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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순간 이성이 마비되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있
습니다. 특히 지름신이 그런 식으로 내리죠. 제대로 지름신을 영접하면 좀비처럼 변하더군요. 지금으로부터 6
년전의 일입니다. 아카디아를 그럭저럭 만족하며 타고 있던 2004년 어느 날. 한 중고차 사이트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차를 발견했습니다.
1995년식 BMW ‘740i’..... 바로 아래 사진입니다.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짙은 파란색입니다. 반짝이는 광택
은 물론 전조등과 브레이크 램프가 모두 세련된 신형을 바뀌어 있어 더욱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2002년에 저 딱떨어지는 자태를 보고 숨막히지 않은 자동차마니아가 있었을까요.
사실 아카디아를 타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1994년부터 생산된 7시리즈(코드명 e38)에 동경을 갖고 있습니다
. 아카디아의 원형모델인 혼다 레전드가 2,3년 먼저 나오긴 했지만 비슷한 디자인이면서 더 완벽한 자태에다,
속물적이긴 하지만 BMW라는 브랜드, 뛰어난 출력과 후륜구동의 매력, 탁월한 고속주행능력이 탐스러운 것이죠
. 제가 타던 아카디아는 이런저런 튜닝을 거치며 시속 230km까지 가능했지만 시속 200km를 넘어서면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한계를 드러내더군요. 2002년 새로 출시된 신형 7시리즈를 시승해봤고 그 성능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그 전세대 모델인 e38의 스포티하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이 더 좋았습니다.
어쨌든 사진으로 볼 때 실내외 상태가 신차수준으로 깨끗하다는 것도 지름신이 내리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었습니다. 주행거리는 7만5000km였고 가격은 2700만 원. 돈을 마련해서 당장 차가 있는 광주로 고속버스를 타
고 갔습니다. 유지보수에 대한 걱정이나, 수입차를 타고 다니다 겉멋들었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지도 않더군요.
차주와 대충 인사를 하는둥마는둥 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 숨이
딱 막히더군요. 저런 멋진 차가 내 소유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필이 꽂힌 매입 예정자
는 매도자의 입장에선 정말 다루기 쉬운 상대일 텐데 표정에서 그걸 숨기지 못했습니다. 중고차를 구입할 땐
마음에 안 드는 척 포커페이스도 중요하답니다. 그래야 협상의 여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협상도 적당히 해야
지 소중히 자식처럼 차를 다뤄온 오너에게 필요이상으로 트집을 잡으면 버럭 화를 내며 "당신에겐 절대 안 팔
아"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정도껏.
아무리 외관이 마음에 들어도 차량의 상태는 확인은 해봐야죠.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생
각보다 컬컬한 엔진음에다 공회전으로 RPM을 올리면 회전질감이 깨끗하지 못하고 차체에 진동도 약간 느껴집
니다. 일단 가속을 해보면 출력은 그럭저럭 나오는데 엔진의 회전질감이 꺼림칙했죠. 그래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본래 V8엔진이 좀 그런 면이 있다는 대답도 있었고, 찜찜하면 사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는 사
람도 있었지만 이미 사고 싶은 마음은 원하는 대답만 골라듣게 되더군요. 스스로 ‘괜찮을 거야~’라고 합리
화를 하고 할인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돈과 서류를 교환하고 키를 건네받았습니다. 지름신은 정말 우리를 병
들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한 것이, 막상 키를 받아들자 비록 중고이긴 하지만 이제 7시리즈 오너
라는 부담감과 회사 동료나 지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비난을 받지 않을지 걱정이 밀려옵니다. 게다가 혹시
저 회전질감(나중에 정말 많은 고민과 고생을 안겨주게 되는)이 엔진을 교환해야할 정도의 결함은 아닐지에
대한 두려움까지... 마음이 뒤늦게 무거워 옵니다.
그래도 몸은 어느새 차로 가고 있습니다. BMW 로고가 새겨진 키를 넣고 다시 시동. 이제 내 차가 됐다니 더
예쁘게 느껴집니다. 이젠 슬슬 속력을 올리며 BMW의 진가를 느껴볼 차례. 시속 100km. 아카디아와 비교하면
이건 뭐 차가 정지해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밋밋합니다. 역시 독일차야...라는 생각과 함께 슬슬 발에 힘이
들어갑니다. 시속 160..170..180..200.. 타고 다니던 아카디아와는 확실히 가속도 빠르고 안정적입니다. 그래
이 맛이야!!! 속으로 환호성을 올리며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시속 210km가 되자
뭔가 저항을 받는 느낌이 오면서 출력이 줄어들고 더 이상 속도가 안오릅니다. 바로 직전 오너에게 전화를 걸
었지만 “나는 200이상 올려본 적이 없어서요.”라고 끊어버립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데...
시속 210km.. 도대체 뭐지. 왜 더 안나가는 것일까. 차에 문제가 있는 걸까. BMW 740i가 시속 210km까지 쭈
욱 잘 올라가다 그 이상은 가속이 안 되는 현상은 식은땀이 흐르게 했습니다. V8 4.0L(1996년부터 4.4L로 바
뀜) 280마력 엔진이면 당연히 250km까지 올라가야하는데 출력이 부족한 것일까. 보통 독일차는 250km에 속도
리미트가 걸려 있는데 210km라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반복적으로 테스트를 해보니 출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고 210km에 이르면 강제로 출력을 제한하
는 리미트 같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휴게소로 들어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수
입차를 잘 안다는 사람들도 7시리즈라면 대부분 250km에서 리미트가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 결
정적으로 수입차업계 지인 한 분으로부터 ‘210km 리미트도 있다고 얘길 들었다’는 증언을 얻어냈습니다. 안
도의 한숨이 나오더군요. 출력문제나 고장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며칠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구입한 740i는 일본에서 들여온 모델이었는데 일본 판매모델의 경우 시속
210km 제한을 걸어놓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한 때 자동차회사들이 에너지 절약과 안전을
위해 자율적으로(정부의 압박도 있었지만) 시속 180km에 속도제한을 걸고 출력도 280마력 이하만 만들었습니
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런 규정들 때문에 자동차기술 발전과 마케팅에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
면서 지금은 출력 부분은 풀렸지만 속도는 아직도 시속 180km 제한에 묶여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속도문제는 잠시 잊기로 하고 주행성능을 만끽하기로 했습니다. 시속 200km에서 국산차나 일본차와
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정감을 느껴보고, 긴 차체에도 불구하고 타이트한 핸들링과 브레이킹 성능...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역시 독일차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뚝뚝 떨어지는 연료계 눈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풀탱크를 채워서 출발했는데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연료 경고등이 들어옵니다
. 신나게 달려왔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슬슬 기름값이 걱정됩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7시리즈 기름값은 이동
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유흥비라고.
