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陽 禹氏 氏族의 연원
시조는 우현(禹玄). 고려 현종 5년에 진사(進士)로 등과(登科), 정조호장(정조호장)을 지냈고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우현(禹玄)이 고려 건국초의 인물이라는 설(說)이 있지만,
그의 5세손 우중대(禹仲大)가 고려 고종때의 인물이고 보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또 하나는 본관 유래에 관한
설명이다. 공민왕 4년 문과(文科)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른 9세손 우현보(禹玄寶)가 단양부원군
(단양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단양(丹陽)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앞서 든 우중대(禹仲大)는 고종 때 문과(文科)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인물이면 그의 손자
우탁(禹倬)또한 우리가 다 아는 유명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조(宗祖)이다. 따라서 우현보(禹玄寶) 이전에
종족(宗族)을 드러낸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이전에 관향(貫鄕)을 단양(丹陽)으로
삼아왔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병오보(丙午譜)’ 세덕(世德)편 시중공조
(侍中公條)를 보면, 시중공(侍中公) 우중대(禹仲大)가 단양(丹陽)으로 관향(貫鄕)을 삼아 벼슬길에 올랐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단양우씨(丹陽禹氏)가 관향(貫鄕)을 정하기는 5대손 우중대(禹仲大)가 이후임이 맞는 것이다.
본관지 연혁
단양(丹陽)은 원래 고구려 적산현(赤山縣)인데, 신라 때 나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가 고려
초에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쳤다. 현종 9년 원주(原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충주(忠州)에 붙었고 충숙황 5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1914년 영춘군(永春郡)을
합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姓氏)로 우(禹)ㆍ가(李)ㆍ장(張)ㆍ피(皮)씨 등이 있다.
파명록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ㆍ예안공파(禮安公派)ㆍ안정공파(安靖公派)ㆍ집의공파(執義公派)ㆍ판서공파(判書公派)ㆍ
참의공파(參議公派)ㆍ봉상정공파(奉常正公派)ㆍ문강공파(文康公派)ㆍ정평공파(靖平公派)ㆍ문숙공파(文肅公派)
주요 세거지
대구(大邱)직할시 남구(南區) 상인동(上仁洞). 행정구역상으로는 시(市)에 소속되어 있지만 전혀 도시다운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 대덕산(大德山)기슭 천연 노송이 바람에 휘어지는 아늑한 분지에 1백 60여 가구 단양 우(丹陽 禹)씨 8백여
명이 한 가족처럼 오손도손 산다.
입향조(入鄕朝)는 고려말(高麗末) 정략장군(定略將軍) 우전(禹奠). 그는 공양왕(恭讓王)때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다
조선(朝鮮)개국 후 전라도(全羅道)에 유배되어 장살(장殺)당한 우홍명(禹洪命)의 손자로 정도전(鄭道傳)등 구데타 주체세력의
보복을 피해 이 마을에 은신했다. 정치 권력이란 한낱 뜬구름 같은 것. 때문에 그는 후손들에게<권력을 탐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당부하며 초야야 뭍혀 살았다.
그의 가르침 때문일까.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권력의 정상에서 세도를 부린 인물도 천석의 부를 누린 갑부(우무천석(禹無千石))도
찾아보기 힘들단다. 진사 급제자가 8명 현감이상 관직에 등용된 인물이 24명. <양반>의 신분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임진왜란 때 대구(大邱)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오른 우배선(禹拜善 호 월곡(月谷))은
이 마을이 배출한 명현. “월곡(月谷)은 이 마을 우(禹)씨 가문에서는 신화적인 존재지요.
임진란 때 유격대장으로 종횡무진 전장을 누빌 때 갑자기 왜군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자 그의 애마가 무릎을 꿇어 주인을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그 몇 해 후 월곡(月谷)어른이 돌아가시자 이말이 식음을
전폐하고 구슬프게 울다가 3일 만에 죽었다는 겁니다.”
후손 우억기(禹億基)씨는 “ 이 의마(義馬)의 순사(殉死)는 결코 구전되는 전설이 아니라 월곡공(月谷公)의 창의록(倡義錄)에
엄연히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일제(日帝)초 까지만 해도 마을 야산에 의마총(義馬塚)이 있었는데 일제말(일제말)
저수지 확장공사로 수몰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가 1986년 저수지가에 <의마비(義馬碑)>를 건립(建立)하였다.
이 마을은 지난 81년 시로 편입되었으나 주소득 사업은 예나 다름없이 농사와 목축업. 가구당 연평균 소득은 4백여 만원.
마을 중앙 울창한 수목 사이에 단청을 드리운 낙동서원(洛東書院)은 역동(易東) 우탁(禹倬)과 그의 수제자 신현(申賢), 그리고
우현보(禹玄寶)ㆍ우배선(禹拜善)등 명현들의 위패를 봉안한 곳. 지난 63년 후손 우종식(禹鍾殖)ㆍ종묵(鍾黙)형제가 사재를
털어 건립. 이 지방 유림과 후손들이 봄ㆍ가을로 제사를 올린다.
씨족史
단양우씨(丹陽禹氏)를 역사에 드러낸 인물은 여말(麗末)의 석학 역동(역동) 우탁(禹倬)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역학(易學)을
개척한 대학자로서 또 서릿발 같은 기개로 왕(王)의 패륜을 극간했던 당대의 명신으로서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1308년, 갓 왕위에 오른 충선왕(忠宣王)은 부왕(父王 충렬왕(忠烈王))이 총애했던 숙창비(淑昌妃)와 정을 통하는 등 정사를
멀리하고 애욕의 늪에 빠졌다. 당시 우탁(禹倬)의 벼슬은 감찰규정(監察糾正). 어느날 그는 도끼 한 자루와 거적때기를 들고
어전에 나갔다. 그리고 거적때기 위에 엎드려<충렬왕릉(忠烈王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부왕(父王)이 총애했던 숙창비
(淑昌妃)를 희롱하는 처사는 인륜을 저버린 패륜>이라는 내용의 칼날 같은 상소를 올렸다. 왕(王)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그의 직간에 만좌한 조신들은 몸을 떨었다.
왕(王)이 어떠한 보복을 내릴는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패륜을 범한 왕일지라도 <인륜(人倫)의 도(道)>를
역설하는 대신을 함부로 범할 수는 없는 법. 왕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우탁(禹倬)에게 거적때기 위에서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도끼로 찍어 달라며 머리를 조아린 채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왕을 욕보인 신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자책이었다.
