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花山面) 하마리(下馬里)에 딸린 섬.
면적 0.16㎢, 인구 69명(1999), 최고점 59m이다.
해남반도 남부와 진도(珍島) 사이에 위치하며 상마도(上馬島)·중마도(中馬島)와 함께 삼마군도(三馬群島)를 형성한다.
고유명칭은 ‘마루섬’이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마뢰도’로 표기되었다.
원래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남군 화산면에 편입되었다.
외양(外洋)에 면한 남해안에는 약 1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중마도와 마주보는 북쪽 해안의 넓은 사빈(砂濱)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때는 김과 바지락 양식으로 높은 수입을 올렸으나 인근의 간척지 방조제 공사 후 주변 바다의 생태계가 변하여 현재는 해조류 채취가 많이 줄어들었으며 일부 가구에서 전복을 양식하고 있다.
매년 초사흘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내며 섣달 그믐날 용왕제를 지낸다.
보길도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의 주도(主島)로서 4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노화면에 속하였으나 1982년 보길 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 보길면으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주요 산은 적자봉(赤紫峰:425m)·광대봉(廣大峰:311m)·망월봉(望月峰:350m)이며,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300m 이하의 산지를 이룬다.
간척지를 제외하면 평야가 거의 없고, 동백나무·상록활엽수림이 곳곳에 자생한다.
해안선은 급경사를 이루며 일부지역에서는 암석해안이 발달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감자이며, 부근 바다에서는 도미·삼치·멸치 등이 잡힌다. 그 밖에 김·미역·전복 등의 양식업도 이루어진다.
완도~노화도~소안도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되며, 보길면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조선 인조 때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머물렀던 보길도 윤선도 유적(사적 368)과 예송리(禮松里)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40), 완도 예송리의 감탕나무(천연기념물 338), 완도 황칠목(莞島黃漆木:전남기념물 154) 등이 있다.
묘당도
본토와 고금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와 잇닿아 있다.
1842년 밀양 손씨(密陽孫氏)가 이주해 들어오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원래는 관왕묘(關王廟)가 있던 섬이라 하여 묘당도로 부르다가 1971년 덕동리에 분구하면서 충무사(忠武祠)의 이름을 따서 충무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경지는 4㏊, 주민은 농업·어업 겸업이며, 비교적 어선이 많고 김·미역 특산지로서 이들이 주 소득원이다.
섬 안에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李忠武公遺蹟:사적 114)이 있고, 주변에 어란정· 월승대· 해남성· 봉화대 등의 유적과 약산도·신지명사십리해수욕장·다도해해상국립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신지도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에 딸린 섬이다.
면적 30.99㎢, 해안선길이 48㎞이다.
완도 동쪽 5㎞ 해상에 있으며 모황도 등과 함께 신지면을 구성한다.
삼한시대에는 백제의 새금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탐진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인 1124년(인종 2) 장흥부에 편입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417년(태종 17) 도강현과 함께 강진현에 편입되었다.
1896년 완도군이 창설되면서 면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옛날에는 지도라고 하였으나 나주목에 있는 지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신지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최고점은 상산(324m)이며, 그밖에도 노학봉(225m)·범산(151m)· 기선봉
(141m) 등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서남쪽에 소규모의 평지가 있다.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6.5℃, 연강수량 1,339㎜이다.
동백나무·곰솔·후박나무·팽나무 등의 아열대성 식물이 자란다.
주요농산물은 보리·쌀·콩·고구마·마늘·고추 등이며, 근해에서는 갈치·멸치가 잡히고, 김·미역 등의 양식도 활발하다.
유적지로는 신지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이 있고, 해수욕장으로는 동고리 해수욕장과 신지도 해수욕장이 있다.
교통은 완도와 매일 정기여객선이 운항되며, 현재 완도와 신지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공사중인데 2004년경 완공될 예정이다.
소안도
면적 23.16㎢, 해안선길이 42㎞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 지점에 있다.
노화도·보길도·횡간도·자개도 등의 섬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룬다.
임진왜란 때 동복오씨와 김해김씨가 처음 월항리에 입도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주민들의 기개가 용맹하여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도라 했다고 한다.
최고봉은 가학산(350m)이며, 그밖에도 부흥산(227.9m), 대봉산(337.6m) 등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는 남쪽과 북쪽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너비 500m, 길이 1.3㎞ 되는 사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해안은 동쪽에 반도처럼 돌출된 부분을 비롯하여 곳곳에 소규모의 돌출부가 있다.
