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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가 배알한 성주(星州) 충무묘(忠武廟)를 왜곡시킨 삼암 표영삼
동학(東學) 교서들에는 충무묘(忠武廟)라고 기록되었다.
이를 후세의 식자(識者) 추암(秋菴) 오상준(吳尙俊, 1882~1947)이 1914년 『본교역사』를 통하여 충무묘를 충무공 이순신묘(사당)로 왜곡(歪曲)시키는 오류(誤謬)를 범하였으며, 1920년 『천도교서』가 이를 그대로 간행하였다.
이후 천도교 원로(元老)인 삼암(三菴) 표영삼(表暎三, 1925~2008)이 왜곡 창작을 더하면서, 이를 합리화시키고자 강변식비(强辯飾非) 견강부회(牽强附會)로써 돌이킬 수 없도록 왜곡을 더하였다.
그 결과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왜곡 창작으로 날조된 내용을 사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단적인 예로 최근 모 단체에서 삼암 표영삼이 창작한 행로를 따라 천리 길을 순례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오랜 세월 삼암 표영삼이 전국을 뛰어다니며 동학의 흔적들을 발굴한 노력이야말로 세세토록 칭송받음이 마땅하지만, 이 같은 표영삼 이름 석 자를 믿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동학도인들의 결과가 얼토당토않은 천리 길 순례로 이어진 것이다.
이만큼에서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어느 단체에선가 또다시 천리 길을 순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말이 쉬워 천리 길이지 이들이 준비했던 과정부터 순례를 마치기까지의 노고야말로 삼암 표영삼의 공과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삼암 표영삼 개인의 명성보다는 또 다른 피해자 양산 방지와 사실을 일깨워줌이 공익(公益)이라고 판단되어 왜곡 창작된 내용을 바로 잡고자하는 것이다.
① 1861년(조선 철종 12 신유) 8월, 입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고루(固陋)한 유생(儒生)들은 선생(先生)이 한울님을 신앙한다는 비평(批評)의 목소리를 높여갔으며, 관(官)의 지목(指目) 또한 나날이 심해졌다.
② 같은 해(1861년 신유) 10월,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동부리 경주 관아(慶尙道 慶州府 府內面 東部里 慶州官衙, 현 경상북도 경주시 중부동 198-4번지, 경주 문화원 자리 慶尙北道 慶州市 中部洞 198-4番地, 慶州文化院址)에서 선생(先生)을 불러들여 사술(邪術)로써 무지한 백성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활동을 당장 중지하라고 엄히 경고한 후 풀어주었다. 선생(先生)은 민중(民衆)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일정기간 경주를 떠나있기로 하였다.
③ 같은 해(1861년 신유) 11월 초순, 선생(先生)이 제자 최중희(崔仲羲)만을 대동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길에 경상도 성주목(慶尙道 星州牧, 현 경상북도 성주군 慶尙北道 星州郡)의 충무묘(忠武廟)에 들렀다.
(1) 성주 충무묘 배알에 관한 동학교서의 기록
① 충무묘(사당)
❏ 입성주배알충무묘(入星州拜謁忠武廟)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대선생주문집』, 『대선생사적』.〉
❏ 역주(譯註) : 성주로 들어가 충무묘(충무사당)에 배알하셨다.
② 이충무공 순신묘(사당)
❏ 지성주 입견 이충무공 순신묘시고(至星州入見李忠武公舜臣廟시고) 〈『본교역사』.〉
❏ 역주1 : 성주에 이르사 이충무공 순신묘(순신의 사당)에 들어가 보시고.
❏ 역주2 : 1914년(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갑인) 추암 오상준이 『본교역사』에서 충무묘를 충무공 이순신묘(사당)로 왜곡시킨 것에 기인한다. 만약 추암 오상준이 이처럼 왜곡시키지 않았다면 현재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③ 충무공 이순신묘(사당)
❏ 성주를 과하시다가 충무공 이순신묘에 배알하시고(星州를過하시다가忠武公李舜臣廟
에拜謁하시고) 〈『천도교서』.〉
❏ 역주1 : 성주를 지나시다가 충무공 이순신묘(사당)에 배알하시고.
