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판 정신대 ‘공녀’
김정현(고려대 강사)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성의 해방은 시대적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편승하여 성을 상품화함으로써 돈을 벌려는 풍토가 유행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 폭행은 여전히 강간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는다. 성은 인간의 자존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강요된 성은 자아를 파괴한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적인 성 범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시에 남자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대신에 여자들은 성의 헌납을 강요당하는 적이 많았다. 힘이 약한 민족이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 경우 여자들의 성은 파괴될 위험에 노출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 우리의 여인들은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야욕에 희생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조선의 여인들이 일본과 청나라에 끌려갔다. 특히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은 더렵혀진 몸을 깨끗이 한다는 명목으로 수차례 목욕을 하였지만 ‘환향녀’라 하여 부모나 남편에게까지 배척당하였다. 원래 외적의 방어는 전통적으로 남자의 임무였다. 그런데도 조선의 남자들은 외적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전가시켰으니 그녀들은 졸지에 ‘화냥년’의 기원이 되는 누명을 뒤집어썼던 것이다. 집단적인 성 범죄는 명백한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며, 가해자가 개인적인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더 크다.
공녀가 발생한 사연은
13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태풍의 시대였다.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된 몽고가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해 나감에 따라 사방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 여파는 우리나라에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몽고군은 1231년(고종18)에 마침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인들은 침략군에 맞서 수십 년 동안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고려는 대부분의 지역이 유린당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였다. 특히 고려 여인들이 몽고군에게 당한 수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몽고군은 저항하는 방어대를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면 성인 남자는 대부분 살해하고 남자 아이와 여자들을 사로잡아 가곤 했다.
몽고의 제6차 침략이 시작되는 때인 1254년(고종41) 한 해 동안에 무려 206,800여 명의 남녀 고려인이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기록을 참고하건대, 전쟁기간 동안 몽고군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한 고려 여인의 수는 수십만 명이 되었을 것이다. 몽고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으며 특히 여인들은 그 위에 성적인 학대까지 받아야만 했다.
고려 여인들은 전쟁 기간에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1259년(고종46) 강화가 성립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지역의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으며 여기에는 사람, 특히 여성까지 포함되었다. 고려는 오랫동안 저항한 대가로 왕국을 유지하였지만 속국의 처지였기 때문에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원은 일본정벌을 단행하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를 고려에게 대부분 전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배기간 내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특산물을 요구하는 등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정부는 금과 은, 사냥용 매, 인삼, 잣 약재 등을 마련하여 보내느라 백성들을 수시로 닦달하였다.
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분야에 종사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고려인들은 공물로서 원에 끌려갈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의 일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세되어 궁중의 환관으로 보내졌으며, 여성의 일부는 처, 첩, 궁녀, 잡역부 등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고려여성의 일부가 마치 공물처럼 원나라에 바쳐졌으니 이들이 바로 ‘공녀’였던 것이다. 공녀의 선발은 일방적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1274년(원종15)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로 끌려간 시초이다. 이는 원에 투항한 남송의 중국인에게 처를 얻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전례에 없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 그 인원을 채워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고려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다 한다.
색출당한 고려 여인들은 말만 처이지 사실상 그들의 노리갯감이었다. 1275년(충렬왕1) 원은 칭기즈칸이 13국을 정복한 이래 그 나라들이 미녀를 바치고 있다면서 고려도 여자를 바칠 것을 은근히 종용하였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고려는 즉시 혼인금지 명령을 내리고 처녀를 색출하여 원에 보냈다. 당시 여기에 선발된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김찬이라는 시인의 동녀시가 잘 대변하고 있다.
온 세상이 갑자기 한 집이 되니
동쪽 당에 명령하여 궁녀를 바치라 하네
규중에 거처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더니
관청에서 선발함에 심사하는 많은 눈을 어찌 감당할까
살짝 다듬은 근심어린 두 눈썹이 파란데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억지로 들게 하니 온통 빨개지누나!
