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5-18
갈릴리에서 뵈오리라 / 백구영 목사
막 16: 7-8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한 유태계 미국 여자가 "복수, 희망의 스토리" 라는 책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는 신문을 읽었습니다.
로라 블루멘 펜트는 1986년 아버지와 함께 모국을 방문했다가 팔레스타인 테러범이 쏜 총에 아버지가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목숨은 구했으나 불구가 된 아버지를 볼 때마다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히브리어와 아랍어에 능통한 그는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로 들어갔고 스스로 자원하여 이스라엘 근무를 하면서 수소문하여 테러범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자는 12년 만에 테러범이 25년형을 받고 수감중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테러범과 그 가족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렵게 사는 모습과 테러범으로 믿어지지 않는 순박한 모습을 대하면서 차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국, "복수는 동물적인 본능" 이란 생각에 이르렀고 진정한 복수는 범인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지난 달, 그 아버지와 함께 테러범의 집에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가족들을 뜨겁게 포옹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이 우리처럼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으면 좋겠습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끝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이 터지고 이에 대한 보복 공습과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 터에 이 여기자의 책은 세인들의 화제가 될 법한 일입니다.
흔히, 이 시대를 협상의 시대, 대화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고우나 미우나 협상 없이는 공존이 불가능한 시대이기에 현대인은 동색이 아니어도 자리를 같이 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기적인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면 무도회를 열고 있다는데, 더 깊은 불신과 단절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신앙으로 풀어가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복의 악순환을 구원의 역사로 이끌어 가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9:15-1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다메섹으로 가라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쫓겨 남쪽 먼 사막을 지나 호렙산 동굴 속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만 남았는데 제 생명마저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잇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잇게 하라고 하시면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000인을 남겨 두었는데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은 자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7-8절의 말씀은 천사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이 두 번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번은 주님의 수난 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한번은 주님의 부활 후, 천사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 16:7) 하신 말씀입니다.
왜 이사야의 목숨을 찾는 아합과 이세벨이 있는 사마리아가 아니고 다메섹으로 가라 하셨고, 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라 하셨겠습니까? 여기엔 숨겨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가야 할 다메섹과 갈릴리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다메섹으로 가라 하신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9: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으로 가서…" 하신 말이 있습니다.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다마스커스라 불려지는 이곳은 강과 운하에 의해 물이 공급되는 사막 가운데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군사상, 상업상, 매우 중요한 도로가 이곳에서 교차한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인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충돌이 아니라 혼합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아합과 이세벨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450명의 바알의 제사장과 무수한 아세라 사제들을 처벌한 것처럼 또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권토중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시고 혼합의 도시 다메섹으로 가 국제질서, 정치질서, 종교질서를 개선하라 말씀하시면서 새 역사의 시작을 위해 7000인을 남겨 두었음을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관계 개선이지 복수가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상 19:17)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지 복수가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복수의 도성이지만 다메섹은 개선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개선이란 결코 과거의 연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개선으로부터 새 역사를 시작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둘째, 갈릴리로 가라 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7 하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선교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갈릴리 역시, 문화적인 혼합의 도시일 뿐 아니라 문제의 도시요, 범죄의 도시요, 저항의 도시오, 가난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모여들던 도시요,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시고 동행하시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논쟁과 대결의 도성이요. 수치와 곤욕의 도성이요, 배신과 비리의 도성이요, 십자가 죽음의 도성이요, 부활의 도성입니다. 동시에 끝까지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전통과 개혁, 생과 사가 대결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만나자" 하였다면 통쾌한 복수의 자리요, 승리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더라면 빌라도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떨었을 것이며, 많은 유대 백성들은 놀라움과 경외속에서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의 자리요, 복수의 자리요, 자기 영광의 자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구원의 자리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승리나 복수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 개선이요, 화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대결의 자리요, 율법과 복음의 대결의 자리요, 유대인과 이
방인의 대결의 자리요, 부활의 복음이 냉대 받는 자리였으나 갈릴리는,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화합의 자리요, 율법과 복음의 화합의 자리요, 부활의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 곳이 된 것입니다.
셋째,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나, 그리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 개선의 자리요, 화합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관계 개선이 되고 화합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사업이 번창하자 교회를 등한시하고 의무에 게을리 했습니다. 목사가 찾아가 권면을 하면 "목사님이 몰라서 그렇지 사업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하고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는 사업에 크게 실패를 해서 부도가 나는 바람에 회사도, 집도 다 날리고 산기슭에 천막을 치고 양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찾아가 격려하자 "목사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아요. 계시다면 나를 이처럼 비참하게 망하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다시 얼마 후, 목사가 찾아가자 이번에는 어린아이 같이 엉엉 울면서 "목사님, 하나님은 정말 계십니다. 나 같은 사람이 망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정말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사업이 잘되었더라면 내 영과 육이 함께 망했을 텐데 사업만 망하고 영이 구원받게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이 집사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의 자리입니다.
또한 나와 이웃과의 관계 개선과 화합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이스라엘 특파원 로라 블루멘 펜트는 아버지를 죽인 테러범을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세계가 모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보려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끝없는 보복 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기가, 우리 모두가 서야 할 이웃과의 화합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회개와 용서는 결코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이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때, 그러한 나를 불러 회개시키시지 않으시면 나에게서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불러 용서시키지 않으시면, 나에게서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용서는 결코 사람의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하시는 음성을 듣고 올 때 은혜를 입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라,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19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신 김재준 박사는 "회개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생활의 중심이 자기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졌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려고 작정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새 생명이 솟아 올라온다. "죽음이 이김에 삼키우바" 되는 것이다. 이 불사의 체험을 가진 생명은 불덩이처럼 굴러다니며 가는 곳마다 불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메섹으로 가라. 갈릴리에서 뵈오리라. 하신 말씀에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승리나 복수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개선과 화합을 위해 회개와 용서로, 새 생명의 불덩이가 되어 가는 곳마다 복음의 불을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