❏역주2 : 1920년(일제강점기 경신) 『천도교서』가 상기 ②항의 왜곡된 내용을 그대로 간행함으로써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2) 창작 날조시킨 삼암 표영삼의 승주설
① 삼암 표영삼이, 「성주(星州)에 충무공 묘당이 없다. 승주(昇州)를 성주로 잘못 기록한 것 아닐까?」라는 의문과 함께 새로운 승주설을 제기함으로써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삼암 표영삼이 충무묘를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삼암 표영삼은 추암 오상준과 『천도교서』의 기록을 믿은 탓일까? 충무공 이순신 사당을 찾은 것이다.
❏ 필자는 2차에 걸쳐 성주에 가서 조사해보았다. 문화원에 들려 알아보았으나 충무공 묘당은 없었다. 혹시 전남 승주(昇州)를 성주(星州)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승주군 해룡면에는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동학1』 통나무 2004. 149쪽.〉
❏ 『대선생주문집』에는 남원으로 가다 성주(星州)에 들러 충무공묘(忠武公廟)를 참배하였다고 하였다. 두 차례나 성주에 가보았으나 충무공 묘당은 없었다. 혹시 승주(昇州)를 성주(星州)로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닐지? 〈『표영삼의 동학 이야기』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8. 105쪽.〉
❏ 역주1 : 성주는, 경상도 상주목 성주목(慶尙道 尙州牧 星州牧, 현 경상북도 성주군 慶尙北道 星州郡)이다.
❏ 역주2 : 승주는, 전라도 순천도호부 승주군(全羅道 順天都護府 昇州郡, 현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全羅南道 順天市 昇州邑)이다.
❏ 역주3 : 승주군 해룡면 충무사는, 전라도 순천도호부 용두면 신성리 용해산 충무사(全羅道 順天都護府 龍頭面 新星里 龍海山 忠武祠, 현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28-1번지 충무사 全羅南道 順天市 海龍面 新城里 山 28-1番地 忠武祠)이다.
② 삼암 표영삼은 상기 ①항에 이어 다음과 같은 행로를 창작 날조하기에 이른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울산 서군효(蔚山 徐群孝) → 부산(釜山) 누이 → (선박 이용) → 웅천(熊川) 외삼촌 → 고성 성한서(固城 成漢瑞) → (선박 이용) → 여수 이순신장군 고적(麗水 李舜臣將軍 古蹟) → 승주(昇州) → 구례(求禮) → 남원(南原). 〈『표영삼의 동학 이야기』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8. 104~105쪽.〉
❏ 역주1 : 울산은, 경상도 울산도호부(慶尙道 蔚山都護府, 현 울산광역시 蔚山廣域市)이다.
❏ 역주2 : 부산은, 경상도 동래도호부(慶尙道 東萊都護府, 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350번지 釜山廣域市 釜山鎭區 堂甘洞 350番地 일원)이다. 〈본 항은 1861년 11월 상황이다. 1599년(조선 선조 32 기해) 경상도 동래도호부(慶尙道 東萊都護府), 1895년(조선 고종 32 을미) 동래부 동래군(東萊府 東萊郡)이다.〉
❏ 역주3 : 웅천은, 경상도 김해도호부 웅천현(慶尙道 金海都護府 熊川縣,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慶尙南道 昌原市 鎭海區 熊川洞)이다.
❏ 역주4 : 고성은, 경상도 김해도호부 고성현(慶尙道 金海都護府 固城縣, 현 경상남도 고성군 慶尙南道 固城郡)이다.
❏ 역주5 : 여수 이순신장군 고적은, 전라도 순천도호부 좌수영 충민사(全羅道 順天都護府 左水營 忠愍祠, 현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산 114-12번지 충민사 全羅南道 麗水市 德忠洞 山 114-12番地 忠愍祠)이다.
❏ 역주6 : 승주는, 전라도 순천도호부 승주군(全羅道 順天都護府 昇州郡, 현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全羅南道 順天市 昇州邑)이다.
❏ 역주7 : 구례는, 전라도 순천도호부 구례현(全羅道 順天都護府 求禮縣, 현 전라남도 구례군 全羅南道 求禮郡)이다.
❏ 역주8 : 남원은, 전라도 남원도호부(全羅道 南原都護府, 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全北特別自治道 南原市)이다.
