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차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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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 문학비의 콘텐츠화 사례 3. 기억 공간의 공원묘지와 용인 지역 현황 4. 용인 지역 문학인 묘소 현황 5. 문학순례길 조성 제언 6. 나가며 |
국문 요약
이 논문의 목적은 문학인 묘지와 시비를 지역 문화콘텐츠로 개발함과 동시에 구체적인 코스를 소개하며, 지자체에 제언하는 형식이다. 용인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문학인들의 묘지와 문학 기념물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화 공간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특히 국내외에서 알려진 기억 공간으로서의 공원묘지를 소개하고, 용인 지역에 남아 있는 문학인들의 묘지와 기념물(시비)을 어떻게 지역문화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기초연구 자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용인 지역에 작가의 묘지들이 집단화되어 있는 이유와 공원묘지의 기원,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또한, 문학계의 묘지와 기념물을 문화콘텐츠로 홍보하고 발전시키는 방법과 기념비의 구체적인 배경, 종류 및 의미, 문화콘텐츠의 예를 소개한다.
이 연구는 묘역과 기념비가 문화콘텐츠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작고한 작가의 문학적 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가치 있는 문학 자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용인 지역에 산재한 문학인들의 묘를 ‘야외 문학박물관’으로 지정하고, 1∼4코스의 문학순례길을 만들어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작고 작가에 대한 인식과 용인에 집중된 작가 수에 초점을 맞추면 ‘옥외 문학박물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용인시가 단순한 참배의 의미를 뛰어넘어 유명한 문학인들의 묘지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할 가능성이 있기에 문학 순례길을 제정하고,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용인 문학순례길’은 아직 제안 수준에 불과하지만, 용인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문학적 자산을 지역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연구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며
본 논문은 용인 지역에 분포된 문학비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문학순례길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제언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해외 및 국내 다수 지역의 문학 공간 콘텐츠 개발 사례를 조사한 후 용인 지역의 콘텐츠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 볼 것이다.
본 연구는 1990년대부터 용인 지역 내에서 문학 관련 취재를 통해 발굴된 시비를 중심으로 필자가 그동안 언론과 문학지 등에 발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애초엔 용인 지역 문학비들을 어떻게 문화 콘텐츠화할 것인가를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용인(龍仁)이란 지명은 조선 태종 14년(1414년) 8월 21일, 고려 시대 행정구역 명칭이던 용구현과 처인현을 병합해서 용구의 ‘용’과 처인의 ‘인’자를 합친 ‘용인(龍仁)’에서 시작됐다. 용인시는 인문 환경 측면에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유물 유적들이 대거 출토됐다. 강남대학교 홍순석 교수는 ‘용인학 길라잡이’에서 “용인은 선사시대 남방과 북방식의 고인돌을 공유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삼국시대엔 백제⋅신라⋅고구려가 점유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엔 불교 유적과 처인성 승첩으로 주목받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엔 전통신앙과 천주교가 공존하던 곳, 항일(抗日)과 친일(親日)이 병존하던 곳이다. 용인은 이처럼 시대마다 다양한 문화여건 속에서 경향(京鄕)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고유문화를 창출한 지역이다. 한마디로 전래의 고유성(固有性)을 고집하면서도 유입된 문화여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온 지역이다. 지금은 전통과 첨단의 문화를 공유하여 미래를 선도하는 도시이다”라고 용인을 정의하고 있다.
용인은 역사적으로도 군사⋅경제⋅문화적 위상이 컸음을 의미한다. 이를 반증하듯 용인시는 2019년 현재도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이자 산업⋅교육⋅문화의 도시로 평가받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 용서고속도로가 용인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GTX와 제2 경부고속도로 노선도 용인시의 동·서부 지역을 관통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전철인 분당선 연장선을 비롯한 신분당선과 용인경전철이 용인 지역의 주요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군사 요충지의 근거로는 예로부터 할미산성, 석성산, 처인성 등 문화재가 유물로 남아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반도체)를 비롯해 수많은 중소기업이 산재해 있다. 아울러 교육 시설 분야 역시 10여 개의 종합대학이 있고, 대기업 및 중소기업 연수원이 집중해 있다. 특히 세입 측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레저시설 골프장의 경우 30여 개에 이르고, 이는 제주도를 제외하면 전국 최상위권이다. 골프장은 세수증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용인시 인구는 2019년 현재 106만 명을 넘었다. 지자체 인구가 100만 명 이상이면 행정 조직과 인력이 확대되는 등 ‘특례시’ 대상으로 도시 위상이 외부적으로도 한층 높아짐을 의미한다.
