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일본 잃어버린 30년… 진 별 5, 뜬 별 5
'헤이세이 30년 불황' 도약한 기업 5
'헤이세이 30년 불황'은 대부분의 일본 기업에 위기였다. 하지만 일부 기업에는 기회로 다가왔다. 소매업체 니토리, 의류업체 유니클로(패스트리테일링), IT 기업으로 출발한 소프트뱅크, 게임업체 닌텐도는 이 기회를 잡았다. 2018년 7월 말 보유 주식의 시가총액 기준으로 일본 경영자 순위를 매기면 1위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2조1410억엔), 2위는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1조3795억엔)이 차지했다. 이어 5위는 니토리 아키오 니토리 회장(4083억엔), 7위는 미키타니 히로시 라쿠텐 회장(3168억엔)이 뒤를 이었다. 모두 1989년 순위에는 없던 기업과 인물이다.
①니토리: 모든 공정 직접 한다
가구·생활잡화 기업 니토리는 32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모두 증가했다. 일본 기업사에서 보기 드문 기록이다. 니토리의 성공은 니토리의 창업자인 니토리 아키오 회장이 이뤄낸 집념의 결과였다. 1967년 니토리가구점으로 출발한 니토리는 1986년 가구에서 홈퍼니싱(가구·잡화)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니토리는 제조·물류·소매 모든 부문을 자사 내부에서 소화하는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토털 패키지(모든 기능을 갖춘)' 기업으로 도약했다.
니토리 회장은 "사업에 필요한 모든 공정은 우리가 직접 한다"는 확고한 경영 원칙을 갖고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영 방식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였다. 수입도 대형 상사 대신 무역 자회사를 설립했다. 제조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했다. 신상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가격 파괴라는 목표로 자체 생산을 고집했다. 침대 매트리스를 구성하는 코일도 니토리는 모두 자체 제작한다. 철사를 대량으로 구매해 직접 구부려 만든 코일에 하나하나 천을 씌워 만든다. 비용이 높아 다른 가구업체에서는 꺼리는 방식이다. 자체 생산으로 원가를 줄이는 대신 더 좋은 상품을 시장에 최대한 투입하자는 니토리 회장의 신념 때문이다.
공격적인 점포망 확대도 한몫했다. 1988년 16곳에 지나지 않던 점포 수도 2018년 현재 523곳(일본 내 505곳)에 이른다. 니토리는 기능성 상품에 특화하며 상품 단가를 높였다. 더운 여름철을 겨냥한 침구 'N쿨'과 꽃가루를 흡착하는 커튼 등이 대표적이다.
②유니클로: 싸고 가벼운 혁신 의류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회장의 사업 목표는 간단명료하다. 세계 1위. 1980년대 일본 패션 시장은 '비싼 옷이 좋은 옷'이라는 트렌드가 만연해 있었다. 유니클로는 이러한 패션 조류에 과감히 도전,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스스로 진화를 거듭했다. 일본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 유럽과 미국의 패션시장을 둘러본 야나이 회장은 "일본의 옷은 비싸다"라는 생각에서 유니클로의 힌트를 얻었다.
유니클로는 헤이세이 시대 일본인의 패션 문화를 송두리째 바꿨다. 어패럴 업계의 오랜 관행에 도전한 유니클로는 1994년 부드러운 소재의 재킷인 플리스, 2003년 얇은 내의 히트텍, 2009년 보온성이 뛰어난 깃털처럼 가벼운 다운재킷 등 수많은 기능성 의류를 대중화했다.
1990엔짜리 플리스는 출시 7년 만에 누적 판매 2600만벌을 기록하며 남녀노소 즐겨 입는 '국민 교복'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히트텍은 10억 벌을 넘어선 대히트 상품이 됐다. 저렴하면서도 가볍고 따뜻한 초경량 다운재킷은 경쟁 업체들이 유사 상품을 쏟아냈다. 유니클로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1989년 1인당 옷의 평균 총무게가 2.5kg이었는데 2018년에는 이보다 절반 이상 줄어든 1.2kg이었다.
유니클로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면서 '규모의 경제' 이점도 누렸다. 백화점 의류 브랜드의 이익률은 비싼 임차료 탓에 1~2%로 매우 낮지만 유니클로는 다양한 점포망 덕분에 임차료를 전체 비용의 평균 5% 수준으로 낮췄다.