동쪽과 남쪽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며, 중앙의 사주와 북쪽 해안에는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기후는 대체로 해양성기후를 나타내며, 1월 평균기온 2.5℃ 내외, 8월 평균기온 25℃ 내외, 연강수량 1,332㎜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 등을 재배하며, 파인애플·귤·고추의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근해에서는 멸치·민어·방어·도미·가오리·고등어 등이 잡히고, 굴·전복·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완도해상지구에 속하며, 문화재로는 완도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39), 완도 맹선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40)이 있다.
유적으로는 비자리에 조선시대인 1874년(고종 11)에 설치된 소안진터와 항일 기념탑이 있으며, 맹선리 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여 지었던 움막집터가 있다.
해수욕장으로는 과목해수욕장, 소강나루해수욕장, 진산리해수욕장, 부상리해수욕장 등이 있어 섬 주민의 휴식터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근에서 많은 피서객이 찾아온다.
그밖의 볼거리로는 미라팔경, 횡간도, 사자바위, 당사도 등대, 제주목사 기념비, 비자리 조개무지 등이 있다.
각시여 전설, 도둑바위 등의 설화가 전해져오고 해마다 정월의 풍어제 습속이 이어지고 있다.
허우도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 차우리(車牛里)에 딸린 섬이다.
면적은 0.7㎢, 인구는 7명(2001)이다.
금일도(金日島)에서 북동쪽으로 7㎞ 부근에 위치한다.
191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일면(현재의 금일읍) 울포리에서 허우리로 분리되었다가 1986년,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800년대 초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섬이 작고 낮아 태풍이 불면 파도가 심하다.
소를 기르면 잘 자라지 못하고 죽어 버리기 때문에 소를 기르지 못할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곱은옥 모양을 한 섬의 서쪽 해안에 좁은 평지가 있으며, 이곳에 마을이 있다.
약간의 밭·논농사가 행해지며, 근해에서는 멸치·장어·문어·감성돔·오징어 등이 잡히고, 김·미역·다시마·조개·꼬막 등의 특산물이 난다. 천혜의 낚시터로도 이름이 나 있다.
화 도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金塘面) 차우리(車牛里)에 딸린 섬이다.
면적 0.1㎢의 무인도이다.
대화도(大花島)라고도 하며, 부근의 중·소화도를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기도 하다.
금당도(金塘島)와 평일도(平日島) 사이에 위치하며 부근에 신도(身島)·충도(忠島)·척도(尺島) 등이 있다.
1911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1990년대 말까지 10~20명이 살았으나, 2001년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섬 중앙에 약간의 농경지가 있어 얼마 전까지도 농사가 행해졌다.
톳· 다시마· 미역· 문어 등이 많이 나며, 김·굴 등의 양식업도 활발하다.
섬 주위에는 낚시터가 형성되어 있고, 저녁노을이 질 때 인근 신흥리에서 바라보는 섬의 모습이 마치 꽃처럼 보인다고 해서 화도(꽃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저녁노을이 질 때의 모습을 가리켜 화도모운(花島暮雲)이라 하는데, 금당팔경(金塘八景)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청산도
청산도는 남쪽에 최고봉인 매봉산[鷹峰山:385m]과 보적산(寶積山:321m), 북쪽에 대봉산(大鳳山:334m)이 솟아 있고 평지는 읍리(邑里)와 양중리(陽仲里) 부근에 발달하였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경승지를 이루므로 다른 섬들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 등이며, 근해에서는 멸치·도미·민어·갈치·쥐치·장어·문어·낙지 등의 어로가 성하고, 김·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특히 청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은 김장용 멸치젓 생산지로 유명하고, 굴· 미역· 조개 등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면소재지인 도청리(道淸里)와 완도(莞島)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오간다.
문화재로는 읍리 하마비(邑里下馬碑:전남문화재자료 108), 읍리 지석묘(支石墓:전남문화재자료 116), 완도 당락리(堂洛里) 성터, 당락리 고분, 백련사(白蓮寺), 동촌리 봉수(東村里烽燧), 도청리(道淸里) 봉수, 부용당(芙蓉堂) 등이 있다.
진 도
면적 : 430.6㎢
인구 : 4만 1184명(2002)
인구밀도 : 96명/㎢(2002)
가구수 : 1만 5828세대(2002)
행정구분 : 1읍 6면
군청 소재지 :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64-1
군의 꽃 : 동백꽃
군의 나무 : 후박나무
군의 새 : 백조
면적은 430.6㎢, 인구는 4만 1184명(2002)이다.
