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자료 출처) 안동권씨대종원 자료실, 15번 게시물, 올린이: 淸河)
안동권씨 安東權氏: 알지계 김(金)씨의 유래와 안동권씨 (安東權氏)의 뿌리는?
[유래].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것이 보여 가서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어린 남자아이가 누어있다가 곧 일어났다. 왕이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어린아이라는 뜻의 알지(閼智)라고 하고 성을 금궤에서 나왔다고하여 김(金)이라고 했다. 왕이 좋은 날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김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김아도(阿都)를, 아도는 김수류(首留)를, 수류는 김욱부(郁部)를, 욱부는 김구도(俱道)를, 구도는 김미추(未鄒)를 낳았다. 알지의 7세손인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대종인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 남아있다. .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을 시조로하는 강릉 김씨,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하는 광산 김씨,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를 시조로하는 영산(永山, 영동) 김씨,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일선) 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한뒤 왕위를 오르게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의 9아들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9아들중 마의태자로 잘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금강산)으로 입산 하였고(후에 부안 김씨로 되었다고함) 둘째 김굉은 나주 김씨, 셋째 김명종은 경주 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는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으며, 구안동, 청풍, 금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 등이 모두 김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알지계 김씨에서 다른 성으로 갈려간 성씨는 안동 권(權)씨, 강릉 왕(王)씨, 광산 이(李)씨, 감천 문(文)씨, 수성 최씨 등이 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 [유래]시조 권행 (權幸)
제1장. 권(權)씨 사성유래(賜姓由來).
1) 후백제(後百濟)와 견훤(甄萱). 신라 최후의 왕인 제56세 경순왕(敬順王) 3년(서기 929),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 즉 지금의 안동(安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견훤(甄萱)은 후백제(後百濟)의 시조(始祖)로 서기 892에서 935년까지인 43년간 재위(在位)한 사람이며, 본래의 성은 이(李)씨이고,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된 사람이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 의하면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이는 확인하기 어렵고 확실하지 아니하다. 어머니의 성씨도 확실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견훤(甄萱)은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 (南院夫人)으로 전해질뿐이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견훤(甄萱)은 "아자개"의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賓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견훤(甄萱)의 출생에 대해, 광주(光洲)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견훤(甄萱)을 지렁이의 후손이라고 하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자랄수록 재주나 용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이때는 이미 신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 당하여, 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때였다. .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진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더욱 문란하여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도적들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견훤(甄萱)에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는 긴 이름을 자칭하고, 북원(北原: 지금의 原州)의 도적의 괴수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사방으로 확장하였다. .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洲)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다음해에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함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이를 포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 뒤, 왕건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一吉 ) 민극(閔 )을 파견하여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아량도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때의 고려와 후백제는 서로 잦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은 군사 1만인으로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淸道)으로 옮겼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 경명왕(景明王)은 김율(金律)을 고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924년(경애왕 1)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파견하여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安東, 혹은 尙州부근)을 공격하였으나, 성중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왕건(王建)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화해를 맺었다. 그러나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925년에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왕건(王建)이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내어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해는 곧 깨졌다. .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견훤은 927년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尙州)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永川)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주로 진격해서, 마침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배풀고 있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고, 왕비(王 )를 능욕하며, 왕족과 궁녀(宮女)를 난행(亂行)한 뒤, 근친 가운데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이며, 왕의 내종(內從)인 김부(金傅)를 왕위에 오르게 하니, 곧 그가 신라 56세의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甄萱)은 닥치는 대로 방화와 노략질을 하며 진군하니 신라 천년의 역사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신라를 도우려 달려온 왕건(王建)도 공산(公山) 싸움에서, 신숭경(申崇謙), 원보(元甫), 김악(金樂) 등의 명장과 수많은 병력을 잃고, 견훤(甄萱)에게 크게 패하여 회군하고 말았다. 기세 등등한 甄萱은 이듬해 강주(康州: 지금의 晋州)를 공격하여 3백 여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지금의 軍威)를 공격하여 1천 여인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막강하였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지금의 安東)전투에서 8천 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패전으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견훤(甄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이 바로 삼태사(三太師)의 돋보인 활약이었다. 그러자 그의 충실했던 신하 공직( 直)이 고려에 투항해 버려 견훤(甄萱)의 하늘을 찌를 기세도 점차로 꺾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1백 여 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3백 여 필의 말을 잡아가기도 하는 부분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934년 운주(運州)를 공격해서는 오히려 크게 싸움에서 패하였다. 견훤은 많은 첩을 두어 10여인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금강(金剛)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 (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양검을 강주(康洲 지금으 晋州) 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 지금의 光州) 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이에 신검은 이찬(恒 )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735년 3월에 견훤(甄萱)과 금강(金剛)은 신검(神劍)에게 금산사에 유폐 당하고, 금강(金剛)은 결국 거기서 죽고 말았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 딸 쇠복(衰福) ,첩 고비 (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그 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기고 결국 왕건에 의하여 멸망당했는데, 견훤(甄萱)이 망하게된 그 결정적인 실마리는 멀리 고창(高昌: 지금의 안동) 싸움에 이기지 못한데 있었다.