③ 삼암 표영삼은 이에 더하여 교훈가의 집필시기와 장소를 창작 날조하였다. 다음과 같다.
『수운은 (남원으로) 가다가 구례쯤에서 교훈가를 지었다고 여겨진다.』 〈『동학1』 통나무 2004. 150쪽.〉
(3) 충무공 이해
충(忠)은 자신의 몸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임금을 받들어 모심(위신봉상危身奉上)이다.
무(武)는 적(敵)의 창끝을 꺾음으로써 국가가 받을 수모를 막음(절충어모折衝禦侮)이다.
공(公)은 예우하고자 최대한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① 이순신장군의 명성에 가려진 충무공들
대한민국 국민에게, “충무공(忠武公)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십중팔구 주저 없이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보편적 통상적 관념임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학의 식자로 알려진 추암(秋菴) 오상준(吳尙俊)이 이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충무묘를 「충무공 이순신묘」로 왜곡시킬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② 조선시대에 충무공(忠武公) 시호(諡號)를 받은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충무공(忠武公) 조영무(趙英茂, 1338~1414) 고려 말~조선 초 장수.
❏ 충무공(忠武公) 이준(李浚, 1441~1479) 조선 왕족.
❏ 충무공(忠武公) 남이(南怡, 1443~1468)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이수일(李守一, 1554~1632)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구인후(具仁垕, 1578~1658)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김응하(金應河, 1580~1619) 조선 장수.
❏ 충무공(忠武公) 이사룡(李士龍, 1612~1640) 조선 중기 무인. 〈이사룡은 본문의 충무묘 주인공이다.〉
(4) 충무공 이사룡에 관한 기록
① 충렬사는 숙종 기유년에 세우고 정조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제말(諸沫) 선조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는데 벼슬은 성주 목사 증병조판서(星州牧使贈兵曹判書)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사룡(李士龍)은 본주(本州) 포수(砲手)였는데 1638년(조선 인조 16 무인)에 청(淸)나라 징병으로 요동(遼東)에 들어가서 금주(錦州) 송산에서 순절하였다. 성주 목사에 추증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사원조(祠院條).〉
② 이사룡(李士龍)의 충렬사(忠烈祠)에 현판을 하사하고 방백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충렬사는 성주(星州)에 있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무의공(武毅公) 유극량(劉克良)의 숭절사(崇節祠)의 사례에 따라 똑같이 현판을 내릴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증 목사 이사룡의 충렬(忠烈)에 대하여 모두 후하게 표창하는 방법에서 무엇인들 아끼겠는가. 비록 유극량의 숭절사와 같은 이왕의 사례가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의리에 흥기되어 시행해야 될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어찌 금법(禁法)의 유무를 따지겠는가. 특별히 현판을 하사하라.』 〈『정조수정실록(正祖修正實錄)』 정조(正祖) 20년 1796년 6월 24일.〉
③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고호古號)의 죽림(竹林) 사이를 붉은 옷차림으로 떠돌면서 그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이 아직도 답답하게 맺혀 흩어지지 않고 있으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헤아려 알 수가 있다. 그처럼 남다르게 탁월한 인물에 대해 혹시라도 방금(邦禁)에 구애를 받은 나머지 그대로 둔 채 제사 드리는 곳 하나 마련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흠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성주목(星州牧)에 증 목사(牧使) 이사룡(李士龍)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연전에 충렬(忠烈)이라고 사액(賜額)했었다.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正祖) 22년 1798년 9월 1일.〉
④ 명나라 은혜에 보답한 이사룡 선생
선생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능일(能一)의 후손이며 정건(廷建)의 아들로 1612년(조선 광해 4 임자)에 태어나 향년 29세로 1640년(조선 인조 18 경진)에 돌아갔다.
