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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천하쟁패(天下爭覇)
1절. 견문발검(見蚊拔劍)
- 병형상수(兵形象水), 칠지칠편(七之七篇)
- 누가 종지(宗之)를 기(蘷)ㆍ설(偰)의 무리라 하였던가.
험한 땅과 평지가 마침내 몸을 위태롭게 하였구나.
부질없이 부로(父老)들을 동문에서 타일러 괴롭히는 것이,
어찌 세 번 꿰매고[三緘] 회진(會津)에 숨은 것만 하랴.*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35권 전라도 나주목편에 실린 정도전의 12영시(詠詩) 중 하나이다. 여기 등장하는 기와 설은 모두 한 나라의 시조이다. (기는 초나라의 부용국, 설은 은나라)
- 이게 대체!
왕건이 금성(錦城)을 떠나기로 하기 3일 전 밤.
총례(聰禮)는 충격으로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중이었으니 - 바로 꿈 속의 자신 앞에 괴이한 복색을 한 노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너는 내가 뉘인 줄 아느냐?
엄숙한 얼굴로 물어보던 그 노인은 정작 총례가 아무런 답변도 못하자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 네 놈은 내 후손이니라.*
- ....?!
- 오늘 불쑥 찾아온 것은 네 놈에게 살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 금성 나씨(또는 '나주 나씨')의 족보에 따르면, 나씨는 본래 축융(祝融)의 후손으로 61세손 광정공(匡正公)이 주(周)나라에 공을 세워 봉토를 받은 데서 유래하였다. 그 후 광정공의 41세손인 주공(珠公)이 한나라 때 예장태수에 봉함을 받아 예장 나씨가 되었고, 그 25세손인 나지강(羅至强)이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다 처벌을 두려워하여 도주했다. 바로 이 나지강의 후손들이 오늘날 전라도 나주에 해당하는 금성 발라현(發羅縣)에 은거함으로써 호족이 된 것이다. 나총례는 바로 그 나지강 계열의 중시조(中始祖)에 해당한다.
노인은 총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였다.
- 이 땅에 신인(神人, 뛰어난 사람, 곧 영웅)이 이르렀으니 너는 반드시 그를 쫓도록 해라.
- 노부(老夫)께서 어인 말씀이시온지 ....?
- 네 놈이 그를 따른다면 반드시 후손까지 복이 이어질 것이라.
문득 노인이 갑자기 들고 있던 지팡이로 총례의 어깨를 세게 내리치니, 총례도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만 잠에서 깨어 버렸다. 그 때의 생생함이 어찌나 실제처럼 느껴지던지 맞은 부분이 얼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 노부는 뉘시며 대체 신인은 또 무슨 말인고?
그렇게 잠까지 설치고 만 총례는 노인의 경고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아침되기 무섭게 오다련을 불러 들였다.
목포 상단의 대행수인 만큼 포구로 오고 가는 인사들을 대략 알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뭐라, 이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오다련도 총례만큼 황당한 마음에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지만, 일단 태수의 부름이기에 전령을 따라 남평현에 들었다. 목포를 출발해 거의 두 식경이나 걸리는 길인지라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오후 쯤 관아로 들어가니 섬돌 아래까지 내려와 있던 총례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끌고 가듯 집무실로 밀어넣었다. 오다련도 영문을 모른 채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러오? 뭔 일이 있소?"
총례는 어리둥절한 그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꿈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다 듣고 난 뒤에도 오다련은 되려 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
"그게 뭔 대수라고 나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이오?"
"괴이하지 않소? 처음 뵙는 노부께서 신신당부하니 .... 혹 요즘 목포에 새로 든 자가 있소?"
"허, 그 참 .... 그, 뭐 .... 굳이 말하자면, 북쪽 상단에서 사람이 하나 온 걸 빼곤 ...."
"북쪽? 혹, 그 궁예가 다스린다는 송악에서 온 사람이오?"
"그렇수다. 늘 여기 있는 상점 살피러 오는데, 이번에 '처음 보는 인사'가 왔기에 눈여겨 봤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자다!
총례는 곧 오다련에게 말하였다.
"그 분, 어디 계시오?"
"아마 지금쯤 여기 남평현을 떠났을 것이오. 특산품을 팔려고 둘러본다며 1주일 전 떠났는데."
오다련의 대답에 총례는 마음이 급해져서 독촉하였다.
"그렇다면 .... 혹, 연통할 방책은 있소?"
"뭐, 사실 우리 딸이 굳이 여기서 빨래를 한다고 먼저 보내놨는데 혹, 만났을 지 모르지."
그 말에 총례는 또 오다련을 재촉해서 딸의 소재를 알아보게 하더니, 아예 비장(裨將)을 붙여서 오다련의 노복과 함께 찾아보도록 한다. 오다련은 당최 이 사태가 뭔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총례의 표정을 보고 꿈에서 심상치 않은 계시를 받은거라 짐작한다.
한 편.
왕건은 2일 간 산성(山城, 금성산성) 주변을 살핀 뒤 다시 목포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남평현을 떠나면서 다른 곳에 보낸 사병들의 소식을 받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의 곁에 바로 오연지도 함께 있었다.