어린 꾀꼬리가 깊은 숲속 나무를 떠나려 하고
젖내 나는 제비가 날아 옛 둥지를 잃으려 하네
낭원에 옮겨 심은 꽃은 금방 핀다 하고
광한에 붙여진 계수나무는 편안히 자란다 하지
떠나가는데 미적미적 대지만 솜털 깔린 수레에 실리고
바쁘게 떠나려 하자마자 준마가 달리누나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질수록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
(*낭원은 신선이 산다는 곳, 광한은 달의 궁전을 의미하며, 모두 원나라 궁궐을
비유한 것임)
규중에서 세상모르고 자라던 어린 소녀들이 선발위원들 앞에 끌려나와 발발 떨며 얼굴과 몸매를 자세히 심사받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행하게 심사에 통과된 소녀들은 떠나려 하지 않지만 강제로 수레에 실렸다. 혼절하였다 깨어 보니 고국은 이미 멀어진지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들은 과연 누구를 원망하였을까? 그녀들이 구박받거나 병들었을 때 도움 줄이 어디 있으랴! 이후 공녀의 헌납은 본격화하여 고려는 원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여자를 바쳐야만 했다. 고려는 계속되는 공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과부와 처녀를 색출하여 원나라에 보내기 위해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몽고인들이 고려 여인을 고토록 탐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정복자로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심리적 요인과 다처의 풍습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환경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들은 춥고 건조한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함께 생화하여 성질이 드셌다. 몽고여인들은 춥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생활한데다 말 젖을 주식으로 하여 곡물, 채소, 과일 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피부가 빨리 노화되어 윤기가 없었다. 이에 비해 네 계절이 뚜렷하여 습도와 온도가 알맞은 기후 속에 살며 곡물, 채소, 과일 등을 적당히 섭취한 고려 여인들은 피부가 뽀얀 미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 잘하고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한 고려여인들은 몽고남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여인들은 피눈물을 쏟으면서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가 노동력 착취와 성적인 학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눈물 실은 마차는 끊이지 않고
고려의 지배층은 원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공녀 색출에 광분하였다. 백성들의 원망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공녀를 색출하는 방법은 한 마디로 ‘인간사냥’이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충렬왕비가 되어 위세를 떨친 제국공주가 측근들에게 양가의 자녀로 나이가 14세에서 15세인 자를 뽑아 올리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순군(경찰)과 홀치(왕의 경호부대)등에게 인가를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밤중에 침실로 돌입하거나 노비를 결박하여 자녀가 숨은 곳을 캐물었다. 그러자 비록 자녀가 없는 집이라도 놀라고 소란하였으며 원망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 찼다고 한다.
제국공주는 친정인 원나라에 고려의 자녀를 선물로 가져간 셈이다. 고려 여인들은 공녀로 선택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여 기피하였다. 딸을 가진 집에서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일찍 혼인을 시키는 풍조가 생겨났다. 딸이 공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사위를 맞아들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가 요구하는 인원을 채우기 힘들어지자, 고려 정부는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1287년(충렬왕13)에는 “양가 집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다음에 혼인시켜라. 어긴 자는 처벌하라”라는 왕명을 내리고 어린 여자들을 색출한다. 1307년에는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여기에서 공녀는 나이가 대략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앳띤 소녀가 선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녀의 대상으로는 초기에는 독신녀, 역적의 아내, 승려의 딸, 과부 등이 포함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원은 양가의 처녀를 계속 요구하였으며 그 때마다 민가를 뒤졌다. 공녀에는 완족이나 관인의 딸도 포함되었지만, 주 대상은 일반 백성의 딸로서 ‘동녀’라 표현된 어린 미녀들이었다. 공녀들은 지배층 출신인 경우 황제의 후궁, 귀족 내지 고위관료의 처 혹은 첩이 되어 그런대로 지낼 만하였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백성의 딸들은 원에 귀부한 여러 나라 군인의 처, 원나라 궁실의 궁녀 혹은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다.
