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렛조 (Arezzo) 에 다녀와서
사회자 씨에나대학 철학부 교수... 오른쪽 이득수선생 후계자 스텔라 교수
앞에 이득수 선생 가족, 마-리, 부인 마리아, 두째딸 싸비나, 큰딸 엘리자
휴식시간에 부인 마리아 와 나폴리대학 한국학교수 리옷또 교수
저녁 찜포지움 마무리로 식당에 모여서... 왼쪽에서 마리아, 엘리자, 삐에트로, 싸비나, 폭트-스피라 교수와스텔라교수
<1>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겨울에도 레몬 꽃이 피는 따스하다는 남쪽나라
토스카나의 아렛조에 도착하자 막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하나 잡으려고 했더니 이 눈 오는 시간에
가장 귀한 것이 바로 택시가 아니랴. 택시가 하나 역 앞에 서 있기에
운전사에게 손을 흔드니까 어디에 가겠느냐고 묻는다.
호텔 이름을 대었더니 역에서 바로 앞으로 곧장 트인 행로를 가리키며
저 길 건너편에 있는 호텔이라고 한다. 가방을 끌고 축축한 눈비를
맞으며 호텔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늘은 내게 어째 눈 복이 있나보다.
아침 새벽에 집에서 역으로 나오면서도 전화로 부른 택시가 이때 마침
내리는 폭설로 말미암아 제 때에 오지 않아서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
기차까지 놓치면 이태리행을 포기해야 하겠다하는 생각을 하면서
택시 운전사에게 독촉을 하여 미끄러운 십자로마다 간신히 건너 역으로
달려 가 막 기차에 올라 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에 아슬아슬한
기분이 돈다.
호텔이 역에서 약 150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호텔에 들어가자
리셉션에서 일하든 고용인이 나를 보자 인사말로 하듯 ‘여기 눈이 와요,
아렛조에 눈이 와요...’ 하고 마치 어린애같이 기뻐했다.
방은 예약이 이미 되어 있어서 3층에 있는 거리 쪽으로 창이 나간 방을
얻었다. 이틀 살 방이니 생각하고 거리에서 오는 소음이 꽤나 시끄러웠으나
참기로 했다.
아렛조에는 오늘 일요일에 무슨 행사가 있었나 보았다. 호텔이 있는
모나꼬 광장에는 색종이 조각들이 산재해 있고 이것을 치우는 청소차가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요란하게 광장을 돌고 있어서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미니바-에 있는 5 유로짜리 비싼 깽 맥주를 하나 마시고 몇 시간을 자기는
했으나 정차했다 출발하는 버스들의 소음으로 말미암아 선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낯선 호텔의 첫 밤은 항상 이러하기 마련이다. 아침 7시 반부터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기에 시간 맞추어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내가 첫 손님이었다.
‘까페, 깝뿌치노, 까페 랏떼..?’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묻기에 깝뿌치노를
주문하고 식사를 시작하려니까 동양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이태리에는 중국사람들이 워낙 많이 살고 있으니 실례가 될 가봐 말을
걸지 않고 있었더니 그 낯선 분이 ‘한국사람이 아니세요’ 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 호텔에서 나에게 한국말을 걸어 올 사람이란 극히 한정되어 있어서 나도
금방 이 분이 누구인가 짐작을 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나니까 이 분은
이득수 선생으로부터 자주 들어오든 전 나이제리아와 벨지에 대사로 근무하든
이동진 선생이었다.
이동진 선생을 말한다면 이득수선생과 씨에나대학 비교문학센터에서 나오는
‘콜라나’라는 씨리즈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콜라나 제 1권은 이동진선생의
시집이기도 하다.
이득수선생을 추모하는 그이 생일날 씸포지움에 우리가 참가하러 왔기에
물론 우리의 대화도 이득수선생에 관계되는 화제가 많았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보니 이동진선생은 내 경기 후배였다.
머나 먼 이태리 아렛조에서 동문 한 분을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오늘 짐포지움의 마지막 차례 ‘한국분야’의 사회를 이동진선생이 맞게 되었다.
그래서 먼 거리를 오신 분이었다.
이동진선생을 말한다면 이 분은 전직 대사일 뿐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콜라나에도 이동진선생이 번역한 몇 권의 번역시가 출판되어 나왔다.
요즘은 한국에서 출판사업을 한다고 했는데 출판사 이름은 ‘해누리’라는
출판사이고 ‘착한 이웃’이라는 월간 잡지도 출판하고 있다고 한다.
