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의 도피와 함께 일반적인 쇠퇴가 프랑스를 엄습하였다. 번화하던 생산 도시는 타락한 도시로 전락되고, 비옥하던 지방은 원시적인 황무지로 바뀌고, 이상한 진보를 보인 기간 후로 지적 부진과 도덕적 퇴폐가 계속되었다.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구빈원(救貧院)이 되었으며,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약 20만 명의 거지들이 왕의 손으로 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수이트 당원들만은 쇠퇴하여 가는 나라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교회와 학교와 감옥과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에서 무서운 독재를 행사하였다. 프랑스의 성직자들, 왕, 입법자들의 수완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무정부 상태와 파멸로 들어가게 만든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복음이 가져다 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주께서 가르쳐 주신 자아 희생과 무아(無我)의 사랑의 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극기를 실행하지 않게 되었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여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고역과 압박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요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은 더욱 극심하고 억압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나타난 귀족들의 탐욕과 방탕은 농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미워했다. 많은 지방에서 토지들은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작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주의 자비에 의존되었고, 그들의 지나친 요구에도 복종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교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서 부담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집권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세가 부과되었다. “귀족들은 쾌락을 제일로 생각하였고, 농부들이 굶어 죽는 것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주의 전적인 이익을 도모하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실로 끊임없는 수고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들이 불평을 말하면 그것은 오만한 모욕으로 취급되었다. 법정에서는 언제나 농민들의 호소보다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반 사회의 제도가 부패됨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의 변덕스러운 주장이 법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었다. 평민들은 한편으로 세속적 권력자에게,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 세금의 절반도 왕실이나 교회의 금고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 돈의 나머지 부분은 방탕한 자아 방종에 낭비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자기들의 동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납세를 면제받고, 국가의 법률과 관례에 따라 여러 가지 중직에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와 같은 특권계급의 사람들은 약 15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절망적이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부록 22 참조).
로마교와 무신론자
궁정은 사치와 방탕에 잠겼고, 백성들과 위정자들 사이에는 신임이 거의 없었다. 정부의 모든 처사는 언제나 모략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반세기 이상의 기간에 걸쳐서 루이 15세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처럼 악한 시대에 있어서도, 나태하고 경박하고 음란한 임금으로 유명하였다. 부패하고 잔악한 귀족 정치, 가난하고 무지한 하류 계급, 국가의 재정적 곤란과 백성들의 격분, 이 모든 것들은 선지자의 안목이 아닐지라도 무서운 사변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왕은 그의 신하들의 경고에 대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대로 버티고 나가 보자. 내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되겠지”라고 언제나 대답하였다. 개혁의 필요를 아무리 역설하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왕은 죄악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을 혁신시킬 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그의 나태하고 이기적인 대답, 곧 “재앙은 나의 죽은 뒤에”라는 말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는 프랑스의 운명을 여실히 표현한 것이었다. 로마교는 왕들과 지배 계급의 질투심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두도록 영향을 미쳤다. 로마교는 이와 같이 하여 나라가 약화되면 백성들과 통치자들이 모두 자기의 지배 아래 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선견적 정책에 의하여 로마교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노예 상태가 되게 하려면 그들의 심령을 차꼬로 채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려면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이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육체적 고통보다 천 배 이상 무서운 것은 도덕적 타락이었다. 성경은 박탈되었고, 고집과 이기적인 교훈으로 얽힌 백성들은 무지와 미신에 가려졌고, 악습에 빠져 버렸으므로 자제하기에 전연 부적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로 생긴 일은 로마교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로마교는 자기의 교리를 맹종하는 대중을 만들기는커녕 그들을 이교도와 혁명가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로마교를 성직자의 정책이라고 멸시하였다. 그들은 성직자들을 그들을 압제하는 당파로 보았다. 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은 로마교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이 알았던 유일의 종교도 로마교의 교리였다. 그들은 로마교의 탐욕과 잔인성을 바로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성경을 전연 무용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로마교가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고 그분의 율법을 왜곡시켜 버렸으므로 이제 사람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를 동시에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가 성경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 맹종하기를 요구하였다. 거기에 반응하여 볼테르(Voltaire) 와 그의 동료들은 성경을 배척하고 무신론의 해독을 도처에 유포시켰다. 로마교는 그 쇠발굽으로 백성들을 짓밟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이 타락하고 사나워져서 로마교의 학정에 대하여 반발을 일으켜 모든 속박을 끊어버렸다. 그들이 그처럼 오랫동안 공경하여 왔던 것이 찬란하게 보이는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분노한 나머지 참 것과 거짓 것을 둘 다 거절하게 되었다. 그릇된 방종을 자유로 오해하여 그들은 그들이 생각한 자유 안에서 죄악의 노예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혁명 초기에 왕의 양보로 백성측의 대표자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그리하여 세력의 균형에 있어서 백성측이 우세하였으나, 그들은 그 힘을 지혜롭고 적당하게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당한 비행을 고쳐 놓기에 급급한 그들은 사회의 개조를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분노한 대중들은 학대받아 온 분노와 잊혀지지 않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으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비참한 상태를 개혁하는 동시에 그들을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들로 생각되는 계급에 대하여 보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압제받던 자들은 학정 아래서 배운 교훈을 실천하여 과거에 자기들을 압박하던 자들에게 똑같이 압제하게 되었다.