2) 고려(高麗)와 왕건(王建) 한편 그 시절 북방에서는 왕건(王建)이 움직이고있었다. 그는 고려를 창건(創建)한 고려(高麗)의 시조(始祖)이며,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 출생으로,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 (鐵圓 :지금의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王建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청주(靑州: 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郡縣)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 )이 되었다. .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황해를 거처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郡縣)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 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 )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 )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뒤 궁예(弓裔)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 (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에 궁예를 몰아내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만 했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恒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王建)은 모든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나갔다. 태조 왕건에게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탁월한 정치적 역량이 있었다. .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의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開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그때부터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920년)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고려의 새 왕조는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安東)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3) 왕건(王建)에게 승리를 안겨준 삼태사(三太師) 위에서 말 한 대로 고창(古昌)은 고려(高麗)에 있어서나 후백제(後百濟)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요충지였다. 그래서 고려(高麗)는 고려(高麗)대로, 후백제(後百濟)는 후백제(後百濟)대로 고창(古昌)을 차지하고자 했으며, 두 세력은 늘 고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가 고창(古昌) 결전(決戰)에서 이긴 것이, 후백제 견훤의 세력을 제압하게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그 고창(古昌)의 전투에서, 우리 시조의 도움은 절대적 이였던 것이다. 당시 열세였던 왕건(王建)은, 만일 삼태사(三太師)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싸움에 이길 수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결국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大業)을 못 이루었을지도 모르며, 역사는 오늘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지도 모른다.
태사공(太師公)의 선계(先系)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처음 성은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종성은 왕실(王室) 성씨를 지칭한 말이고 종실(宗室)이라 쓰기도 한다. 종성이란 말은 종족(宗族)의 성씨로 쓸 때에는 같은 겨레붙이의 성씨, 즉 성씨가 같은 일가붙이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라의 종성이라 하였기 때문에 국성(國姓), 즉 왕성(王姓)을 말한다. 신라의 국성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것이 김씨인데 고대에 경주와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두 김씨가 있었다. 경주의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여 퍼졌고 김해의 김씨는 가락국(加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여 퍼졌는데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김씨는 다 이 두 김씨에서 분적(分籍)되어 독립된 본관을 갖게 된 성씨들이다. 그리고 우리 안동권씨는 신라의 종성에서 권씨로 환성(換姓)하였으므로 또한 경주 김씨에서 분적된 것인데, 이를 분적이라고 이르지 않는 것은, 분적이란 그 성은 그대로 두고 본관만 바꾸어 독립할 때에 지칭하는 말이고 성과 본관을 다 바꿀 때는 완전히 타성으로 되어 통혼(通婚)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동성혼(同姓婚)을 안함에 있어 분적을 한 동성끼리는 좀체로 혼인을 안하지만 분적 환성을 한 성씨와는 구애없이 통혼을 하되 외가 성씨에 대해 친근한 정서를 갖는 것처럼 이를 더 선호하면 하였지 배척하지 않았던 것이다.(중략) 신라 56왕 가운데 박씨 10왕 석씨 8왕을 뺀 38왕이 김씨인데 그 가운데 한 왕이 우리 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예조(藝祖)라 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여왕 3위는 후손이 없거나 있더라도 타성이 되었을 터이니 제외하고 남왕 중에도 14왕이 기록상 사왕자(嗣王子)가 없으며 말왕(末王) 경순왕은 태사공과 동시대인이니 제외하여 이들 18왕을 다시 빼면 태사공의 선조가 될 수 있는 임금은 20왕이 되는 셈이다. 김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난 서기 65년으로부터 태사공이 권씨로 득성(得姓)한 930년까지는 865년이 되고 미추왕의 즉위가 서기 262년이니 그로부터 930년까지는 668년이 된다. 사람의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계산하면 태사공은 미추왕으로부터는 22∼23세손이 되겠고 김알지의 28∼29세손이 될 것이다. 태사공과 동시대인인 경순왕이 김알지의 28세손이라 하니 대략 태사공도 알지 시조의 30세 이내로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 태사공의 태어나고 돌아간 생몰(生歿) 연대와 그 부친 및 배위(配位)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신라 왕실의 종성(宗姓)으로서 신분이 존귀하며 명망이 커서 당세의 관민(官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걸이었음을 미루어 알 뿐이다.
