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사용된 문자를 이르며,
상형문자로 분류된다. 기원전 3000년대 초반에 발생하여 기원전 2700년대에 문장을 표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상형문자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문자 + 표의문자 + (자음만 있는 불완전한) 표음문자로 변형된다.
가장 이른 예시로
아비도스의 무덤에서 기원전 33세기경에 기록된 상형문자가 발견되었다. 이전까지 이집트 상형문자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다는 설이 강했는데 기원전 33세기의 이집트 상형문자가 동시기의 쐐기문자보다 형태가 더 발전된 문자체계였음이 밝혀져 오히려 쐐기문자가 이집트 문자보다 더 오래되었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해졌다.
문자체계가 갖추어진 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상형문자로 기록된 가장 최근의 비문은
서력기원 39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거의 3500여 년 가까이 쓰였으니 가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랫동안 쓰였던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자는 고대 이집트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 고대 이집트어의 후예가 중세까지 쓰던
콥트어이다. 현재는
아랍어로 대체되어
사어가 되었고,
이집트 아랍어에서 쓰이는 단어들을 제외하면 실생활에서는 당연히 쓰이지 않는다.
[1] 다만 학자들과 학부생들을 중심으로 수요는 있는 편. 한편으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표음성을 갖게 되고 유럽과 중동 각지로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고유 문자가 되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표음문자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먼 기원으로 둔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기원이 아닌 표음문자는
가나,
한글,
주음부호 등 정말 몇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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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1왕조의 파라오인 호르 아하의 이름이 적힌 도편. 이 시절에 이미 이집트 상형문자의 초창기 형태가 드러난다. 참고로 이 사람은 대략 기원전 31세기 인물이다. |
흔히 '히에로글리프'라고도 하며, 이는
그리스어로 '신성한 글귀'라는 뜻의 'τὰ ἱερογλυφικὰ γράμματα'(타 히에로글리피카 그람마타)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md nchr(메두 네체르 = 신성한 글귀)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때문에 히에로글리프를 '신성문자'로 번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문자의 해독과 관련된 이야기는
로제타 석 문서 참고.
사용된 기간이 매우 오래된 탓에 시대에 따른 변화 정도가 큰 편으로, 대체적으로 시대가 갈수록 자형이 점차 단순해지고, 글자수는 더 많아지는 양상을 띈다. 이 때문에 후기의 히에로글리프는 그림을 그대로 문자로 만든 상형문자보다는 기호화된
표의 문자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표음 문자로서의 기능 또한 가지고 있는 복잡한 체계를 가지게 된다. 순수 상형문자에서 시작한
한자의 변천과정과 유사하다.
[2]가령 이집트어로 '가르치다'라는 뜻의 동사는 오리모양의 글자와 발 모양의 글자, 이집트독수리 모양의 글자 그리고 매를 들고있는 남자의 그림으로 표기되는데, 여기서 오리모양의 글자는 s, 발모양의 글자는 b, 이집트독수리 모양의 글자는 A
[3]의 음가를 나타내는 발음기호이며, 맨끝에 매를 들고있는 남자의 모양이 바로 sbA의 뜻이 무엇인지 한정시켜주는 한정사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격언 중에
학생의 귀는 등에 있다. 때려서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매를 든 남자는 바로 선생을 묘사한 것.
그런데 이집트 문자에는 모음을 전혀 표기하지 않을 뿐더러 이집트어는 문법에 따라 모음이 바뀌는 굴절어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원 발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따로 참조할 만한 단서가 없는 이상 학계의 발음 관행에 따라 읽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편의상 문자 '이집트독수리⟨A⟩ˈ와 '앞팔⟨a⟩ˈ, '갈대 하나⟨j⟩'는 /aː/로, '메추라기⟨w⟩'는 /uː/로, '갈대 한쌍⟨y⟩'은 /iː/로 읽고, 이외의 자음들 사이에는 /ɛ/를 붙여 읽는다. 예컨대 상술한 ⟨sbA⟩를 /sɛbaː/(세바)로 읽는 식. 당연히 당대에 실제로 사용되었을 발음과는 차이가 있다.