며칠 뒤 시간을 내서 BMW 서비스 센터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국산차와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센터 안
으로 차를 몰고 쓰윽 들어갔더니 누가 달려 나옵니다. 꾸뻑 인사를 한 뒤 ‘사장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
물어보더군요. 요즘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2002년 당시 국산차 서비스센터는 고객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정비사 눈치를 보면서 잘 봐달라고 부탁도 하고 음료수도 사들고 가는...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점검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니 고객응접실로 안내를 한 뒤 여직원이 커피도 한
잔 가져다줍니다. 물론 정비료에 그런 서비스 비용이 다 들어있겠죠. 일단 진단기를 물려서 차에 문제는 없는
지 살펴봤습니다. 대체로 깨끗하더군요. 주행거리 조작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기반 아래에 각종 정보를 알
려주는 LCD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 글자가 아래 사진처럼 깨져서 물어봤더니 교체를 해야 한답니다.
점점 액정의 도트가 깨지면서 나중에는 아예 정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더군요. 가격을 물으니 98만 원!!! 아마 요
즘 BMW 계기반은 다양한 기능이 더 많이 들어가고 디스플레이도 화려하게 변해서 더 비쌀 겁니다.
계기반 10개면 국산 소형차도 한 대 살 수 있는 가격입니다. 수리비가 많이 든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더군요. 당장 큰 문제가 없기 때문에 다음에 하기로 하고 점검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렸습니
다. 그런데 똑같은 740i가 한 대 들어와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정비사에게 잠시 시동 걸어봐도 되냐고
물어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키를 돌렸습니다. 우웅~~ 8기통의 우렁차면서 기분 좋은 시동소리가 들린 뒤 고
요해집니다. RPM을 서서히 올려봤는데 내 차의 느낌과 완전히 다릅니다. 엔진의 매끄러운 회전질감에다 진동
도 거의 없었습니다. 바로 다시 내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고 RPM을 올려보니 완전 딴판.
쾅!! 뭔가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오면서 힘이 쭈욱 빠집니다. 분명 엔진이나 센서에 문제가 있다... 계기
반이 100만 원 가까이 한다는데 엔진에 문제가 있다면...도대체 얼마나... 두려운 마음에 점검을 마친 정비사
에게 물어봅니다. “엔진에 진동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없나요.” 정비사는 “진단기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진동이 약간 큰 건 사실이네요. 그렇다면 엔진을 정밀하게 진단해보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문제면 엔진 블럭을 교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라뇨?? 내 카라이프는 왜 이리 파란만장한 것인지
“그 문제라뇨?”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물어보자 정비사는 머뭇머뭇 하더니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1995년 이전에 출시된 8기통 엔진에 일부 문제가 있습니다. 황이 많이 들어간 저질 휘발유를 쓸 경우 실린
더 벽이 살짝 녹아내리면서 압축압력이 새고 엔진에 진동이 오죠. 저도 옛날에 얼핏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아직 그런 차를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단 얘깁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허탈한 마음으로 차를 몰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만에 하나라지
면 점점 생각은 만에 만으로 꽂혀들어 갑니다. 수리비용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인터넷을 뒤지기 시
작했습니다. 한국 BMW 동호회엔 당연히 그런 전문적인 내용은 없었고 미국 쪽을 찾아봤습니다. △
www.bimmerboard.com △bimmer.roadfly.com/bmw/forums/e38 △www.seattle7s.com 등 미국 쪽에 여러 BMW 동호
회나 게시판이 있더군요. 이때부터 몇날 몇일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이들 사이트에 들어가서 정비사가 말했던
문제를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학창시절에 영어공부를 했을 때보더 더 열심히 영문 독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문제를 총정리한 여러 가지 문서들을 발견해냅니다. 이 문제를 ‘Nikasil Problem’이라고 부르더
군요. 내용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996년 이전에 나온 엔진 중 ‘M60(V8엔진)’과 ‘M52(V6엔진)’ 일부 엔진
의 실린더 벽면에 니켈과 실리콘이 코팅된 니카실 엔진이 있는데 이 코팅이 황성분이 많은 저질 휘발유를 쓸
경우 녹아내리면서 실린더 벽이 손상을 입어 압축압력이 새고 △엔진진동 △출력감소 △엔진오일 과다 소모
등의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엔진이 들어간 모델은 7시리즈(e28 e38)와 5시리즈( e34 e39)입니다.
M60B44엔진이 들어갔다면 해당사항 없습니다.
독일에선 휘발유 품질이 좋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미국 등 여타 국가에 수출된 차량의
경우 저질 휘발유를 쓰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합니다. 수입차 회사들(특히 독일쪽)이 한국 비롯해 독일 이
외의 지역에 모델을 출시하기 전에 미리 해당 국가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유를 하고 테스트를 하거나 휘발유
샘플을 검사하는 이유죠.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런 문제가 나타나면서 이후 엔진들은 실린더와 코팅의 재질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선 4만km만 타도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네요. 그리고 해당되는의 엔진코
드도 있었습니다. 그 엔진코드를 들고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BMW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엔진코드는
차체 바닥에서 언더커버를 제거하고 봐야 합니다.
리프트에 차를 올리고 언더커버를 뜯은 뒤 작업등을 비춰 엔진코드를 찾았습니다. 있더군요. 적어온 숫자는
‘1 725 963 or 1 742 998’ 두 종류. 로또번호를 맞추는 심정으로 앞자리부터 비교한 결과 덜컹 당첨되고
말았습니다. 엔진 블록교환은 1200만 원 정도 들어간다는데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고수입차 구입예정자께 보내는 비망록4-엔진과의 사투>
엔진블럭을 교체해야 할 수도 있고 비용이 1200만 원이나 든다는 말에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들 수밖엔 없
었습니다. BMW에선 리콜은 아니지만 캠페인으로 문제의 엔진블록에 대한 보증수리 기간은 6년 16만km로 연장
을 했다지만 주행거리는 남았지만 이미 출고 9년이 지나서 해당사항이 없었죠.
전 차주가 주행거리가 7만km로 낮은데 시세보다 좀 싸게 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문제가 있었다니...
BMW딜러에서 이전의 정비기록을 살펴보니 엔진의 회전이 거칠고 진동이 있어 점검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아
마 정비비용에 대한 걱정 때문으로 좀 싸게 내놓고 서둘러 매각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습니다. 정비사의 말이
맞는지 일단 엔진을 점검해보기로 했습니다. 압축압력이 새는지, 연소는 정상적으로 되는지, 엔진오일 소모는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죠.