철학부 학장 Camillo Brezzi,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득수선생의 후계자 Francesco Stella 교수
맨 앞줄 왼쪽에 이득수선생 가족들이 앉아 있고 (싸비나, 마리아(부인), 엘리자,마리아-테레자)
맨 가운데 흰머리의 제일 나이 먹은 사람이 이득수 선생의 스승 Claudio Leonardi (뒤에 더 얘기 하겠다)
그 옆에 Armando Rigobello 역시 이득수 선생의 스승이다.
<2>
이득수 선생 추모 짐포지움은 씨에나 대학 철학부 강의실에서 열렸다. 약 100 여명의
청중이 들어가는 강의실이 거의 꽉 찼었다. 9시 15분에 짐포지움이 시작하기로 예정
되어 있었으나 모든 참가자가 자리를 잡아 앉았을 때는 30분이 더 지나갔다. 아렛조는 약 5년 전
이득수 선생이 자동차로 우리를 태우고 프로렌스 자택에서 떠나
씨에나를 들려 아렛조에 왔을 때 한번 구경한 곳이라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도시 자체도 자그마해서 돔에서 내려와 삐앗자-그란데 광장을 중심으로 몇 골목을 돌면
구경이 다 끝날 정도다.5년 전에 이득수 선생의 안내로 돔을 구경하고 시내로 내려오면서
큰 한길에 있는 한 음식점에 초대받아 들어가서 배부르도록 점심을 먹고 나온 기억이 난다.
식당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 음식도 좋았다.
그래서 이번에 아렛조에 갔을 때도 이 음식점이 어디에 있었나 찾아보기도 했다.
짐포지움은 30분 연발로 시작하여 씨에나 대학의 아렛조와 씨에나 문학-철학부
Brezzi 와 Chiarini 학장들의 인사말에 이어 이득수 선생의 후계자 Francesko Stella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모두 다 이태리말로 강연이 계속되어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내용은 어떠할게라 짐작을 하고 있었다. 스텔라교수의 강연이 끝나자 이태리 한국
대사관의 정규윽 문화관이 영어로 한 인사말이 있었다.
특히나 이 아침에 있었던 회의에서는 이득수 선생의 직계 스승이었던 Claudio Leonardi
교수와 Armando Rigobello 교수의 이득수 회고담이 있었다. 레오나르디 교수를 말한다면
이득수 선생을 마치 양자 아들같이 돌보아주면서 같이
공부를 한 스승이었다. 이득수 선생이 언젠가 나에게 말했지만 이러한 스승들을 자기가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태리에서 자기의 중세라틴어 공부는 다르게 발달했을 것이라고
했다. 리고벨로 교수는 울음을 억지하면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나는 이태리어를 이해 못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못 알아들었지만
그 감정은 알아보았다.
아침 둘째 번 회의는 주제가 ‘카로링거 왕조시대’ (L'epoca carolingia, 7-9세기) 였고
페루쟈 대학의 Enrico Menesto 교수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이득수 선생이 이태리에
와서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한 대학이 이 페루쟈 대학이었다. 그래서 페루쟈 대학도
이 짐포지움에 참가한 것이다. 첫 강연으로 벨지에의 나무르 대학에서 온 Guy
Philippart 교수의 ‘Bonifacio 와 Leoba' 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필��파르 교수는
이득수 선생의 한 친지로서 나도 그의 이름은 많이 들었다.
‘보니파치오와 레오바’에 관한 제목은 이득수 선생이 한국말로 쓴 논문도 있고 또
이 논문을 나에게 독일말로 좀 번역해 달라고 해서 번역을 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이어 볼로냐 대학의 Raffaele Savigni 교수가 ‘카로링거 시대’에 관한 강연이 있었고
다음으로 파리 쏘르본느 대학에서 온 Christiane Veyrard-Cosme 박사의 ‘이득수와
알추인 성도전’ (I Deug-Su et Alcuin hagiographie) 에 관한 프랑스말로 한
강연이 있었다. 베이라르-코스머 박사는 독일말도 좀 해서 이득수 선생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만나지는 못했지만 논문을 통해서 잘 안다고 말했다.