동쪽은 명량해협(鳴梁海峽)을 사이에 두고 해남반도(海南半島)로 이어지고, 서쪽은 황해, 남쪽은 제주해협으로 틔어 있으며, 북쪽은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 및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주한다.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등 1읍 6면으로 이루어졌다.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이다.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섬으로 전라남도 면적의 3.6%를 차지하며, 수리적(數理的)으로는 동경 125°37'∼126°28', 북위 34°08'∼34°35'에 위치한다. 진도·상조도·하조도·가사도 등 45개의 유인도와 185개의 무인도 등 2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해의 관문으로서 극동은 고군면 와도, 극서는 조도면 죽도, 극남은 조도면 병풍도리, 극북은 군내면 나리이다.
전라남도의 군 가운데 구례군·곡성군에 이어 인구가 3번째로 적은 곳으로, 특히 1985~1995년에는 37.5%의 인구감소율을 보였다.
인구는 진도읍에 집중되어 있고 군내면의 인구가 가장 적다.
진도군은 남서방향의 소백산맥 지맥이 황해에 이르러 서서히 침강하여 이루어진 다도해 섬으로서, 동북부는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서남부는 급경사로 인한 침식해안으로서 경관이 빼어나다.
중생층 점판암 토질로 유기질이 많아 비옥하고 해안은 개펄로 이루어져 해산물이 풍부하다.
전체면적의 70% 정도가 산과 구릉지이며, 지질은 백악기의 반암과 응회암이 대부분이다.
특히 진도·상조도·하조도·가사도 등의 섬들은 지질시대에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던 섬들이다.
산은 200~400m 정도의 산지가 많은데,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m)·
덕신산(德神山:385m)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지력산(智力山:325m)·석적막산(石積幕山)이, 북쪽에는 금골산(金骨山)·설매봉(雪梅峰) 등이 있다.
또 이들 산지 사이에는 좁은 계곡평야와 잔구가 생성되어 있다.
하천으로는 석교천(石橋川)·인지천(仁智川)·이십오천(二十五川)·진도천·의신천 등이 있으나, 대부분 3~6㎞로 짧다.
의신천만이 10㎞ 정도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하천이 하상경사가 급하다.
해안선은 총 662.3㎞로서 리아스식 해안이라 양항이 많은 편이다.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태풍,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큰 파도가 많다.
진도 본도의 만입지에는 간석지가 발달했고,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거차도·서거차도·대마도·관매도·외병도·내병도의 해안을 따라 해식애와 파식대가 발달해 있다.
특히 울돌목으로 부르는 명량해협에는 시속 79㎞의 빠른 조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조류는 일본의 나루토[鳴門]해협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조류로 알려져 있다.
기후는 남쪽 해상 부근을 흐르는 난류의 영향으로 온난하지만,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직접 받기 때문에 인접한 완도군과 부산보다 기온이 낮다.
연평균기온 13.8℃이고, 1월 평균기온 1.7℃, 8월 평균기온 26.4℃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121㎜이며, 봄과 여름에 비가 많다.
특히 봄철에는 짙은 안개가 자주 발생하는데, 이는 부근 해상교통에 많은 장애가 되기도 한다.
진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물·유적, 천연기념물, 기·예능보유자가 많다.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돗개의 친근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진돌이'가 마스코트이다.
관매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에 딸린 섬.
면적 4.08㎢, 인구 480명(2001)이다. 하조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7㎞ 지점에 위치하며, 다도해의 일부를 이루는 독거군도에 속한다.
1600년경 나주에서 강릉 함씨가 처음 섬에 들어와 살았으며, 그 후에 제주 고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새가 입에 먹이를 물고 잠깐 쉬어간다는 뜻으로 볼매라고 불리다가 1914년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칠 때 볼을 관(觀)자로 표기하여 관매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약 1700년경 조씨 성을 가진 선비가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약 2㎞에 달하는 해변에 매화가 무성하게 핀 것을 보고 관매도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고봉은 돈대산(219m)이며, 주로 낮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의 대부분이 암석해안을 이루고 있으나, 북서쪽 해안은 모래가 풍부한 사질해안이며, 특히 남쪽 해안은 높은 절벽과 해식동이 많아 절경을 이룬다. 썰물 때에는 인접하여 있는 각흘도·항도·방아섬과 연결되기도 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고구마이며, 그밖에 쌀·보리·콩·유채 등이 생산된다.
