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성곽길여행(17) -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궁궐의 주산(主山)> 논쟁.
<선바위>와 <국사당>을 보고 돌아와 다시 본격적인 성곽 길로 접어 들었다. 꽤 급한 경사의 산을 조금 더 올라가면 앞서 도성에 대한 기초지식에서 배웠던 굽은 성곽 즉‘곡장(曲墻)’을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산세를 이용하여 축성된 성곽이지만 도성을 위협하는 외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의 모양새다. 일반시민들이 산책하는 이 곳을 첨단무기로 전쟁을 벌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으며, 부대 안에는 레이더와 발칸포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이 관성일까? 아니면 군사적 필요성일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 곡장을 지나 급한 경사로 숨가쁘게 올라가면 곧 340미터 높이의 인왕산 정상이다. 경복궁을 비롯해 도성 안이 한 눈에 들어 온다. 그런데 처음 궁궐의 위치를 어디로 할 것인가는 크게 논쟁이 된 사항이다.
이를 보기 위하여 먼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를 보도록 하자. 한양은 내사산(內四山 : 백악-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성곽이 축성되어 있으며, 밖으로 외사산(外四山 : 삼각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이 성밖 10리(城底十里)를 둘러쌓고 있다. 여기서 경복궁을 기준으로 풍수지리상 백악은 한양의 주산(主山)이 되고, 북한산은 이를 뒤에서 받치는 진산(鎭山)이 된다. 즉 북한산-보현봉-백악으로 그 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남산은 임금의 책상처럼 안산(案山)이 되는 것이고, 관악산은 신하들이 임금을 조회(朝會)하는 한양의 조산(朝山)인 것이다. 또 경복궁 옆의 낙산과 인왕산은 각각 좌청룡, 우백호로 그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런데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어디다 축성할 것인가, 즉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놓고 조선 초 큰 논쟁이 있었다. 처음 하륜이 서대문형무소 뒷산인 ‘무악(안산)주산론’을 주장했으나 터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과 정도전의 ‘백악주산론’은 불교와 유교의 정면 대결 양상이었다. 하지만 ‘군주는 남쪽을 보고 정사를 본다’는 제왕남면(帝王南面)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하는 정도전의 방안이 힘을 얻으며 채택된다. 이에 백악주산의 문제점으로 무학대사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백 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서 왕위를 찬탈 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백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연려실기술 제1권》
여기서 정씨 성을 가진 자는 정도전을 이르며 실제 태조 때 왕자의 난을 치렀다. 또 5대(태조-정종과 태종-세종-문종-단종)를 지나자마자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이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200년 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인왕산 왕기설(인왕산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주장)’로 과장돼 이 말에 솔깃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자수궁>(옥인동 45-1)을 짓도록 하였다.
나야 풍수지리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내사산 가운데 인왕산이 가장 멋진 산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산수화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및 안견의 《몽유도원도》등 거의 대부분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지 백악이나 남산, 낙산 등을 배경으로 그려진 산수화는 극히 드물다.
<사진설명>
▲(사진1) 한양도성의 내사산과 외사산, 내사산을 잇는 선이 한양도성이 되고, 외사산을 잇는 선에서 도성으로부터 10리, 즉 성저십리(城底十里)로 한성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진2) 도성을 칩입하는 외적을 성안에서 공격하기 쉽게 산세를 이용하여 돌출되게 쌓은 성곽, 즉 곡장이다. 일반인들의 출입은 통제되며,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사진3) 인왕산 곡장을 좀 더 가까이서 찍은 사진으로 이곳에 군부대의 레이더와 발칸포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