이후 우탁(禹倬)은 벼슬을 훌훌 떨쳐 버리고 경북(慶北) 안동(安東)지방(현 안동군 예안면(安東郡 禮安面))에 은거, 주역(周易)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호 역동(易東)은 <동방에 역학(易學)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그의 사후(死後) 2백년-. 성리학의 대가 이퇴계(李退溪)는 그를 “동방(東方) 성리학(性理學)의 조(祖)”라 극찬, 은거지 예안
(禮安)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세우고 그의 위업을 기렸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쥐고…”,“춘산(春山)에 눈녹인 바람…”등의 ‘한노가(恨老歌)’는 그가 남긴 명시조다.
우탁(禹倬)의 출생지는 충청도(忠淸道) 단양(丹陽). 17세에 진사(進士)에 합격,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됐고 29세에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祿)을 제수 받았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당시 영해군(寧海郡)에 팔령(八鈴)이라는
요신(妖神)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역동(역동)은 과거에 급제한 사록(司祿)을 제수받고 먼저 그 사당을 부수고 요신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한다.
우씨(禹氏)는 고려 충령왕조(忠烈王朝1247~1308)를 전후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조선 개국 직전까지 번영을 누린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우중대(禹仲大)는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 그의 아들
천규(天珪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천계(天啓)ㆍ천석(天錫 시중(侍中))ㆍ천우(天佑)ㆍ천성(天成)등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중 맏이인 천규(天珪)의 아들이 바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다.
공민왕(恭愍王) 11년 홍건적의 침입 때 개성(開城)수복에 공을 세우고 동서북면도원수(東西北面都元帥)ㆍ찬성사(贊成事)등에
오른 우제(禹磾), 우길생(禹吉生 적성부원군(赤成府院君))ㆍ우복생(禹福生 창왕조(昌王朝)ㆍ문하시중(門下侍中))ㆍ우팽(禹伻
문하시중(門下侍中))ㆍ우인열(禹仁烈 찬성사(贊成事)ㆍ정평공파조(靖平公派祖))등은 여말(麗末)의 대표적 명현들이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면서 우씨일문(禹氏一門)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역동(易東)의 손자인 우현보
(禹玄寶)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갈리던 무렵의 대표적인 절신(節臣). 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등을
역임하고 단양(丹陽)부원군에 오른 그는 당대의 명유인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등과 교분이 두터웠던 석학이었다.
그는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귀양을 가기도 했었으나 조선개국 후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중 고려수절제신조(高麗守節諸臣條)에 禹玄寶의 편모가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창왕(昌王)2년에 김저(金佇)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낭관(郎官)들이 공(公 우현보(禹玄寶))이 여흥(驪興)에 가서
폐왕 우(禑)를 만나 은밀히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했다 하여 공(公)을 벌하도록 왕에게 간했다.
그러나 창왕(昌王)은 이를 곧이 듣지 않고 파직만 했다가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했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공(公)은
경주(慶州)로 유배되고 그 이듬해 고려가 망했다. 조선 개국 후 이성계(李成桂)가 공신(功臣)의 칭호를 주었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이성계(李成桂)는 옛친구인 공(公)에게 친구의 예(禮)로서 대접하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공(公)은 낙향하기를 원했다.
공(公)이 죽은 뒤 태조(太祖)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우현보(禹玄寶)는 조선 정종(定宗)2년 68세로 세상을 떴다.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다. 세상에서 죄를 지은 몸이니 내가 죽거든
선영 밑에 묻지 말고 우리 내외를 합장도 하지 말라. 나 혼자 무덤을 만들어 내가 생전에 죄인이었다는 뜻을 표시케 하라”
우현보(禹玄寶)가 남긴 유언이다.
그의 아들 우홍수(禹洪壽 대제학(大提學)ㆍ대제학공파조(大提學公派祖))ㆍ우홍부(禹洪富 예판(禮判)ㆍ예안군파조(禮安君派朝))ㆍ
우홍강(禹洪康 개성유수(開城留守)ㆍ대제학(大提學)ㆍ안정공파조(安靖公派祖))ㆍ우홍득(禹洪得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ㆍ
집의공파조(執義公派祖))ㆍ우홍명(禹洪命 예판(禮判)ㆍ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등 5형제도 조선 개국 당시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다 전원 유배당했으며 우홍수(禹洪壽)ㆍ홍득(洪得)ㆍ홍명(洪命)등 3형제는 혁명의 와중에서 또는 유배지에서 숨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한편 둘째 우홍부(禹洪富)와 셋째 우홍강(禹洪康)은 뒤에 풀려나와 우홍부(禹洪富)는 정종(定宗)2년 제2차의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太宗))을 도운 공으로 정난원종(靖難原從)에 올랐고, 우홍강(禹洪康)은 한성부윤(漢城府尹)ㆍ
강원도(江原道)관찰사 등을 지냈다. 맏이 우홍수(禹洪壽)의 아들 성범(成範 공양왕의 사위)도 조선(朝鮮)개국 때 죽음을 당했으나,
그의 아우 우승범(禹承範)은 황해도(黃海道)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우공(禹貢 수사(水使)ㆍ도총관(都摠管))은 세조(世祖)때 이시애난(李施愛亂)의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敵愾)공신 3등에 오르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좌리(佐理)공신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때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가(詩歌)로써
시국을 풍자하다 갑산(甲山)에 귀향갔던 우선언(禹善言)은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단양 우(丹陽 禹)씨의 충절의 기개는 구국의 투혼으로 되살아났다. 우성전(선조조(宣祖朝) 대사성
(大司成))ㆍ우복룡(禹伏龍ㆍ동(同)ㆍ성천부사(成川府使))ㆍ우배선(禹拜善 동(同)ㆍ樂安郡守), 우치적(禹致績 동(同) 순천부사
(順天府使))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들 중 우성전(禹性傳)은 선조(宣祖)때 동인(東人)이 남인(南人)ㆍ북인(北人)으로
분파 할 당시 남인(南人)의 영수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 그가 서울 남산(南山)밑에 살았기에 남인(南人)이란 호칭이 생겼다.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당쟁이 불꽃을 튀기던 시절,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ㆍ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등을 지냈던 그는
북인(北人)에 의해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수천의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활약,
서울 남산(南山)을 수호하는 등의 전공으로 대사성(大司成)에 특진되었으나 부평(富平)전투에서 전사했다 저서로‘역설(易說)’,
‘이기설(理氣說)’등을 남겼다.
우희열(禹希烈)은 태종(太宗)때 충청(忠淸)ㆍ경기도(京畿道)관찰사를 거쳐 세종(世宗)때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특히 수리 공사에
대한 식견이 높아 각도에 파견되어 제방(堤防)공사를 독려했다. 선조(宣祖)때의 유학자이자 부사ㆍ목사등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우복룡(禹伏龍)은 희열(希烈)의 5대손.