지리적으로 경기 남부권인 용인시는 한반도 중부 내륙 산지 지역이다.
서울특별시 면적 605.21㎢의 98%에 해당하는 592㎢다. 평균 해발고도는 85.7m로 낮은 산지가 많고 한강과 연결되는 탄천이 있어서 예로부터 풍수지리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용인을 풍수지리 측면에서 보면 명당자리가 많기로 유명하다. ‘사거용인(死去龍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분묘가 많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명망가들의 분묘가 많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장묘시설(공원묘지)들이 설치되면서 여전히 사후의 인기 지역으로 꼽힌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성곽 주변 도시에 고관대작들이 우거지로 선호해 조광조, 남구만 같은 인물들이 용인으로 낙향해 살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용인에 머물면서 명현의 묘역이 조성되거나 명현이 많이 배출됐다. 그중 당대에 유명세를 날리던 문학인들의 묘역까지 대거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역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인문 환경을 비롯해 향토문화유적들의 흔적을 찾아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용인 지역에 산재한 문학인들의 사후 시비를 전수조사하고자 한다. 또한, 문학비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기록들을 수집하여 제시할 것이다. 자료 수집은 주로 문학인들이 용인에 묘지를 조성하게 된 배경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며, 조성된 묘지와 묘비가 갖는 의미를 도출할 것이다. 아울러 문화콘텐츠로 계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언을 하고자 한다.
2. 문학비의 콘텐츠화 사례
특정 문학인의 예술 활동이나 사상을 연구 비평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활동 시기와 공간, 그 시대의 특수한 환경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작가론은 작가의 탄생 공간부터 작품활동에 영향을 끼쳤던 환경, 그리고 사후 묘역을 통한 조명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연구 방법론이 폭넓어야 한다.
소설가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를 쓰면서 단 한 번도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는 소설 속 공간 ‘평사리 최참판댁’을 완벽하게 그려내 화제가 됐었다. 박경리는 이미지 재현을 위해 지도를 놓고 평사리 들판을 찾아냈다고 전해진다. 문학작품의 시공간에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한다.
작가 자신의 출생지와 성장지, 한 생애를 구성한 물리적 공간과 환경 도시 공간이다. 물론 작가의 가족들과 주변의 인적 환경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비단 문학인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 주요 인물 중에는 오히려 사후에 업적의 공과가 새롭게 조명되거나 더 많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후에 숭배의 대상이 되는 곳은 문학비를 비롯한 기념관 또는 박물관 등의 물리적 공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더 추가할 것이 있다면 작가의 생가터를 비롯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지역 또는 작품활동 무대 등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고향 크레타섬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그의 묘소는 성벽 위에 있어 이라클리온 시가지 전경을 바라보기에 좋다. 관광객들에게는 이곳이 필수 방문코스로 유명하다. 그리스 전체가 그랬듯이 크레타섬도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크레타섬은 힘센 자들이 탐을 냈던 곳이지만 식민지배 하의 조국 그리스에 다시금 정신문화를 우뚝 세우고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제시한 카잔차키스가 있어 그리스인들에게는 의미가 크다.
오스트리아는 음악의 나라로 수도 빈에 ‘중앙묘지’가 있다. ‘음악가의 묘지’로도 불리는 그곳엔 공교롭게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같은 유명 음악가들이 잠들어 있다. 묘지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해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관광객들의 방문이 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파리의 지하묘지’는 문학작품, 만화 영화, 영화, TV,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815년 에리카르 드튀리 Héricart de Thury는 파리의 지하묘지에 관한 최초의 안내 책자 파리 지하묘지의 기술 Description des catacombes de Paris)에서 지하묘지가 세워진 배경과 방문객들이 돌아볼 수 있는 경로를 소개했으며, 현재는 매년 50만 명이 찾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나 독일의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등 문학가들은 생전보다 생후에 인기가 더 많은 경우다. 그들은 묘소뿐만 아니라 생전에 즐겨 찾았던 찻집, 그들이 앉았던 단골 음식점의 책상과 의자, 심지어 술 취해 거닐었던 거리까지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생전과 생후의 모든 흔적까지 문화콘텐츠로 활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보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묘소가 있다. 스웨덴의 우드랜드 묘지공원과 마카오 신교도 묘지다. 묘지공원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스톡홀름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스코그쉬르코그르덴 묘지공원으로도 불리는데 숲속 공원을 의미한다. 이는 스웨덴이 묘지 공간 하나도 환경과 건축의 미를 의식하고 만든 결과다.
