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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10장
하나님의 구윈의 약속, 하나님의 양자(자녀)됨,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이방인에 대해 성취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현재 성령의 선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됨, 미래, 영광, 선택,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약속 등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영적 복음을 누리고 있습니다.
1~33절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자신의 유대인 동족들이 구원을 받지 못해서 큰 근심에 휩싸입니다. 실제로 가능하기만 했다면 바울은 동료 유대인들이 구원받도록 자신이 저주를 받는 지옥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외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3절).
4~5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큰 특권들이 열거됩니다.
여섯 가지 복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씩 두 개의 나란한 목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자됨:율법
영광:예배
언약들:약속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을 때 하나님의 입양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아마도 성막과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로 약속하신 언약들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고 모세 율법에서 그들의 '예배'를 규정하셨으며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들'을 주셨습니다(4절).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이스라엘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도 유대인에게서 나왔으며 그리스도는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라 또한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5절).
많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은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유대인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씨가 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부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창 21:12에서는 약속의 혈통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6~7절).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바울이 지금 구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바울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물질적 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8절). '약속'은 하갈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라와 그녀의 자손에게 주어집니다. 에서와 야곱의 탄생은 하나님이 유대인 혈통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같았고 심지어 쌍둥이었지만 하나님은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9~10절).
하나님은 야곱이나 에서의 삶 속에 있는 어떤 것의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행위'와 부르심의 대조는 바울이 여기서 단지 한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운명만이 아닌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11절).
리브가가 받은 약속(창 25:23절)은 하나님이 큰 자인 에서가 아니라 어린 자인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11장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일하시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2절).
하나님은 두 형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둘 중에 누가 얼마나 선하거나 악해질지는 고려하지 않으시고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하셨으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다른 사람 대신 선택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누군가가 구원받는 것은 출 33:19의 인용구가 단언하듯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14~15절).
따라서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에 달려 있습니다(16절). '이 일을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악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출 9:16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통치자로 세우셨고 자신의 구원의 능력과 영광스러운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분노조차 하나님을 높이는 역할을 하게됩니다(17절).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거나 완악하게 하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유죄를 선고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죄를 물으실 수 있는가? 바울의 신자들 중에 일부는 바울이 19절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에 호소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방식에 반항적으로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피조물에게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문맥에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은 구원받는 이들과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을 나타냅니다(19~21절).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와 '긍휼'이 함께 나타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정당한 분노를 배경으로 해서 더욱 빛나며 이를 통해 어떤 사람의 구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할 의무가 있다고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22~23절).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로부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신 분입니다(24절).
바울은 '내 백성 아닌' 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실증하기 위해 호세아 2:23과 1:10절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자격없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처럼 죄 있는 백성을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불러 구원 하실 때 자기 백성이 아니었던 이들에게 과분한 긍휼을 베푸십니다(25~26절).
바울은 이 상황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과의 다른 관계를 추가하지도 않았지만 이제 '믿음'으로 그런 바른 관계를 누립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추구했지만 결국 그런 관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30~31절).
이스라엘은 어찌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이르지 못했는가? 그들은 겸손한 신뢰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지 않고 율법을 자신들만의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와 같은 율법의 오용으로 인해 그들은 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의를 세우려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2절).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이사야 28장16절에 예언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말세에 '부끄러움'을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33절).
1~21절
10: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유대인의 '열심'과 진지함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폭넓은 원리는 많은 진지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이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2절).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 그 대신 자신의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3절).
'마침'이란 목표와 끝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할 것입니다. 모세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표에 이르렀고(율법은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예상했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구속력을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표이자 끝이므로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속합니다(4절).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이들은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레 18:5를 인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미 보여준 것처럼 모든 사람이 율법을 위반하므로 생명은 이런 식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5절).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을 통해 오는 의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신명기 30장 12~14를 인용합니다. 믿음에 기초한 의는 이런 구약의 진술들을 재해석하며 그것들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그리스도'를 땅으로 '모셔 내리'려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또 누구든 '그리스도를 죽은 자가운데서 모셔'올려야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초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6~8절).
'내가 만약에 내 입으로....시인하며', 이는 한 사람의 믿음을 말로 시인하는 것이 칭의를 받을 만한 '행위'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런 고백은 내적인 믿음의 외적 증거를 제시하며 대체로 그 믿음을 말한 사람 자신에게 확증을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이해없이 이 개별적인 사건만 믿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부활의 그것과 관련된 복합적인 진리 전체와 더불어 특히 인류를 대신한 예수님의 죄를 짊어진 죽음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인정을 보여준 부활을 믿을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구원 얻는 믿음은 단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깊은 내적 신뢰입니다(9~10절).
바울은(행위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윈의 이를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이사야 28장 16을 인용합니다. '부끄러움'은 여기서 마지막 날에 심판 받는 이들이 지옥에 보내질 때 경험하게 될 말세의 수치를 가리킵니다(11절). 하나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풍성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2~13절).
'그런즉', 일련의 수사학적 질문과 함께 바울은 한 사람의 구원받는 데 필요한 연속적인 사건들을 고찰합니다. 14절은 '부르리오'라는 말로 13절과 연계됩니다. 이 구절들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1)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을 경우에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3) 사람은 누군가가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할 때만 그리스도에 대해 듣게 됩니다. (4) 그리스도에 대한 메세지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그 메세지를 선포하도록 보내시지 않으면 선포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일을 절박한 일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14~15절).
복음을 듣는 일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개인적인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사야 53장 1은 모든 사람이 믿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 합니다. 로마서 9장~11장의 문맥에서 바울은 특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16절).
바울은 이제 지금까지의 논증을 요약합니다. 사람은 복음을 '들음'으로써만 '믿음'에 이를수 있으며 들어야 할 구체적인 메세지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17절).
메세지를 들은 '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바울은 시편 19장4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그 본문의 문맥상 일반 계시 복음이 '땅끝까지' 즉, 이방인에게까지 이르렀으므로 유대인들도 복음을 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구절을 특별 계시(복음 선포)에 적용합니다(18~19절).
이사야 65장1의 예언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취 되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사야 65장 2의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메세지를 거슬렸고 불순종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손을 벌려 구원받도록 초대하셨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택한 이들만 예정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이 두 진술이 어떻게 둘 다 참인지 이해하기란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성령은 둘 다 가르치며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부정하기 위해 다른 한 진리를 이용해선 안됩니다(20~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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