점화플러그 자리에 압력측정기를 꽂고 엔진을 크랭킹시켜 실린더의 압축압력을 재는 테스트부터 시작했습니
다. 두근두근.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2시간여에 걸친 준비와 테스트가 진행된 뒤 결과는 예상외로 이상무. 8
개의 실린더 모두 규정 압력에서 벗어나지 않고 실린더간의 압력도 이상징후를 보이는 불균형이 없다는 결론
입니다. 점화상태도 괜찮다고 하네요. “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테스트를 받는 과정에서 20만~30만 원쯤 들어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엔진오일 소모 테스트인데 이건 일단 주행을 하면서 소모량을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엔진오일을
‘Full’선에 맞춰 넣고 약 한 달간 1500km를 주행했습니다. 일상적인 주행 외에 오일 소모가 많은 고속주행
도 여러 차례 해봤습니다. 호기심에 중간중간 오일 게이지를 뽑아봤지만 거의 변화가 없더군요. 한 달 뒤 센
터에 다시 찾아가 소모량을 체크했지만 오일 소모가 0.5L 정도로 정상범위 이내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도
대체 원인이 뭐란 말입니까” 이렇게 물어보자 정비사도 답답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혹
시 엔진 롤스토퍼(엔진과 차체를 연결시키고 진동도 잡아주는 고무부품으로 현장용어는 엔진 미미. 미미는 일
본어로 귀라는 뜻인데 엔진 옆에 귀처럼 붙어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가 손상된 걸 아닐까 점검을 요구했지만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일단 엔진은 정상이라지만 동일 모델 다른 차에는 없는 소음이 있다는 사실 차체를 용납하기 싫어졌습니다.
왜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한 번 어떤 문제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온통 그 문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약간은 정신병적인 상태. 바로 그 병에 걸려버린 것이죠. 운전을 해도 즐거움 보다
는 거친 엔진회전과 진동 때문에 스트레스만 받더군요. 사실 별생각 안 하고 지나치면 그냥 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 때부터 명의(名醫)를 찾아나서고 좋다는 약은 모두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큰 병원에서 치유가 힘들
다고 하면 온갖 민간요법과 언더그라운드 무면허 의사들을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딱 이 꼴이죠. 엔진 세척부
터 시작했습니다. 연료라인에 연결해서 세척액을 주입하는 방법에서부터 신기의 명약이라는 모 제품까지 처방
을 받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BMW에서 가장 용하다는 기능장 자격증을 갖고 있는 정비사를 찾아 부산에서
서울까지도 가봤지만 역시 원인미상 불치병으로 판단하더군요. “이 정도면 큰 문제 없으니 신경쓰지 말고 타
고 다니라"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점화플러그도 모두 갈아보고... 3개월간 이리저리 시간과 비용은 자꾸
들어갔지만 증상은 전혀 호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 원인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해외 동호회와 정비사이트를 몽땅 뒤지기 시작했죠. 일주일간의
사투 끝에 내 차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그 원인이 나와 있는 글을 여러 건 찾았습니다. 오일 세
퍼레이터(Oil Separator)라는 부품이었습니다. 이 부품은 크랭케이스나 밸브트레인 쪽의 가스를 빼주는 역할
인데 가스는 엔진오일과 섞여 나오기 때문에 이를 분리시켜 오일은 엔진오일 팬으로 보내고 가스는 재순환시
키는 것이죠. 골치 아픈 차 하나 생기면 정말 자동차는 물론 어학까지 공부를 많이 하게 됩니다. ^^ 아래 사
진 3장은 오일 세퍼레이터 부품들입니다.
다시 BMW센터를 찾아가 본 내용대로 여러 가지 요구를 합니다. 오일 세퍼레이터의 교환과 점화코일 점검 후
교환, 로커암 커버에서 엔진오일이 조금씩 흐르는 것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었죠. BMW 엔진들은 웬만하면 커버
에서 오일이 약간씩 비칩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모든 부품이 준비됐으니 정비를 받으러 오라는 것입니다.
정비는 약 4,5시간 걸린다고 하네요. 정말 이번엔 해결할 수 있을까. 출근길에 차를 맡기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오후 7시쯤 택시를 잡아타고 센터로 향했습니다.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하며 마음이 복
잡합니다.
센터에 도착하자 내 차가 덩그러니 주차장에 놓여있습니다. 세차도 깨끗이 해놨네요. 모든 BMW서비스센터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가던 곳은 정비로 차가 더러워지면 세차를 해줬습니다. “정비는 끝났습니까” 어드
바이저에게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입니다. “차 상태는요” 까다로운 고객에게 약간씩 지쳐가는 어드바이저는
두려운 듯 “일단 사장님(내가 그렇게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고객님이라고 해라고 요구해도 시정되지 않
음) 요구대로 모두 해놨습니다. 일단 타보세요.”
키를 받아들고 차로 달려가 앉았습니다. 처음 차를 사서 운전석에 앉았을 때보다 더 떨립니다. 심장은 콩딱
콩딱. 시동을 바로 못 걸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기도도 했나봅니다. 제발 부드러운 엔진으로 환생하기를....
한 1분 정도 차에 그렇게 앉아 있은 뒤 조심스럽게 키를 꽂고 경건하게 시동을 겁니다. 제발~~하는 작은 외침
과 함께 키를 돌리자.... 부르릉 시동이 걸리는데...
5편에서 계속...
“부르릉~~”
시동이 걸리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일단 시동이 걸리는 순간엔 엔진의 진동이 이전보다 약간 개선
된 듯한 기분이어서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기뻐하기에는 이릅니다. 공회전으로 RPM을 올렸을
때 매끄러운 회전과 진동 줄어들었느냐가 수리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키포인트. 가속페달을 밟기가 두려웠
습니다.
새색시가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넘듯 살포시 가속페달을 밟아 RPM을 서서히 올렸습니다. ‘오~~옹~~우~~우웅
’ 엔진회전음은 점점 올라가고...3500RPM쯤 됐을까요.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에서 발이 떨어졌습니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이럴 리가... 이전과 전혀 변화가 없어보였습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사실을 인정하기 싫
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다시 한 번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습니다. 그랬더니 여전히 거친 회전과 드르륵 하는
잔진동이 차체와 시트를 통해 피부로 전달됩니다. 그 절망감이란...
기대했던 만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립니다. 한 30초 정도 멍하니 앉아 있었나봅니다. 이젠 할 만큼 했
고 정비사들도 ‘정상이다’ ‘타는데 지장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라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수리비를 계산하면서 “괜찮냐”고 묻는 어드바이저의 질문에 그냥 건성으로 “예”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들도 해줄 게 없고, 나도 더 요구할 게 없으니 그냥 타는 수밖에.
‘이제부턴 차의 수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 수양이 필요한 시기다.’ 스스로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차의 모든 기능이 정상인데 단지 엔진 회전과 사소한 진동 때문에 BMW가 주는 매력들을 놓쳐버리는 꼴이니까
요. 처음엔 마인드컨트롤이 잘 먹히지 않았습니다. 자꾸 엔진에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래서 다른 문제부터 해
결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리미트를 풀자...
1편에서 설명했듯이 BMW는 기본적으로 시속 250km에 리미트가 걸려있는데 일본버전이라 210km로 낮게 잡힌
것을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평소 알고지내던 유명 ECU 튜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사정이 이러저러한데 가능
한지. 가능할 것 같은데 일단 차는 봐야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튜너의 사업장이 있는 용인으로 갔습니다.