유럽의 중세학을 전공으로 하게 되면 이렇게 유럽 내에서는 ‘국제적’이 되는가 보다
내 혼자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3>
아침 셋째 번 회의는 ‘성자학과 신비설’ (Agiografia e mistica) 이라는 주제로
볼로냐 대학 쥬셉뻬 크레마스콜리 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첫 번째 강연으로 베르린의
자유대학 중세학과 Fritz Wagner 교수의 ‘성자 베른하르트 폰 클레르보 와
이득수’ (Bernhard von Clairvaux und I Deug-Su) 라는 제목이었는데 바그너교수가
갑자기 병으로 입원하게 되어 아렛조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그너 교수는 이득수 선생으로부터 말은 많이 들어오던 사람으로 이득수선생의
독일대학 친지이고 베르린 자유대학 중세학과에서 교환교수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까지
힘써준 사람이다. 그래서 6년 전부터 이득수선생이 매년 겨울에 베르린에 와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바그너교수의 독일어로 쓰인 강연을 들어보지 못한 것도 유감이었지만
바그너교수와 사귈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더 유감이었다.트렌토 대학과 레쳬 대학에서
참가한 Degl'innocenti 교수와 Santi 교수의 성자학에
대한 강연이 있었는데 다 이태리어로 발표한 논문이었고 싼티교수의 강연은 너무
길어서 못 알아들으면서도 지루한 강연이었다. 그러나 강연 중에 이득수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아 이득수와 심히 관련이 깊은 논제의 강연인 듯 보였다.
사회자가 몇 번이나 시간이 ‘오버’라는 팁을 받아서야 강연을 끝냈다.
무슨 짐포지움이라고 해서 어디를 가거나 이러한 지루한 강연이 꼭 한 둘은 있기 마련이다.
못 알아들은 성자학의 강연들이 끝나고 난 뒤 휴식시간 겸 서서 먹는 간단한 점심부페가
나왔다. 물론 이태리여서 ‘파스타’가 빠질 리가 없었다. 짐포지움을 준비한
스텔라교수의 노력이라고 하겠다. 이 짐포지움은 타계한 이득수선생을 추모하는
모임이었지만 후계자가 자기소개를 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저기 쫓겨 다니는 스텔라교수의 모습이 민망스럽게도 보였다.
너무 바빠서 쫓겨 다니는 사람과 시간을 내어 한가하게 얘기할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었다. 콜라나 씨리즈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점심 휴식을 끝내고 이어 오후의 첫 번째 강연으로 씨에나-아렛조 대학의
Caterina Tristano 교수의 사회로 아렛조 대학의 Patrizia Stoppacci 교수와
Teresa d'Alessandro 교수의 ‘중세의 텍스트’에 관한 발표가 있었는데 너무
전문적이고 또 이태리어로 발표해서 조용히 앉아 그냥 듣기만 했다.
이득수선생의 가족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여 하루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고역을 하는 것을 보니 좀 안되었다. 휴식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독일 그라잎스발트
대학에서 온 포크트-스피라 교수와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 분의 이름은 이득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적이 없는데 그라잎스발트 대학에 자주 가서
강연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리고 그 대학에 있는 렝거박사를 아렛조에 초대해서 연구생활을 하게끔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포크트-스피라교수는 친절한 분이었다. 내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내가 누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득수 선생집에서 지금 머물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분의 전공은
중세학이 아니고 고전학이었다.
오후의 두 번째 강연은 피렌쳬 대학의 Paolo Cappellini 교수의 사회로 ‘유럽의 관념’에
대한 주제로 강연이 시작되었다. 독일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의 고전학과
Gregor Vogt-Spira 교수와 그의 조교 Almut Renger 박사의 <‘유럽’에 대한 연구>라는
강연이 있었다. 독일말로 하는 강연이어서 이해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말구마다 다
흥미 있게 들었다.
이 강연은 이득수 선생이 학계에 제기한 물의의 ‘유럽관념’을 주로 다루는 테마였다.
유럽의 중세학자들 사이에는 현재까지 ‘유럽’이라는 관념이 카로링거 왕조시대에 나온
개념으로서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유럽’을 통괄하는 개념으로 믿어져 오고
있는데 이득수 선생은 유럽에 관한 학설을 역사적인 ‘원본’을 찾아 읽어 이와는 반대로
‘유럽’이라는 관념은 고전시대로부터 예를 들어 skyth족 시대의 크림반도에서 현
유럽까지 미치는 지리적인 개념과 관계 된다는 새로운 학설을 내 세웠다.
이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나에게 몇 번 읽으라고 보내준 글들이 있는데 나의 취미와는
좀 달라서 겉으로만 두루 읽어본 것이 탈이라 ‘유럽’에 대한 이득수선생의 정의를
정확하게 얘기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다시 이 글들을 읽어보아야 하겠다. 여기서
이득수 선생이 언제나 강조하던 것이 <‘원본’을 읽으라>는 말이었다.
<4>
‘한국과 유럽’ (La Corea e l'Europa) 이라는 제목 아래 이동진 전대사의 사회로 오늘
마지막 회의가 시작했다. 이미 말했듯이 이동진 전대사는 씨에나대학 비교문학연구소
주관으로 나오는 ‘콜라나’ 씨리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이득수선생과 두터운 친교가
있던 분이다. 이태리 말로 청중에게 인사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이태리말도 제법 하셨다.