숙종(肅宗)때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성리학자로 박람강기했던 우세일(禹世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한말의 이름높은
경사가(經史家)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우성규(禹性圭 단양군수(丹陽郡守))등도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낳은 인물들이다.
조선말(朝鮮末) 대원군(大院君)의 천주교 탄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우세영(禹世英)은 한국 천주교 수난사에서 기록된
순교자, 사후에 복자(福者)로 추앙받고 있다. 근세의 인물로는 을사(乙巳)조약(1905년)이 체결되자 <정동의여대장(正東義旅大將)>
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관서(關西)의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펴 용맹을 떨쳤던 우동선(禹東鮮), 대구(大邱) 친위대 참교(參敎)로
있다가 을사(乙巳)조약이 체결되자 병영을 탈출해 광복회(光復會)조직, 만주(滿洲)에 군사학교 설립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우재룡(禹在龍), 안중근(安重根)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암살할 당시 동지로서 합세했던 우덕순(禹德淳)등이 빛난다.
이렇든 단양우씨(丹陽禹氏)는 1천여 년의 씨족사에서 <절의(節義)>를 가장 고집해온 가문이다. “왕(王)앞에 도끼를 들고 나타났던 역동(易東)의 기개가 고려가 망할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임진왜란과 일제침략을 당해서는 구국의 투혼으로 이어져
왔다.”고 우대규씨(禹大奎 서울 화숭회장ㆍ한일(韓一)약품회장)는 말한다. 해방 후 단양우씨(丹陽禹氏)문중은 사회 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박사는 <세계의 권위>로 꼽혔었다. 1919년 동경제대(동경제대) 농학과를 졸업한 그는
피튜니아 꽃의 겹꽃 육종에 성공했으며 1936년 <종(種)의 합성설(合成說)>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대(代)잡종의 확립,
핵(核)치환 배추육성, 고추 우량 품종 육성 등의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우인가(禹仁可 楊州牧使)
우중대(禹仲大 문하시중(門下侍中))
우탁(禹倬 자(字):천장(天章)·호(號):역동(易東)·시호(諡號):문희(文僖)·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우길생(禹吉生 적성군(赤城君)·삼중대광(三重大匡))
우현보(禹玄寶 자(字):원공(原功)·호(號):독락당(獨樂堂)·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시호(諡號):충정(忠靖)·판삼사사(判三司事))
우천계(禹天啓 판서(判書))
우천석(禹天錫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제(예안군(禮安君)·찬성(贊成))
우국진(禹國珍 시(諡): 문강(文康)·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우팽(평장사(平章事))
우복생(禹福生 시(諡): 문순(文純)·상장군(上將軍))
우인열(禹仁烈 시(諡):정평(靖平)·의정부좌정승(議政府左政丞))
우신(禹愼 자(字):과회(寡晦)·호(號):양일재(養一齋)·형조판서(刑曹判書))
우홍수(禹洪壽 부원군(府院君)·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우성범(禹成範 단양군(丹陽君)·중대광국보(重大匡輔國))
우홍득(禹洪得 상호군(上護軍))
우홍명(禹洪命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성유(禹聖兪 시중상서(侍中尙書))
우숭여(禹崇呂 자(字):상진(尙津)·호(號):수암(秀菴)·절신(節臣))
우도응(禹都膺 찬성사(贊成事))
▲ 조선조
우원광(禹元光 예조참의(禮曹參議))
우희열(禹希烈 시(諡):문숙(文肅)·호조판서(戶曹判書))
우계인(禹繼仁 판서(判書))
우승범(禹承範 호(號):양졸옹(養拙翁)·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우홍부(禹洪富 예안부원군(禮安府院君)·시(諡):정평(靖平)·예조판서(禮曹判書))
우승경(禹承瓊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세민(禹世民 우상(右相))
우현손(禹賢孫 자(字):여윤(余胤)·호(號):효경당(孝敬堂)·호조참판(戶曹參判))
우계노(禹季老 자(字):도의(道義)·단양군(丹陽君)·현감(縣監))
우공(禹貢 자(字):현규(顯圭)·호(號):운암(運岩)·단성군(丹城君)·시(諡):양장(襄莊)·병조판서(兵曹判書))
우홍강(禹洪康 시(諡):안정(安靖)·형조판서(刑曹判書))
우필명(禹弼明 자(字):석보(碩輔)·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우윤공(禹允功 돈령도정(敦寧都正))
우정(禹鼎 자(字):계삼(季三)·호(號):송와(松窩)·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제학(提學))
우치하(禹治河 자(字):전옹(奠翁)·호(號):청량정(淸凉亭)·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우근(禹僅 좌윤(左尹)),
우길봉(禹吉逢 자(字): 노경(魯卿)· 호(號): 치재(恥齋)·부정(副正))
우실(禹實 자(字):중광(仲光)·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우원도(禹元道 자(字): 향순(亨叔)· 호(號): 청옹(聽翁)·춘추제학(春秋提學))
우전산(禹奠山 자(字): 윤공(允功)·단원군첨중추부사(丹原君僉知中樞府事))
우현규(禹玄圭 자(字): 직부(直夫)·이조참의(吏曹參議))
우결(禹決 자(字): 성소(性邵)· 호(號):금계(錦溪)·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
우규(禹圭 자(字):응보(應甫)· 호(號): 황강(黃崗)·별시위(別侍衛))
우치회(禹治淮 자(字): 평수·호(號): 양파(陽坡)·한성부참관(漢城府參軍))
우효강(禹孝剛 형조참판(刑曹參判))
우집(禹楫 자(字):용여(用汝)·대사성(大司成))
우현규(禹玄圭 대사간(大司諫))
우전(禹塡 학정(學正))
