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세종과 문종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구신(舊臣)들 중에 시세(時勢)따라 종사(從仕)하는 아유구용배(阿諛苟容輩) 또한 적지않았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 집현전학자(集賢殿學者) 출신의 절의파(節義派) 문신(文臣)들과 유응부(兪應孚), 성승(成勝), 박정(朴靖), 박중림(朴中林) 등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무신(武臣)들이 은밀히 회동 모의하여 상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면서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세조(世祖) 2년 병자(丙子) 6월 1일, 세조는 상왕(上王)과 더불어 창덕궁에서 연회(宴會)를 베풀고 명나라에서 책명사(冊命使)로 나온 윤봉(尹鳳)과 김여(金與) 양사(兩使)를 저대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성삼문과 박팽년은 연희장내(宴會場內)의 일을 맡고, 유응부 와 성승 박정이 별운검(別雲劍)을 서게 될 때 세조 부자(父子)를 한꺼번에 참살(斬殺)하고 단종(端宗)을 복위 시키려는 모의(謨議)가 수립(樹立)되었다
그런데 거사직전(擧事直前)에 공교롭게도 왕명에 의한 갑작스런 별운검의 제폐(除廢)와 투병중(鬪病中)인 세자의 불참으로 인하여 거사(擧事) 성패여부(成敗如否)에 대한 정세(情勢)의 판단(判斷)이 흐려져서 연기론(延期論)이 우세(優勢)해지자 계획이 실패할 것을 확신한 배신자 김질의 고변(告變)으로, 모의(謨議)점모(全貌)가 들어남으로써 상왕 복위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주모급(主謨級) 연루자(連累者)들은 모두 검거(檢擧)되어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하다가 혹은 옥사(獄死)하거나 능지처참(凌遲處斬)의 참형(慘刑)에 처해지고, 직계비존속까지 연좌처형(處刑)되므로써 사실상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였다.또한 여파(餘波)는 상왕 단종에게도 미쳐 일조(一朝)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멀리 영월(寧越)로 강제 유배(流配)된지 삼년만에 기어이 살해(殺害)되는 비운(悲運)을 당하였다
세조실록에는 주모급 17명, 연루자 백여명, 희생자 만여명에 이른다고 적혀 있으니, 그야말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참극(大慘劇)이기도 하려니와, 이 끔찍한 사건을 가리켜 병자사화(丙子士禍)또는 사육신의거사건(死六臣義擧事件)이라고도 부르는것이다.
이 무렵 거사 모의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세조와 그 일당들의 흉악(凶惡)한 패륜행위(悖倫行爲)에 분개(憤慨)하여 세상을 등지고 미친체 하거나 야산에 피(避)하여 은둔(隱遁)한 사류(士類)들이 적지 않았다.특히 그 중에서도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위시(爲始)한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등이 그 대표적인 인사들인바,이들을 가리켜 사육신(死六臣)의 대칭(對稱)인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추강 남효온은 후일 병자사화 전말을 소상하게 밝힌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을 선술(選述)하였는데, 이 육신전(六臣傳)은 당시의 사실을 올바르게 평하고 서술한 유일본(唯一本)이라 할수 있으며,어용사가(御用史家)들이 멋대로 써놓은 왕조실록(王朝實錄)은 기실 준신(其實準信)하기 어려운 대문이 적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白玉軒 先生의 奉祀孫 종석 死六臣 李塏先生 遺稿集에서 옴겨 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의롭게사는것은 도리이지만, 그시절 모든 의로운 사람들이 저항하여 잡혀 죽었더라면 후세에 진실은 남겨지지 않았을겁니다. 역사란 힘있는자들에 왜곡되어 씌여질수있다함을 시사해주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추강 남효온 같은 분들이 계서 역사의 진실이 전해지는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요? 사료를 전달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현시대에 인간들도 지적 하여주신 자 들이 있으니 이사회의 진실은 묻혀져버리고 가짜(사육신 역사왜곡)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