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계곡에 산재해 있는 동굴교회들은 석회암으로 이뤄진 급경사 산을 타고 넘어야만 접근할 수 있다.
“성지순례는 인생의 의미를 한마디로 규정한 말입니다. 도보 여행자로서, 방향을 알려줄 길로서의 인생이 성지순례란 단어 속에 압축돼 있습니다.… 물을 예로 들어 봅시다. 강물로 흘러가지 않을 경우 길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고여 있는 물은 퇴화될 뿐입니다.”
어린이 같은 웃음이 매력인 교황 프란치스코가 전하는 메시지다. 2016년 6월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지방 마체라타에서 로레토까지 이어진 성지순례 행사에 즈음한 축사다. 28㎞에 달하는 미니 성지순례지만 일몰과 함께 이뤄지는 심야순례란 점에서 전 세계 기독교 신자들이 주목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교황은 ‘성지순례=직접 몸을 움직여 걸어가는 인생’에 비유했다. 크게 보면 ‘인생=엄숙하고도 경건한 성지순례’로 느껴진다. 물론 성지순례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라도 흐르는 강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지순례에 나설 경우 자신이 흐르는 강물 속에 있다는 확신을 한층 더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 문화권에서는 성지순례라는 말 자체가 낯설다.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 모두가 떠올리는 천년, 아니 수백 년 성지순례지가 하나라도 있을지 궁금하다. 관광지를 성지라는 말로 바꿔 부르거나, 일부 신흥 종교나 왕의 이름을 빌린 성지는 넘친다. 그러나 정작 모두가 인정하고, 일생을 통틀어 한 번은 체험해야만 한다고 믿는 역사적·운명적 차원의 성지순례지 자체가 드물다. 티베트불교나 힌두교의 성지순례지, 나아가 일본 남부 시코쿠 88개 사찰 순례가 아시아에 존재하는 희귀한 성지순례지들로 여겨진다. 중국문화권에 성지가 없는 이유는 ‘왕=하늘’이라 믿는 통치사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왕을 뛰어넘은 특별한 인물에 관련된 장소를 그냥 둘 리가 없다. 왕을 멀리하고 다른 존재를 숭배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3대 가족이 몰살당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성지순례와 무관한 중국문화권이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이념적’ 성지 개발에는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중국의 옌안 장정 혁명성지, 북한의 백두혈통 성지 같은 곳들이 좋은 본보기다. 서구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신과 인간과의 공간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인 차원의 성지라 볼 수 있다. 서구의 성지에 등장하는 관용, 사랑, 인내, 자기성찰을 대신한 것들이 혁명, 애국, 민족, 통일 같은 개념들이다. 이것이 중국문화권 신흥 성지의 공통분모로 활용된다. 혁명, 애국, 민족, 통일에 관한 개념은 장기적·이성적 개념과 무관하다. 시대 상황에 맞춰 한순간 타오르다 꺼지는 단기적·감정적 차원의 이념에 불과하다. 강제나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서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3대에서 4대 세습으로 이어질 김정은의 북한이야 예외일 수 있지만 중국의 옌안 혁명성지 같은 곳이 5년, 10년 뒤에도 관심을 끌지는 의문이다.
기둥교회 내부. 내부를 전부 파서 만든 교회로 중심을 지지하기 위한 초대형 기둥이 인상적이다.
해외여행으로 경쟁력 쌓은 그리스
성지순례를 뜻하는 영어 ‘pilgrimage’는 원래 라틴어 ‘페레그리누스(peregrinus)’에서 왔다고 한다. 전부 섭렵하다라는 의미의 ‘per’와 외국 땅 광야를 뜻하는 ‘ager’의 합성어가 어원이다. 외국인, 이방인,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란 의미라 볼 수 있다.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동일 계보의 언어다. 그러나 멀리 보면 ‘외국 거주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peregrinatio’가 영어 ‘pilgrimage’의 원조라 볼 수 있다. 중국문화권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여행기나 기행문도 드물다. 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뿐, 밖에 나가서 새로운 것을 배워오거나 내부 사정을 외부에 알리는 것 자체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사실 여행(旅行)이란 한자도 군대 조직 중 하나인 여단(旅團)의 여(旅)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자 여(旅)는 군대 깃발을 앞세운 군인들의 집단이동을 의미한다. 개인 차원의 21세기형 자유여행이 아니라, 상관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단체행동이다. 따라서 왕의 명령이 없다면 움직일 수도 없다. 작은 깃발을 앞세운 채 집단으로 움직이는 여행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고도 성장기 일본에서 탄생한 여행 발명품이다. 고전적 의미의 중국적 세계관을 충실해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서방 문화는 여행을 인생의 출발점이자 목표로 잡고 있다. 문학의 첫 번째 주제도 여행이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 호메로스가 남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가 대표적이다. 당대의 대모험 여행 가이드북인 동시에, 멀고 먼 세상으로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장려하는 선동문학이기도 하다. 그리스를 모체로 한 서방은 ‘외국 거주자=새로운 문명·문화의 전도사’로 적극 환영했다. 외국인에 대한 문호개방과, 아테네 시민에게 외국여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정책은 고대 아테네가 지중해, 에게해 1000여개 도시국가(Polis)의 맹장에 오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오해하기 쉬운데, 성지는 신과 직접 관련된 종교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산, 바다, 하늘, 우주 어디에 가도 신의 손길이 드리워져 있다. 신의 위대함, 반대로 인간의 왜소함을 느낄 공간이라면 그 어디라도 성지로 떠오를 수 있다.