우남양(禹南陽 자(字): 몽뇌夢賚·號: 운곡(雲谷)·학자(學者)),
우인손(禹仁孫 자(字):애지(愛之)·도총(都摠))
우복룡(禹伏龍 자(字): 현길(見吉)·호(號):동계(東溪)·선혜제조학(宣惠提調學)),
우경송(禹敬松 호(號): 누지재(樓遲齋)·홍문교리(弘文校理))
우상중(禹尙中 자(字): 일지(一之)·시(諡): 충장(忠莊)·도총관(都摠管))
우몽규(禹夢圭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중원(禹仲源 용양위부호군)
유춘규(禹春奎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낙(禹珞 자(字): 질부(質夫)·호(號): 우암(憂菴)·효행(孝行)
우석주(禹錫疇 영종방어사(永宗坊御使))
우준민(禹俊民 자(字): 수언(秀彦)·號: 풍택(楓澤)·도승지(都承旨))
우창적(禹昌績 자(字): 자무(子懋)·호(號): 죽계(竹溪)·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창하(禹昌夏 자(字): 자상(子尙)·공조정랑(工曹正郞))
우두천(禹斗天 자(字): 담필(淡弼)·오위장(五衛將))
우천기(禹天機 자(字): 중운(重運)· 호(號): 양심당(養心堂)·옥천군수(沃川郡守))
우극진(禹克進 자(字): 퇴이(退而)·예조정랑(禮曹正郞))
우복룡(禹伏龍 성천부사(成川府使))
우영석(禹永錫 참봉(參奉)
우정신(禹靜臣 만호(萬戶))
우수한(禹守漢 훈련첨정(訓練僉正))
우석규(禹錫圭 자(字): 연옥(鍊玉)·호(號):성재(誠齋)·문행(文行))
우일남(禹一男 자(字): 백부)伯夫)·호(號):사재(思齋)·좌승지(左承旨))
우순신(禹舜臣 자(字): 계문(繼文)·부총관(副摠管))
우안택(禹安宅 자(字): 성안(聖安)·만호(萬戶))
우익하(禹翊夏 운봉영장(雲峰營將))
우경서(禹敬敍 자(字): 이숙(彛叔)·진도군수(珍島郡守))
우경설(禹敬卨 자(字): 은경(殷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윤하(禹胤夏 자(字): 여흠(汝欽)·호(號):우송당(友松堂)·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
우효달(禹孝達 훈련첨정(訓練僉正))
우승선(禹承先 자(字): 비서(丕緖)·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우극준(禹克俊 자(字): 자호(子豪)·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우순민(禹舜民 자(字): 희수(熙壽)·호(號): 추계(秋溪)·의관(議官))
우정규(禹廷圭 자(字): 중헌(仲獻)·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우한봉(禹漢封 자(字): 윤성(允成)·이조참판(吏曹參判))
우석규(禹錫珪 자(字): 백옥(伯玉)·호(號): 지족당(知足堂)·진천현감(鎭川縣監))
우여도(禹汝度 자(字): 숙도(叔度)·호(號): 만회당(晩悔堂)·우후(虞侯))
우천록(禹天祿 자(字): 응정(應禎)·좌승지(左承旨))
우광적(禹光績 자(字): 문숙(文叔)·칠원현감(漆原縣監))
우득남(禹得楠 자(字): 명노(明老)·호(號):매우(梅宇)·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적(禹績 자(字): 공서(功敍)·호(號): 우천(愚泉)·좌승지(左承旨))
우돈(禹惇 자(字): 군면(君勉)·호(號): 눌계(訥溪)·의병(義兵))
우여무(禹汝楙 자(字): 대백(大伯)·호(號) 눌계(訥溪)·병조좌랑(吏曹佐郞))
우석일(禹錫一 자(字): 자행(子行)·호(號): 난곡(蘭谷)·형조금오랑(刑戶金吾郞))
우환(자(字): 군신(君信)·병조참판(兵曹參判))
우여성(禹汝成 자(字): 홍정(洪定·호(號): 원염재(遠炎齋)·공조정랑(工曹正郞))
우석명(禹錫命 자(字): 치승(致承)·통제사(統制使))
우신(禹紳 자(字): 정립(廷立)·중추부사(中樞府事))
우성전(禹性傳 자(字): 선선(善善)·호(號): 추연(秋淵)·시(諡): 문강(文康)·대사성大司成))
우필성(禹弼成 이천부사(利川府使))
우치적(禹致績 통제사(統制使))
우유일(禹惟一 자(字): 자중(子仲)·호(號): 우헌(友軒)·전적(典籍))
우성적(禹成績 자(字): 경훈(景勳)·호(號): 죽오(竹塢) 중군(中軍))
우전(禹 甸 자(字): 전지(甸之)·군수(郡守))
우치중(禹致中 자(字): 자화(子和)·사복시정(司僕寺正))
우홍성(禹弘成 자(字): 공보(功甫)·號: 곤은·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우필한(禹弼漢 자(字): 공원(公遠)·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우극렴(禹克謙 자(字): 익천(益天)·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서규(禹瑞圭 자(字): 집경(執卿)·도총관(副摠管))
우필창(禹弼昌 자(字): 군언(君言)·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후현규(禹玄圭 자(字): 석지(錫之)·연기현감(燕岐縣監))
우휘광(禹輝光 자(字): 명진(明鎭)·공조참판(工曹參判))
우관흥(禹寬興 자(字): 치우(致佑)·오위장(五衛將))
우현징(禹賢徵 자(字): 양필(良弼)·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
우순필(禹舜弼 자(字): 여량(汝亮)·병조참판(兵曹參判))
우홍제(禹弘濟 자(字): 사집(士楫)·통진부사(通津府使))
禹夏亨(우하형 자(字): 회숙(會叔)·부총관(副摠管))
우홍규(禹弘圭 자(字): 공백(功伯)·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우맹하(禹孟河 자(字): 성일(聖一)·영장(營將))
우덕구(禹德九 자(字): 여명(汝明)·좌승지(左承旨))
우성하(禹聖河 자(字): 시백(時伯)·호조팒서(戶曹判書))
우창모(禹昌謨 자(字): 대유(大有)·공조참판(工曹參判))
우수일(禹守一 자(字): 부여(富余)·호(號): 만산(晩山)·호조참판(戶曹參判))
우기영(禹起榮 자(字): 군영(君榮)·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우성기(禹聲冀 자(字): 경도(景都)·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우산수(禹山壽·좌승지(左承旨))
우정규(禹禎圭 자(字): 여보(汝寶)·호(號): 남파(南坡)·호초참판(戶曹參判))
우성규(禹成圭 자(字): 성석(聖錫)·호(號): 굥재(景齋)·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우하철(禹夏哲 자(字): 윤명(允明)·호(號): 삼신재(三愼齋)·정언(正言))
우석귀(禹錫龜 자(字): 종서(宗端)·호(號): 세심와(洗心窩)·경사도사(慶尙都事))