내가 첫 번째로 차례가 와서 ‘괴팅겐대학 도서관의 한국고소설 모음’에 대한
독일말로 쓴 논문을 짤막하게 중요한 점만 간추려 얘기 했다. 그리고 왜 괴팅겐대학
도서관의 한국고소설 자료가 이득수선생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내용의 얘기를 이어
몇 마디 하였다. 스텔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짐포지움에 참가한 청중들이
독일말을 한다고 하여서 모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마치 독일어 작문 시간마냥 가능한 한 문장을
짤막하게 그리고 쉬운 문법으로 나와 이득수 선생과의 관련, 이득수 선생과 괴팅겐과의
관련에 대해서 말했다.
스텔라 교수가 내 바로 앞에 앉아서 내 강연을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것을 보았다. 1
998년 이득수 선생으로부터 나를 씨에나대학 비교문학연구소 한국문학 고문으로
인정한다는 공식문서가 왔더라는 얘기를 하자 이를 다시한번 긍정하듯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나를 이어 나폴리 대학 한국학 교수로 있는 리옷또 교수의 ‘이득수와 한국’이라는
강연이 있었다. 이 리옷또 교수를 말한다면 나와 이동진선생이 아침에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알게 된 분인데 이 분의 한국말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리옷또 교수의 한국말 발음도 그렇거니와 하나도 어색한 점이 없는 한국말을 하는
분이었다. 한국 경희대학 출신으로 홍길동전이란 책자를 이태리말로 막 출판해 내었다고
가지고 와서 내가 한 벌을 선물 받았다. 원래는 한국고대사 전공인데 한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키도 작고 똥똥한 이태리 사람인데 Sizilia 의 팔레르모에 집이 있어서
나폴리 대학으로 왔다 갔다 원거리 출근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태리에 오면
자기 집에 꼭 찾아오라고 이미 초대를 하기에 우선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에 관한 마지막 강연이 끝나고 짐포지움의 프로그램에 의해 이득수 선생의 큰딸
엘리자와 둘째딸 싸비나의 바이오린과 피아노 협주곡 연주가 있기로 되어 있었는데
엘리자가 바이오린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싸비나가 혼자 피아노 독주를 했다.
마지막 곡으로 아버지 이득수 선생이 좋아하던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곡을 연주하여
청중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저녁에는 씨에나대학에서 초대를 하여 이득수 선생 가족을
비롯해 약 10여명이 시내의 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 모였다.
식당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이러한 모임은 서로 사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즐거운 담화를 나누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득수 선생의 가족들도 오늘 만족한 마음으로 귀가했으리라고
믿는다. 2월 13일로 이득수선생이 가신지 꼭 일 년이 되었다.
윗 사진은 왼쪽 첫째 이득수 선생부인 마리아, 끝에서 두째 망내딸 마리아-테레자
맞 건너편 아들 삐에트로, 오른쪽 첫째 스텔라교수, 두째 포크트-스피라교수,
세째 둘째딸 싸비나아래사진은 오른쪽으로부터 첫째 리옷또교수, 두째 스텔라교수,
세째 포크트-스피라교수
내 강연의 두째편 독일말로 쓴 '이득수와 괴팅겐' :I Deug-su und Göttingen
Es war im Sommer 1986 im Internationalen BegegnungsZentrum (IBZ) der Universität Göttingen, als ich I Deug-su
erstmals kennenlernte. Wenn ich mich an jenen Tag erinnere, war es ein sehr heißer Sommertag.
Ein koreanisches Professorenehepaar, das ich seit meiner Universitätszeit in Korea kenne, war von mir als Gast der
Universität im IBZ untergebracht worden. Deshalb ging ich bei ihnen fast tagtäglich aus und ein.
Auch an jenem Nachmittag besuchte ich das Ehepaar. Im Zimmer war die Luft sehr drückend und heiß, sodass wir uns
in den Garten des IBZ begaben, um uns etwas Kühlung zu verschaffen.
Mein Bekannter, Yi Ki-mun, ein Professor der Koreanistik an der Seoul National University, erzählte mir, im unteren
Gebäude wohne eine koreanische Familie aus Italien. Er sagte, den Mann sähe er nur ab und zu, er scheine immer
sehr spät abends nach Hause zu kommen und ein fleißiger Mann zu sein.