우리나라에도 주목할 만한 곳이 있다. 서울특별시 담당으로는 유일한 구역인 ‘망우리 공원묘원’. 과거에는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불렸다. 1933년 5월 27일 경기도의 임야 일부를 경성부에서 양도받아 일반 사람들을 매장하기 위한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나 미 군정기에 나라를 위해 애쓴 지사들이 안장되기도 했다. 현재 지석영, 문명훤, 오세창, 방정환, 한용운, 조봉암, 장덕수, 문일평 등 지사들의 묘가 남아 있다. 망우동 산57-1번지 일대 832,800㎡의 공간에는 한때 2만 8500기의 봉분이 있었지만, 현재는 7000여 기 정도밖에 없다.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시인, 독립운동가, 소설가, 화가, 가수 등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근심을 잊고 잠들어 있다는 뜻의 망우(忘憂). 지금은 서울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시인 박인환(1926∼1956) 묘소가 있고, 인근엔 소설가 계용묵(1904∼1961)이 있다. 또 애국지사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1879∼1938)과 부인 유씨가 합장돼 있다. 또 어린이날을 지정한 소파 방정환(1899∼1931) 묘소 등이 있다. 독립운동가나 유명 인사들의 묘지는 주로 구리시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중랑구에서 망우리 공원에 묻힌 독립운동가나 저명인사들의 묘지를 부각하고 안내 입간판 및 입석 등을 설치했다는 것. 입구에는 독립운동가 혹은 저명인사의 무덤 위치를 표시해 둔 대형 안내 입간판을 설치했으며, 해당 인물묘지 입구에는 안내 표지 입석을 세웠다. 입석의 앞면에는 이름과 관련 인물이 남긴 어록 한 구절을 기록해 놓았으며, 뒷면에는 이력을 적어 관련 인물의 행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서울시와 중랑구 등의 공원정비계획에 따라 산책로와 자연관찰로가 조성되어 주민들이 산책로와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정자, 운동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망우 묘역을 주목한 이유는 격동기의 한국사가 남긴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시설관리공단 측이 망우 묘역 내 저명인사들의 묘지를 안내하는 입간판과 표지 입석을 세웠음에 주목한다. 저명 작가들을 기리는 묘지야말로 사후 박물관이나 기념관, 문학관처럼 전 생애를 옮겨다 놓는 또 하나의 ‘기억박물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기억 공간의 공원묘지와 용인 지역 현황
1) 묘지 문화의 상징적 의미와 국내외 사례
동서양 모두 묘지 문화는 단순한 숭배와 참배를 넘어, 영원불멸한 기억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현상은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동서양이 가족과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종교 이상이다. 묘지는 추억을 기억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이별의 상실감으로 인해 발생 가능한 사건 예방기능도 있다. 결국, 인간 사후의 기억 공간이라는 특수성으로 묘지와 묘비가 만들어지고, 그 묘역의 상징물로 비석 등이 조성되는 것이다.
중국 최초의 황제(기원전 260∼210) 진시황(秦始皇)은 살아생전 사후세계를 믿었다. 그는 가장 웅장한 건축 계획을 명령했다. 진시황릉은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8000여 개의 토병들과 일상 생활용품, 조상숭배 청동 식기, 악기, 부인과 궁궐 신하들까지 황제의 저승길을 보위하도록 함께 묻혔다. 사람들은 묘지를 삶과 죽음의 통로, 혹은 삶의 연장선(환생)으로 생각해온 결과다.
묘지는 한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나라마다 형식은 다를 수 있지만, 공통으로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인식하는데 기인한다. 티베트 장례문화 중에는 천장(혹은 풍장이나 조장) 의례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을 작게 잘라서 돌산에 내놓아 독수리들의 먹잇감이 되게 한다. 새에게 인간은 단순히 먹잇감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새의 몸을 빌려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일종의 신앙 행위로까지 이어지는 의식 행위다.