다이나모 기계를 물려서 출력을 측정했더니 227마력이 나옵니다. 제원상 280마력이고 자동변속기이니 약 20%
의 로스는 큰 문제는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역시 엔진엔 문제가 없군요.
이틀에 걸쳐 ECU의 데이터 수정작업을 했고 차를 찾아왔습니다. 자.. 드디어 내 차도 시속 250km 클럽에 가
입하는 건가. 서서히 속도를 높여봅니다. 200까지는 순식간에 올라갑니다. 곧이어 210.. 울컥이며 속도가 줄
었던 리미트는 사라지고 속도계 바늘은 계속 돌아갑니다. 220..,230..240..250..260 그동안 엔진 때문에 시
달렸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갑니다. GPS로는 256까지 찍혔습니다.
물론 앞으로 이런 속도로 다닐 것도 아니지만 생각보다 낮게 걸린 리미트는 항상 뭔가 억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지 않았거든요. 5000만원 연봉 회사원에게 ‘당신은 2억 원 이상 연봉을 받을 수 없도록 주문이 걸렸어’라고 말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자기 평생 2억 원의 연봉을 받지 못하는 회사원이 99%지만 뭔가 인생에 큰 걸림돌이 생겼다는 압박감 때문에
남은 생이 편안하진 못할 겁니다. 바로 그런 기분이 해소된 셈이죠.
이후엔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중간에 절친한 친구가 나를 따라 V12 750Li를 구입했는데(이 차에 대한 기막
힌 스토리는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그 부드러운 12기통 엔진의 회전질감을 보고선 내 차의 엔진이 저주스럽기
도 했지만 그래도 애정을 쏟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비사가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지만
구입한 지 6개월이 지났고 주행거리가 8만km를 넘긴 것을 기념해 차에 이것저것 해주고 싶었습니다. 자동차환
자들은 한동안 차에 뭔가 해주지 않으면 불안해지거든요. 오일도 갈고 벨트류도 점검해보고 엔진마운트(롤스
토퍼-제일 윗 사진)도 교환해주고자 센터를 찾았습니다.
부품을 주문하고 일주일 뒤 다시 센터에 가서 차를 맡기고 2시간쯤 걸린다는 이야기에 그냥 기다리기로 했습
니다. 그동안 친해진 어드바이저와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신문도 보고 인터넷도 서핑하며 시간을 보내며 정비
가 끝나길 기다렸죠. 2시간을 조금 넘겨서 모든 작업이 끝났습니다. 엔진마운트 교체에 약 50만 원 정도가 들
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출고된 차에 앉아 아무런 생각없이 시동을 걸었습니다. 뭐 좀
부드럽게 시동이 걸리는군... 이런 생각을 하며 서서히 가속페달을 밟아 RPM을 높이며 센터를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엔진의 회전질감과 진동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차를 세우고 기어를 파
킹으로 넣은 뒤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아 RPM을 높였는데...
‘우웅~~아앙~~’
벌떡벌떡 심장의 박동이 하얀 와이셔츠 밖으로도 보일 정도로 뛰는 가운데 오른발은 과감하게 가속페달을
지긋이 밟아나가고 있었습니다. BMW 740i의 V8 4.0L 엔진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2000...3000...4000...5000...6000...6500RPM
‘사라졌다!’ 헤비급 권투선수의 주먹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차를 인수해온 뒤 그렇
게도 괴롭혔던 엔진의 거친 회전질감과 진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간 심한 다크서클이 드리운
채로 머리를 산발을 하고 여기저기를 헤매는 어느 영화 속의 광인처럼 엔진의 컨디션 회복을 위해 부산 서울
용인 일산 등 거리를 마다않고 쫓아다녔던 행적들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겨우 엔진 마운트(롤스토퍼) 하나 때문에 생긴 현상인데, 처음부터 그 놈을 의심을 했지만 정비사들이 외견
상 이상없다는 소견에 어려운 길을 빙빙 둘러왔다니. 허탈한 웃음만 나옵니다. BMW엔 실력 있는 정비사들이
많지만 모든 문제를 쪽집게처럼 잡아내진 못합니다. 물론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겠죠. 무상보증수리기간이
남아있는 차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부품을 이것저것 계속 갈아나간다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정비비용이
사치에 가까운 수입차의 경우 완벽한 정비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입차중고차는 새 차를 구입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 비용절감 차원에서 구입한 것이라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빠듯한 예산에 능력을 넘어서서 보증수리 기간이 지난 수입중고차(특히 럭셔리브랜드)
를 샀다가 큰코 다칠 수도 있다는 뜻이죠. 어렵게 2500만 원을 모아서 쏘나타를 살 것이냐 아니면 5년 지난
BMW 5시리즈 등 중형 중고수입차를 살 것이냐를 고민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물론 괜찮은 차가 당첨되면
몇 년은 큰 문제 없이 버티겠지만 혹시라도 뭔가 잘못되면 1000만 원 나가는 것은 간단합니다. 아니면 오너
스스로가 차에 대해 대단히 해박하면서 수입차를 싸게 잘 정비하는 카센터를 알고 있다면 사정은 훨씬 나아지
겠죠. 차도 잘 모르고 친하면서 실력있는 카센터도 잘 모르고 예산도 겨우 맞춘 상태라면 말리고 싶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허무함은 잠시, 곧 환희가 발가락부터 꼼지락 꼼지락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
져나가 거의 오르가즘 상태에 이릅니다. 고생했던 만큼 쾌감도 큰 것이죠.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차는 어느
새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합니다.
그래 이제 마음껏 BMW를 느껴보는 거야. V8아 마음껏 울부짖어다오. 미치광이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며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눌러 후륜에 280마력을 실어보냅니다. 전에는 우웅~~드르륵 가가각 하고 올라가던 RPM이 휘
이잉~~ 하는 매끄러운 회전으로 6700RPM을 점령합니다. 모튤 300V 크로노 엔진오일도 오랜만에 신나게 엔진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며 제 성능을 내줍니다.
아마 새 차를 산 것보다 더 기뻤던 것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한 부모의 기분이 이럴까요. BMW의 핸
들링도 마음껏 느껴보고, 고속주행의 안정감, 전륜구동에선 느낄 수 없는 코너를 파고드는 다이내믹.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타이어가 녹아버릴 정도로 열심히 며칠 간을 쏘다녔습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 BMW다.
그렇게 BMW와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몇 주가 흘렀을까요. 스트레스가 많았던 날이면 집까지 가는 지름길
을 놔두고 속도를 낼 수 있는 먼 길로 빙빙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날도 고속화도로를 지나 집 쪽으로 빠지는
램프에서 타이어 슬립음을 내며 타이트 하게 빠져나오는데 스티어링휠과 차체에 부르르 진동이 옵니다. 헉!!