십자군교회 천장에 새겨진 십자가. 십자군의 권위와 용맹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무서운 십자가로 느껴진다.
4~15세기 기독교의 흔적
최근 주변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새로운 성지순례지 한 곳을 발견했다. 삼라만상이 성지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새로 발굴한 성지는 종교적 차원, 다시 말해 고전적 의미의 순례대상에 들어간다. 4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고대 중세 기독교의 흔적이 밴 곳이기 때문이다. 중심 무대는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지방이다. 한국인 여행객들에게도 익숙한, 아나톨리아 한복판에 들어선 기묘한 모습의 석회암 지형으로 유명한 곳이다. 카파도키아 여행지의 필수코스는 괴레메 야외박물관이다. 신비로운 모습의 고깔형 동굴 집산지로, 기독교도의 삶과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기독교도가 4세기에 그린 성화 벽화는 괴레메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1등 공신이다. ‘아프가니스탄 블루’라 불리는 푸른색 장식의 성화가 압권이다. 덕분에 1985년부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필자가 발굴한 새로운 성지는 괴레메에서 동북쪽으로 5㎞ 정도 떨어진 로즈계곡(Rose Valley)에 들어서 있다. 성지의 대상은 계곡 사이 곳곳에 들어선 동굴교회들이다. 작은 무명 교회까지 합치면 수십 개가 되겠지만, 방문용으로 문을 열어둔 공간은 3군데에 그친다. 대략 하루 만에 끝낼 성지순례 무대다. 필자가 굳이 로즈계곡을 성지순례지로 추천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손때’가 타지 않은 초기 기독교 현장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으로 들끓는 괴레메의 성화나 유물·유적을 보면 이미 성형미인으로 퇴화한 느낌이다. 보여주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대는 과정에서 원래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기 어렵다. 로즈계곡 내 교회는 초기 원형 그대로 보존된, 인류 역사상 희귀한 성화로 채워진 공간이다.
이곳을 성지순례 무대로 추천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계곡 전체에 흐르는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이른바 ‘파워 스팟(Power Spot)’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기운이 계곡 곳곳에 표류한다. 그러나 로즈계곡에 들어가려면 나름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미끄럽고도 가파른 계곡 절벽을 타넘어야만 한다. 안전을 고려한 시설이 거의 없다. 초기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고깔형 동굴의 지붕을 타고 넘어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다. 지면에 찰싹 달라붙는 신발과, 어두운 동굴을 밝힐 전등이 필수다. 괴레메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지만,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신비로운 오지다. 1000년, 2000년 전 삶과 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포도교회 천장에 그려진 포도송이와 넝쿨. 카파도키아 지방은 포도 산지로 유명하다.
석회암 절벽을 타넘어야 진입 가능
성지순례로 가장 좋은 계절은 10월부터 11월까지다. 날씨도 적당하고 수확의 계절로 신에게 감사의 뜻을 전할 거룩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쯤이면 카파도키아 전체가 곡물과 과일 수확으로 바쁘다. 인상 깊은 것은 포도다. 카파도키아 지방은 포도 산지로 유명하다. 바짝 마른 모래형 토지가 포도 재배에 적격이다. 로즈계곡 아래는 품종 개발 이전의 원시 포도나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전부 지면에 바짝 붙어 자란다. 주인이 없기 때문에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포도 향과 달콤함이 계곡 전체에 넘실댄다. ‘우줌루 킬리세(uzumlu kilise)’는 필자가 선택한 로즈계곡 성지순례 출발지다. 직역하면 포도교회다. 고깔형 동굴교회로, 포도 넝쿨과 포도송이가 2m 높이 천장에 그려져 있다. 색이 바랜 벽화지만, 1000년 전에 그려진 성화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게 느껴진다. 예수는 자신의 피를 와인에 비유했다. 포도송이와 넝쿨이 넘칠수록 예수의 복음과 사랑도 뻗어나간다. 포도송이 하나를 따서 교회 내 제단 한가운데에 바쳤다.