근해에서는 멸치·조기·민어·삼치·농어 등이 잡히며, 김·미역·톳 등이 양식된다. 특히 돌김·미역·활선어 등은 특산물로 유명하다.
해안을 따라 가면 관매8경이 펼쳐지는데, 방아섬, 서들바굴 폭포, 하늘다리 등의 볼거리가 있으며 기암절벽과 숲으로 우거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령 약 800년인 후박나무(천연기념물 212)가 있다.
설화와 전설로는 꽁돌과 형제섬, 구렁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전화취급소 1개소가 있으며,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1개교, 병설중학교 1개교가 있다. 진도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1일 1회 운항된다.
옥 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옥도리에 딸린 섬.
면적 1.59㎢, 해안선길이 7.5㎞이다.
하조도 북서쪽 6.6㎞ 지점에 있다.
섬 모양이 구슬 옥(玉)자 같이 생겼다 하여 옥도라고 부른다.
1600년대 초에 김해김씨 김진삼이 처음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그 뒤 전주이씨, 인동 장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최고점은 섬 북쪽에 솟은 105m의 구릉지이며,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해안은 주로 암석해안이며, 동쪽 해안에는 서쪽 해안까지 닿을 정도로 깊숙한 만이 형성되어 있다.
1월 평균기온 1℃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 연강수량 940㎜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주요농산물은 고구마·보리·참깨 등이고, 근해에서는 멸치·문어·낙지·갈치 등이 잡힌다.
김·미역 등의 양식을 하는 한편, 톳·파래·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지구에 속하며, 해안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경찰지서와 초등학교 분교 1개교가 있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1일 1, 2회 운항된다.
상조도와의 사이에는 나룻배로 왕래한다.
흑산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딸린 섬.
면적 19.7㎢, 인구 3,133명(2001)이다. 해안선길이 41.8㎞이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7.2km 떨어져 있으며,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했다고 한다.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으로,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난 뒤 서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 섬에 반월성을 쌓으면서부터라고 한다.
본래는 월산군에 속하였으나 조선시대인 1678년(숙종 4)에 흑산진이 설치되면서 나주목에 속하였고, 1914년에는 무안군에, 1969년에는 신안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최고점은 문암산(400m)이며, 깃대봉(378m)·선유봉(300m)·상라봉(227m) 등이 솟아 있어 섬 전체가 산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선이 복잡하며, 북동쪽에는 비교적 넓은 만이 있다.
1월 평균기온 0.8℃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 연강수량 844㎜ 정도이다.
농산물로는 고구마·보리·콩·마늘·참깨 등이 생산되며, 연안 일대에서는 참조기와 병어가 잡히고, 김·미역 등이 양식된다.
문화재로는 흑산도 진리의 초령목(천연기념물 369)이 있으며, 유적지로는 반월성과 최익현 유적지, 정약전 유적지 등이 있다.
그 밖의 볼거리로는 석주대문이 있는데, 바다 위에 돌로 만들어진 대문으로, 모양새가 코끼리와 같다 하여 코끼리 바위라고도 불리며, 구멍바위라고도 한다. 해수욕장으로는 배낭기미해수욕장과 세께해수욕장이 있으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달 리 도
전라남도 목포시 충무동에 딸린 섬.
면적 2.64㎢, 인구 410명(2001)이다.
목포시에서 서쪽으로 5.6㎞ 떨어진 해상에 있다.
주위에는 눌도·고하도·외달도·장좌도 등이 있다. 섬 모양이 반달과 같다 하여 달동이라 부르다가 달리도로 바뀌었다.
약 7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처음 들어와 살다가 떠나고 그 후 영양 천씨, 김해 김씨, 광산 이씨, 전주 이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섬 서쪽에 솟은 사재산(139m)과 금성산(139m)의 줄기가 남북으로 뻗어 있고,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낮은 평지를 이룬다.
해안은 개펄이 넓게 펼쳐져 있어 간척하여 농경지와 염전으로 이용한다.
1월 평균기온 1℃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이고 연강수량 950㎜이다.
취락은 사재산 기슭에 주로 분포하며,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농산물로는 쌀·고구마·보리·콩 등이 있다.
부근 바다에서는 김 양식이 성하였으나 근래에는 줄어들고 있다.
목포-달리도 간 정기여객선이 1일 3회 운항되어 육지와의 교통은 편리하다. 경찰초소가 있으며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구비 전승으로 한탄가, 김매기노래, 상여가 등이 있고 농악과 당제 등이 전해왔으나 현재는 소멸되어 가고 있다.