③닌텐도: 경쟁사와도 적극 제휴
닌텐도는 1989년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를 출시하며 세계 게임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90년대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 등 경쟁사에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는 나날도 적지 않았다. 닌텐도는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를 등장시켰다. 2006년에 내놓은 게임기 위(Wii)는 리모컨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운동게임으로 게임과 담을 쌓았던 다양한 연령층을 끌어들이며 누적 판매 대수가 1억 대에 달했다. 위 발매 이후 주춤했던 닌텐도는 최근 '닌텐도스위치' 발매 이후 다시 비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영업이익이 1년 전보다 41% 늘어난 2200억엔을 기록했다.
닌텐도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타사와의 제휴를 마다하지 않는다. 2007년 발매한 건강관리 게임 위핏(WiiFit)이 대표적인 예다. 보드에 올라 게임 소프트에 맞춰 트레이닝하는 이 게임은 전기 부품업체인 미네베어의 고성능 센서 기술을 제공받았다. 스마트폰용 확장 현실을 이용한 온라인 게임인 포켓몬고(Pokemon Go)는 캐릭터 회사인 포켓몬과 미국 나이언틱과의 공동 개발로 탄생했다.
탄탄한 재무 체질을 중시하는 'BS경영'도 한몫했다. 보통 자기자본비율이 40% 이상이면 건실한 기업으로 평가받는데, 닌텐도는 변제 의무가 없는 자기자본비율이 85.2%(1조2509억엔)에 달한다. 보통 일본 기업들은 손익계산서를 중시하는데, 닌텐도는 풍부한 현금과 무차입 경영을 원칙으로 재무상태표를 중시했다. 3년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한 해에도 매해 500억엔의 연구개발비는 줄이지 않았다.
④소프트뱅크: 과감한 글로벌 투자
손정의 사장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는 가장 '핫한' 경영자다. 1990년대 그의 주특기는 '타임머신 경영법'으로 불렸다. 미국에서 성공했거나 유망한 비즈니스 모델을 일본에 들여와 장점은 흡수하고 손정의식 경영을 더했다. 1994년 미국 IT 미디어기업 지프 데이비스(Ziff Davis), 포털기업 야후 등 IT 혁명의 황금기를 이끌던 미국 기업에 M&A(인수·합병)와 투자를 이어갔다. 1996년 미국야후와 일본에 공동 합작회사를 설립해 일본 내 인터넷 검색 부흥시대를 열었다. 2013년 미국 4위 휴대전화업체인 스프린트(Sprint)를 인수해 모바일 부문을 키웠다.
2000년대 소프트뱅크는 기간사업인 통신 부문을 강화하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ADSL(전화선을 이용한 데이터통신)을 활용한 인터넷 통신회사 야후BB를 설립했는데 당시 야후BB가 내세운 월정액 요금 2280엔은 기존 요금의 100분의 1 수준이었다. 이후 손정의 회장은 통신 부문의 '적자 3형제(일본텔레콤·보다폰·윌컴)'를 모두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손 회장은 2017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정부 계열 펀드 출자를 묶어 10조엔 규모의 비전펀드를 설립했다. 미국 차량공유기업인 우버와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중국의 알리바바와 디디추싱 등 성장 전망이 높은 기업에 족집게식 투자를 이어갔다. 지난해 12월에는 소프트뱅크의 핵심 자회사인 휴대전화사업을 떼어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상장으로 조달한 금액만 2조6000억엔. 경제 호황기였던 1987년 일본 1위 통신회사인 NTT도코모의 2조3341억엔을 뛰어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고 투자할 곳은 널렸다"고 말한다.
⑤라쿠텐: 인터넷 안에 각종 서비스 집결
1997년 설립된 라쿠텐은 헤이세이 시대에 설립된 기업 중 최초로 매출 1조엔을 달성했다. 라쿠텐 이전의 일본 인터넷 포털 강자는 야후재팬이었는데 라쿠텐이 등장하며 양자 구도를 형성했다.
은행원이었던 라쿠텐 창업자 겸 회장인 미키타니 히로시는 1997년 5월 인터넷상에 다양한 점포를 모은 쇼핑몰 '라쿠텐이치바' 운영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2000년에는 M&A를 통해 여행과 서적, 티켓 판매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했다. 2010년 전후에는 보험·카드·은행 등 금융 서비스와 해외 진출에 힘을 쏟았다. 인터넷 공간에 쇼핑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를 망라해 고객이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가 구매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해 연계 소비를 노렸다.
