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낙척서생(落拓書生) -5
'너무도 아름답다.'
광무군은 넋을 잃었다.
"호호… 왜 그리 얼굴이 붉어지지요? 호호!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
라고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몽화랑의 웃음소리가 환상을 깨뜨렸다.
속마음을 들켜 버린 아이처럼 광무군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나, 나는 종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가 조금 크게 말하자, 근처에 있던 기녀들이 까르르 웃어
제쳤다.
"호호…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다!"
"화향루에 저런 촌닭이 오다니!"
광무군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러나 몽화랑만은 그를 비웃지 않았다.
"광서생, 소문은 들었습니다. 한데, 제게서 어떤 종이를 찾으시는
지요?"
그녀가 상냥히 묻자, 광무군은 더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이야
기했다.
"오늘 아침 지방문인각에서 종이를 사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한데, 왜……?"
"그… 그 중 제 것이 있습니다. 화송노인(火松老人)이 착각한 나
머지, 제게 전해져야 하는 것을 낭자께 전해지는 지물에 끼워 팔
았습니다."
"호호… 정말 흥미로운 데요? 그런 실수로 은거하고 있던 화중선
(畵中仙) 광무군 서생의 방문을 받다니!"
몽화랑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상념이 흐르고 있을까?
한 겹의 고운 껍데기, 육신(肉身)이라는 것!
그것이 미추(美醜)를 몽땅 판가름한다는 것은 정말 묘한 일이다.
- 미인(美人)은 피부 한 겹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나, 이 자리에서는 통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몽화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또한 그녀는 기녀답지 않게 숭고(崇
高)함을 지니고 있었다.
몽화랑의 방 안.
칠현금(七弦琴)과 문주란(文珠蘭)이 팔선탁(八仙卓) 위에 놓여져
있다.
광무군은 향차(香茶)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단아한 방이다. 기방(妓房)이 이런 곳일 줄은 몰랐다.'
광무군은 혼자 앉아 있었다.
몽화랑은 그를 방 안으로 안내한 다음, 다른 곳으로 거 버린 후였
다.
차를 다 마셨을 때, 조용히 방문이 열리며 몽화랑이 들어섰다.
그녀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서생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원하시던 것을 여기 찾아왔습
니다."
몽화랑은 화선지 꾸러미를 갖고 있었다.
광무군이 얼른 그것을 받으려 하자, 몽화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호… 그냥 내어 드릴 수는 없어요."
사향(麝香) 내음일까? 그녀의 육향(肉香)은 더없이 색감(色感)적
이었다.
"어… 어이해?"
"호호… 그렇지 않아도 화공(畵工) 하나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호
호! 그림 한 가지를 부탁드릴 작정으로요."
"그… 그림이오?"
"광무군서생의 장기가 그림이라는 것은 소녀도 익히 알고 있습니
다!"
"그… 그것은 삼사 년 전 객기(客氣)로 한 번 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붓을 꺾었습니다!"
광무군이 고개를 저었다.
"홋홋… 옷과 팔소매에 먹물이 묻어 있는데도 붓을 꺾었다 하시니
……."
"이, 이 먹 자국은… 그… 그림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오."
"그럴 리가?"
"나는… 종이를 쓰지 않소. 그러기에 그림은 남지 않소!"
광무군의 해명은 묘한 데가 있었다.
종이를 쓰지 않고 그리는 그림!
대체 그는 무엇을 그리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몽화랑의 태도 또한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그림을 그려 주세요. 대가는 두둑이 드리겠습니다. 그림을 그려
주시지 않는다면 당장 축객령을 내리겠습니다."
"어, 어이해 나를 핍박하시오?"
광무군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봤다.
희고 아름다운 손, 자신의 손을 본 지도 꽤 오래 된 듯 낯설기만
했다.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이렇게 사정하는 사람을 보기도 처음이
다.'
그는 생각을 부드럽게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지필(紙筆)을 준비하시오!"
"호호… 역시 대장부(大丈夫)이십니다."
몽화랑은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익-!"
꾀꼬리 소리를 닮은 휘파람 소리가 퍼져 나갔다.
직후, 사르륵 주렴(珠簾)이 걷혀지며 여인 다섯이 걸어 들어왔다.
손에 채대(綵帶)를 든 여인들인데, 걸치고 있는 옷의 빛깔이 각기
달랐다.
홍황현백녹(紅黃玄白綠)!
다섯 여인 하나하나 짜릿한 미색(美色)을 지니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다섯 가지 옷의 빛깔마냥 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
닌 여인들.
옷이 너무도 몸에 달라붙었기 때문일까? 다섯 여인은 더할 나위
없이 육감(肉感)적이었다.
⑥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화향루에 이런 미인들이 있을 줄
이야. 한낮 탕굴(蕩窟)인 줄로만 알았는데…….'
광무군은 살아 움직이는 꽃들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
다.
