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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고 있습니다. 성도님”하고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님에게 좋은 일이 있습니다.”하고 한 번 더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있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신자가 있고, 성령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성도가 있다고 고린도 전서 1장에 보면 구분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교인이십니까?
신자이십니까?
성도이십니까?
저는 우리 분당주님의교회 모든 식구들은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반드시 성도이어야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본래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스스로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는 거룩하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성경에 ‘거룩’ 이라는 단어가 약 3백여 번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지칭하여 거룩하신 분이라고 지칭한 말은 불과 두 세 번 밖에 없습니다.
3백번 넘는 거룩이란 단어는 하나님을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들”을 지칭하여 쓰인 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것들, 하나님의 천사들을 지칭하여 쓰인 것입니다.
거룩한 천사들, 거룩한 백성들, 거룩한 성전, 거룩한 기구, 거룩한 하늘, 거룩한 날, 이렇게 하나님 주변에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을 지칭하여 거룩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본래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귀신도 알고 “당신은 거룩한 자니이다.”하고 외쳤습니다.
오직 거룩한 것으로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를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거룩한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한 이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들이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거룩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마이크가 집에 있을 때는 그냥 마이크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마이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을 때, 이 마이크는 즉시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 먹는 떡이나 포도주가 세상에서 먹는 포도주나 떡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찬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니 성찬인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소관에 들어있지 아니하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닙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을 때, 그가 거룩한 성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0편 3절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이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우리가 그의 것이 될 때 이를 “거룩하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성전도, 똑같은 건물입니다.
상가 건물과 똑같습니다.
옆집이나 이 집이나 같은 돈 주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어떤 데는 전세금을 주고 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가 거룩하신 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문제입니다.
누구의 소유냐는 겁니다.
누구의 것이냐는 겁니다.
그 소유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으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주일을 성일이라 합니다.
일주일 중에 6일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이 날은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날이기에 성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많이 수입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물질 가운데 내가 쓰는 것을 거룩한 물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은 내 것이라”고 한 게 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쓰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7장 28절 이하에도 “십일조는 성물이라. 거룩한 물질이라” 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 그것은 거룩한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한 교회에서 아주 가난한 여성이 예배 중에 헌신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의 손에 있는 결혼반지를 빼어 헌금쟁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장면을 한 집사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예배 후, 헌금 계수하는 시간에 목사님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가난한 성도의 결혼반지 이니 돌려주자고 했습니다.
목사님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그 여성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성도님! 성도님의 마음과 사랑은 이미 다 받았습니다. 이 반지는 그냥 도로 가져가세요.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때 그 가난한 성도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 반지를 도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교회에 드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목사님은 전율하는 감동을 느끼며 크게 회개를 했고, 교회 안에도 엄청난 회개의 바람이 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과 다릅니다.
거룩한 성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게 누구 손에 있느냐는 겁니다.
천사가 왜 거룩합니까?
천사들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찬송케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거룩한 천사들”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천사였지만, 교만하여 그 마음이 떠나는 순간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니 그때부터 마귀는 거룩한 천사가 아니라 더러운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겁니다.
그래서 마귀를 바알세불이라고 합니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사전용어로는 “똥 막대기” “똥집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똥통을 흔드는 똥 막대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거룩하냐?’ ‘더러우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룩은 단지 ‘누구의 소유냐?’는 겁니다.
* 똑같은 칼이라도, 의사가 들면 사람을 살리는 아주 귀중한 도구이지만, 강도가 들면 무서운 흉기가 되고, 똑같은 마이크라도 목사가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찬송 하는 거룩한 성물이지만, 이 마이크를 노래방에서 쓰는 순간 음란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죄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이크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들고 있고, 누가 쓰고 있느냐에 따라 존재가치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을 때에만 거룩한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지배 아래 들어 있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도 보면 자기를 위해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즐거움이나 자기만족으로 예배 합니다.
자기 기분으로 찬송하고, 헌금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걸 거룩한 예배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배가 하나님의 소유 안에 들어올 때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성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서 실컷 즐기고 놀았다면, 그것은 성일이 아닙니다.
주일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때 주일이 성일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당에 앉아서 ‘나는 거룩한 자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도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세에 의인 가운데서 악인을 골라낸다고 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 때에 구별하시고, 양과 염소를 저녁때에 구분하듯이, 거룩한 자들 속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들어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형제여, 당신은 어찌하여 거룩한 성도들이 들어오는 곳에 거룩한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들어오는고? 저를 골라서 내어 쫓아라. 밖에 나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거룩한 옷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지은 옷이 거룩한 옷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지은 옷이 거룩한 옷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그러신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보면 “예수로 옷 입어라.”
그래서 예수로 옷 입은 자를 “거룩한 성도들이다.” 할렐루야!
실력이 있어서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행실이 깨끗하여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말을 차분히 한다고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성격이 조용조용하다고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한 자의 이름으로 지은 옷을 입어야 거룩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회개하고, 개심하였답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더러운 버릇을 고쳤답니다.
술 먹던 사람 술 끊고 담배 피던 사람 담배 끊었답니다.
부도덕하게 살던 사람들이 자기의 생활을 청산하였답니다.
그걸 성경은 거룩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실이 아닙니다.