미키타니 회장은 이를 '라쿠텐 경제권'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상품 판매에 머물렀다면 치열한 경쟁 속에 레드오션에 잠식될 거라는 경영적 감각과 확신 때문이었다. 1997년 5월 13개 점포로 시작한 라쿠텐 시장의 출점 점포 수는 현재 4만5000곳을 넘어섰다. 라쿠텐의 일본 내 전자상거래 유통 총액은 3조4000억엔, 라쿠텐 카드의 취급액은 7조5000억엔에 달한다.
[출처] 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5/2019042501702.html
'헤이세이 30년 불황' 추락한 기업 5
2차 대전 이후 40년 넘도록 불패(不敗) 신화를 일군 일본 경제는 헤이세이 30년 내내 긴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일본에서는 1990~1995년 주식·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1000조엔이 증발했다. 2년치 일본 국민총생산(GNP)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쇼와(昭和) 시대를 수놓았던 샤프와 엘피다는 도산했다. 소니와 도시바, 닛산은 살아남았지만 구조조정을 거친 탓에 몸집이 쪼그라들었다.
①샤프: 과거 영화에 안주
샤프는 '긴급개발 프로젝트'라는 독창적인 기업 문화가 자랑이었다. 개발팀이 내놓은 시제품에서 대박 가능성이 보이면 부서를 초월한 사내 전문가를 불러모아 사장 직속 특별팀을 꾸린 후 특별 예산을 투입해 신속하게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는 구조였다. 일본 최초 전자레인지, 세계 최초 액정 전자계산기, 세계 최초 탁상용 전자계산기 등이 성장의 발판이었다. 여기에 컬러 TV(1960년)에 이어 세계 최초 LCD TV(1987년)를 선보이며 고속성장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호황이 길어지자 샤프는 성공에 안주했다. TV 시장에서 삼성·LG가 맹렬히 추격하는 동안, TV 이후 히트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일본 1위'라는 명맥은 유지했으나, 이마저도 일본 정부의 판매 보조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기술력을 과신한 나머지 세계적으로 TV 기술 트렌드가 뒤바뀐 와중에도 흐름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2012년 TV와 LCD 시장의 침체가 닥치자 일본 정부는 '규모의 경제'를 목표로 도시바, 히타치, 소니의 LCD 사업부를 묶어 '재팬디스플레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샤프는 여기 합류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선택했다. 혼자서도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 해 샤프는 6조원이 넘는 순손실이라는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여러 차례 이러한 판단 착오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바람에 결국 2016년 아이폰 하도급업체인 폭스콘에 넘어가는 수모를 겪게 됐다.
②도시바: 사내 파벌 간 갈등 격화
"파벌주의와 불필요한 회장 숭배에 빠진 경영진, 쓸데없이 완고한 상명하복 문화와 지시가 없으면 아예 움직이지도 않는 직원들." 일본 경제전문지 동양경제는 위기에 빠진 일본 기업 도시바의 사내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도시바는 1939년 시바우라 제작소와 일본 최초로 백열전구를 생산한 하쿠네쓰사, 도쿄전기가 연합해 만든 80년 역사의 회사다. 1985년 세계 최초로 휴대용 컴퓨터를 개발할 정도로 빼어난 기술력을 자랑했고, 이를 토대로 반도체와 인프라, 군수산업에까지 진출했다.
문제는 사업 확장에서 생긴 파벌 싸움이었다. 대표적으로 인프라 사업군은 순환 주기가 짧은 반도체·가전 부문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인프라계'와 '가전계'로 파벌이 나뉘어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각 파벌이 돌아가면서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맡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2008년 진출한 원자력 사업은 도시바 몰락의 도화선이었다. 도시바는 당시 아베 정부가 추진하던 '원자력 르네상스' 정책에 발맞춰 미국 원전 설계업체 웨스팅하우스를 시장 예상가의 2배에 달하는 50억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도시바의 전(前) 사장·회장 출신으로 구성된 파벌이 경영진을 종용해 의사 결정을 주도했다. 그러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 사업 부문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런데도 '2017년이 되면 매출 1조엔을 기록할 것'이라고 경영진이 주장하는 바람에 아무도 손을 쓰지 못했다.
전근대적인 파벌 싸움을 근절하지 못한 대가는 참혹했다. 2015년 손실을 메우려 회계 부정을 저질러 왔다는 사실이 발각됐다. 원자력 사업 진출 실패의 여파로 알짜배기였던 반도체 사업부는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국 ·미국·일본 연합 컨소시엄에 팔렸다. 도시바는 지금도 부정 회계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③다카타: 위기관리 부실
'8년간 20명 사망·200여명 부상.' 품질 관리에 실패한 기술자와 위기 관리에 무심한 경영진이 만난 결과는 비참하다. 2017년 일본이 자랑하던 세계 2위 에어백 업체 다카타는 '죽음의 에어백' 논란 끝에 파산을 신청하고 중국 기업에 헐값으로 팔렸다. 부채 총액은 약 17조원. 일본 제조업체 가운데 최대 규모 파산이라는 불명예까지 씌워졌다.