이렇듯 묘지 문화는 국가별 지역별 풍습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크게 다르다. 한 나라와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보기 위해서는 묘지 문화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 논문에서 보여준 용인 지역의 문학비를 중심으로 한 연구는 일반적인 묘지 문화와 달리 연구 대상과 내용이 많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대문화를 발굴 연구하고자 할 때 묘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처럼, 묘지 문화는 시공간을 초월한 또 하나의 역사 공간이자 살아 있는 현장 박물관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규모 기억 공간을 보자면 1960년 4⋅19혁명 때 희생한 영령 199위를 안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5⋅18 기념공원’과 ‘망월동 묘역’, ‘제주 4⋅3 평화기념관’ 등이 있다. 이들 공간은 기념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아픈 교훈을 되새기자는 취지에서 조성됐다. 이념 대립 요소가 남아 있지만 앞으로 후세들에게 역사 기억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자연재해나 인재로 인한 참사, 또는 참전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원(탑)이나 묘역 등이 추모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유명 정치⋅문화예술인의 기념관 혹은 박물관, 생가(터)나 묘지(기념비) 등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도 주목받고 있다.
2) 용인 지역 공원묘지 실태와 문학비 사례
용인시 지역에는 묘지가 많다. 지리적으로는 수도권에 자리 잡고 있고, 종교단체 또는 사설 공원묘지가 집단으로 설치되어 있다.
망우리 공원묘지처럼 근현대사 인물뿐만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묘지 군이 산재해 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지석묘)이 곳곳에 있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352-9에 있는 용인 맹리 지석묘는 문화재자료 제68호, 용인시 양지면 주북리 지석묘는 용인 문화재자료 제49호, 용인 모현읍 왕산리 지석묘는 시도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석묘에 묻힌 인물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당대의 지도층 인사들로 추정된다. 지석묘를 통해 고대의 생활사를 추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 자산이다.
풍수지리 각주에서도 언급했듯이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去鎭川 死去龍仁)’이란 말이 있다. 여러 구전이 전해지고 있지만, 현대인들은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말로 이해한다. 이 말은 용인에 묘지가 많으므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항간엔 명당이 많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과학적 설득력이 없기에 논외로 한다. 따라서 직급과 신분 등에 따라 왕이 있는 도성(都城) 100리 밖 전후에 묘지를 써야 했던 당시의 사회 풍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크게 개별 묘지(종중, 가족묘 포함)와 국가나 지자체 소유 또는 사설 공동(집단)묘지로 나눌 수 있다. 장례 방식과 분묘 형태에 따라 매장과 화장, 분묘를 포함한 봉안묘나 수목장 등이 있다. 문제는 매장이든 납골이든 공간을 임대하거나 매입해야만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동묘지(종교시설 또는 사설, 국가나 지자체 소유 포함)에 묻히게 된다.
용인 지역에서도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공동묘지가 형성된 시기는 1960년대 이후다. 이 시기에 서울이나 수도권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유명 문인을 비롯한 정·재계와 종교계 인사들이 대거 용인 지역에 안장됐다. 이 같은 현상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2009년도엔 김수환 추기경이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됐고, 2011년엔 작가 박완서도 같은 공원묘원에 안장됐다. 이들은 종교시설에서 만든 묘지공원에 안장된 사례다.
용인 최초의 공원묘지는 1967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만들어진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이다. 1975년에는 인근 지역 모현읍 초부리에 ‘용인공원묘원’, 1977년에는 수지구 죽전동에 ‘정자공원묘원’, 1979년에는 처인구 이동읍 서리에 ‘서울공원묘원’ 등이 차례로 설치됐다. 최근엔 처인구 이동읍에 화장과 납골 및 장례식장을 갖춘 초대형 현대식 시립 장례문화센터인 ‘용인 평온의 숲’이 건립되어 종합 장례문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수목장이 들어서고 있다.
4. 용인 지역 문학인 묘역 현황
용인 지역에서는 문관 출신의 문인들과 현대 문인들의 묘지와 문학비를 활용한 지역 문화콘텐츠 개발 여론이 오랫동안 조성됐다. 그러나 행정기관이나 문화단체에서는 구체적인 실천 계획이 없다. 용인시에서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년∼1711년) 등에 대한 추모사업이 진행 중이다. 포은 정몽주의 경우 지방자치 실시 이후 용인문화원 주최로 매년 ‘포은문화제’가 전국 규모 행사로 열리고 있다.
2003년 문화관광부에서 ‘6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된 포은 정몽주는 용인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5∼6월 중 ‘포은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용인문화원 측은 ‘포은문화제’를 통해서 용인이 ‘동방 성리학의 성지’로 재인식되길 기대하면서 포은의 위업을 재조명하고 있다. 주요 행사인 포은 선생 천장례행렬(圃隱先生遷葬行列) 재현이나 추모제례(追慕祭禮)로 용인이 동방의 예학(禮學)을 대표하는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개혁가이자 대학자인 정암 조광조를 기리는 ‘정암문화제’도 용인 지역에서 매년 볼 수 있다. 조광조는 중증 반정 이후 조정에 진출한 유학자다.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선비 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로 용인시 수지구의 상현동에 묘소와 그를 기리기 위한 심곡서원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에서 2015년 국가사적 530호로 승격된 용인시 주요 문화재다.