태사공(太師公)의 득성(得姓) : 영정은 아시조 태사공
태사공은 본래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서 성명이 김행(金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에는 성명이 권행(權行)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관(史官)의 착오로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세전(世傳)의 기록이나 기타 모든 문적(文籍)에는 다 휘(諱)가 행(幸)으로 나오고 행(行)으로 나온 곳은 고려사 뿐이다. 혹시 태사공이 사성(賜姓)을 받아 성이 김씨에서 권씨로 되면서 휘도 행(幸)에서 행(行)으로 바뀐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나 더 상서롭고 좋은 글자인 행(幸)을 버리고 행(行)을 취했을 이치가 없으니 환성(換姓)이 되면서 휘자(諱字)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태사공이 덕업(德業)을 쌓고 공훈을 세워 사성(賜姓)과 작위(爵位)를 받은 일은 사서(史書)나 각 집안의 문헌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수없이 많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의 기록이다. 동사강목은 조선 영조(英祖) 때 안정복(安鼎福)이 아동의 교과용으로 지은 역사책으로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 말(高麗末)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송(宋)나라 주자(朱子 : 주희)의 통감강목(通鑑綱目) 을 참고하여 편술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3년 기축(己丑 : 929)[후당(後唐) 천성(天成 : 明宗 연호) 4년 견훤(甄萱 : 후백제) 38년 12월에 견훤이 고려(高麗 : 신라)의 고창군(古昌郡 : 안동)을 포위하니 고려 임금 건(建 : 왕건)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와 구원하였다. 경순왕 4년 경인(庚寅 : 930)[후당 장흥(長興) 원년 견훤 39년]에 고려 임금 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대파(大破)하니 동방(東方)의 주군(州郡)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창을 구원하러 와 예안진(禮安鎭 : 안동시 예안면)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워 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상(大相 : 고려초의 문무관 2품)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불리하면 마땅히 사잇길을 좇아 가야지 죽령(竹嶺)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하니 반드시 먼저 사잇길을 닦아야 합니다." 하였다. 장군 유검필(庾黔弼)이 말하기를, "병(兵)이란 흉기(凶器)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니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 계책이 없은 연후에 가히 승패를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거늘 지금 적 앞에 임하여 싸우지는 않고 먼저 북으로 꺾일 것을 염려함은 어째서입니까? 만약 지금 고창을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3천여의 무리가 손을 맞잡아 읍하여 적을 맞아들일 터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신(臣)은 진군하여 급히 칠 것을 원합니다." 하니 고려왕이 이를 좇았다. 병술일(丙戌日)에 고려왕의 군대가 고을의 북쪽 병산(甁山 : 안동시 臥龍面 西枝里)에 이르렀는데 훤(萱)의 군대는 석산(石山)에 있어 상거가 5백보가 되자 드디어 접전하였다. 저물 때까지 격전을 벌였는데 검필(黔弼)이 경병(輕兵)을 이끌고 저수봉(猪首峰)에서 분격해 치니 훤이 패해 달아나는지라 그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것이 8천여인이었다. 고려왕이 고창에 입성하여 검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첩(勝捷)은 경(卿)의 공이다." 하였다. 견훤은 장수를 보내 순주(順州 : 풍산)를 쳐 침략하고 인호(人戶)를 약탈해 가지고 갔다. 고려왕이 곧 순주로 행차하여 성을 수복(修復)하고 주(州)를 격하하여 하지현(下枝縣)을 삼고 원봉(元奉 : 성주)을 잡았는데 [백제에 항복했으나] 전에 세운 공이 있으므로 용서하였다.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 고려 초기 문무관 1품)으로 삼고 김행(金幸)과 장길(張吉 : 장정필)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을 승격하여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이에 영안(永安 : 풍산) 하곡(河谷 : 안동시 임하면) 직명(直明 : 안동시 일직면) 송생(松生 : 청송) 등 30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는 이때 병력이 점점 강해지고 나라가 동쪽으로 넓혀져 바다에 연한 주군(州郡)과 부락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니 명주(溟州 : 강릉)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 : 울산)에 이르기까지 총1백10개 성이었다. 김행(金幸)이란 사람은 나라의 종성(宗姓 : 왕실 성씨)인데 견훤이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말을 듣고 무리와 모의하기를, "훤(萱 : 견훤)은 의리상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으니 어찌 왕공(王公 :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설해(雪解)치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 하고 권(權)씨로 성을 하사하였다.