다시, 합방(合房,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이름)을 하던 그 날 밤.
오연지의 눈물을 본 왕건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오연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닦아주며 이르기를,
"정녕 그대의 마음이 이러한 줄 몰랐소만 이미 정혼(定婚)하였소."
여기서 '정혼자'라 하는 이는 정주(貞州)의 유천궁(柳天弓)의 딸 주혜(珠慧)를 이름이다. 국가적 대사업을 준비하면서 상당한 도움을 받은 만큼, 그의 은근한 압박을 왕건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오연지를 먼저 품은 줄 알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기에 염려했던 것이다. 오연지도 그 점을 짐작하고 아뢰었다.
"무선황후(武宣皇后)는 본디 천한 몸으로 일시에 귀해졌으므로 좌중의 목도(目睹, 주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황제가 이미 정실(正室, 조강지처)을 두었으므로 오히려 의혹을 받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몸을 낮추어 정실을 받들고 후궁의 아들까지 자애(慈愛)하여 가문을 평안케 하였습니다.* 첩이 오늘 장부를 만나 서로 합쳤으니 어찌 변씨와 다르겠습니까? 만일 정혼자가 있다면 마땅히 그 분을 섬길 것이니 또한 부덕(婦德)에 합하지 않겠습니까?"
* < 삼국지 > 위서 권5 무선변황후(武宣卞皇后) 열전에 인용된 어환의 < 위략 >을 인용한 것이다.
왕건은 그녀의 지혜로움을 보고 비로소 안심하니 둘의 뜻이 일치되었던 것이다. 남평현을 떠나던 날, 뜻밖에 부친의 연통을 받으니 왕건에게 아뢰었다.
"하늘이 장부를 도우심이니 속히 만나셔야 합니다."
이렇게 왕건의 일은 마치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처럼 결론을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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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운명은 마치 예고하듯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다.
"제향(祭享)을 넘기라니요?"
소씨 형제는 진례성에 당도하자마자 김인광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으니 -
본디 김해(金海)의 치소는 금관성(金官城)이었다.
그 강역(疆域)은 오늘날 경상도 부산광역시와 마주보고 있는 곳까지 이르니, 과거 신라의 관문인 울주(蔚州) 일원, 특히 부산포(釜山浦)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곳을 수도로 하였던 금관가야(金官伽倻)는 철 생산을 중심으로 왜국 및 중원과 깊숙히 교류하는 한 편, 경제와 군사 양면에서 신라를 압도하며 전기 가야동맹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仇衡王) 대에 이르러 금관가야는 신라 법흥왕의 정복 사업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으며,* 그 후예였던 김유신 일가가 진흥왕 삼맥종(三麥宗)과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진골 귀족이자 중흥 공신이라는 문벌(門閥)로 가세를 이었던 것이다.
* < 삼국유사(三國遺事) > 가락국기(駕洛國記)는 법흥왕 19년(서기 532년)과 진흥왕 23년(서기 562년) 두 설을 모두 기록하여 금관가야의 멸망 시기에 관한 논란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구형왕의 삼남인 김무력(金武力)이 후일 백제-왜-가야(후기 대가야 연맹) 연합군으로 이루어진 성왕의 군사를 깨뜨린 관산성(管山城, 오늘날 충청도 옥천) 전투에 참전했던 만큼, 구형왕의 항복 시기에 관한 진흥왕 설은 시기와 사실 관계 모두에서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소설은 전자(법흥왕 설)를 지지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김유신 일가가 왕통(王統)을 장악한 김춘추 계의 몰락과 함께 쇠락하면서 김해 일원의 주도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김수로 제향'의 주도권 문제는 결과적으로 '금관성 소유권'과 맞닿아 있었으며, 신 가락국 연맹을 창설한 김인광 입장에서 볼 때 반드시 선결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금관성에 부식한 소씨 일가를 못 마땅하게 여기는 건 필연적인 것이었다.*
* 김인광, 김심희 일가가 오늘날 경상도 창원 일대로 밀려난 점, 소씨 형제가 당시 금관성의 주인 노릇을 한 점, 여기에 제향 문제로 지속적인 갈등을 빚은 점으로 볼 때, '제향'의 주관과 '금관성의 소유권' 문제는 김해를 근거로 한 옛 가락국 세력의 권력 투쟁 요인이었다. 진례성을 기반으로 김해 일대를 다스리며 신 가락국 연맹을 창설한 김인광은 신라에서 유래해 금관성에 부식(扶植)한 소씨 일가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들 형제가 김인광의 먼 친척을 앞세워 제향을 주관하며 빈 틈을 주지 않으려 한 게 결정적이었다.
"그대들이 우리 일가의 일을 임의로 처리하고 있지 않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일가가 지금 자네들 처사만으로 만족하리라 여겼나?"
김인광은 연맹의 여러 족장(族長)과 장수, 호족들 앞에서 소씨 형제를 엄중하게 질타하였다.