우홍전(禹洪傳 자(字): 군보(君甫)·호(號): 월주(月洲)·장릉봉사(莊陵參奉))
우하신(禹夏臣 자(字): 성즉(聖則)·호(號): 회은(晦隱)·승지(承旨))
우효신(禹孝臣 자(字): 문구(門求)·호(號): 과계(果溪)·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우태영(禹台榮 자(字): 경삼(景三)·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
우기정(禹冀鼎 자(字): 우존(而尊)·호(號): 기선(奇仙)·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우주영(禹周榮 자(字): 치화(稚和)·호(號):오남(梧南)·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우복두(禹福斗 자(字): 선오(善五)·호(號): 죽와(竹窩)·공조판서(工曹判書))
우우두(禹佑斗 자(字): 민오(敏五)·호(號): 담재(膽齋)·공조참판(兵曹參判))
우승두(禹昇斗 자(字): 현오(賢五)·호(號)號: 관란재(觀瀾齋)·호초참판(戶曹參判))
우기동(禹起東 자(字): 경춘(敬春)·호(號): 정암(貞菴)·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우상성(禹尙聖 자(字): 명수(明秀)·대사성(大司成))
우제승(禹濟升 자(字): 중기(重基)·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내성(禹乃聲 의병대장(義兵大將))
[등과인명(登科人名)]
▲ 고려조(高麗朝)
문과(文科)
우천석(禹天錫 원종조) 우천우(禹天佑 충렬왕조) 우탁(禹倬 충렬왕조) 우현보(禹玄寶 공민왕조) 우홍득(禹洪得 우왕조)
우홍수(禹洪壽 우왕조) 우홍강(禹洪康 우왕조) 우홍부(禹洪富 우왕조) 우홍명(禹洪命 우왕조)
▲ 조선조(朝鮮朝)
문과(文科)
우승범(禹承範 이판(吏判)) 우효강(禹孝剛 형판(刑判)) 우계번(禹繼蕃 부윤(府尹) ) 우전(禹塡 학유(學諭))
우즙(禹楫 사예(司藝)) 우가손(禹賀孫 전적(典籍)) 우순필(禹舜弼 현령(縣令)) 우면(禹錦 감사(監司)) 우세민(禹世臣 사정(寺正))
우천기(禹天機 군수(郡守)) 우성전(禹性傳 대성(大成)) 우준민(禹俊民 감사(監司)) 우홍적(禹弘績 승지(承旨))
우정침(禹廷琛 사정(寺正)) 우여무(禹汝楙 현감(縣監)) 우경석(禹敬錫 교교(校校)) 우유일(禹惟一 찰방(察訪))
우규(禹糾 찰방(察訪)) 우창적(禹昌績 예판(禮參)) 우배창(禹拜昌 찰방(察訪)) 우정구(禹鼎九 군수(郡守))
우정(禹鼎 현감(縣監)) 우세준(禹世準 첨지(僉知)) 우홍적(禹洪迪 승지(承旨)) 우경한(禹景漢 상례(相禮))
우정봉(禹禎鳳 현감(縣監)) 우순석(禹舜錫 첨지(僉知)) 우세신(禹世臣 첨지(僉知)) 우정규(禹禎圭 첨지(僉知))
우석귀(禹錫龜 지평(持平)) 우제일(禹濟一 지평(持平))
[음사인명(蔭仕人名)]
우현(禹玄 호장(戶長)) 우신(禹臣 호장(戶長)) 우인가(禹仁可 호장(戶長)) 우잉순(禹仍順 호장(戶長)) 우경절(禹慶節 호장(戶長))
우중대(禹仲大 공생급제(貢生及第)) 우천규(禹千珪 진사(進士)) 우탁(禹倬 좨주(祭酒), 시(諡): 문희(文僖)) 우길생(禹吉生 적성군
(赤城君)) 우현보(禹玄寶 영상(領相)) 우홍수(禹洪壽 판서(判書)) 우영범(禹永範 견문(見文)) 우계손(禹繼孫 군수(郡守))
우팽령(禹膨齡 주부(主簿)) 우윤성(禹允成 사과(司果)) 우세건(禹世健 참봉(參奉)) 우억기(禹億期 참봉(參奉)) 우강(禹綱 진사(進士)) 우홍업(禹弘業 사정(寺正)) 우정(禹鼎 사과(司果)) 우진서(禹震瑞 사과(司果)) 우현규(禹玄圭 현감(縣監)) 우홍부(禹洪富 판서(判書)) 우승원禹承瑗 직장(直長)) 우계로禹季老 직장(直長)) 우공(禹貢 병판(兵判), 단성군(丹城君), 시(諡): 양장(襄莊)) 우창언禹昌言 참의(參議)) 우석규(禹錫圭 참의(參議)) 우일남(禹一男 승지(承旨)) 우영해(禹英海 참봉(參奉)) 우춘(禹春 통정(通政)) 우상덕(禹象德 증지평(贈持平)) 우명중(禹命中 증교관(贈敎官)) 우명일(禹命一 증교관(贈敎官)) 우인택(禹仁澤 통덕랑(通德郞)) 우인집(禹仁楫 승사랑(承仕郞)) 우인동(禹仁東 증좌랑(贈佐郞)) 우종원(禹宗源 증복정(贈僕正)) 우봉규(禹鳳圭 증승지(贈承旨)) 우진표(禹鎭杓 증참판(贈參判)) 우길원(禹吉源 동추(同樞)) 우인옥(禹仁玉 통정(通政)) 우용손(禹龍孫 참봉(參奉)) 우용택(禹龍宅 참봉(參奉)) 우학록(禹學祿 증참의(贈參議)) 우상만(禹相蔓 감찰(監察)) 우창종(禹昌宗 동추(同樞)) 우승적( 禹承績 통덕랑(通德郞))
[조선조 급제자 정록]
승범(承範 태조조(太宗朝) 8年· 무년시( 式年試)·진사( 進士))
승강(孝剛 세종조(世宗朝) 8年· 무년시( 式年試)·진사( 進士))
승범(承範 세종조(世宗朝) 9年· 중시(重試)·을과이(乙科二))
효강(孝剛 세종조(世宗朝) 18年·중시(重試)·을과이(乙科二))
계번(繼蕃 세종조(世宗朝) 20年·문년시(式年試)·정과(丁科))
전(塡 성종조(成宗朝) 3年·춘장(春場)·병과(丙科))
즙(楫 성종조 (成宗朝) 18年·별시(別試) 병과(丙科))
하손(賀孫 연산군(燕山朝) 1年·별시(別試)·병과(丙科))
필순(弼舜 중종조(中宗朝) 21年·별시(別試)·병과(丙科))
상(중종조(中宗朝) 35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세신(世臣 명종조(明宗朝) 7年·무년시(式年試)·(丙科))
천기(天機 명종조(明宗朝 16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성전(性傳 선조조(宣祖朝) 1年·별시(別試)·병과(丙科))
준민(俊民 명종조(宣祖朝) 15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홍적(弘績 명종조(宣祖朝) 24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정침(廷琛 명종조(宣祖朝) 24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방(舫 광해군(光海朝) 12年·별시(別試)·을과(乙科))
여무(汝楙 인조조(仁祖朝) 12年·별시(別試)·병과(丙科))
경석(敬錫 인조조(仁祖朝 22年 ·정시(庭試)·병과(丙科))
유일(惟一 인조조(仁祖朝) 24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규(糾 효종조(孝宗朝) 4年 ·별시(別試) 병과(丙科))