국민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로 잘 알려진 약천 남구만을 기리는 ‘약천 남구만문학제’가 용인문학회와 의령 남씨 종중 주최와 주관으로 매년 열린다. 주최 측은 2018년부터 전국을 대상으로 한 남구만 신인문학상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남구만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최근 주목할 만한 현대 작가는 경북 월성군 출신인 박목월(1915∼1978) 시인이다. 2015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유족인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와 용인공원묘원 측이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용인공원묘원 내에 있던 박목월 묘역을 ‘박목월 시 정원’으로 단장해 개원했다. 목월의 탄생지는 아니지만, 묘지를 현대적 문화콘텐츠로 개발한 대표 사례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인 소설가 황순원(1915년∼2000년) 역시 출생 연고지가 아닌 경기도 양평군에서 소설 ‘소나기’의 배경을 재현한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로 재탄생했다. 소나기마을은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일원 4만 7640㎡에 2009년 6월 개장했다.
이곳에는 소설 「소나기」의 배경 무대와 지상 3층 규모의 황순원문학관이 들어섰다.
문학비를 중심으로 용인 연고 작가들을 보면, 한시인(漢詩人)으로 학자 겸 시인인 읍취헌 박은(1479∼1504)을 꼽는다. 조선 시대 문인인 약천 남구만은 용인문학회가 2009년 의령 남씨 문충공파 종친회와 함께 ‘약천 남구만 심포지엄’과 ‘약천 남구만문학제’를 개최하면서 지금까지 다양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 우리나라 문학사에 있어 대표 여류시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난설헌 허초희(1563∼1589) 시비가 용인에 있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작자 허균(1569∼1618)의 누이고, 허균 일가의 묘역은 현재 용인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다. 조선 시대 한시인 김세필(1473∼1533)의 묘역 위치도 용인 수지구 죽전동이다.
용인 출생의 근현대문학 인물로는 노작 홍사용(1900∼1947)이 있다.
홍사용은 출생지가 용인시 기흥구지만 생후 100일 만에 서울 종로구 재동 집으로 옮겨가서 자랐다. 아버지가 죽자 현재 용인경계 지역인 화성시 동탄으로 이사해 휘문의숙(현 휘문고) 입학 전까지 살았다. 현재 화성시에 ‘노작문학관’이 있고, ‘노작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용인 지역은 다양한 근현대 문학인들의 거점이기도 했다. 용인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서 살았던 문학평론가 안막(1910∼?)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소장파를 형성,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한 인물이다.
본명은 안필승, 필명은 추백으로 월북 무용가 최승희(1911∼1969 남편이다. 노동운동가이면서 1930년대 한국 카프 문학의 맹장으로 수많은 트로이카를 주도하며 일제의 지배 체제에 항거한 안병춘(1910∼?)은 양지면 식금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사망 시기와 묘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30년대 초 유치진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던 이하윤(1906∼1974)의 시비가 한국민속촌에 세워져 있다. 신동엽(1930∼1969) 시비와 김용호(1912∼1973) 시비가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가 생기면서 옮겨져 왔다. 모더니즘 작가이면서도 농촌과 자연을 소재로 감각적인 서정시의 세계를 구축한 장만영(1914∼1975)의 시비가 모현면 초부리 용인공원묘원에 있다.
용인공원묘원에는 박목월(1916∼1978) 시인을 비롯해 소설가 이범선(1920∼1981), 국어학자이면서 영문학자였던 시인 양주동(1903∼1977),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 등이 잠들어 있다. 시 ‘산정묘지’로 유명한 조정권(1949∼2017) 시인도 이곳에 영면했다. 인근에 있는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도 신문학의 기수이며 계몽운동가인 우리나라 자유시의 출발점이 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을 비롯해 시문학파로 알려진 김영랑(1903∼1950),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수필가 전혜린(1934∼1965), 소설가 김소진(1963∼1997) 등이 있다.
용인 지역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명망 있는 문인들은 물론 현대 시대의 문인들까지 사후 유택이 몰려 있음이 현장 취재로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처음엔 용인 지역 시비 순례를 시작했으나 장르의 다양성을 고려해 문학비 순례로, 더 나아가 ‘용인 문학순례길’을 답사코스별로 구상한 계기가 마련됐다.