생활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이 변화 되었다고 거룩한 게 아니라 그가 거룩한 분의 소유가 되었느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참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원래는 독일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시민권을 얻는 순간 독일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도 한국말보다 독일 말을 더 잘합니다.
피도 독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주민등록을 받는 순간 한국인이 된 겁니다.
바로 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회개라고 할 때도, 내가 바로 살고, 내가 도덕적으로 살고, 누가 보더라도 완전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느냐는 겁니다.
세상에서 살던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느냐는 것입니다.
회개의 원뜻이 “돌아오다.” 라는 뜻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듯이 “돌아오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거룩하다.” 이걸 가리켜서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거룩한 성도가 될 수가 있습니까?
인간은 이미 아담의 죄로 인하여 거룩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이는 노력으로 안 됩니다.
울어도 안 됩니다.
힘써도 안 됩니다.
애를 쓰고, 선을 행해서 안 됩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의 삯은 사망이요,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슬초에 피를 찍어서 피 뿌림으로 내 백성이 거룩해진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9-22절을 보면 “모든 기구를 피 뿌림으로 거룩하게 하나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기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고, 양을 잡고,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찌 아버지 앞에 나옵니까?
19절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무엇으로 사셨습니까?
예수의 피로 사셨습니다.
예수의 피 뿌림으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뿌리심으로 인류의 죄악을 사하시고,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고 그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그 즉시 “너는 내 것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를 가리켜 “너희는 피로 산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피로 산 내 교회라!”
“너는 내 아들이라!”
그 때부터 거룩하신 아버지를 뵐 수 있는 겁니다.(히12:14)
지옥이 뭡니까?
지옥이라는 단어는 게엔나라고 하는데 게엔나라고 하는 것은 ‘불붙는 쓰레기장’ 이라는 뜻입니다.
꺼지지 않는 영원히 불이 붙어, 영원히 저주 받고 있는, 쓰레기장이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곳입니다.
누가 더럽습니까?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모든 것들은 더러운 것입니다.
추한 것입니다.
게엔나에 영원히 던져 버릴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거룩 하라 거룩 하라”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가 이겁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양편에는 두 강도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오른편 강도가 주께 말씀드립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면 나를 생각하소서.”
무슨 얘깁니까?
“나는 당신에게로 가오니 나를 받으소서!”
“나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소서!”
그가 좋은 일을 했습니까?
그가 구제를 하였습니까?
그의 말이나 삶이 거룩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하나 “나는 주의 소유되길 원합니다.”
“나는 거룩하신 주에게로 들어갑니다. 나를 받으옵소서.”
오직 예수 안에 들어가기를 원한 겁니다.
예수의 피로 깨끗해지기를 원합니다.
그 순간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할렐루야!
그는 순간 예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더러운 강도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셔 들이는 순간 거룩한 성도가 되어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게 된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줄을 알 수가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장21-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할렐루야!
에베소서 1장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고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13-14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4장30절에서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된 사실은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아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을 쳤다는 말은 “너는 내 것이라!, 너는 거룩한 내 백성이라!”고 인,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을 받은 겁니다.
어떤 분들은 계속해서 “아이구 목사님 아직 난 아직 생활이 거룩하지 못해요.”라고 합니다.
예, 맞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 스스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 있는 똑같은 물건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면, 그 순간 거룩한 성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신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사실을 어찌 안다고요?
예, 성령으로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아직도, 확실한 믿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에, 하나님의 소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신 예수를 믿고, 내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그 증거로 성령의 인 치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최대 부자였던 록펠러는 어렸을 때 돈이 많을 벌겠다고 결심을 했답니다.
그래서 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이웃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답니다.
주변에서 악덕업자라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산 결과, 그는 33세에는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의 소유자가 되었고, 53세에는 당시 지구상에 유일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53세의 어느 날 머리에 독성이 퍼지는 독두증이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머리털은 빠졌고, 눈썹도 다 빠져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온몸은 미라처럼 오그라들었습니다.
한 주에 수입이 백만 달러가 넘었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은 소량의 우유와 과자뿐이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았기에 사방에 원수가 있어서 그는 밤낮으로 경호원에 둘러싸여 사생활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잠도 거의 자지 못했고, 즐거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삶에서 웃음과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의사를 통해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신문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그가 죽으면 바로 기사를 쓰려고 미리 부고 문을 써놨습니다.
그렇게 투병하던 어느 날,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동전 하나도 내 것이 아니구나!”
그때 그는 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 돈들이 내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겁니다.
‘그렇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가 돈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교회와 자선단체와 학술단체에 기부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면서 록펠러는 신기하게도 잠을 자게 되고, 음식도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두증을 극복하고 98세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의 것으로 산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천한 나의 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것으로 쓰임 받는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천안에서 호두과자로 큰돈을 번 권사님이 자기가 번 돈으로 성전을 7개나 지어드렸다고 합니다.
그 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다윗 왕보다 행복 하답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지만 성전건축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는데, 자기는 풀빵장사를 하면서도 성전을 7개나 지었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의 것으로 쓰임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김전도사님과 일하다가 창고를 정리하면서 걸레를 보는데 그런 생각이 납니다.
“너는 어쩌다가 걸레주제에 하나님의 성전을 닦는 성물이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무엇으로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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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 감사해요..어쩌다가 제가 주님을 알리는 자가 됬는지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