창적(昌績 현종조(顯宗朝) 1年·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배창(拜昌 현종조(顯宗朝) 4年 ·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정구(鼎九 현종조(顯宗朝) 14年 ·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정(鼎 숙정조(肅宗朝) 1年 ·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세준(世準 영조조(英祖朝) 1年·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홍적(洪迪 영조조(英祖朝) 5年 ·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태귀(泰龜 영조조(英祖朝) 9年 ·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한(景漢 영조조(英祖朝) 15年·정시(庭試)·병과(丙科))
정봉(禎鳳 영조조(英祖朝) 31年·정시(庭試)·병과(丙科))
정규(禎圭 영조조(英祖朝) 42年·정시(庭試)·병과(丙科))
석귀(錫龜 정조조(正祖朝) 16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간(錫簡 순조조(純祖朝) 10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하철(夏哲 순조조(純祖朝) 13年·무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문(錫文 순조조(純祖朝) 15年·무년시(式年試)·을과(乙科))
제일(濟一 고종조(高宗朝) 24年·개성별시(開城別試)·(甲科))
[별열(閥閱)]
●공신(功臣)
: 우공(禹貢 세조조 이시애난토벌3등공신(李施愛亂討伐3等功臣), 성종조 성종즉위4등공신 (成宗卽位4等功臣))
●문형(文衡)
: 우성전(禹性傳 선조조)
●호당(湖堂)
: 우복룡(禹伏龍), 우성전(禹性傳), 우홍적(禹弘績)
●청백리(淸白吏)
: 우현보(禹玄寶 태조조) 우세계(禹世謙 명종조) 우홍적(禹弘績 선조조) 우복룡(禹伏龍 선조조) 우성전(禹性傳 선조조)
우정침(禹廷琛 선조조)
●절의(節義)
: 우성채(禹洪采 경종신임사화(景宗辛壬士禍))
●명륜(明倫)
:(효행(孝行)) 우달홍(禹達弘 (정려(旌閭), 증교관(贈敎官)) 우상방(禹尙邦 (증가선 (贈嘉善)) 우명오(禹命五철종조
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
(열녀(烈女)) 우씨(禹氏 서정옥(徐正玉)의 처(妻), 정려(旌閭))
●문집(文集)
: 구암집(懼庵集 우복룡(禹伏龍)) 동계잡록(東溪雜錄 우복룡(禹伏龍)) 경재집( 景齋集 우성규(禹成圭))
역설(易說 우성전(禹性傳)) 이기설(理氣說 우성전(禹性傳)) 계갑일기(癸甲日錄 우성전(禹性傳))
천일록(千一錄 우하영(禹夏永))
단양우씨의 내력 각 파조의 내력
1.득성( 성씨의 취득)
한국의 성은 서기 350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고구려,신라,백제,때는 일부사람들만이 사용 하였다.
예로 신라의 박,진,김,이,최,정,손,배,사, 9성이 일부제한된 귀족에게만 사용되었다. 고려문종(1055)에
이르러 과거응시의 요건으로 성씨가 필요하게 되자 이떄부터 성씨가 보편화되었으며 평민층급에는
득성을 용인하지 않았다.
우리단양우씨는 그 근원이 오래되어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시조(현)는 고려태조때 분으로(928-1035 ??)
일반적 득성시대보다 백년이 앞서 득성하였다고 보며 일설 중국에서 유입운운은 고증할 만한 기록이 없다.
시조 (현) 할아버지 (928-1035)
향진사 정조호장
부인은 평산신씨숭보의 녀로 평산신씨족보에 기재되어있다.
2세 (신) 할아버지 (970-1066)
전법령
3세 (인가) 할아버지 (1026-1120)
양주목사
4세 (잉순) 할아버지
관찰사
5세 (경절) 할아버지 (1172-1253)
지도평의사사
이상5대는 타성의 예와 같이 구전등으로 전래되어 온 기록인 바 불확실함
6세 (중대) 할아버지 상령공, 중시조
문과에 급제 관은 문하시중
(대동원부군옥)에 수록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시대의 수상직. 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품계는 종1품, 정원은 1명이었다.
문하시중-고려 때 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종 1품 관직.
1275년(충렬왕 1)에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로 고쳤으므로 중서령은 폐지되고, 문하시중 대신
좌·우첨의중찬(左,右僉議中贊) 각1명씩 두었다. 1308년 첨의부가 도첨의부로 됨에 따라 정승이라고 불렀다.
1369년(공민왕 18)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고쳐지자 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으로 불렀으며, 창왕때는 시중·
수시중으로 불렀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우중대(禹仲大)는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
중대 할아버지의 아들
천규(天珪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
천계(天啓)ㆍ
천석(天錫 시중(侍中))ㆍ
천우(天佑)ㆍ
천성(天成)등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중 맏이인 천규(天珪)의 아들이 바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다.
우중대(禹仲大)할아버지의 맏아들인 우천규(禹天珪)할아버지(1253[고종 40]년)는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문하시중의 다음 벼슬)를,
둘째 아들 우천계(禹天啓)할아버지는 판서(判書: 고려 때 각 관청 및 6조(六曹)의 으뜸벼슬로 정2품 관직),
셋째 우천석(禹天錫)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우천우(禹天佑)(군기윤 軍器尹),
우천성(禹天成)(낭장 郎將)할아버지을 포함한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모두 지금의 장관급이상으로 입신 출세하여
가문을 빛냈다.
이들 5형제 중 맏이인 우천규(禹天珪)할아버지의 아들이 바로 탁(倬)할아버지이다.
고려조(高麗朝)는 이 무렵 안으로는 왕권(王權)의 쇠미(衰微)로 정치적 변란( 變亂)이 여러번 일어나고 밖으로는
몽고의 외환(外患)으로 환난(患難)이 극에 달해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고려조는 부득이 1259[고종 46]년 몽고와
강화(講和)를 맺게 된다.