이건 뭐지. 분명히 엔진의 진동은 아니고 하체로부터 올라오는 게 확실합니다. 처음엔 시속 70~90km로 돌아나
가는 커브길에서 조금씩 느껴지던 진동은 점차 직진에서도 감지가 되고 그 진폭은 야금야금 커져만 갑니다.
아!!! 다시 고난의 시작인가. 주여 내게 또 시련을 내리시렵니까. 부르르르....(7편으로 이어집니다.)
‘부르르르...’
엔진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뒤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모터라이프를 즐기던 중 갑자기 찾아온 차체
의 진동. 차만 떨리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도 부르르 떨립니다. 도대체 이 놈의 차는 주인에게 또 얼마나 내
놓으라고 요구할지. BMW가 ‘Break My wallet’의 약자라더니 정말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큰 걱정은 안했습니다. 시속 70~90km 사이에서만 진동이 발생하는 것으로 봐서 경험상 휠밸런스가
틀어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좀 수상하긴 했습니다. 휠이나 타이어에 충격을 받은 적이 없는데 갑자
기 밸런스가 틀어지다니... 뭐 생각할 것 있나요. 단골 카센터에 찾아가 휠을 빼서 밸런스를 체크했습니다.
양쪽 다 15g 정도 틀어졌더군요. 밸런스 납덩이를 붙이면 당연히 해결되는 문제라고 확신했습니다. 밸러스를
0g으로 맞추고 다시 몰고 나와서 시속 70km를 넘어서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부르르르...
스트레스 수치가 팍 치솟습니다. 또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저녁 약속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둥
마는둥 정신은 딴 곳에 가있으니. 다음날 출근하면서 BMW 센터에 들어갔습니다.(직장인이 이래도 도는 건가요
. 차에 문제가 있으면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손실, 피폐해지는 정신, 업무능력 저하로 사회적 손실까지 발생한
답니다. 자동차회사들 정말 차를 잘 만드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센터 사람들은 내가 들어오면 살짝 걱정스런
눈치로 봅니다. 무슨 까다로운 요구를 할까. 그 덕분에 정비사들과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차에 대해 고민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이죠. 아무래도 친해지다보면 좀 더 세심하게 차를 살펴봐주고 비용
도 줄여줄려고 노력합니다만, 그것보단 친해지지 않더라도 차에 고장이 덜 발생해 센터에 들어가지 않는 쪽이
훨씬 정신건강과 가정경제에 좋습니다. 어드바이저나 정비사와의 친분 정도는 바로 얼마나 센터에 돈을 바쳤
느냐를 나타내주는 지수라고나 할까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차를 리프트에 올리고 정비반 책임자에게 증상을 설명했더니 3분 만에 답이 나왔습니
다. 트렉션 스트럿의 고무 부싱에 미세하게 균열이 있다는 것이죠. 직접 작업등을 비춰가며 설명을 해주는데
눈으로 봐선 거의 이상이 없어보였습니다. 아마 엔진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 너무 신나가 밟고 다녀서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보통 국산차 같으면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균열 정도는 아무런 이상을 발생시키지 않습니
다. 본래 약간 헐렁하게 유격을 허용하는 편이어서 조금 더 유격이 생긴다고 해서 바로 증상이 생기지 않죠.
그런데 BMW는 날카로운 핸들링과 고속안정성을 위해 서스펜션의 각 부분이 타이트하게 조여져 있어서 약간
의 이상이 생기거나 세팅이 틀어지면 금방 돈달라는 소리를 냅니다. 예쁘지만 까탈스러운 여자 같다고나 할까
요. 화끈한 밤을 보내는데 대한 댓가가 상당합니다. 조금만 관리를 안 해주면 앙탈을 부리죠.
문제의 트렉션 스트럿은 전륜에서 가장 힘을 많이 받는 부품입니다. E38 740i의 경우 다른 서스펜션 부품은
알루미늄으로 재질인데 이 녀석은 두꺼운 주철로 돼 있습니다. 알미늄은 서스펜션 작동부분의 질량을 줄여서
노면추종성고 승차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죠. 그런데 트렉션 스트럿은 횡력을 많이 받는 부품이라 안전을 위해
주철로 만들었습니다. 요즘 BMW는 이 부품마저도 알루미늄으로 대체했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은 못해봤습니다.
트렉션 스트럿의 교환 가격은 한쪽에 약 25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쪽 끝은 볼조인트이고 반대
쪽 끝은 부싱인데 볼조인트가 나갔다면 전체를 교환해야 하지만 부싱은 따로 판매를 해서 그것만 교환이 가능
합니다. 그런데 보통 센터에서는 전체를 교환합니다. 나는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미국 부품 사이트에서
좌우 2개 한 세트로 5만 원에 수입해둔 부싱(아래 사진)이 있어서 센터에 부품을 가져다주고 부싱만 교환을
했습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리지만 부싱만 따로 센터에서 교환도 가능합니다.
어쨌든 50만 원 정도가 필요한 수리를 공임을 포함해 10만 원에 마무리한 셈이죠. 그런데 이렇게 외부 부품
을 가져와서 공임만 주고 수리를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워낙 친분이 두터워서 가능했던 것이니
혹시 여러분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좌우 트렉션 스트럿 부싱을 교환했더니 거짓말처럼 차체진동이 싹 사라졌습니다. 기분인지 핸들링이 약간
향상된 듯하더군요. 정말 3분만에 원인을 찾아낸 정비사에게 고마움이 느껴지더군요. 사실 엔진진동을 잡아내
지 못해 그렇게 고생을 시킨 정비사들의 실력에 적잖이 실망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여튼 그렇게 차체 진동
은 싸고도 어렵지 않게 해결하고 다시 즐거운 카라이프를 연장해나가고 있던 중 여름이 왔습니다. 당연히 에
어컨을 틀어야 하는 계절. 그런데 생각보다 BMW의 에어컨은 시원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죠. 역시
독일 사람들은 달라. 너무 시원하면 냉방병에 걸릴까봐 적당히 냉방을 해주는군...이라고. 현대차가 하면 불
륜 BMW가 하면 로맨스인가요. 사실 과거 현대차는 대우차에 비해 에어컨이 약해서 불만들이 좀 있었죠. 지금
은 해결된 문제지만.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을 옆자리에 태웠는데 버럭 짜증을 내는 겁니다. “아니 왜 차 안이 이렇게 더운거야.
BMW가 왜이래.” 엇 내 BMW를 폄하하다니. 이런 나쁜X 같으니라고. 독일 사람들은 어쩌고저쩌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읊으며 무식하다고 쫓아보냈습니다. 기름값도 안 대주면서 다신 내 차 타지 말라고. 사실 그래
도 좀 덥긴 하더군요. 정말 에어컨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도 다시 들기 시작했고요. 에어컨을 중간정
도로 작동시켜도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하지만 에어컨 송풍구에선 찬바람이 쌩쌩 잘 나오는데 차 안은
전체적으로 덥다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에어컨 개스를 새로 주입하고 송풍구 온도도 측정했지만 정상이라는
판정입니다. 그래 내가 예민한거야. 맞아. 괜히 멀쩡한 놈 바보만들지 말자. 이렇게 스스로 주문을 걸었지만
역시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기온이 30도가 넘어가고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곳을 다닐 땐 에어컨을 강하게
작동시키지 않으면 때로는 차 안이 불타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대시보드 위에 올려놨던 메모지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윈드실드(앞유리) 밑까지 밀려가서
그걸 잡으려고 허리를 일으켜 세워 손을 뻗었는데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앗 뜨거... 헉 이
게 뭐야... 그건 바로...