그러는 동안, 광무군의 눈앞에 화선지 한 장이 펼쳐졌다.
몽화랑은 그의 몸종이나 서동(書童)처럼 행동했다.
그림을 그릴 준비가 다 되었다.
몽화랑은 광무군이 붓을 쥐기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그려 주세요, 군무도(群舞圖) 한 장을. 어떻게 그려도 상관은 없
어요."
"군… 군무도?"
"호호… 저 아이들이 춤추는 것을 보시고 그림 한 장을 만들어 주
세요. 호호……!"
몽화랑은 웃으며 손뼉을 친다. 손뼉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 어
디에선가 소성(簫聲)과 비파성(琵琶聲)이 들려왔다.
삘리리- 삘리리- 띵- 띵-!
그리고 야릇하게 터져 나오는 교성.
"흐으으… 응, 호접장몽(蝴蝶長夢)……!"
노란 옷을 걸친 기녀가 채대를 흔들며 발을 내딛었다.
꽃잎을 딛고 멈춰 서는 호접(蝴蝶)인 양 가볍게!
그녀가 너울너울 춤을 출 때,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펑퍼짐한 둔
부를 흔들어대며 교태롭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만화난락(萬花亂落)- 백화제무(百花齊舞)!"
스슥- 슥-!
기녀들의 몸이 한데 뒤섞였다. 한순간 현란하게 피어나는 오색의
찬연한 꽃송이.
섬섬옥수는 꽃술이 되고, 너울거리는 옷자락은 바람에 흐느끼는
꽃잎으로 변한다.
기녀들의 춤은 더욱 현란하게 이어졌고…….
"혼, 혼영무(混影舞)!"
광무군은 눈썹이 일자(一字)가 된다.
혼영대라무(混影大羅舞).
그림자가 뒤섞이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자리를 바꾼다. 그것은
하나의 기문진학(奇門陣學)이라 할 수 있었다.
일개 기녀들이 그 놀라운 강호절예를 시전할 줄이야…….
광무군은 감히 붓을 쥐지 못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기녀들의
몸놀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녀들의 춤사위는 더욱 능숙해졌다.
東去長安萬里餘
故人那惜一行書
玉關西望腸堪斷
況復明朝是歲除
동쪽 장안성을 떠나온 지 만 리도 넘고,
친구에게서는 한 장의 편지도 없네.
옥관에서 서쪽을 보면 창자가 끊어질 듯.
아아, 더욱이 내일은 섣달 그믐날이 아닌가?
제 3장 낙척서생(落拓書生) -7
몽화랑의 노랫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비한 피리 소리, 육감
적으로 부푼 몸뚱이를 흔들거리며 춤추는 여인들.
다섯 쌍의 눈빛은 그윽하게 광무군의 마음을 훔치고, 광무군의 손
끝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기녀들은 아주 빨리 움직였다.
"교(巧)-!"
몽화랑은 간간이 신호를 했다.
띵- 띵-!
비파 소리는 춤사위를 더욱 변화롭게 했다.
모든 것이 하나였다.
너울너울 흔들리는 채대의 움직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육봉(肉
峰)을 가진 기녀의 발놀림… 모든 것이 쉼 없이 이어지며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 냈다.
비파 소리, 피리 소리, 그리고 몽화랑의 일갈(一喝)!
"섬섬(閃纖)- 라라(羅羅)-!"
"……."
광무군은 무념무상지경(無念無想之境)에 젖어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야릇한 신광이 흘러나왔다.
붉다고 하기에도, 푸르다고 하기에도 엷은 광채!
그것은 광무군의 가장 큰 비밀이 되는 것이었다.
"환(幻)… 연환환(連環幻)의 식(式). 끊어지나(斷), 그것은 찰나
이고… 곧 하나로 뭉친다!"
그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스슥- 슥-!
다섯 기녀는 뭉쳤다가는 다섯 방향으로 흩어졌다.
채대는 수천 개의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간간이는 펼쳐졌고, 어떤
때에는 비수(匕首)처럼 빳빳해져서 허공을 갈랐다(破空).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땅-!
광무군의 뇌리를 깨어 버리는 일탄비파성(一彈琵琶聲)이 있었다.
"으으… 음!"
광무군은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껌벅거렸다.
몽화랑이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춤사위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림을 그려 주십시오."
"그… 그림! 군무도(群舞圖)!"
몽화랑의 청을 받은 광무군은 눈을 내리감는다.
흰 종이(白紙), 검은 먹이 듬뿍 발린 큰 붓…….
'그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광무군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다만 느끼는 것을 손끝으로 옮겨 낼 뿐이다.'
그는 심필일합(心筆一合)의 경지에 들어섰다.
군무도가 너무도 변화막측한 탓일까?
그는 쉽게 형상을 묘사하지 못했다.