대혁명이 일어남
불행한 프랑스는 자신이 심은 씨앗을 피로써 거두었다. 프랑스가 로마교의 지배하에 복종한 결과는 두려운 것이었다. 프랑스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의 초기에 최초의 화형주를 세웠던 그 곳에 프랑스의 혁명당들은 최초의 단두대를 세웠다. 16세기에 개신교의 신앙을 가진 최초의 순교자들이 화형을 받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18세기에는 최초의 희생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는 자기 나라를 치료해 줄 복음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무신론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재를 무시해 버릴 때 인간의 법률은 인간의 정욕이라는 강력한 물결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성경에 대한 투쟁은 세계 역사에서 공포 시대라는 뚜렷한 한 시대를 초래하였다. 사람의 가정과 마음에서 평화와 행복이 사라졌다. 안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의 승리자가 내일에는 혐의를 받고 정죄를 받았다. 포악과 음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왕과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흥분하고 미쳐서 날뛰는 군중들의 잔악무도한 행동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하고자 갈망하는 그들은 왕을 처형함으로 한층 더 자극되었다. 그리고 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자들도 오래지 않아서 왕의 뒤를 이어 단두대로 끌려갔다. 혁명을 반대하는 것으로 혐의를 받은 자들은 다 살육되었다. 감옥들은 만원이 되었는데 한 때는 20만 명 이상의 검거자들이 수용되었다. 국내의 각 도시에 무서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혁명주의자들의 한 당이 다른 당과 싸우므로 프랑스는 드디어 하나의 커다란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로 싸우는 군중들의 분노와 격정은 온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 “파리에서는 소동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시민들은 여러 당파로 나누어져서 피차에 서로 물고 뜯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였다.” 온 나라가 이와 같은 참상을 당한 외에도 구라파의 열강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황폐케 하는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나라는 거의 파멸 상태에 이르렀고, 군인들은 급료의 지불이 지연됨으로 소동하였고, 파리 시민들은 굶어 죽어갔으며, 각 지방들은 비적들로 말미암아 황폐되었고, 문화는 무정부 상태와 백성들의 방종으로 거의 사라질 지경까지 되었다.” 백성들은 로마교가 반복해서 가르쳐준 잔인과 고문의 본을 너무도 잘 받았다. 보응의 날은 드디어 오고 말았다. 옥에 갇히고 화형주에 달리는 사람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 전에 죽임을 당하고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제 가혹한 로마교는 과거에 유혈 행위를 즐기도록 가르쳐 주었던 사람들의 무서운 세력을 느끼게 되었다. “프랑스의 로마교 성직자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서 실천해 온 박해가 이제는 그들 자신들에게 매우 혹독하게 보복되어 왔다. 단두대는 신부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일찍이 위그노 신도들로 채워졌던 갤리선과 감옥들이 이제는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로 채워졌다. 걸상에 붙들어 매어진 채로 노를 젓는 형벌을 당하고 있는 로마교의 성직자들은 일찍이 자기들의 교회가 소위 이단이라고 부르는 온유한 사람들에게 그처럼 임의로 과했던 그 형벌을 이제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부록 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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