7세 (천규)할아버지 상령공 제일자
남성전서 문하시중 동평장사
휘(천계) 상령공 제2자
(천계) 할아버지 상령공 제 2 자
우천계(禹天啓)할아버지는 판서(判書: 고려 때 각 관청 및 6조(六曹)의 으뜸벼슬로 정2품 관직)
(천석)할아버지 상령공 제3자
우천석(禹天錫)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묘는충주산척 충북중원군산척면송강리
1980년 묘비개편
우천석 할아버지의 묘는 송강리 행정마을에 있다. 묘의 면적은 약 50여평 정도이고 묘는 네모형태의 방형분이다.
돌을 다듬어 4-5단을 쌓아 네모난 형태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데 호석은 높이가 앞면이 90cm이며 뒤로 가면서
산의 경사면 때문에 낮아져 50cm정도이고 뒤로는 흙으로 연결되고 있다.
석물은 상석 일체와 상석의 좌측에 옛날 묘표(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諱天錫之墓)가 있고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새로운 묘비(내용 : 高麗侍中丹陽禹公之墓)가 있으며 묘비 앞에 문인석이 있다.
우평 묘
우천석 할아버지 묘 바로 뒤에는 우천석 할아버지의 아들 우평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데 조성 양식이 우천석
할아버지의 묘와 동일하며 〈고려밀직부사추봉시중사우공평지묘〉란 옛 묘비와 1980년에 세운〈문하시중
평장사단양우공지묘 배군부인 청풍김씨합 부〉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천등재(天登齋)란 사당과 숭덕문(崇德門)이라는 출입문이 있고 사당 바로 좌측에 1982년에 세운
단양우씨제단비가 있다.
충주시내에서 목행대교를 지나 직진하다 보면 영덕삼거리가 나오고 제천방향으로 조금 가면 산척면
소재지가 나온다.
산척농협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가다보면 길 왼쪽으로 손순효 신도비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바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가운데 길로 500m 쯤 가면 왼쪽 산 중턱에 우천석 할아버지의
묘가 잘 보인다.
(천우)할아버지 상령공 제4자
우천우(禹天佑) (군기윤 軍器尹)
(천성) 할아버지 상령공 제5자
우천성(禹天成) (낭장 郎將)
8세(탁)할아버지 (1262-1342) 탁부 (천규)의 자
호는 역동선생,백운,단암,익호는 문희공
우리 단양우씨조상중의 가장 뛰어난 명저상으로 고려조의 석학이다.
진사(鄕貢進士)인 우천규 할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다.
주역을 도입교수하시어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앙받고 유림에서 존중 숭배 되다.
관은 성균관제주 진현관직제학
감찰순정으로 충선왕의 실덕을 충련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비항은 배종호박사저(역동우탁선생고실)참조
휘 (칭) 휘 (천석) 의 장자
문과 관은 좌대언
휘 (평) 휘 천석의 제 2자
봉익부부 밀직사부사 상호군 추봉문하시중
9세 (길생)할아버지
(칭)할아버지의 장자 호천숙
(탁)할아버지 하로 출계하여 종통을 이음
적성부원군 관은 판서운관사
서성재보작공2등
참의공파의 파조
휘(원광) 휘 (탁)의 자
예조참의
조선초기의 관리, 본관은 단양(丹陽).
8세손 문희공 탁의 자, 관직은 예조참의(參議)
봉상정공파의 파조
휘 (원명) 휘 (탁)의 자
봉상정
조선초기의 관리, 본관은 단양(丹陽).
8세손 문희공 탁의 자, 관직은 봉상정(奉常正)
문강공파의 파조
휘 (국진) 휘 (칭)의 2자
참판,일운 사조판서 익호는 문강공
公이 고려말에 태어나셔서 문과에 급제하시고 참판을 거쳐 의금부 판사,
그리고 이조판서를 지내셨다.
문행록을 대략적으로 보면 충심으로 임금을 섬기고 명을 의로서 관계를 지속하였으며 유교와 불교를 엄 중히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이 그게 바로 올바른 道 라고 하셨다.
外史氏 찬성하여 말하기를 백이와 숙제의 오상고절한 뜻(夷齊之志)과 야음과 목음의 빼어난 학행(冶牧之學)이라
하여 그 뜻을 높이 사셨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문강공 국진祖를 派祖로 모시고 제향을 피웠다
휘(복생) 휘 (평)의 제3자
관은 상호군 추봉 문하시중
10세 휘(현보) 휘 (길생)의 자(1333-1400)
자는 (원공) 호는 양호당,독락당,익호는 충정공
관은 문하시중,단양부원군,순충익재좌리공신,청백사,
우씨문중에서 역동이 도학군자로 학문에만 치중한데 비해
현보 할아버지는은 고려말 이조초의 정변의 과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고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묘소 개성 장단군장단면
1980년 파주군파평면두포리 망제단건립
1333(충숙왕 복위 2)~1400(정종 2). 고려말 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원공(原功),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단양(丹陽). 55년(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
집의(執義) .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우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 제학(提學) .
동지밀직사사 겸 대사헌 . 정당문학(政堂文學)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역임했다.
88년(우왕 14) 다시 찬성사가 되어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해 요동정벌(遼東征伐) 때는 경성 유수(京城留守)로 남아 있었고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한 뒤
좌시중(左侍中)으로 있다가 곧 파직,
뒤에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으로 봉해졌다. 90년(공양왕 2)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있다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 원배(遠配),
이어 석방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철원에 유배, 곧 풀려나와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개봉(改封)되었다.
92년(공양왕 4)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다시 원배(遠配), 이어 풀려 나왔으나 이 해 조선이개국되자
또 광주(光州)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었다.
98년(태조 7) 복관(復官)되고,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으며,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 내(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듣고 이를 방원(芳遠)에게 알린 공으로 난이 평정된 뒤 추충보조공신
(推忠輔祚功臣)이 되었다
정평공파의 파조
휘(인열) 휘(복생)의 장자 (1337-1403)
의정부좌정영,익호는 정평공 성동익재공신 이분은 고려말 이조초의 혼탁한 정계에서 출장입상의 충성을 다한 분이다.
1337(충숙왕 복위 6)~1403(태종 3). 고려말 . 조선 초의 권신. 시호는 정평(靖平). 본관은 단양(丹陽). 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침입 때 원수 한 방신(韓方信)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이어 판선공시사(判繕工시事)를
거쳐 응양군 상호군(鷹揚郡上護軍)이 되었으며, 74년(우왕 즉위) 명사(明使) 피살사건으로 간관(揀官)의 탄핵을 받은
이 인임(李仁任)에게 아부하여 이를 변호했다.