앗 뜨거... 유리 바로 아래 에어벤트로 아주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30도가 넘는 여
름 한 낮에 뜨거운 바람까지 나왔으니 대시보드가 얼마나 후끈 달궈졌겠습니까.
분명히 에어컨을 강하게 작동시킨 상태인데도 유리 아래서는 뜨거운 바람이 쏟아져 나와 차 실내 윗부분의
온도를 올리니 머리부분이 독감에 걸린 것처럼 후끈거릴 수밖엔... 에어컨을 오토모드에 놓으면 알아서 풍향
을 자동조절하면서 열풍을 위쪽으로 토해놓으니 가슴 아래는 분명히 시원한데 머리와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이죠. 임시처방으로로 풍향을 수동조절해서 바람 방향을 가슴과 발아래로 향하게 하면 윈드실드 에어
벤트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이 줄어서 이전보단 훨씬 시원해집니다.
업무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며칠을 그렇게 다녔습니다. 머리 한쪽 구석에 ‘에어컨 관련 고장이면
대시보드를 몽땅 들어내야 하는데... 제법 큰 작업일 텐데 도대체 비용은 얼마나 나오려나. 거기다가 블로워
모터나 덩치큰 부품이 들어가면... 기백만 원.’ 골치가 아파옵니다. 풍향을 조절하면 이마가 뻘개지지 않고
그럭저럭 다닐만한데 그냥 고치지 말까...하는 고민도 했지만 어디 한 군데 차가 비정상적인 것을 참고 넘기
지 못하는 성격이라 일주일을 만에 단골 BMW 서비스센터로 들어갔습니다.
어드바이저가 반갑게 맞아주네요. “어서오세요 사장...아니 기자님.” 난 속으로 그랬죠. “난 하나도 안
반갑네 이 친구야...” 세상에는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정비사를 만나지 않고 사는 일생도 어쩌면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단 증상을 설명하니 센터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정비담당 부장을 모셔옵
니다. 언제부턴가 내 차는 부장 전담이 됐습니다. 그 부장으로부터 BMW에 대해 많이 배웠고 여러가지 편의를
봐준 인연으로 지금도 한 번씩 전화통화를 하곤 합니다. 연배는 나보다 높지만 그냥 친구가 된 게죠.
이번엔 진단이 1분 만에 내려집니다. 내 설명을 듣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럽니다. “히터밸브가 문제일
겁니다.” 그 밸브는 냉각수가 실내 히터코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라고 합니다. 즉, 뜨거워진 냉
각수가 대시보드 안에 있는 라디에이터처럼 생긴 장치를 통과할 때 팬이 바람을 불어주면 더운 바람이 나오면
서 난방이 됩니다. 그런데 히터밸브는 에어컨을 작동시킬 때 냉각수의 실내 유입을 차단해 에어컨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죠. 이런 밸브가 없는 차는 공조기 판으로 바람의 경로를 바꿔서 에어컨에만 송풍이 되도록 해서
냉방을 하는데 아무래도 히터코어가 계속 달궈져 있으면 열이 에어컨 송풍구 쪽으로도 전달되기 때문에 냉각
효율은 조금 떨어지게 마련이죠. 현대차는 이 밸브가 없었는데 최근 나온 차는 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왼쪽 사진의 워터밸브는 주먹만한 크기인데 대충 보기에도 고급 부품은 아닙니다. 그런데 교환가격은 50만 원
입니다. 이제 50만 원쯤은 5만 원 정도로 느껴집니다. 수입차의 고장수리를 진행하다보면 돈의 가치에 대한
혼란이 옵니다. 다행히 작업은 30분 정도면 된다네요. 대시보드를 몽땅 뜯어내는 터프한 작업은 필요 없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부품은 엔진룸 안쪽에 쉽게 접근 가능한 곳에 있더군요. 국내에 부품 재고가 있어 이틀
뒤 다시 찾아가 교환을 했습니다.
아.. 그랬더니 어찌 그리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지. 전에는 송풍을 5단을 놨다면 이젠 2단만 놔도 섭씨 30도
의 기온에 버틸 수 있습니다. 수리를 한 뒤 곧바로 차 안이 덥다며 BMW를 욕했던 지인을 찾아갑니다. 일단 차
에 태우고 근처를 돌면서 급하지도 않은 업무상 얘기를 했죠. 그리곤 슬며서 공조기를 가장 시원하게 맞췄습
니다. 그랬더니 추우니까 온도를 좀 올리자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에는 덥다고 투덜대더니 이젠 또 춥대
. 남자가 말야 너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 아냐”라고 한방을 날렸줬습니다.
또 그렇게 행복한 카라이프는 다시 시작되는 듯했습니다. 더 이상은 고장날 곳이 없으리라는 기대감에 차는
더욱 이뻐보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니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있나. 어느 날 신나게 달리고 있
던 중 액정이 깨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 계기반 메시지창에 이상한 경고문가 좌악 뜨면서 차가 갑자기 울컥울
컥 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도로 중간에 차가 거의 서버리는데...
덜커덩 덜커덩... 덜덜덜....
정말 신나게 잘 달려주던 BMW 740i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시속 80km로 달리던 중 갑자기 속도
가 줄어들며 가속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오르지 않고 시속 30km정도로 떨어집니다. 계속 가속페달을 밟자 차는
거의 정지할 정도로 속도까지 줄어드네요. 곧이어 BMW 고유의 ‘땡’하는 경고음이 한 차례 들리더니 계기반
메시지 보드에는 ‘failure...’라고 뜨는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과 거의 비슷한 상황입니다. 픽셀이 깨져서
정확히 알파벳이 보이지 않았죠. 아.. 답답해. 결국 계기반도 고쳐야겠군.
어쨌든 거친 엔진소리를 내며 거의 멈추다시피한 차를 길 옆으로 세웁니다. 다른 방법이 있나요. 일단 시동
을 껐다가 다시 켜봅니다. 그런데 웬걸. 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가슴을 쓸어내
려봅니다. 뭐 생각할 것도 없죠. 다음 단계는 서비스센터죠. 가는 도중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
젓습니다. 도대체 또 무슨 문제인가. 일단 시동을 껐다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엔진의 기계적인 문제는 아닙
니다. 기계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시동을 껐다켰다고 정상으로 돌아오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기적인 오류일
가능성이 높고 그 원인은 센서나 배선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데 결론을 내립니다.
