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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와 잿머리 성황당
신라 마지막 왕 김부대왕의 셋째 부인과 장모 모신 사당
새로 신축된 잿머리 성황당. 매년 음력 10월 1일 성황제가 열린다.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내의시랑(內議侍朗) 서희(徐熙)는 경기도 안산현의 성두(城頭) 나루터에 도착해 항해의 무사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제를 올리고 난 그 날 밤 객관에서 잠을 잘 때 꿈에 소복을 한 두 여인이 나타났다.
“우리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신 김부대왕의 부인과 장모 되는 사람입니다. 저희 두 모녀는 김부대왕을 살아 생전에 받들지 못하고 죽어서 한을 갖고 구천에 떠도는 영혼입니다. 대왕은 이 곳에서 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고려의 개경으로 돌아가신 후 소식이 없었습니다. 들려오는 말에 대왕은 고려 태조의 따님을 맞아 부인으로 정하고 별궁에서 지내고 계시다고 합니다. 평생을 함께 지내지 못한 소생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한을 공께서 풀어 주시옵소서. 풀어 주시는 것은 사당을 하나 지어 저와 저의 친정 어머니, 그리고 대왕의 영정을 그려 사당에 두고 일년에 단 한 번씩이나마 인근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현몽했던 여인은 곁들여 말하기를,
“그렇게 해 주시면 우리 두 모녀의 혼은 공을 따라 항해길에 올라 바다의 잡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를 일게 하는 것을 못하게 막을 겁니다. 지금도 풍랑이 심합니다.”
서희는 꿈이 참으로 기이하다 생각하고 일찍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루터로 나가 보았다. 꿈에 그 여인이 말한 것처럼 배가 떠날 수 없을만큼 파도가 심했다.
“허어, 예사 꿈이 아니구나.”
서희는 그 꿈을 믿었다. 그리고 그 곳 관아의 수장을 불러 꿈을 얘기하고 사당을 짓게 했다. 며칠을 걸려서 사당이 완공됐다.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을 불러 영정을 그리게 했다. 사당을 짓고 영정을 그리는 동안에도 바다는 잠잠하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완공되자 그렇게도 하늘이 흐리고 거칠던 바다가 개이고 조용하기 시작했다.
내의시랑 서희는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그렇게 하고나자 하늘은 정녕 언제 구름 한 점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청명하고 바다는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서희의 일행은 무사히 중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내의시랑이라는 관직은 나라 안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는 내의성 소속의 고위직 벼슬이다.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한다.
서희가 지어준 사당의 자리는 지금의 해봉산(海峰山) 꼭대기다. 해발이 100m도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으로, 당시는 바다와 맞닿아 있었던 무명의 산이다. 이 산에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조 광해군 때 일이다. 해봉이라는 호를 가졌던 당시 재상 홍명원(洪命元·남양홍씨)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묘도 이 산 자락에 있다.
경순왕의 세번째 부인 안씨의 영정.
서희의 꿈에 나타난 두 여인은 경순왕의 세번째 부인이라는 안씨와 안씨의 친정어머니 홍씨다. 안씨는 순흥안씨(順興安氏)고, 홍씨는 남양홍씨(南陽洪氏)다. 홍명원의 조상인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의 씨족계보를 보면 경순왕과 안씨부인 사이에 낳은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이름이 김덕지(金德摯)이고, 김덕지의 후손이 오늘날 울산김씨로 되어 있다. 현 동아일보 사주와 인촌 김성수, 고 김병노 대법관이 그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서희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인물로 고려 성종 때 고려와 송나라 간 국교가 단절되어 있는 것을 복구시키고자 송나라에 다녀왔고, 소손녕(簫遜寧)이 거느린 걸안군의 대군을 담판으로 물러가게 한 뛰어난 화술과 외교에 능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희가 육로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압록강 건너편은 걸안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이다.
해봉산 성황당은 그간 긴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럴 때마다 주민들이 다시 지었다. 경순왕을 모신다는 성황당을 보면 경순왕의 시호인 경순으로 호칭하지 않고 왕의 이름에다 대왕을 붙여 호칭했다. 즉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 부르고 위패에다 쓰고 했다. 이것은 무속인의 관례였다.
현재 모 방송국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제국의 아침을 보면 소신있고 직간을 잘 하고 꼿꼿한 대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서필(徐弼)이다. 그는 청렴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광종이 금잔을 하사하자 “신이 금잔을 쓰면 폐하는 위이니까 장차 무슨 잔을 쓰시겠습니까?” 하며 사양했다. 그는 글씨를 잘 썼다. 일찍이 글씨를 잘 써서 조정 신하로 기용됐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유명한 서희의 아버지인 것이다.
지금 안산시의 잿머리 성황은 새로 신축되고, 경순왕, 안씨, 홍씨 세 영정도 새로 그려 모셨지만, 이 성황당이 있는 안산시 성곡동 산 77번지는 좌우 앞뒤 할 것 없이 공장으로 들어차 있다. 바다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넓게 육지로 변해 있다. 바다쪽과 4호선 지하철 종점이 있는 오이도 사이에는 시화담수호가 조성돼 있다.
옛날에는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내왕했던 항만 역할을 했다. 인천 소래포구와 접한 오이도(俉耳島)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오질이도(吾叱耳島)라 불렀다. 조선조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고, 봉수대도 있었다. 해안가 봉수대가 있었다면 당연히 배가 드나드는 항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산에는 옛날 토성(土姓)으로 김씨와 안씨가 많았다. 현재 안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산김씨가 있다. 그러나 안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는 없다. 경순왕의 셋째 부인이 안씨라서 안씨 성이 있었음은 사실인데, 비단 성황당에서 나온 설화만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그런 설화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시흥시로 편입됐지만, 해봉산과 함께 경순왕에 대한 설화가 있는 곳으로 군자봉(君子峰·198m)이 있다. 옛날에 해봉산과 군자봉을 경순왕이 백마를 타고 오갔다는 얘기가 전한다. 입으로 전하기만 하고 확인되지는 않는 이야기지만, 안산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걸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의 중심지와 가까워 유명인사들의 거주지역으로 이용됐고, 출신 인물도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에게 딸을 셋이나 왕비로 보낸 김은부(金殷傅)가 있다. 고려사열전에 보면 김은부는 안산현 사람으로 여러 높은 벼슬을 지내고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候)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안산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것은 그의 작위를 받은 것이라 한다. 그의 아버지도 안산개국후라는 높은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를 안산김씨의 문중 조상이라고 받들고 있다. 개국후란 그 지역을 처음 세운 제후, 즉 봉건주란 뜻이다. 나라에 유명한 인물에게 사후 시호를 내려주는 예로 충무공이니 문정공이니 하는 것을 임금이 하사해도 개국후란 큰 작위는 좀체로 내려주지 않는다.
안산을 처음 개국한 인물이 있어도 그 개국인만이 안산의 이름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 어느 성씨라도 같은 지명을 시호의 명칭으로, 또는 본관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
(김정현 향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