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州紙』의 내용은 『三檜寺 : 在慶雲山西 世傳此寺與昭陽亭 皆三韓時幷建 而千年古屋 少無欹隙處 堦砌則以雜石亂築 而少無細罅納水之處 觀者異之 乙亥之歲 爲火墾者所煨燼』로 『三檜寺는 경운산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절은 소양정과 함께 모두 삼한시대에 세워졌는데 천년된 옛 집이 조금도 기울거나 틈이 생긴 곳이 없으며, 섬돌은 잡석으로 어지러이 쌓았는데 조금도 미세한 곳으로 물이 샐 곳이 없으니, 보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을해년에 화전으로 개간하여 모두 타 없어졌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록이 생산된 시기인 1648년에는 분명 삼회사 입니다. 또한 위치에 관해서도 경운산의 서쪽에 있다고 명시하였는데 지내리의 삼회사 역시 경운산의 서쪽은 맞기에 너무 포괄적이라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다만 지내리의 삼회사를 경운산의 서쪽으로 표시하기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고 오히려 용화산 남쪽 줄기나 수리봉의 서쪽, 또는 지내리 성문안 마을 뒷산의 옛 이름으로(성문고개란 고개가 있지요) 표기 하는게 맞다는 생각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 기록과의 대조를 위하여 잠시 뒤로 돌립니다.
그럼에도 후대의 기록인 『春川風土記』가 삼회사로 기록한 『春州紙』의 원문을 인용하면서도 회삼사로 기록한걸 1994,1997년『춘천의역사와문화유적』에서그대로 답습하였기에 기록의 정확성이나 신빙성으로 보면 춘주지가 훨씬 믿을만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회사와 회삼사가 아직까지도 병행되는 처지인데 사명문제뿐 아니라 위치에 관해서도 어디에도 지금의 삼회사가 기록의 삼회사인지 증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春川風土記』에 기록된 『신북읍 지내리 상리마을 북방 1km에 있으며 불상 2기와 사리탑 1기가 있는데 삼회사의 옛터라고 전한다』고한 기록이 유일합니다. 결국 그 이후의 춘천 역사는『春川風土記』를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합니다.
기록상 위치 확인이 안되던 삼화사지가『春川風土記』에서 위치를 처음 표시한 것입니다. 그럼 그 이전의 기록에는 삼회사가 어디인지 나오지 않았을까요? 직접적인 삼회사의 위치를 언급한 기록은 현재로선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春州紙』에 삼회사와 관련지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바로 은선암 인데 춘주지에는 은선암에 대해 『隱仙庵:在三檜洞 西石峰下』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은선암은 삼회동 인근의 서쪽 바위봉우리 아래에 있다” 라고 읽힙니다. (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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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주) 은선암의 한자는 춘주지와 삼한동기에 다르게 기록되었습니다 춘주지는 선을 (신선仙)자를 쓰고 삼한동기는 (고요할禪)을 씁니다.
은선암은 삼한동기에도 수차례 등장하는데 삼한골의 좌측 수리봉 아래가 분명하고 그 위치는 지난해 답사를 통해서 확인한바 있습니다.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는 삼한동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수리봉아래 절터를 은선암 으로 보는 건 무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럼『春州紙』는 왜 은선암을 삼회동의 서쪽 바위봉우리 아래라고 하였을까요? 더욱이 삼회사를 기록하면서 은선암에 나오는 삼회동을 표시하지 않았을까요? 만일 춘주지에서 삼회사에 대하여 삼회동의 서쪽이라거나 삼회동의 북쪽이라고 표기하였으면 지금의 관점에서 해석이 쉬었을 텐데? 이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선『春川風土記』에서 왜 삼회사를 지내리로 보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의문을 푸는 유일한 열쇠는 청구도입니다. 1834년 김정호에 의하여 제작된 청구도에는 현재의 지내리 부근을 삼회동으로 기록한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 이 지도를 풍토기의 저자인 河野萬世가 보았다면 성문안 마을의 절터와 관련을 지을만 하겠지요. 그럼 다른 지도는 어떨까요? 청구도보다 27년 늦은 1861년 제작된 역시 김정호의 지도인 동여도에도 삼회동이 표기되어있는데, (동여도는 당시에는 가장 장밀한 지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여도 에는 삼회동을 우두산의 한참 동쪽(마적산아래)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12.15일 홍성익 박사 연구실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어느 지도가 맞는 것일까요?
전술된 글 중에 의미 있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春州紙』에 기록된 은선암 부분입니다. 은선암은 삼회동 서쪽 바위봉우리 아래라고 하였지요. 또한 삼한동기에 은선암을 기록 하면서 『은선암(隱禪庵)을 지나갔다. 어둑어둑해지는데 청아한 경쇠소리는 금과 옥을 흔드는 듯하고, 하나하나 깎아 세운 듯 연꽃 같은 뾰족한 봉우리들이 더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모두 표현할 수가 없다. 관암(冠巖)·문암(門巖)·표암(豹巖)·마암(馬巖) 등이 가장 빼어난 봉우리이다』 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은선암의 위치는 지금의 수리봉 아래가 분명 합니다. 전술된『春州紙』가 은선암을 지금의 삼회사로 기록한건 분명 아닐 겁니다. 지내리 성문안 사지에는 서쪽에 바위봉우리가 없으니까요.