1640년(조선 인조 18 경진) 청나라가 우리나라에 대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원병을 요구하자 포사(砲士)로 징발되어 금주(錦州, 중국) 싸움에서 명나라 조대수(趙大壽)의 군대와 대전했으나 탄환을 넣지 않고 공포로만 싸우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고문을 당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부터 입은 은덕을 상기시키며 배반의 불가함을 역설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대명충신이요 조선의사(大明忠臣 朝鮮義士)’라 크게 써서 걸고, 청 태조도 의로운 일이라 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환국할 때 그 주검을 운구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니 인조가 지나는 길의 5도 감사에게 명하여 예장하도록 하고 월항면 작촌 고산에 안장하게 하였다. 또 당시의 성주 목사 최유연(崔有淵)에게 명하여 그 묘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1692년(조선 숙종 18 임신) 향리 사람들이 그의 옛터에 사당을 짓고 옥천(玉川)이라 하고, 1793년(조선 정조 17 계축) 성주 목사에 증직되고, 정려를 지어 1796년(조선 정조 20 병진) 충절사(忠節祠)라 사액(賜額)하였다. 〈이상 ④항 『성주군청(星州郡廳)』 홈페이지 성주문화관광.〉
(5) 이사룡의 사당과 묘
본 항의 1861년(조선 철종 12 신유) 11월 당시, 경상도 성주목 당소방 작촌리(慶尙道 星州牧 唐所坊 作村里, 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마을 慶尙北道 星州郡 月恒面 仁村里 作村마을)에 선생(先生)이 배알하였던 충무묘(忠武廟,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가 있었다.
1958년(대한민국大韓民國 무술) 옥천충렬사가 훼철되기 전 입지했던 작촌마을 옛터에 이사룡(李士龍)의 후손들이 세운 옥천서당이 자리 잡고 있다. 작촌마을 삼거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강당 1동으로 되어 있다. 서당 앞쪽에 자연석을 이용한 옛 유허비와 후손들이 석재를 다듬어 세운 유허비가 함께 세워져있다.
① 이사룡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 중기의 무인이다. 그는 1640년(조선 인조 18 경진)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청(淸)나라의 원병으로 징발되어 동북지방의 전투에 출전하였다. 이듬해 전투에 임한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明)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여 명군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성주군청』 홈페이지 성주 옥천서원.〉
② 이 서원은 조선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서원은 1692년(조선 숙종 18 임신) 성주 목사와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처음 충렬사(忠烈祠)로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중략)… 이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으며, 1793년(조선 정조 17 계축) 성주 목사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796년(조선 정조 20 병진)에 사액되었다. 〈『성주군청』 홈페이지 성주 옥천서원.〉
③ 1919년(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기미) 직계 후손들의 집성촌인 경상북도 성주군 성암면 대조동 봉산동(慶尙北道 星州郡 聖巖面 大租洞 鳳山洞, 현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2리 778번지 慶尙北道 星州郡 龍岩面 大鳳2里 778番地)으로 옮겨와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중건(경상북도 기념물 제162호)하였다.
❏ 역주 : 본 항은 1919년 상황이다. 1914년 3월 조곡면(租谷面)과 초곡면(草谷面)을 통합하여 성암면(聖巖面), 두릉면(杜陵面)과 대동면(大洞面)을 통합하여 용두면(龍頭面), 1934년 4월 용두면(龍頭面)과 성암면(聖巖面)을 통합하여 용암면(龍岩面), 대조동의 대(大)와 봉산동의 봉(鳳)을 따서 현 대봉리로 개편되었다.
(6) 서원 철폐령
1871년(조선 고종 8 신미) 대원군(大院君, 1820~1898)이 중첩된 서원들을 철폐토록 하는 서원 철폐령(書院撤廢令)을 내렸다. 다음과 같다.
「비록 사액(賜額)한 서원이라고 해도 한 사람에 대해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된 것은 예조 판서가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정(稟定)하여 신주를 모신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하라. 이후 몇 백 년을 내려가면서 도학으로 받들어야 할 분이 있으면 반드시 도학자들을 모시는 서원에 배향하고, 충성과 절개로 받들어야 할 분이 있으면 반드시 충성과 절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셔두는 서원에 배향한다는 것을 거듭 밝혀 『오례편고(五禮便考)』에 올림으로써 만년(萬年)의 법식(法式)과 영구한 계책으로 삼도록 하라.」 〈『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高宗) 8년 1871년 3월 9일.〉
필자는 이 글을 올리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다. 그러나 그릇된 글, 변질된 글, 왜곡된 글 등은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 중 하나이다. 앞으로도 공부자들에게 독소가 되는 잘못된 글이 보이면 바로 잡아주려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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