그는 붓을 세우고 숨을 멈추었다. 우주(宇宙)가 정지된 듯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순간 광무군의 손이 섬전(閃電)처럼 움직였고, 백지가 검게 물
들여지기 시작했다.
백지 위로 무수한 선들이 그려진다. 선은 거듭 이어지면서 사람으
로 변화했다.
두 팔을 쳐드는 여인, 다리를 조금 벌리고 서서 채대로 무수한 동
그라미를 만드는 여인,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몸을 핑그르르 돌리
는 여인…….
스슥- 슥-!
얼마 후, 종이는 검게 더럽혀졌다.
"……!"
광무군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소!"
광무군은 몽화랑을 봤다.
몽화랑은 시꺼매진 화선지를 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 대단하다… 대단해!"
그녀는 왜 그리 놀라는 것인가?
더럽혀진 종이 위에는 백팔 명이 있었다.
종이가 시꺼매진 이유는 좁은 공간에다가 너무도 많은 것을 그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백팔 가지 변화(變化)를 모두 기억해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다니
… 아아, 최소한 한 가지 정도는 놓칠 줄 알았는데…….'
몽화랑이 얼굴을 붉히는데…….
"낭자(娘子)는 어떤 분이오?"
광무군이 붓을 벼루 위에 걸쳐 놓고 고개를 쳐들었다.
"몽… 몽화랑(夢華娘)일 뿐이지요."
몽화랑은 빙긋 웃는다.
잠시 후, 몽화랑은 지방문인각에서 사 온 종이 꾸러미를 광무군에
게 전했다.
광무군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
가 바라는 것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광무군이 종이 꾸러미를 살피는 동안, 몽화랑을
비롯한 여러 기녀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⑧
유령(幽靈)의 장난이었을까?
광무군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미친 사람같이 중얼
거리며…….
"그래, 내가 그리던 것에는 환(幻)과 교(巧)가 없었다. 그래서 파
천일죽(破天一竹)이 자꾸만 끊어졌던 것이다."
그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
다 댔다.
광무군은 문득 정신을 되찾았다. 어느 새 저녁노을이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잠깐인 줄 알았는데, 세 시진(時辰)이 지나다니……!"
광무군은 흠칫 놀라며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 후, 그는 도부(屠夫)의 거처 가까이에 이르렀다.
우우… 움메……!
슬픈 황소 울음소리.
간간이 고기가 질긴 수우(水牛)도 보였다.
백정(白丁)의 거처. 천민(賤民) 중의 천민이고 세상에서 가장 음
지(陰地)라 할 수 있는 도살장(屠殺場) 하나가 있었다.
애로육관(哀 肉館).
개원성에서 가장 거대한 육고(肉庫)이고, 그 뒤에는 도살장이 있어
고기를 찾는 사람에게 항상 신선한 고기를 파는 곳이다.
'백발의 도부(屠夫)라고 했다. 고기 싸는 유지(油紙)를 사 간 사
람은…….'
광무군은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도부들이 도살(屠殺)을 하는 모습이 도처에서 눈에 띄었다.
팍-!
거대한 도끼로 황소의 골을 치는 사람.
신기한 것은 황소가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황소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면 일급도부라 할 수 없다. 정확히 한
번에 숨을 끊어야만 도부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광무군은 도부 노릇에 익숙한 천민들을 보고 걷다가 한 사람을 발
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이다!"
그는 백발노인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날이 아주 무딘 대부(大斧) 하나를 쥐고 있었다.
대나무같이 마른 사람인데, 몸 앞쪽으로 아주 긴 그림자를 만들어
놓은 채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도부가 보는 것은 하늘(天)이었다.
그는 큰 도끼를 번쩍 쳐든 채 하늘을 응시(凝視)하고 있었던 것이
다.
차차 광무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갔다.
'살기(煞氣)다…….'
그는 살기의 그물(網)이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사지(四肢)가 굳어졌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늙은 도부
가 신형(身形)을 돌려 자신의 심장에다가 도끼질을 해댈 것만 같
았다.
'놀라운 자세다. 저런 자세는… 천하에 다시없는 완벽한 자세다'
광무군은 입술도 달싹이지 못했다.
그는 석상(石像)이 되어 반 시진을 보냈다.
땀이 주르르 흘러 회삼(灰衫)을 축축이 적셨다.
늙은 도부는 모발(毛髮)조차 움직이지 않았고, 광무군 역시 털 오
라기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뻣뻣이 서 있는 것이었다.
부동(不動)…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一)였다.
그리고 한순간.
쌔- 액- 쌕-!
늙은 도부의 손이 내리쳐졌다.
바로 그 순간, 광무군의 볼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엇인가를 보고 만 것이다. 찰나의 순간, 무엇인가가 갈라
지는 것을…….
'그림자가 끊어졌다(斷影)! 바로… 파천단영부(破天斷影斧)라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늙은 도부가 가른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