5. 용인 지역 문학순례길 제언
다음은 본 연구자와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마로니에북스, 2008)의 저자 안영선 시인이 《용인문학》과 용인문학회라는 활동 기반에서 출발하여 용인 지역의 문학 공간을 공동취재, 답사한 후 『용인 역사문화지도』(용인문화원, 2015, 290∼313쪽)에 수록한 ‘용인 문학순례길’과 관련된 일련의 글을 발췌해 보완한 내용이다. 그동안 산재해 있는 문학비를 지역별로 분류, 체계적인 답사코스를 제안한다. 시대와 장르별로 분류된 문학순례길 코스는 면적이 광범위해 사실상 개별로 진행함이 바람직하다고 판단, 지역별 기준으로 코스를 분류했다. 도로 코스도 또한 다양하고, 앞으로도 지속할 것으로 보여 지도는 생략하기로 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망우 공원묘지처럼,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묘지 안내판, 묘지 앞에는 이력 등의 설명문을 설치하는 것이 시급하다. 아울러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묘지 위치 안내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1) 용인 지역 문학순례길 1코스
(비파담∼용인자연휴양림∼용인공원묘원)
(1) 약천 남구만(비파담∼우산정사∼별묘∼시가비∼묘소)
용인 문학순례길 1코스는 남구만 묘역부터 여러 문인 작가들이 잠들어 있는 용인공원까지다. 모두 모현읍 갈담리와 초부리에 있다. 약천 남구만 묘역 순례는 비파담에서 시작하면 좋다. 비파담은 현재의 경안천의 옛 본류 또는 지류다. 비파담과 우산정사
(고택)를 둘러본 후 걸어서 별묘를 둘러보면 된다. 이곳엔 시가비를 비롯해 영정 등이 모셔져 있다.
이어 45번 국도를 건너서 조금만 더 가면 남구만 묘역이 있다. 묘역 입구엔 ‘동창이 밝았느냐∼’의 시비 등이 있고, 걸어서 산으로 조금만 더 가면 새롭게 조성된 남구만 묘역이 있다. 문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한눈에 진입로를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45번 국도에서 이정표도 잘 보이지 않고, 마을 안길로 진입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2) 용인자연휴양림(작고 문인들 문학비 집단조성)
용인자연휴양림은 약천 묘역에서 약 2.4km 거리다. 이곳엔 용인 지역에 묘소가 있거나 연고가 있는 작고(作故) 문인들의 문학비가 있다. 용인시가 2009년 9월 25일 모현읍 초부리에 용인자연휴양림을 개장하면서 조경 사업의 목적으로 모두 10명의 작가를 선정, 시비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시비 주인공은 용인과 연고가 있는 인물들로 다음과 같다.
△채제공(조선 후기 문인, 시와 수필에 뛰어난 재능) △장만영 시인(시비 「달⋅포도⋅잎사귀」 시비) △박목월 시인(문학비 「나그네」) 포은 정몽주(문학비 「단심가」) 노작 홍사용(문학비 「나는 왕이로소이다」) 허균(시비 「명연」) △남이장군(시비 「북정가」) △충정공 민영환(유서 문학비「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정암 조광조(문학비 「절명시」) △전혜린(문학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이다. 이중 용인 출생은 홍사용이다. 하지만 그의 묘소는 현재 경기 화성시에 있으며, 화성시 측이 묘소와 인접한 곳에 ‘노작문학관’을 건립,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
(3) 용인공원묘원(이범선, 양주동, 이원수, 박목월, 장만영)
용인공원은 ‘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관리사무소 도움 없이는 묘역을 찾기 어렵다. 웹, 앱 등을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도 있겠으나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판 등의 설치가 필요하다. 사설 공원묘지 특성상 쉽지 않아 보여 자치단체와의 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용인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가까운 이범선 소설가의 묘역으로 관리번호가 가5-866호이다. 1982년 한국문인협회와 한국 크리스천문학가협회에서 세운 묘비 뒷면에는 첫 창작집 학마을 사람들의 후기 일부를 기록해 놓았다.