전라남도 목포시 충무동에 딸린 섬.
면적 1.78㎢, 인구 369명(2001)이다. 해안선 길이 10.7㎞이다.
목포에서 약 2㎞ 떨어진 거리에 있다.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라 불렸으며, 고화, 고하, 보화라고도 불리었다.
삼국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1963년 무안군에서 목포시에 편입되면서 충무동이 되었다.
최고점이 77m로, 섬 전체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동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고, 남서 사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해안에 이어진다.
해안은 곳곳에 소규모의 갑과 만이 발달하여 드나듦이 심하며, 만 안의 간석지는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와 염전이 이루어져 있다.
기후가 온난 습윤하고 무상기일이 200일이 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육지면(陸地棉)이 재배되었다.
섬의 남서쪽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어서 목화 재배 외에 논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감자·쌀·보리·콩 등의 농산물이 생산되고, 농어·아나고·숭어 등의 잡어류가 잡힌다.
취락은 남동쪽 평지에 집중 분포한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하루에 6회 운항되며, 약 15분 소요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해 전략지로 활용되어 왜적의 침투를 막아낸 곳으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충무공기념비(지방유형문화재 39)가 있다.
또한 이 지역을 이충무공유적지(지방기념물 10)로 지정하여 충무공의 뜻을 기리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분교 1개교, 경찰출장소, 교회 1개소가 있다.
탕건바위놀이 등이 전해지며 해송림과 낚시터가 있어 관광객이 자주 찾고 있다.
소록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딸린 섬.
면적 4.42㎢, 인구 890명(2001)이다. 해안선길이 14㎞이다.
고흥반도 남쪽 끝의 녹동으로부터 약 500m 거리에 있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른다.
예전에는 한센(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한센병 환자와 병원 직원들만의 섬이었으나 현재는 아름다운 경관이 알려지면서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원래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였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양읍에 편입되었다.
최고점은 118m로 섬의 북쪽에 솟아 있으며, 대부분 기복이 작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드나듦이 심하며, 북서쪽 해안은 해식애가 발달한 암석해안이나 나머지 해안은 사질해안이다.
1월 평균기온 1℃ 내외, 8월 평균기온 26.5℃ 내외, 연강수량 1,383㎜ 정도이다.
농산물로는 쌀·보리·마늘·생강·유자 등을 생산하며, 어업 활동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민은 나병환자와 국립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직원 및 그 가족이 대부분이다.
취락은 주로 북동쪽 해안가에 집중 분포하며, 병사지대와 직원지대로 구분된다.
이곳에 있는 국립소록도병원은 1910년 외국 선교사들이 소록도에서 운영하던 ‘시립나요양원’에 나병환자들을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916년 ‘소록도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으며, 1960년부터 수용 위주에서 치료 위주로 관리 정책을 전환하였다.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 등 여러 이름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유적으로는 6·25전쟁 때 이곳을 지키다 순직한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는 순록탑, 그리고 육영수 여사의 공덕비, 한하운 시인의 시비 등이 있다.
섬 전체가 울창한 산림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룰 뿐 아니라, 동쪽 해안에는 해수욕장이 있으며, 섬의 남단에 소록도등대가 있다.
각종 의료시설과 복지시설, 순천교도소 소록지소, 우체국, 도양읍 소록출장소, 천주교 성당 2개소, 개신교 교회 8개소, 원불교교당 1개소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간호보조원양성소 1개소와 초등학교 분교 2개교, 유치원 1개소가 있다.
거금도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에 딸린 섬이다.
면적 62.08㎢, 인구 4,720명(2001)이다. 해안선 길이 54㎞이다.
고흥반도 도양읍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소록도 바로 아래 위치한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양목장에 속한 마목장의 하나로 절리도라 하였다.
그 후 강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897년 돌산군 금산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흥군 금산면이 되었다.
큰 금맥이 있어 거억금도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최고점은 적대봉(592m)이며, 400m 내외의 산지가 많으나 서쪽과 북쪽은 경사가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다.
해안은 사질해안이 많으나 돌출한 갑 일대는 암석해안을 이루고 있으며, 해식애도 발달해 있다.
1월 평균기온 1.0℃ 내외, 8월 평균기온 26.0℃ 내외, 연강수량 1,518㎜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참깨·고구마·면화 등이 주로 생산되며, 마늘·양파·콩 등도 약간씩 생산된다.