센터에서 진단기를 물려본 결과 몇몇 fault 코드가 뜨기는 하는데 바로 잡아내진 못합니다. 차를 놔두고 가
면 테스트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일단 차는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집으로 몰고 돌아와 며칠동안 아무 문제없이
다녔습니다. 곧 증상이 나타났지만 시동을 껐다 켜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계속 그런 상태를 반복
하다 역시 미국 동호회 검색을 통해 트로틀 포지션 센서(TPS) 이상일 수 있다는 글을 여러 개 발견합니다.
TPS는 구형 모델이라 2개가 있습니다. 1개는 스로틀 보디의 개도각도를 센싱하는 것이고 다른 1개는 트랙션
컨트롤시스템(TCS)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구형 TCS는 요즘처럼 전자식 스로틀밸브를 닫아서 출력을 줄이는 것
이 아니라 드로틀 밸브 앞에 또 하나 달린 밸브를 여닫아서 출력을 조절하는 방식입니다. 동호회에 올라온 증
상이 제 차와 거의 비슷했기에 센터에 부품을 주문을 해버렸습니다. 가격은 개당 10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
합니다. 다행히 예상은 적중해서 TPS를 교체한 뒤로는 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TPS를 분해한 모습 브러시가 많이 우그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왼쪽 사진은 TPS를 두쪽으로 분해한 모습. 오른쪽은 합체한 상태
그런데 문제의 진단은 여기서 그칠 수는 없죠. 위 사진처럼 차에서 떼어낸 TPS를 분해해봤습니다. 센서의
길이는 엄지손가락 정도입니다. 아니 그런데 사진처럼 브러시가 망가져 있는 겁니다. 저 브러시가 카아본 전
극판과 맞닿으면서 변하는 저항값에 따라 전류의 흐름은 달라지고 그 신호로 드로틀 밸브의 열림 정도를 ECU
가 판단하는 거죠. 그런데 브러시가 저 모양이니 값이 들쭉날쭉했을 것이고, 순간적으로 전류값이 널뛰면 이
상신호로 판단하고 차의 출력을 스스로 줄여버리는 로직이 작동한 것입니다. 사소한 부품 하나에 차가 완전히
바보가 되더군요. 물론 저 부품은 보쉬가 만들었습니다. 보쉬가 좋은 부품들을 많이 개발하고 자동차의 성능
과 기술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나 때로는 내구성이 형편없는 물건들을 만들어내서 사용자들을 골
탕먹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나중나중에 다시 나옵니다. 그래서 보쉬의 기술력은 높이 평가하지만 내구력은 신
뢰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
뭐 이젠 이 정도의 수리는 무덤덤합니다. 웬만한 고장은 큰 수고를 하지 않고도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고장과 수리의 반복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시간과 돈의 낭비겠지만, 자동차 쪽으
로 뭔가를 꿈꾸는 입장에선 모두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막상 그런 생각을 하고 차를 대하니 이
놈이 좀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올 테면 와봐라... 하는 마음에 740i가 겁을 먹어버린 걸까요. 그렇
게 몇 개월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고장도 이상증상도 보이지 않아 룰루랄라 기쁜 마음으로 지내던 중 대구에 있는 친척집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어른들을 모시고 어딘가 방문을 해야 했죠. 아무리 중고차라도 큰 덩치의 BMW를 몰고 가면 건방
지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탈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그냥 운전을 하
고 대구로 향합니다. 대구에 고급휘발유 주유소를 찾기 힘들지도 모르니 가기 전에 옥탄가 99라고 자랑하던
모 정유사의 고급휘발유를 가득 채워둡니다. 인수 이후부터 혹시라도 탈이 날까 항상 고급휘발유를 먹여줬습
니다. 특히 황 성분에 의해 엔진의 실린더 벽이 손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거의 병적으로 고급휘발
유만 찾아다녔습니다.
어쨌든 대구에서 도착해 어른들을 차에 모셨습니다. “아니 웬 BMW냐. 누구 차냐. 혹시 산 건 아니겠지”
이런 걱정들을 쏟아내십니다. 중고로 샀고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 걱정마시라고 안심을 시켰지만 영 못 믿
겠다는 얼굴들이십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싸게 샀다지만 고장이 나면 어쩔거냐. 유지비가 보통이
아닐텐데 무리하는 것 아니냐. 차가 커서 기름값도 많이 먹을 텐데 걱정이다...” 잔소리를 늘어놓으십니다.
물론 모두 맞는 말씀이죠.
“아니에요. 독일차는 본래 내구성이 좋아서 고장날 걱정이 별로 없어요.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어요.(속
으론 뜨끔) 자주 안타고 다니니 걱정마세요....” 이렇게 둘러대며 한 10km를 달렸을까요. 갑자기 차에서 힘
이 좌악 빠집니다. 마치 너무 심하게 운동을 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느낌이랄까요. 속도가 부드럽게 쓰윽
줄더니 가속페달을 밟아도 엔진에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런 X됐다. 달리다 그냥 시동이 꺼져버린 거죠.
일단 남아있는 탄력으로 길 옆에 차를 세우고 다시 시동키를 돌려봅니다. 키리릭 키리릭... 시동모터는 열심
히 돌아줍니다. 배터리나 발전기에는 이상이 없다는 얘깁니다.
아무런 고장도 없다고 말하자마자 멈춰버린 차...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어른들의 얼굴...'고장
안난다며'라고 말씀하시고 싶지만 참아주시는 듯 꾹 다물고 계신 입.... 잠시 침묵은 흐르고...아.. 세상에
이런... 황당함이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습니다. 기름도 많고 배터리도 정상인데 왜 이럴까
. 무슨 퓨즈가 나갔나... 10여초간 정말 많은 생각이 뇌신경을 타고 뱅뱅 돌아다닙니다. 순간 갑자기 뭔가 번
쩍하는데... (10편으로 이어집니다.)
애증의 BMW 740i. 이미 떠나간 지 오래됐지만 증오보단 애정이 더 크게 남았다.
머리 속에 번쩍하며 떠오른 생각은 일주일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2004년 당시 부산엔 고급휘발유 주유소가
많지 않았지만 BMW 740i에는 고집스럽게 고급휘발유를 먹여줬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최고급 분유를 먹이고픈
엄마의 마음이랄까요. 더군다나 740i의 V8엔진 실린더에 코팅된 Nikasil은 황이 많이 포함된 가솔린을 넣을
경우 녹아버릴 우려가 있어서 고도로 정제되고 황성분이 일반유보다 적다는 고급휘발유에 대한 집착을 일으켰
죠.