이듬해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를 거쳐 77년 경상도 원수로서 사불랑(沙弗郞) . 영광(靈光) 등지에서
왜구(倭寇)를 격파, 다음해에 경상 . 양광 . 전라 . 삼도 도체찰사(慶尙楊廣全羅三道都體察使)가 되었다.
79년 원수로서 합포(合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이어 사주(泗州)에서 또 왜구를 대파하고 합포 도순문사
(合浦都巡問使)가 되었다.
83년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청평(淸平)에 들어온 왜구를 토벌, 85년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88년(창왕 즉위) 찬성사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설 장수( 長壽)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창왕의 습위(襲位)를
알렸고 이듬해 김 저(金佇)의 옥사(獄事)에 변 안렬(邊安烈) . 이 임(李淋) . 우 현보(禹玄寶) .
이 색(李穡) . 왕 안덕(王安德) . 우 홍수(禹洪壽) 등과 함께 연루되어 유배 되었다가 91년(공양왕 3) 풀려나왔다.
92년 조선개국 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고 이듬해 귀국하여
판개성 부사(判開城俯使)가 되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다.
95년(태조4)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留後), 1400년(정종 2) 판승녕부사(判承寧俯事)에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
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01년(태종 1) 귀국, 이 해 정종의 사위(辭位)와 태종의 습위(襲位)를
허락한 데 대한 사은사로 또 명나라에 다녀왔다.
03년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올라 병사했다.
문숙공파의 파조
휘 (희열) 휘(복생)의 제 3자 (1354-1435)
충청,경기감사 호조판서 익호는문(강)공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관리. 본관은 단양(丹陽).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1408년(태종 8)에 민무구(閔無咎)사건에 관련되어 하옥되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으며, 이듬해
3월에는 제언(堤堰)수축을 통한 수리의 개발을 주장하여 태종대의 수리시설 확장사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413년에는 충청도도관찰사의 직임을 띠고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하여 시도된 태안반도 운하개통사업,
즉 축제(築堤)사업을 주관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경기·충청 양도의 권과농상사(勸課農桑使)로 나가
제언수축과 식상(植桑)의 일을 권장하였다.
1415년에 다시 충청도관찰사, 같은해 말에 경기도관찰사에 이어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가 되었다.
1418년 판청주목사로 있을 때 전국 각지에 제방과 관개시설의 목록을 갖추어 매년 수치하게 하고
경차관을 보내어 감독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려 이를 실현시켰다.
김제 벽골제(碧骨堤), 부평 수용제(水桶堤) 등의 수축에 큰 공을 세웠으며 농업전문가로서의 활약이
컸다.
대제학공파의 파조 공양왕과 사돈
11세 휘(홍수)충정공의제1자(1355-1392)
집현전대제학,동지밀직사사,형조판서
1355(공민왕 4)∼1392(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단양백(丹陽伯) 현보(玄寶)의 아들이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성균박사를 겸하였으며, 지신사(知申事)·대사헌을 거쳐, 창왕 때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김저(金佇)의 옥사에 관련되어 다음해에 인주(仁州:지금의 인천)에 유배되었다가, 1391년
(공양왕 3)에 다시 기용되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나 1392년 정도전(鄭道傳)의 모함을 받아
정몽주(鄭夢周)일파로 몰려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장살당하였으나, 곧 신원(伸寃)되었다.
예안군파의 파조
이조개국시 정도전일파에 피화
휘 (홍부) 충정공제2자(-1411)
정헌부부,예조판서,예안부원군
묘 경기도 여주군대신면상구리
?∼1414(태종 14).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단양백(丹陽伯) 현보(玄寶)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입사, 1382년(우왕 8) 장복서령(掌服署令)으로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였다.
1392년(공양왕 4) 6월 전의감부령(典醫監副令)재직 중에 이성계(李成桂)일파의 구신(舊臣)제거와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원방에 유배하도록 결정, 이해 7월 고려 구신에 대한 재논죄와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결장(決杖)후 원방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면, 1398년(태조 7)윤5월 직첩(職牒)을 환급받았다.
1400년(정종 2) 1월 회안군(懷安君:芳幹)의 처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가 아버지에게 회안군이
정안군(靖安君:뒤에 太宗)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이를 전해들은 그가 정안군에게 고변하였는데, 이해 11월
이 공로로 특별히 개성유후사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에 서용되었다.
1412년(태종 12) 방간의 난에 대한 공로가 다시 논의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예안군(禮安君)에
봉군되었다.
1413년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 벼슬아치에게 주던 사령장)을 몰수당하였으나
이듬해 질병을 기한 태종의 특은으로 고신을 환급받은 후 죽었다.
안정공파의 파조
휘 (홍강) 충정공제3자(1357-1423)
개성유후,대사헌,형조판서,대제학 익호 안정공 청백사
묘소 개성 장단면 장단군
1980년10.5 파주군파평면두포리 망제단건립
(공민왕 6)~1423(세종 5). 고려말 . 조선 초의 문관. 시호는 안정(安靖). 본관은 단양(丹陽).
현보(玄寶)의 아들. 78년(우왕 4)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된 뒤 삼사판관(三司判官) . 사예(司藝) . 전교부령(典校副令) .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 .
친어위대호군(親禦衛大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 등과 함께 고려를 다시 세우려다가 삭직(削職)되어 원지(遠地)에
장류(杖流), 98년(태조 7) 풀려나와 직첩(職牒)을 환급(還給)받았다.
이어 좌사간(左司諫) . 판통례 문사(判通禮門事),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목사(牧使),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
10년(태종 10) 이조참의(吏曹參議)로서 진한사(進獻使)가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
13년 한성 부윤(漢城府尹) .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뒤에 안동 부사(安東府使) . 홍주 목사(洪州牧使),
21년(세종 3) 개성 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에 이르렀다.
집의공파의 파조
휘(홍득) 총정공 제4자 (-1392)
집의, 전교영
이조개국시 정도전일파에게 피화
1980년 충북음성군 금왕면 사당건립
?~1392(태조 1). 고려의 문관. 본관은 단양(丹陽), 현보(玄寶)의 아들. 공민왕 때에 집의(執義), 뒤에
전교령(典校令)에 이르렀다.
92년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강원도에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장살(杖殺)당했다.
판서공파의 파조
휘(홍명) 충정공제5자(-1392)
예조정랑,예조판서
이조개국시 정도전일파에게 피화
1949년 달성군월배면 설단
?∼1392(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아버지는 단양백(丹陽伯) 현보(玄寶)이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장원급제, 공양왕 때 이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아버지 현보와 형제인 홍부(洪富)·홍득(洪得) 등과 함께 이초(彛初)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 획책하다가 전라도에 귀양,
유배지에서 장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