"나, 김인광은 경파(京派)의 수장이자 수로대왕(首露大王)의 당당한 말예(末裔, 후손)일세. 이런 내가 몇 년 째 수로대왕의 제향에 참여치 못하는 이유를 모를 것이라 여기는가? 다 그대들이 제향의 주도권을 주지 않으려 함이 아닌가? 게다가 실상 그대들은 제향보다 그로 인해 동반해오는 광대한 전답을 노린 것이 아닌가?"
구형왕 투항 후 수로왕의 제사를 위해 신라가 김해 주변의 토지를 봉토로 내렸던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김인광은 제향 주관의 권한과 소유권 역시 자신과 문중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하고 있었다. 함께 참석한 김심희(진경대사, 김유신의 적손(嫡孫)) 역시 동조하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이리 모욕주실 것입니까?"
"잔말 말고 올 가을부터 제향은 우리가 주관할 것일세. 또 관련 전답 역시 당장 내놓게."
이는 사실상 금관성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김인광의 속셈이었으니 -
그로 인해 난처하게 된 것은 그 동안 제향을 올린 김평(金平)이었다. 그는 김인광의 먼 일가였으나 아직 김해에 연을 두고 있어, 소씨 형제에 의해 억지로 제관(祭官)이 되었던 것이다. 관련 전답 역시 명목상 그의 소유로서 관리 중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마침내 소씨 형제 중 맏이인 소충자(蘇忠子)가 벌개진 얼굴로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구형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 제향은 나라에서 정한 자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 있는 김평의 선조인 중광(中匡)인 것입니다. 그가 누대로 제관을 맡아 온 것이 150여 년이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장군이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 소씨는 김해를 모토(茅土, 봉토)로 받아 백 년을 다스렸습니다. 그것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우리가 소유권을 갖는 게 합당치 않겠습니까!"
김인광도 그 말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네 이 놈! 나는 구형왕의 적통(嫡統)이며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의 본명)의 사손(嗣孫)이니라! 김평 일가의 일은 계림에서 임의로 정한 것이지 어찌 합당한 사유이겠으며, 소목(昭穆, 일가의 적서 관계)으로 따져도 내가 김평의 일을 도로 거두어 주관하는 게 이치에 부합하니라! 어찌 적통이 아니라 지손(支孫)에게 맡기도록 임의로 정해진 것을 주장하는가?"
모처럼 화합을 이루고자 모인 자리에서 뜻밖의 문제가 불거지자, 모든 인사들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며 어쩔 줄 모르는 듯 당황하였다. 소씨 형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 밖으로 나가 버리니, 김인광은 더욱 격분하여 장차 병마를 일으켜 금관성을 치겠다고 한다.
그러자 김평이 조심스레 일어나 말하였다.
"소인과 일가가 제관을 오래 맡은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니, 이제 종숙부(從叔父, 김인광)께서 거두시겠다면 어찌 이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만 소씨 형제 역시 그곳에서 세를 이룬 지 오래라 쉬이 도모할 수 없으니 통촉하십시오. 자칫 이 일로 계림(鷄林)과도 마찰을 일으키게 될까 저어됩니다."
이 말에 김심희도 말을 보탰다.
"형님이 참으십시오. 조카의 말이 지당하니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김인광은 씩씩거리며 간신히 분을 억눌렀으나 도무지 성은 안 차는 눈치였다. 김심희와 김평은 서로 그를 달래면서 여러 좌중을 설유(說諭)하여 이 일에 관해 함구하도록 하였다. 이에 모두 불안한 기색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한 편 소씨 형제는 금관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로 논의하였는데, 이 때 소율희(蘇律熙)가 형(소충자)에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비록 김인광이 무도하게 우리를 내치려 하겠지만, 딱히 좋은 명분이 없으니 당장 어쩌지 못 할 것입니다. 다만 듣자하니 진례성에 머무는 계림의 황족 김애와 교분이 두터운 데다, 전일 서로 만남의 자리까지 주선했다고 하니 필시 뭔가 일을 꾀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알아보아 넌즈시 계림에 통고(通告)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충자도 그 말을 옳다 여기고 곧 사람을 진례성 주변에 놓아 알아보게 하는 한 편, 신라의 실권자인 박예겸 등과 접촉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또 그는 동생에게 일러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진례성에 대항하고자 한다.
이로 인해 신 가락국 연맹에 큰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건은 1차 정보 수집을 마치고 일시로 송악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 때 오연지도 아쉬운 마음으로 그를 배웅하였는데, 그 정경이 후일 그녀의 싯귀로 남게 되었다.
- 너의 모습을 기억하니 긴 휘파람 소리 향기를 내네. 顧盼遺汝䠷, 長嘯氣若蘭.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오작교가 생겼네. 無以結中心, 有以生烏鵲.
그리운 사람 어디 있을까 생각하니 바로 송악에 있네. 所思兮何在, 乃在扶蘇山.
이렇게 깊이 사랑하게 되었네. 於焉我相戀.*
* 미상, '너의 모습을 기억하다(顧盼遺汝䠷).'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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