그래서 LPG차량 운전자가 가스충전소 지도를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고급휘발유 주유소의 위치를 적은 메모
지를 차 안에 넣고 다녔습니다. 고급휘발유 주유하겠다며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갈 때도 있고 연료량이 간당간
당 아슬아슬한데도 일반유를 넣지 않고 끝까지 고급유 주유소까지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던 게죠. 연료경고등이 들어온 상태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보니 연료 속에 잠겨서 식혀져
야 할 연료펌프(아래 사진)가 자주 열을 받아 부품이 빨리 열화가 됐을 것이고, 또 바닥에 깔려 있는 찌꺼기
들을 많이 빨아들여서 회전부에 끼인데다 압력이 증가하면서 부하가 더 걸렸겠죠. 결정적으로 일주일 전에 기
름이 거의 떨어진 상태에서 고급유 주유소를 찾아가다가 약 1km를 앞두고 기름이 바닥나서 차가 서버렸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며 유턴차선에 대기 중이었는데 엔진 회전이 불규칙적이더니 회전이 비실비실해지며 RPM이 떨어
지고 곧이어 푸드득 시동이 꺼져버리는 겁니다. 여러차례 시동키를 돌려봤지만 엔진은 묵묵부답. 신호가 바뀌
어서 뒷 차들은 빵빵거리지...시동은 안걸리지...황당함에 땀은 삐질삐질 등줄기로 흘러내리고. 내려서 뒷 차
들을 수신호로 보낸 뒤 힘껏 차를 흔들어봤습니다. 기름이 떨어졌을 경우 간혹 차를 흔들어 기름을 흡입구쪽
으로 보내면 몇Km 정도는 더 갈 수 있는 경우도 있거든요. 하지만 역시 시동은 안 걸립니다.
BMW 7시리즈 길에서 한 번 밀어보셨나요? 그게 보통 힘들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신호가 바뀐 틈을 타
운전대를 돌리며 A필라를 잡고 밀었는데 왜 이렇게 차는 무거운 건지. 보니까 살짝 오르막이더군요. 차는 도
로 중간쯤까지 밖에 가지 못했는데 신호는 바뀌고 차는 몰려와서 상향등을 번쩍거리지.. 이런 낭패가. 쩔쩔매
는 모습을 봤던지 선량한 시민이 한 분 홀연히 나타나 같이 밀어주더군요. 그래서 겨우 차를 노견 쪽으로 붙
일 수 있었습니다. 운전자들은 웃으면서 차창 밖으로 흘끗 보고 지나가더군요. 아마 ‘BMW도 별 수 없네...’
이런 미소였겠죠.
일단 비상등을 켜놓고 주유소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주유소는 보통 20리터짜리 기름
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통에 10리터 정도 휘발유를 샀습니다. 10리터면 휘발유의 비중을 감안할 때 7Kg 정
도라 별로 안무거울 줄 알았는데 들고 1km를 걷자니 팔이 빠져옵니다. 주유소 직원이 5리터만 가져가라고 할
때 말을 들을 걸 그랬습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다 잡히더군요. 어쨌든 그렇게 기름을 가져와서 넣는데 행인들
이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아마 가짜 휘발유 넣는다고 오해하는 듯. 능력 안 되면 버스 타고 다니지 왜
BMW에 가짜 휘발유나 넣냐고...이런 생각들이겠지요. 기름이 떨어졌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누가 물
어봤어요 라는 반응이 돌아올까봐 서둘러 기름을 넣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기름은 왜 그렇게
잘 안들어가냐고요. 주유구 입구를 막고 있는 500원짜리 만한 밸브같은 게 있는데, 주유기는 그 밸브를 밀고
들어가서 주유를 하지만 기름통에 달린 꼭지의 직경은 굵어서 그 밸브에 닿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한 손으론
볼펜으로 그 밸브를 열로 다른 한손으론 기름통을 잡고 넣는데 힘들어서 팔이 부들부들 떨리네요. 이 굴욕이
란...
그런데 안 그래도 연료펌프 모터가 잦은 ‘헝그리’ 주행으로 노화가 돼 있는데다 연료가 바닥났을 때 시동
을 걸면서 큰 데미지를 입은 게지요. 연료가 없는데 시동을 걸면 모터에 부하가 전혀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고
회전을 하게 되면서 손상을 입기 쉽습니다. 결국 일주일 뒤 주행 중 연료펌프가 고장나면서 아예 차를 서버리
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죠.
이유없이 시동이 꺼져버릴 때는 주로 전기나 연료계통쪽에 문제가 있습니다. 발전기가 고장났거나 배터리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는 시동모터가 힘차게 돌지 못하거나 아예 딸깍딸깍 소리만 내며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때 헤드라이트를 켜보면 점등이 되지 않거나 희미하게 제 밝기는 내주지 못합니다. 나중엔 라디오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전압이 떨어져버립니다. 시동모터가 힘차게 돌아가고 전조등도 환하게 들어온다면 일단 배터리
충전용량은 충분하다고 보고, 시동유지와 관련된 퓨즈가 나갔거나 연료펌프쪽 문제로 봐야 합니다. 연료부족
이라면 주유경고등이 들어온 상태일 겁니다. 연료펌프가 나갈 때는 시동이 꺼질 때 엔진이 푸득푸득거리며
RPM이 떨어진 뒤 조금 있다가 시동이 꺼집니다. 연료도 많은 상태라면 퓨즈 문제일 가능성이 높죠. 연료펌프
나 ECU 퓨즈가 나가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보충용 퓨즈가 있으면 그걸로 교체하면 됩니다. 끊어진 퓨즈를 바꿀
때는 같은 전류값이 써진 놈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평소에 퓨즈박스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긴급상황
에선 도움이 됩니다.
다시 대구에서 차가 멈춘 상황으로 돌아와서... 차에 모시고 가던 어른들을 택시에 태워 보내드리고 전화로
대구지역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연료펌프 재고가 있다네요. 재고를 확보해고 있는 센터가
고맙긴 하지만 그만큼 자주 나가는 부품이라는 뜻도 되겠죠.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 차를 실어서 보낸 뒤
어른들을 뒤따라 목적지로 갔습니다. 일을 보는 동안 머릿속에선 '내 예상대로 연료펌프여야 하는데... 다른
고장이면 안되는데...' 이런 불안한 생각 때문에 좌불안석입니다. 만약 다른 문제로 며칠 묵혀둬야 한다면 부
산까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내려갔다가 나중에 다시 또 올라와야 하는 귀찮니즘이...
그래서 한 두 시간쯤 있다가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빙고... 다행히 연료펌프가 맞고 힘차게 시동이 걸린다
고 합니다. 비싸도 좋으니 오늘 고쳐지기만 해라던 마음에 연료펌프 교환비용 56만 원은 아깝지도 않다는 생
각입니다. 물론 카드로 결제했고 한 달 뒤 대금을 지급할 땐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죠. 내 지갑은 BMW 센터 소
유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물론 이번에 내 실수로 고장이 나긴 했지만요.
고장과 관련된 이야기만 계속하면 지겨울 것 같아서 다음 편엔 BMW를 운행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와 BMW의 가
치 등에 대해 올려보겠습니다. 그럼 11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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