우줌루 킬리세에서 로즈계곡으로 진입하려면 높이 30~60m 정도의 석회암 절벽을 타넘어야만 한다. 워낙 가파르기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신이 지켜주리란 신념과 함께 타넘었다. 고공에 대한 공포증 탓에 다리에 마비 증상이 와 30분 정도 절벽 위에서 쉬어가야만 했다. 카파도키아 동굴교회는 이슬람 공격에 대비한 보호시설로도 활용됐다. 이슬람이 공격해 올 경우 계곡 곳곳에 있는 동굴 속으로 피했을 것이다. 급경사 석회암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기독교도들의 체력이 대단했을 듯하다.
성지 로즈계곡은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동굴로 이뤄져 있다. 하나하나 보려면 적어도 보름은 잡아야만 한다. 외부인에게 문을 연 3개의 동굴교회는 로즈계곡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가장 큰 교회는 ‘디레크리 킬리세(Direkli Kilise)’로, 직역하면 기둥교회(Column Church)다. 밖에서 보면 1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3층으로 구성된 인공 동굴이다. 전부 인간의 손으로 파낸 인공물이란 의미다. 돌산 하나를 겉만 남긴 채 내부를 뻥 뚫어 사용했다. 10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로 신자용 무덤과 성직자용 거주지도 동굴 내부에 들어서 있다. 본당 교회는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10m 정도로 상당히 크다. 인공 창문을 만들어 빛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부엌과 식당이다. 디레크리 킬리세의 가장 밑바닥 지하에 들어서 있다. 죽은 자를 기리는 의식이 끝난 뒤 모두 모여 식사를 했을 듯한 공간이다. 아마 카파도키아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도 의식용 음식과 함께 제공됐을 것이다.
로즈계곡 동굴교회 가운데 가장 선명한 색상의 성화를 가진 곳은 ‘하크리 킬리세(HaÇlıKilise)’다. 십자군교회란 의미다. 교회 앞에서는 오렌지주스와 차를 파는 알제리 출신 안내원이 지키고 있다. 로즈계곡 내 동굴교회에는 입장료가 없다. 알제리 출신 안내원에 따르면, 하루에 20여명 정도가 찾는다고 한다. 로즈계곡 내에 들어선 유일한 음료수 판매처이기 때문에 목이 마르면 사먹을 수밖에 없다. 십자군교회의 천장은 초대형 십자가로 장식돼 있다. 정면에는 선명한 성화가 그려져 있다. 박애나 사랑과는 무관한 무섭고도 벌을 주는 비잔틴 시대 신을 묘사한 성화다.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신의 뜻에 반하지 않으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도의 의무다. 십자군교회는 가로·세로 5m 정도의 아담한 공간이다. 뻥 뚫린 초대형 문을 통해 카파도키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지순례는 기독교도만이 아니라 이슬람 신자의 신앙체험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결정적 차이 하나가 있다. 집단과 의무로서 성지순례 여부다.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으로 성지순례를 했다. 이슬람은 집단이자 의무로서 메카 성지순례, 즉 하즈(Hajj)에 나서야만 한다. 기독교 성지는 바티칸이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수십, 수백 군데 퍼져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성지는 메카를 비롯해 특정 장소에 한정돼 있다. 이슬람 신자가 특정 장소를 ‘나만의 성지’라 말하는 것은 율법 위반이다.
‘기둥교회’와 ‘십자군교회’
필자 개인의 생각이지만,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성지순례라는 단어에 따라붙을 최적의 인물 중 한 명이다. 추측건대 오바마의 성지는 케냐가 아닐까 생각된다. 오바마는 케냐를 전부 4번 방문했다. 1987년 학생 시절, 2006년 상원의원 당시, 2015년 대통령 재직 시, 2018년 대통령 은퇴 후다. 나이로비 출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케냐를 찾은 근본 이유이자 목적이다. 케냐는 26살 흑인청년 오바마의 아이덴티티를 확인, 확신시켜준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진다. 오바마 자서전 ‘아버지의 꿈(Dreams From My Father)’에도 나오지만, 1987년 케냐 순례를 통해 아버지와 신의 뜻에 눈뜨게 됐다고 한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성지순례라고 하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부터 떠올리는 듯하다. 앞서 강조했듯이, 성지순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예루살렘, 메카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만을 위한, 나에게만 들리고 느껴지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전 세계, 아니 우주의 모든 것이 순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했듯이, 결코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가는 강물로서의 순례가 기본이다. 나에게만 들리는 하늘의 목소리를 원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순례에 나설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