☆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2세:자(子) 인행(仁幸)·낭중공(郎中公) 시조 태사공의 독자(獨子)이다. 모든 안동 권씨가 이 자손이며 2세조로서 아시조(亞始祖)라고도 부른다. 휘(諱)는 인행(仁幸)이다. 태어나고 돌아간 연대를 알지 못한다. 그 휘자(諱字)에 부친의 행(幸)자를 넣어서 어찌 촉휘(觸諱)하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는 설이다. 고려 후기의 명유(名儒)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말에 '신라 사람이 조(祖)와 자손 간에 같은 이름자가 있는 것은 당시의 세속이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부자간에 같은 이름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고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이를 휘피(諱避)하게 된 것은 고려의 초중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조자손 간에 같은 자로 이름을 지은 예는 대표적인 것이 고려 태조와 그 부조(父祖) 3대의 경우이다. 고려 태조의 본디 성씨를 모르거니와 그 5대조가 되는 국조(國祖)는 호경(虎景)이고 그 증손이 작제건(作帝建)이고 다음이 용건(龍建)이며 다음이 왕건(王建)이다. 용건은 뒤에 왕륭(王隆)으로 성명을 바꾸고 사후에 세조 의덕대왕(世祖懿德大王)으로 추존되지만 이렇게 3대가 건(建)을 돌림자로 써서 이름을 지은 것은 당시의 도참비설(圖讖秘說)에 3건, 즉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세 사람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 돌아 거기에 맞춘 것이라 한다. 그러면 이 시절에 대를 내려 같은 자를 써 이름을 짓는 것은 매우 고귀하거나 특수한 신분의 경우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관직은 낭중(郎中)이다. 이 관직명으로 공을 낭중공이라 부른다. 낭중은 본디 신라 후기에 집사성(執事省)과 병부(兵部)·창부(倉部)에 딸린 벼슬로서 17관등의 13품직인 사지(舍知)로부터 11품직인 내마(柰麻:내마에도 7등급이 있음)까지가 이 직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남북 왕조 시대의 발해(渤海)로 가서는 정부 각 부(部)의 장관이 되었고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에서는 광평성(廣評省)과 각 부처의 중하위관이 되었다. 직위는 중하에 속하지만 해당 부서의 실무를 맡고 있는 요직이었다. 고려 태조는 서기 918년에 궁예의 포학을 그치게 하고 개국하였지만 태봉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면서 이 낭중이라는 직함을 중앙의 경직(京職)뿐이 아니라 지방의 향직(鄕職)으로도 부여하였다. 향직은 나중에 고려가 중앙의 왕정 집권화(王政集權化)가 강화·확립되면서 쇠퇴하여 각기 그 지방의 서리(胥吏), 즉 아전(衙前)으로 전락하지만 초기에는 경관과 대등하였거나 아니면 그 고을과 지역에서의 실권이 막강하여 각지역의 분립된 영주(領主)와 같은 존재였다. 그와 같은 지방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장에게 고려 태조가 이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6대 임금 성종(成宗) 2년, 983년에 이를 바꾸어 호정(戶正)으로 하였다. 이 호정은 당시 9등급으로 나눈 향직의 제4위였다. .한편 낭중은 성종조 향직 개편 후에는 병정(兵正)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병정은 고려 시대 지방 관아의 한 부서로서 군병의 일을 맡은 사병(司兵)에 딸린 향직 이름이었다. 이 이름으로는 조선 초기에도 각 지방에 향리직을 둔 바가 있다. 또 성종 초에 병부(兵部)의 경(卿)을 병정이라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방 관아의 부서로서 병사를 맡아 보던 사병(司兵)에는 당시의 향직인 병정(兵正)·부병정(副兵正)·병사(兵史) 등이 있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성격의 낭중에서 공이 정확히 어떤 직임의 낭중을 역임하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서기 930년에 태사공이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이룰 때에 청장년기에 있었을 것을 상정한다면 공이 낭중의 직함을 받은 것은 고려 개국 13년 이후로부터 성종이 이를 호정으로 고칠 때까지인 서기 983년의 기간을 넘지 않는다. 이것은 공이 향직으로서의 낭중을 받았을 경우이다. 