1933년 문을 연 다카타는 세계 20개국에 56개 공장을 운영하며 에어백과 안전벨트 등 자동차 안전용품에서 세계시장의 20%를 점유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파산 직전이었던 2016년에는 매출 6600억엔을 기록했고, 종업원은 4만6000명에 달할 정도로 사세가 컸다.
다카타에 몰락의 신호탄이 터진 것은 2014년. 에어백이 펴질 때 부품 일부가 파손되면서 금속 파편이 운전자와 승객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치명적 결함이 있는 제품을 알고도 팔았다는 폭로가 터져 나왔다. '운전자를 사지에 몰아놓고 모른 체했다'는 전 세계 소비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 조사에 따르면 다카타는 2000년 무렵 결함을 알았지만, 10년이 넘도록 리콜에 나서지 않고 제품을 계속 팔았다.
다카타는 2015년에야 미국 전역에서 리콜을 실시했지만, 이미 사태는 손 쓰기 어려운 시점으로 진입한 이후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다카타 몰락의 싹이 2007년부터 자라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창업자 3대인 다카타 시게히사(重久) 회장 겸 사장이 매출 신장과 주가 올리기에만 몰두했다는 것. 주식 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만한 대책은 사내에서 아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④엘피다: 합병 이후 융합 실패
엘피다는 2000년 당시 세계 5위 반도체 업체인 일본 NEC와 7위 업체인 히타치가 힘을 합쳐 세운 'D램 연합군'이다. 1980년대 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은 1990년대 들어 삼성전자 등 한국·대만 기업에 밀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시바 등 다른 회사들이 반도체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일본 D램 반도체 제조업체는 2000년에는 엘피다 하나만 남았다.
하지만 엘피다는 희망했던 만큼 오래가지 못했다. 엘피다가 설립될 당시 NEC와 히타치를 합쳐 D램 세계시장 점유율은 16%였다. 그러나 바로 1년 뒤 8%로 반 토막 났고 이듬해 다시 4%로 재차 반이 줄었다. 반도체 업체마다 표준 제조 기술 등에 차이가 커 인위적인 합병이 시너지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NEC와 히타치 두 회사 기술자들은 합병 이후에도 같은 뜻을 가지고 힘을 합치기보다 자신의 장기를 내세우기 바빴다. 1980년대 D램 시장 점유율 세계 1위 자리를 여러 해 차지했던 NEC 출신 기술자들과 미세가공 기술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히타치의 기술자들은 개발 현장 곳곳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혼란과 마찰이 발생했다. 2인 3각을 해도 모자랄 마당에 서로 샅바를 잡고 씨름을 한 셈이다. 2011년 25나노 D램 제품을 삼성전자보다 앞서 개발했지만, 양산 제품을 내놓지 못하는 등 여러 내부 갈등 요인으로 인해 역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⑤고베제강: 품질 증명서 조작
150년을 쌓은 신뢰도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2017년 벌어진 고베제강(神戸製鋼) 알루미늄·구리 품질 조작 파문은 1868년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차곡차곡 쌓인 '메이드 인 재팬'에 대한 믿음이 헤이세이 시대 말미에 이르러 뿌리부터 뒤집힌 대표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고베제강은 일본에 3곳뿐인 용광로 사업자다. 1905년에 설립하고 1911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해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가 청년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직장이기도 하다.
고베제강은 2017년 10월 8일 돌연 자사 주력 제품인 알루미늄과 구리의 강도·규격·연성 등에 관한 품질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발표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2016년 9월부터 1년 동안 4개 공장에서 출하한 제품 약 4만t이 품질 기준에 못 미쳤음에도 검사증명서를 조작해 팔았다는 것. 현장 직원과 임원 모두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이렇게 팔린 알루미늄과 구리는 도요타 자동차의 본넷, 일본 고속열차 신칸센 차량 등 시민 안전에 직결되는 부품에 두루 쓰였다. 중국이나 한국 등 신흥국 제품과 가격 경쟁 하게 되면서 원가 절감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도덕적 해이가 퍼졌다는 점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출처] 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5/20190425016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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