[4] 실제 발음은 다른 주변국의 기록에 나오는 이집트 인명, 지명 등을 대조하여 확인했다. 특히 아카드어 비문과 점토판은 숫자도 많은 편인데다 그 언어부터가 신왕국 시기까지 국제어로 널리 쓰였고, 무엇보다 아카드어 표기에 사용된 쐐기문자가 음절문자라 모음까지 알 수 있었으므로 청동기시대 이집트어 재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리스어/콥트어 문헌도 큰 역할을 했다. 현대인들에게도 친숙한 세트(그리스:Σήθ, 콥트:Ⲥⲏⲧ), 토트(그리스:Θώθ, 콥트:Ⲑⲱⲟⲩⲧ) 등 이름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표기를 따른 것이다. 그 외에 파라오(Φαραώ)란 단어도
70인역 성경의 그리스어 표기에서 비롯된 발음이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가령 기원전 24세기경부터 문자를 기록하던 서기들은 공식기록이외에 정부문서나 행정업무를 위한 기록을 위해 기존의 복잡한 도형들을 간소화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신관문자(Hieratic), 또는 승용(僧用)문자라고 부른다. 신관문자는 시대에 따라 점차 더 추상화되는 양상을 띠는데 가령 중왕국 시대의 신관문자와 신왕국시대의 신관문자만 하더라도 전문가조차 파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것이 보인다. 이후 식자층이 좀 더 광범위하게 퍼져가면서 극도로 단순화된 글자체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민중문자(Demotic)'라고 부르며 이집트 상형문자의 최종진화형으로 여겨진다. 유명한
로제타 석에 기록된 문자도 그리스 문자와, 오래전부터 내려온 정체, 그리고 민중문자이다.
신관문자의 좋은 예시. 이집트 제18왕조 시절인 아멘호테프 1세 때(기원전 1514~1493년경) 글씨연습용 석판에 쓴 글귀로 중왕국시대의 문학작품인 <아메넴하트의 교훈>을 담고 있다. 본 텍스트는 제12왕조의 개창자 아메넴하트 1세가 아들 센우세레트 1세에게 써준 교훈서로, 쿠데타로 전왕을 죽이고 왕이 된 아메넴하트 1세의 사정을 반영하듯 '네 주변 부하들을 항상 철저하게 감시하라. 아무도 믿지 마라. 네 형제도, 알고지내는 친구들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말아라.'고 쓰였다.
이집트 제26왕조 시절에 민중문자로 기록된 계약서의 모습이다. 무슨 아랍문자마냥 극도로 추상화된 형태라서 원래 글자가 어땠는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는데, 이 문서는 갑과 을의 상품거래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상품의 양도일자와 대금 지불방법, 그리고 계약 당사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자 이집트인들은 빠르게 그리스 문화에 물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풍습은 여전히 지켜졌지만, 당장 파라오부터 이집트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배울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밑의 토착인 관리들이 알아서 그리스어를 배워 세금을 내는 이집트 서민들과 파라오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인이 출세하는 법은 이와 같은 궁정관리나 행정관이 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는 이집트어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기존의 어렵고 난해한 민중문자는 이윽고
그리스 문자를 개량한 새로운 문자로 대체된다. 이것이 바로 콥트 문자.
콥트 문자는 그리스 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그리스 문자로는 표기할 수 없는 소리들과 인두음을 표기하기 위해 기존의 민중문자 기호 7개를 추가로 받아들였다. 오메가(ω) 뒤로 자리잡은 문자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훗날 샹폴리옹이
로제타 석을 통해 이집트 상형문자가 표음문자의 기능도 하고 있었음을 밝혀낸 힌트가 되기도 했다.
최후로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 비문의 모습. 상형문자 자체가 쇠락하던 시기라 그런지 전성기에 비하면 글씨도 매우 조잡하고 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문구로는 이렇게 쓰여있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타아누스의 치세로부터 110년 (394년 8월 24일), 호루스의 아들 메룰 앞에서, 에스멧 아콤 (판독불가) 손에 의해 (판독불가) 에스멧의 아들이자 이시스 여신의 두번째 가는 예언자, 영원할지어다. 위대한 신이자 아바톤의 군주 메룰
[5]이 말하다.
그림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기록자가 상형문자를 제대로 모르는지 아래에는 민중문자 비문도 있는데, 민중문자로는
나는 에스멧 아콤이며, 이시스 여신의 기록의 (판독불가) 집의 서기이자, 이시스 여신의 둘째가는 예언자이자 어머니가 에스웨레인 에스멧 하네카테의 아들이다. 나는 이 만둘리스
[6]의 조각을 영원히 남기는데, 그는 나에게 언제나 자애로운 얼굴 (판독불가) 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오시리스의 탄신일 그의 (판독불가) 봉납축제에서, 110년
한편 이집트가 그리스의 문화권에 들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상형문자를 아는 이들의 수는 점차 줄게되었다. 애초부터 정통 글씨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신관들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민중 문자는
로마 제국 통치기에는 콥트 문자에 밀려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도를 탄압하기위해 사원들의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상형문자를 아는
이집트인은 더더욱 줄게 되었다. 결국 540년에 아스완의 필레 섬에 있던 마지막 사원인
이시스 신전이 폐쇄되면서 상형문자를 전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졌다. 이후 불과 100년 후인데도 이슬람 제국이 이 땅을 정복했을 때에 이집트 상형문자는 깡그리 잊혀서 당대에 이미 악마의 주문이 새겨진 비밀의 문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