그런데 또한 공이 경직으로서의 낭중을 받았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가설(假設)은 공이 병산대첩을 전후하여 고려 태조에게 볼모로 견질(見質)되었을 경우를 상정하여 성립된다. 당시는 신약(信約)의 보증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볼모를 반드시 보냈으며 대등할 때는 서로 볼모를 교질(交質)하였다. 전자는 신라가 고려에 스스로 볼모를 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후자는 고려와 후백제가 화호의 뜻으로 각기 그 임금의 사위나 조카를 보낸 것이 실례이다. 고려 태조는 복속하거나 귀부해오는 각처의 영주(領主)에게서 반드시 그 자제를 볼모삼아 유학(留學) 등의 명목으로 서울 송도(松都)에 머물러 두었다. 안동은 영남 동북부의 요충(要衝)이자 웅진(雄鎭)이다. 주변 고을이 모두 고려와 백제에 귀부해도 홀로 끝까지 남아 있다가 전략적으로 고려군과 연합하기 위해 일시 귀부하여 국적 견훤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본의는 종국(宗國) 신라에 있지 고려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안동의 영주 3태사의 자제를 고려 태조가 볼모하였을 것은 필지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의 볼모에게는 좋은 예우가 따른다. 그리하여 명민한 자질의 공에게 경직(京職)의 낭중이 배수(拜授)된다. 이 가설이 성립되면 공의 혼사(婚事)에 대한 의문이 풀릴 수가 있다. 공의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공암 촌주(孔巖村主) 허선문(許宣文)의 딸이다. 지금의 서울 강서(江西)와 양천구(陽川區)에 해당하는 옛 공암촌은 한강 하류의 한 나루터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곡창 지대였다. 여기에 어떤 연유로 정착하여 큰 문호를 이룬 허선문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예로 알려졌다. 당시의 혼사는 아직도 엄격한 골품제적 신분을 본위로 하여 이루어졌을 터이려니와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안동 영주의 아들인 공과 공암의 촌주인 허선문의 딸은 서로 어울리는 혼반(婚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와 같은 난세(亂世)의 교통 여건에서 어떻게 영남 안동의 공이 경기의 한강 하류까지 와서 공암 촌주 허선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을 것인가. 여기에서 공이 송도에 와 볼모살이를 하고 그러면서 경직을 받았다면 정부의 권유나 주선 등으로 이같은 혼사를 이루었을 가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공이 송도의 경직으로 종생(終生)토록 사환(仕宦)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낭중이란 그리 높은 직위가 아니고 공 또한 고향에 귀환하고 싶은 염원에서 현달을 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공이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성장한 자제를 또 서울에 머물러 두어 볼모로서 유학을 할 수 있게 만든 연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 통합의 초기로서 왕권과 중앙 집권화가 견고히 정착될 때까지의 일이었다. . 다음은 공이 안동에서 어느곳으로도 움직임이 없이 지내면서 향직인 낭중에 안주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벽상공신(壁上功臣)의 외아들에게 세습시킨 향직의 작위로서는 우선 소홀하고 미흡한 감이 있다. 그리고 공이 안동에서 향직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어떤 행적도 남긴 것이 없는데 뒤에 공의 장자 책(冊)이 스스로 구하여 안동 고을의 호장(戶長)이 되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안동 고을의 향직을 받은 것이 공의 아들 대에서부터가 아닌가 의심이 간다. 세번째의 가설은 공이 안동도 송경(松京)도 아닌 제3의 지역에 가서 신라 시대 촌주(村主)나 촌장(村長)과 같은 의미의 낭중으로서 한 고을의 원을 지낸 경우이다. 