근해에서 장어·감숭어·전어 등이 잡히고, 김·미역·굴 등의 양식업도 활발하다. 특히 김 양식은 대규모로 행해진다.
문화재로는 대흥리에 있는 조개더미가 대표적이며, 그밖에도 송광암· 금산리성지· 상하리 고인돌군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고등학교 1개교, 중학교 2개교, 초등학교 7개교, 초등학교 분교 1개교가 있고, 면사무소·우체국·보건지소·경찰지소 등이 있다.
섬에는 버스가 운행되며, 고흥반도와 거금도 간 정기여객선이 매일 수시로 운항된다.
당산제, 월포농악 등 민속놀이가 잘 보존되어 있다.
우 도
제주도 북제주군 우도면(牛島面)을 이루는 섬. 해안선길이 17㎞, 최고점 132m이다.
북제주군 우도면을 이루는 섬으로 제주도의 부속도서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다.
성산포에서 북동쪽으로 3.8㎞, 구좌읍 종달리(終達里)에서 동쪽으로 2.8㎞ 해상에 위치하며, 부근에 비양도(飛揚島)와 난도(蘭島)가 있다.
1697년(숙종 23) 국유목장이 설치되면서 국마(國馬)를 관리·사육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거주가 허락되었으며 1844년(헌종 10) 김석린 진사 일행이 입도하여 정착하였다.
원래는 구좌읍 연평리에 속하였으나 1986년 4월 1일 우도면으로 승격하였다. 섬의 형태가 소가 드러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도라고 이름 지었다.
남쪽 해안과 북동쪽 탁진포(濁津浦)를 제외한 모든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쇠머리 오름이 있을 뿐 섬 전체가 하나의 용암대지이며, 고도 30m 이내의 넓고 비옥한 평지이다.
주요농산물은 고구마·보리·마늘 등이며, 가축 사육도 활발하다.
부근 해역에서는 고등어·갈치·전복 등이 많이 잡힌다.
부서진 산호로 이루어진 백사장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우도 8경이 유명하며, 인골분 이야기를 비롯한 몇 가지 설화와 잠수소리· 해녀가 등의 민요가 전해진다.
남서쪽의 동천진동 포구에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 상인들의 착취에 대항한 우도 해녀들의 항일항쟁을 기념하여 세운 해녀노래비가 있으며, 남동쪽 끝의 쇠머리 오름에는 우도 등대가 있다.
성산포에서 1시간 간격으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비양도
면적 0.5㎢, 동서길이 1.02㎞, 남북길이 1.13㎞이다.
죽도라고도 한다. 한림항에서 북서쪽으로 5㎞, 협재리에서 북쪽으로 3㎞ 해상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인 1002년(목종 5) 6월 제주 해역 한가운데에서 산이 솟아 나왔는데, 산꼭대기에서 4개의 구멍이 뚫리고 닷새 동안 붉은 물이 흘러나온 뒤 그 물이 엉키어 기와가 되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 비양봉에서 어떤 화산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며, 서북∼남서 방향의 아치형 능선을 중심으로 동북사면이 남서사면보다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섬 중앙에는 높이 114m의 비양봉과 2개의 분화구가 있다.
오름 주변 해안에는 ‘애기 업은 돌’이라고도 하는 부아석(負兒石)과 베개용암 등의 기암괴석들이 형성되었으며, 오름 동남쪽 기슭에는 ‘펄낭’이라 불리는 염습지가 있다.
주민의 주산업은 어업이고 고구마 등의 밭농사를 겸한다.
부근 해역에는 황돔·농어·옥돔·뱅어돔 등 80여 종에 이르는 어족이 서식하며, 각종 해조류가 자라고 있어 여름철이면 낚시꾼들이 몰려든다. 특산물로는 전복·소라·해삼·오분자기가 있다.
북쪽의 분화구 주변에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비양나무(쐐기풀과의 낙엽관목) 군락이 형성되어 1995년 8월 26일 제주기념물 제48호인 비양도의 비양나무자생지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한 오름이 날아와 비양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한림읍 한림항에서 하루 두 번 배편이 운항된다.
♠ 안양 문화원에서 활동하셨고
생존 하실 때 진돗개 애견가이셨으며
휘호와 위의 글을 주신 장로님이십니다.
수원과 안양서 학교선생님과
안양성결교회의 장로님으로
평생 신앙의 모범이 되 주셨던
황소 최태술장로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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