일단 공녀로 선발되면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번은 충렬왕 때 세자(후일의 충선왕)가 마음속으로 점지한 왕족의 처녀가 공녀에 포함되어 길을 떠난 일이 있었다. 세자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한 신하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는 모후인 제국공주에게 아뢰어 그녀는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세자의 모후가 원 황제의 딸로서 남편인 충렬왕을 쥐고 흔든 여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은 공녀로 선발되면 어떤 막강한 배경을 지니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공녀로 뽑힌 딸을 구하려다 갖은 수모를 겪은 한 아버지의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충렬왕과 왕비 제국공주가 양가의 여자를 뽑아서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홍규의 딸도 그 중에 뽑혔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보기도 했지만 그의 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사기에게 “내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한사기는 “화가 공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홍규는 한사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제국공주가 이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홍규를 가두어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였다. 제국공주는 또한 그의 딸을 가두어 심문하였다. 딸은 “제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아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국공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땅에 처박아 쇠로 만든 채찍으로 마구 때리도록 하였다. 그녀의 몸뚱이에는 피부가 온전한 곳이 없었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홍규는 무인정권 최후의 집권자 임유무를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딸을 구해낼 수 없었다. 그는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어 사정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아버지는 섬으로 귀양 가고 딸은 원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바쳐지고 만다.
한편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이 원나라 실력자의 총애를 입어 출세하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하급관료를 지낸 기자오의 막내딸은 고려 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인 순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더욱 세력을 떨친다.
그녀와 고려 출신 환관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여 원나라의 정치를 좌우하였으며, 고려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려에 남아 있던 그녀의 친족들은 하루아침에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에 자극받은 고려의 고급 관인들 중에는 일부러 자신의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바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좌정승(종1품)을 지낸 노책은 원나라 황제에게, 판삼사사(종1품)를 지낸 권겸은 황태자에게 딸을 바쳐 권세를 부렸다.
그녀들의 넋이 떠돌고 있다면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천륜에 어긋나는 만행이었다. 어떤 묘지명에는 “동방의 딸들이 뽑혀 서쪽(원나라)으로 가기를 거른 해가 없었다... 모녀가 한번 헤어짐에 아득하여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니, 아픔이 골수에 사무처 병에 걸리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무엇이 있어 지극히 원통함이 이보다 더하단 말인가” 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은 경주김씨 문벌가문 출신으로 왕족에게 시집간 여자였다.
그런데 그 딸이 공녀로 원에가 있어서 근심과 번민 끝에 병이 생겨 일찍 죽었다 한다. 그 딸은 원나라 고급관리의 처가 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앓이 끝에 병들어 죽었으니 일반 부모들은 어떠하였으랴.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그 사실을 숨겨 이웃이 찾아와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당시의 기록은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통한 심정은 고려말 대학자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1335년(충숙왕 복위4) 원나라에 올린 상소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자들을 모아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예쁜 여자도 있고 미운 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미인이라도 놓아 주고 다른 데에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 여자를 얻으려 수백 집을 뒤지게 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 뿐, 누구도 어길 수 없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띠고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 번에 데려가는 여자의 수는 많게는 40명에서 50명에 이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이 서로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를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옷자락을 부여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한 자도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성의 헌납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아 이후에도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공녀는 12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책을 실시한 후에야 비로소 중단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이곡의 상소에 따르면 공녀는 한 번에 많게는 40에서 50명이 선발되었다. 80여 년에 걸친 원 간섭기 동안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아니면 2년에 한 번 바쳐졌으니 수천 명이 끌려갔던 셈이다.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자들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고려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야 그녀들은 성적 수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 초기까지도 가끔 공녀가 보내지지만 그 규모나 횟수에 있어서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의 전쟁 중에 이미 수십만 명이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수천 명이 ‘공녀’라는 이름하에 끌려가서 노리갯감이 되었다. 고려 왕조는 결국 백성의 딸을 제물로 바쳐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세월이 너무 흐른 지금에 와서 당시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현재의 몽고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 좀 무리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 때 우리 나라 여인들을 ‘정신대’란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끌어가서 일본군의 위안부로 만든 만행을 납득할만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도 않고 용서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먼 훗날 고려시대의 공녀처럼 아물지 않는 수치로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