Während wir uns im Garten unterhielten, kam ein koreanisch aussehender Mann in meinem Alter aus dem unteren
Appartmentsgebäude uns entgegen. Er hielt ein kleines Mädchen im Vorschulalter an der Hand. Er stellte sich mir
als Mittellateiner aus Universität Siena vor, was mich sehr beeindruckte. Wie konnte ein Koreaner in Italien, in der Höhle
des Löwen, als Mittellateiner eine Professur erlangen und sich unter den Löwen behaupten.
Er muß ein aussergewöhnlicher, genialer Mensch sein, dachte ich. Die Begegnung mit I Deug-su hat mich innerlich
sehr bewegt. Zu jener Zeit war I Deug-su als Gast des Max-Planck-Instituts für Geschichte in Göttingen und wohnte
mit der Familie im IBZ. Das kleine Mädchen damals, das ich gesehen habe, ist Elisa, die älteste Tochter von I Deug-su.
Dann haben wir uns eine Zeit lang aus den Augen verloren.
Erst am Ende der 90er Jahre war I Deug-su öfters, aber immer für kürzere Zeit, als Gast des Max-Planck-Instituts
in Göttingen. Da wir uns nun öfters trafen, hatte ich Gelegenheit, I Deug-su auch menschlich näher kennenzulernen.
Er sprach Koreanisch mit starkem Akzent des Südostdialektes, was auf mich vom Anfang an sehr sympatisch wirkte, denn i
ch stamme ja auch aus dem Südosten Koreas. In unseren Gesprächen stellte sich nach und nach heraus, dass wir
aus demselben Stadtteil von Pusan stammten und auch gemeinsame Freunde hatten. So kamen wir auch menschlich
sehr nahe. Jedes Mal als er in Göttingen war, suchte er mich auf, zeigte reges Interesse an Koreanistik.
Da ich in der Universiätsbbilbiothek in Göttingen als Fachreferent für Koreanistik Dienst tat, wollte er von mir fachliche
Anregungen über koreanische Literatur und Literaturwissenschaft. Im März 1998 erhielt ich von I Deug-su eine Urkunde
"Nomina consulente esperto di Letteratura coreana del Centro Interdipartimentale", worauf ich ihm mit einem Besuch
in Siena und Arezzo erwiderte. Der einwöchige Aufenthalt in Pontignano war unvergeßlich.
I Deug-su interessierte sich besonders für die Sammlung koreanischer Erzählungsliteratur der Göttinger Universitäts-
bibliothek. In der Göttinger Sammlung sind auch etwa 70 Handschriften enthalten, die früher zur königlichen Bibliothek
Naksŏnje gehörten. Im Herbst 2002 bat I Deug-su mich, diese Handschriften in Fotokopie anzufertigen und nach
Arezzo zu schicken. Da er offenbar nicht genau zu wissen schien, wie umfangreich diese Handschriften sind, wollte er
das gesamte Material auf ein Mal nach Arezzo geschickt bekommen, was aus technischen Gründen der Bibliothek in der
kurzen Zeit nicht möglich war. Eine der Familiensaga, Wanŏl hoemaeng'yŏn, umfasst ca. 6.000 Blätter, das sind
ca. 12.000 Seiten.So erhielt er zuerst vier von mir ausgewählte Titel, nämlich 1) Tong'yugi, 2) Susa-yumun (Leningrader
Exemplar), 3) Poŭn-kiurok und 4) Hwa-Chŏng sŏnhaengnok, Alleine diese vier Titel umfassen mehrere tausend Blätter. Bei diesen Handschriften handelt es sich um handschriftliche Exemplare, die hauptsächlich von anonymen Hofdamen im
Palaststil, kungch'e genannt, niedergeschrieben sind. Da sie in den meisten Fällen von Frauenhand stammen, resultierte
I Deug-su daraus, diese handgeschriebenen Erzählungen als "Frauenliteratur" zu titulieren, was in der Sache nicht ganz
gerecht wird. Denn von den meisten Erzählungen sind die Verfasser unbekannt.
Ausserdem regte mich I Deug-su an, einen Katalog dieser Sammlung neu zusammenzustellen und in der Reihe Collana
zu veröffentlichen. Auf seine Bitte hin saß ich den ganzen August 2003 vor dem Computer, um einen neuen Katalog
zusammenzustellen. I Deug-su bombardierte mich fast jeden Tag mit Faxen und Telefonanrufen, und forderte mich auf,
den Katalog zügig abzuschließen. Er wußte wahrscheinlich schon, dass er unheilbar krank war. Am Ende dieses ermüdenden August war der neu zusammengestellte Katalog fertig. Der Katalog trägt Bandnummer 9 in der Reihe Collana, wofür ich
I Deug-su herzlich dan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