이 가설로 성립되는 것이 공이 청도(淸道)의 공암 촌주(孔巖村主)를 지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러면 첫째로 전제되는 조건이 이곳이 그 부인 양천 허씨의 처향(妻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도에 있는 또하나의 공암촌은 신라의 서울 경주(慶州)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천연의 높은 산줄기가 외부와 차단해 이룬 길고 큰 계곡으로서 신라의 화랑도가 수련하던 운문사(雲門寺)가 그 안에 있고 계곡을 흐르는 동창강(東倉江)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옛적의 곡창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신라의 경순왕이 백관과 회의를 열어 사직(社稷)을 고려에 바치기로 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통곡하고 거기에 따르지 않는 무리 3천을 거느리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에 공도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안동에서 받는 세습의 향직에 안주하지 않고 서라벌에서 가까운 청도의 공암촌으로 들어가 종국(宗國) 신라를 복고(復古)시킬 뜻을 키웠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의 공암이 고려 태조에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을 댄 공을 세웠을 당시 이미 90세를 넘은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의 선향(先鄕)이었다던가 하는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설에 대해서도 아직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증이 나온 것이 없다.
권수홍(守洪):복야공(僕射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orilife.pe.kr%2FBokya1.jpg)
복야공(僕射公) 수홍(守洪)의 단소.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교리 송파(松坡)에 있다. 상서공(尙書公) 중시(仲時)의 둘째아들로 태사공후 10세대파의 네 번째인 복야공파(僕射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배위(配位)와 생몰연월 및 묘소의 소재 등을 모른다. 처음에 공은 관향(貫鄕) 안동에서 출생하여 장성해서도 상당 기간 거주하며 향직을 받아 부호장(副戶長)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 권씨 최초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에 공의 관직이 부호장으로서 증 군기감(贈軍器監)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군기감은 군기감의 감(監)으로서 정4품의 대부직(大夫職)이다. 그러나 현금의 모든 권씨 보서에는 공의 관직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으로 되어 있다. 대개 추밀원 부사는 정3품직이고 상서좌복야는 정2품에 해당하는 공경직(公卿職)이다. 보서에 공이 이 직함이 증직(贈職)인지 행직(行職)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자손이 크게 귀현(貴顯)함에 따라 관작이 추증되고 거듭 가증(加贈)된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으로 인식된다. 추밀원 부사로서 그 상위직인 상서좌복야를 겸할 수가 없으니 추밀원 부사와 상서좌복야를 각기 더하여 추증받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이 처음에 관향 안동에서 입신(立身)하여 있다가 백씨(伯氏) 추밀공(樞密公) 수평(守平)이 경사에 진출한 연고로 뒤이어 서울로 이거하여 문호(門戶)를 이룬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 또한 기득(旣得)의 기반이 만무할 경사에서 백씨와 함께 군직(軍職) 등에 들어가 종사(從仕)하며 간고한 가운데 근면으로 집안을 중흥시켰을 것으로 본다. 공이 1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 자여(子輿)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이르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겸하였다. 이 또한 실직(實職)이 아닌 증직(贈職)이라 하더라도 매우 현달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작위이다. 손자는 5인인데 장손 책( :允宜)은 첨의평리 치사(僉議評理致仕)이고 다음 윤평(允平)은 증 추밀부사 좌복야이며 다음 윤보(允保)는 중문지후(中門祗侯), 다음 조여(祖如)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다음 빈( )은 중문지후이다. 그리고 장증손(長曾孫) 일재(一齋) 한공(漢功)에 이르면 추성동덕협찬공신(推韶德協贊功臣)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으로서 문탄공(文坦公)의 시호를 받기에 이른다. 