다음은 국문학자로 알려진 양주동 박사의 묘소다. 그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은 시인으로 묘소는 가-8지구에 있다. 공교롭게도 양주동 묘역에서 50m 정도만 더 올라가면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아담하고 소박한 합장묘(관리번호 가8-816호)를 만날 수 있다. 그와 함께 잠들어 있는 아내 최순애도 아동문학가다. 이원수는 16세가 되던 1926년, 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고향의 봄」이 대표작이자 등단작이라 할 수 있다. 1929년 홍난파가 곡을 붙여 지금까지도 국민동요로 불리고 있다. 2015년도엔 박목월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박목월 시 정원’을 개원했다. 박목월 묘역은 사유지로 유족과 용인공원 측이 문학공원으로 재단장했다. 용인 문학순례길 1코스의 종착지는 장만영 시인 묘소로 관리번호는 가3-450호다. 공원묘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3지구 정상 부분에 있다. 묘비 대신 세워져 있는 시비는 1983년 7월, 문우들인 김경린, 김광균, 구상, 박태진, 송지영 등이 고인의 8주기를 맞아 추모사업의 하나로 건립했다. 이 코스 마지막에 추가할 수 있는 인물은 2017년 영면한, 시 「산정묘지」를 쓴 조정권(1949∼2017) 시인이 있다.
2) 문학순례길 2코스
(포은 정몽주 묘역∼천주교 용인공원묘원)
(1) 정몽주 묘역∼ 천주교 용인공원묘원
2코스 역시 모현읍으로 능원리의 포은 정몽주 묘역에서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까지다. 묘역 입구에는 1986년 5월에 세운 시조비 「단심가」가 있다.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를 지나 묘소에 가면 오석에 정몽주의 시비 「단심가」와 포은의 어머니가 지은 시조 「백로가」를 새긴 문학비가 있다. 포은 묘역 옆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지헌 이석형의 묘가 있다.
(2)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최남선, 영랑, 박완서, 전혜린, 김소진)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은 포은 묘역에서 약 5.6km 떨어져 있다. 모현읍 오산리 무등치 산자락에 있는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은 서울대교구가 1967년 조성한 천주교 신자 묘역이다. 이곳은 한국 현대시 100년의 출발점이 된 육당 최남선, 시문학파의 중심이 된 영랑 김윤식, 현대소설의 금자탑을 이룬 소설가 박완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수필가 전혜린, 소설가 김소진 등을 만날 수 있다.
관리사무소에서 최남선골로 불리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의 묘지까지는 약 800m. 합장묘 앞 비문에는 ‘기미 독립선언서의 기초자’라는 문구가 있고, 독립선언서 전문을 새겨놓은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30년대 《시문학》을 통해 순수서정시를 이끈 시인 김영랑(1903∼1950)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서울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김영랑은 6⋅25전쟁 중에 사망, 남산에 임시매장 후 망우리 공원묘지에 이장했다가 유가족에 의해 용인으로 이장됐다. 김영랑의 묘는 최남선의 묘소에서 100m 남짓한 거리에 있다. 가장 최근 이 묘역에 안장된 작가 중 한 사람은 소설가 박완서다.
전혜린 묘소는 박완서 묘소에서 약 70m 떨어져 있다. 묘비에는 「전헤린, 1934년 1월 1일 나서 1965년 1월 10일 가다」라고 새겨져 있다. 언뜻 보기엔 오타처럼 보이는 ‘전헤린’은 그녀 스스로 즐겨 사용했던 이름이다.
3) 문학순례길 3코스
(조선 시대 박은∼카프 맹장 안병춘부터 홍길동의 허균까지)
(1) 양지면(박은∼안병춘, 현존작가 안재성과 천명관 고향)
용인 문학순례길 3코스는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원삼면 맹리까지 약 17km다. 이 순례길을 ‘개혁과 변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길’이라고 명명했다. 이곳에서 조선 시대의 위대한 시인 읍취헌 박은과 일제강점기에 노동운동가와 독립운동가였던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맹장이자 비평가였던 안병춘을 만날 수 있다. 안병춘은 1910년 6월 10일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108번지(당시는 양지군 주동면)에서 태어났다. 6·25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 묘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 원삼면(허균 일가 묘역과 허난설헌 시비)
양지면에서 허균 일가 묘역이 있는 원삼면 맹리까지는 약 9.5km. 맹리에는 허균 가묘를 비롯하여 허씨 5문장으로 유명한 아버지 허엽과 형 허봉과 허성의 묘가 있는 양천 허씨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엔 1969년 국어국문학회에서 세운 허난설헌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4) 문학순례길 4코스
(단국대 신동엽 시비∼한국민속촌 이하윤 시비)
(1) 단국대학교(신동엽 시비와 김용호 시비 한남동에서 죽전캠퍼스 이전)
지리적으로만 보면 용인 문학순례길 4코스는 2코스(처인구)와 인접해 있다. 하지만 행정구역상 수지구와 기흥구에 속해 있어 별도 분리했다.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에 있는 신동엽 시인과 김용호 시인의 시비를 시작으로 죽전동에 있는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문학비와 묘역,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선생의 고택과 묘소를 거쳐 한국민속촌에 건립된 이하윤 시인의 시비까지를 연결하는 문학순례길이다.