일문의 영화와 현달이 불과 3,4세에 그 백씨 추밀공 일가와 함께 고려의 중앙 경조(京兆)에서 으뜸의 현벌(顯閥)을 이루었다. 한편 공의 장증손 한공(漢功)이 예천(醴泉)을 관명(貫名)으로 군호(君號)를 받고 다시 그 후손이 잇따라 예천군(醴泉君) 또는 예천백(醴泉伯) 등을 받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인가. 이는 공의 백씨 추밀공 자손에게 먼저 영가(永嘉)·길창(吉昌) 등으로 봉군(封君)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해 안동의 인접 고을인 예천을 관명으로 택했을 수도 있다. 또한 공이 처음 경사로 진출하기 전에 행직 부호장으로 입신했던 곳이 예천땅이어서 거기에 전장(田庄)을 남겨 세습(世襲)케 하니 자손이 이를 구기(舊基)를 삼아 왕래하며 별업(別業)처럼 전수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 가설(假說)로 한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단서를 잡을 수가 있다. 추밀·복야 양공의 후손은 이후로 안동 권씨의 양대 산맥(兩大山脈)을 이룬다 할만큼 많은 숫자로 번성하는데 추밀공파 후손은 주로 기호(畿湖) 지방에, 복야공파는 주로 영남(嶺南)에 세거하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추밀공은 상경할 때 안동 지역에 어떤 세업(世業)을 남겨두지 않고 올라와 장단(長湍)에 새로이 근거를 잡아 이를 자손에게 구기로 남겨 주었다. 그리하여 추밀공 이하의 역대 묘소가 모두 장단 일대에 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복야공은 예천땅에 장만했던 근거는 그대로 유지시켜 두고 경사로 이거하였고 그리하여 사후에는 예천으로 환장(還葬)되었으며 그 자손도 살아서는 서울에서 현달하되 죽어서는 예천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향으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향 의식은 그 후손의 세거 형태에 반드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또 한 가지 이를 뒷받침하는 징후는 공에게 세 딸이 있는데 모두 지방 토성인(土姓人)에게 출가했다는 점이다. 3녀중 장녀는 호장(戶長) 방걸(方乞)에게 출가하였다. 방걸은 온양인(溫陽人)인데 이는 온양 방씨의 뜻이지 그 거주지가 반드시 온양인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호장이니 경직(京職)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 방만년(方萬年)은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경직에 진출한다. 여기에서 방만년은 외가의 반연으로 경사에 진출해 입신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차녀는 별장 부정(別將副正) 권양준(權良俊)에게 출가한다. 권양준은 동성(同姓)으로서 좌윤공(佐尹公) 지정(至正)의 손자이니 공의 재종손(再從孫)이 된다. 즉 좌윤공과 공이 4촌간인 것이다. 골품(骨品)을 중시하던 신라에서 왕족이 혈통을 지키고자 지친혼(至親婚)을 했고 고려 왕실도 그와 같이 했거니와 안동 권씨는 신라 왕통의 긍지를 지켜 상당 기간 동성혼을 오히려 선호하였다. 그 결과로 공이 재종손을 사위로 삼은 것인데 양준은 별장과 부정에 그쳤으니 향직에 머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공의 외손자가 되는 양준의 아들 수(粹:精)는 중앙에 진출해 문과(文科)를 하고 이로부터 그 문호를 크게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 양준의 후예인 좌윤공파 일가는 잇따라 현달하면서도 그 근거를 안동에서 옮기지 않아 세장지(世葬地)가 안동의 제비원[燕院]에 있다. 다음 3녀는 김이견(金利堅)에게 출가하는데 이 역시 호장(戶長)이고 그 딸이 권미(權美)에게 출가하나 또한 호장의 향직이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추밀공이 남긴 구기가 경기도 장단이라면 복야공이 남긴 구기는 경북의 예천땅이 아닌가 상정해 보는 것이다. 공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이 단소(壇所)를 봉축한 곳 또한 경북 안동의 서후면 교리(西後面校里)의 송야(松夜:솟밤)이다. 이곳이 공의 5대손 예의 판서(禮儀判書) 인(靷)의 묘산(墓山)인 것이 인연이겠으나 예천 땅에서도 가까운 거리이다. 1994년 갑술 봄에 후손이 이곳 송야산(松夜山)에 임좌병향(壬坐丙向:북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자리)으로 단소를 베풀고 산하 동구(洞口)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