신동엽 시비는 단국대학교 상경관 앞에 있다. 이 시비는 시인의 24번째 기일인 1993년 4월 7일 사학과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한남동 캠퍼스 퇴계 중앙기념도서관 앞에 세운 것을 죽전 캠퍼스 이전과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시비의 앞면에는 ‘신동엽 시비’, 뒷면에는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를 새겼다.
학산 김용호 시인의 시비 「날개」는 신동엽 시비에서 약 40m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1975년 단국대학교와 한국문인협회가 주최하여 한남동 캠퍼스 교정에 건립한 것이다. 단국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죽전로를 따라 1.2km 정도를 가면 내대지마을이 나오는데 대청초등학교 바로 옆 야산에서 김세필의 문학비와 묘소를 만날 수 있다. 김세필 선생의 묘소(죽전동 산 23번지)는 1999년 도지정문화재 제92호로 지정이 되었다. 거리상으로는 꽤 떨어져 있는 기흥구 지곡동에는 음애 이자 선생 고택(지곡동 297- 2번지)과 묘역(지곡동 산 11-17번지)이 있다. 경기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고택 앞에는 모두 세 개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4코스의 마지막 도착지는 한국민속촌 안에 있는 연포 이하윤 시인 시비 「물레방아」이다. 이하윤의 시비를 찾아가려면 먼저 민속촌의 제일 안쪽인 시장터 옆에 있는 물레방앗간을 찾아야 한다.
6. 나가며
본 연구에서 제시한 용인 문학순례길 4개 코스는 유무형의 ‘야외 문학박물관’ 건립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용인시에 산재한 문학인 묘지를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 활용한다면 우리나라 최대의 문학인 성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비 조성과 관련, 문학비의 시대별 종류와 의미를 체계적으로 조사한 후 문화콘텐츠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작가들의 사후 문학작품 세계까지도 재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작고 문인들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용인 지역에 있는 문학비를 문화 콘텐츠화하기 위해 ‘용인 문학순례길’을 4개 코스로 만들어 제안했다. 그동안 용인 지역 문학인들과 지역 언론에서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발굴해온 결과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문화예술인이나 유명인 한 명만 있어도 문화콘텐츠로 활용 방안을 찾는다. 작고 문인들의 문학비와 묘지지만 한 지역에 이 만큼 집중되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나라 문학사에 의미가 있다 하겠다.
연구결과, 유명 문학인들이 용인 지역에 잠들어 있지만, 지자체에서 체계적으로 관리가 가능한 안내 표지판, 또는 문헌으로 된 자료조차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이 문학비를 중심으로 작고 문인들에 대해 예의 차원에서라도 ‘문학순례길’을 제정, 운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용인시를 비롯한 용인문화재단과 용인문화원 등의 적극적인 지원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용인시는 용인시민을 비롯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문학인과 묘소 참배객들에 대한 편의 제공 측면에서 ‘용인 문학순례길’ 코스 지도나 안내판 등을 하루빨리 제작 설치해야 한다. 실제, 연구자들조차 공원묘원 관리 직원들의 안내 없이는 찾기 힘들 정도다. 공원묘원 입구에 안내판이나 이정표, 작가 소개만 있어도 용인 문학순례길에 동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울러 문학 전문가들의 고증 없이 행정 편의주의로 세워진 문학비에서 발견되는 오자(誤字)와 오류(誤謬)도 바로잡아야 한다. 지자체부터 유명 문학인들의 묘지는 단순 참배 의미를 뛰어넘어 역사와 관광 상품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의식전환이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인 문학순례길’을 시대와 장르별, 또는 지리를 고려한 코스별 콘텐츠 연구를 지속하여야 한다.
본 논문은 용인 문학순례길 4코스를 제안하는 기초연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용인 지역에 산재한 문학비를 지역 문화콘텐츠로 생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논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참고문헌
기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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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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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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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망우리 공동묘지엔 귀신도 놀랄 묘 있다」, 『중앙일보』, 2017년 10월 2일 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