지금의 삼회사를 풍토기에서 삼회동의 서쪽에 있어서 삼회사로 표기하였다면『春州紙』는 적어도 삼회동과 은선암 모두를 잘못 표시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결국『春州紙』가 말하는 삼회동은 은선암의 동쪽이니 지금의 삼한골이나 발산리가 되는 거지요.『春州紙』에서 삼회사를 경운산의 서쪽으로 표시한건 아마도 삼회사가 은선암 보다 동쪽이나 북쪽에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만일 송광연이 말하는 삼한사나 구암사등 삼한골의 어느 절이 삼회사라면 경운산의 서쪽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요)
여기서 또 다른 가능성은 삼회사와 삼한사와의 관계입니다. 1648년『春州紙』에 있던 삼회사 기록이 같은 지역을 답사한 1686년『三韓洞記』에는 삼한사로 나오는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삼회사는 유일한 근거가『春川風土記』이고 삼한골이 삼회동 이었을 근거는『春州紙』가 유일하지만 은선암과 맞물려『春州紙』가 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발굴 조사중인 지내리 성문안 사지의 발굴결과가 답을 내야 합니다. 필자의 생각은『三韓洞記』의 저자가 삼회사를 삼한사로 혼동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런 연유로 필자가 주장 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삼회사는『春州紙』의 원문을 인용하여 회삼사 병기가 아닌 삼회사로 통일하여야 한다.
나. 은선암은『春州紙』와『三韓洞記』의 문헌을 근거로 현재의 삼한골 서쪽 수리봉 아래이다.
다. 삼회동은 지내리가 아닌 발산리 삼한골 입구 마을로 보아야 한다.
라. 삼한동기에 나오는 삼한사는 삼회사의 오기이다.
이런 가설은 정설로 자리 잡기위해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함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기록된 문헌들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 질수도 있는 걸 경계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기록되고 시간이 지나면 정설로 자리 잡는다면 역사에 정확한 기록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들게 됩니다.
이미 삼회사는『春川風土記』에서도 오기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데『춘천의역사와문화유적』은 그걸 검증 없이 회삼사로 표기하였습니다. 이는 분명한 오기라고 보입니다. 만일『春川風土記』에서 회삼사로 기록하려면『春州紙』의 원문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 회삼사로 표기하였는지 밝혀야 하지요.
삼한동과 지내리 사지와 관련한 문헌은 『春州紙』 『三韓洞記』 『春川風土記』 『重菴集』이 현재 밝혀진 문헌의 전부입니다. 이 문헌을 토대로 검증을 하여야 한다는 반증이지요. 문헌을 토대로 지형적 특성을 감안하여 가설을 이어가고, 추 후 발굴 조사등을 통해 정설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참고문헌 : 『春州紙』 1648년 엄 황
『三韓洞記』 1686년 송광연
『重菴集』 19세기 김평묵
『청구도』 1834년 김정호
『동여도』 1861년 김정호
『春川風土記』 1935년 河野萬世
『춘천군의역사와문화유적』 1994년 한립대박물관
『춘천의역사와문화유적』 1997년 한립대박물관,
번역문 자료 협조 : 권혁진 박사(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동여도,청구도 지도 협조 : 홍성익 박사 (강원대 사학과)
첫댓글 끈질긴 노력의 결실로 보여 논고가 더욱 값집니다!
<풍토기>의 '회삼사'가 잘못된 이름이라는 건 이미 역사문연 창립 때의 지표조사간다고 할 때 내가 글을 올려 알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위 번역문도 소개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 제대로 읽혔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선생의 꼼꼼한 비교로 드디어 엉터리가 드러나게 됐습니다!
송광연의 <삼한동기>는 내 생각으론 문제가 있는 글로 여깁니다. 옛 지도의 '삼회동' 표기는 의문입니다. ~동은 골짜기를 의미하는 말이고, 왜 삼회동과 삼한동이란 명칭이 불과 40년 사이에 같이 쓰였을까를 생각하면 서로 다른 곳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경운산 서쪽이면 지금의 삼한골이 맞겠고, 화전민이 살 만한 곳이면 지내리나 발산리는 아닐 것도!
그럼 우리가 서너 번씩이나 갔던 성문안 그곳, 지금 한림대에서 발굴하는 거긴 뭐였단 말인지 더 궁금해집니다. 거기도 분명 절터였는데!!
저도 궁금한데요 발굴중에 무언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현재상태로는 작은 암자로 추정되는 규모같아요...
건물지가 축대2단에 건물하나인지 두개인지.....근데 더이상 발굴을 안할거 같더군요...ㅠㅠ
우리가 답사갈때 와편나오던곳 불상이있던 바로 앞이 유일한 건물지더군요..
송광연 춘천부사에 대한 정리부터 해야 싶네요... 삼한동기라고 남긴 글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도 궁금해 지네요.
송관연부사 글을 수없이 읽었는데 송광연 부사글에서 현재관점으로 문제제기가 될 글은 법화사부분입니다. 법화사를 현재관점에서 볼것이냐 아니면 삼회동인근에 법화사가 있었느냐도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또한 현재 용화산의 법화사도 보아야 하는 대목이 바로 청평사보다 일찍있었다는 건자야라는 사찰입니다. 이부분은 따로 글을 쓸 예정입니다. 지도를 다시 보았는데 청구도에도 삼회동은 지내리가 아니라 훨씬 동쪽으로 나오더군요..
오늘 문화원에 사무실 사용신청서쓰러 갔던길에 권혁진 박사를 만났는데 권박사말이 송광연이 춘주지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쓴 지리지가 있다고 하는데 발문만 있고 원본이 전해지는지 확인이 불가능해서 이부분도 찾아보아야 할 대목으로 보입니다. 분명 삼회동은 삼한동과 연관이 있는것으로 보이는데 춘주지가 잘못기록한건지 송광연이 잘못기록한건지 위치는 발산리 삼한골 주변이 맞는듯 보입니다.
@뒤뚜루(오동철) 송광연의 지리지라? 첨 듣는데, 규장각에서 <범허정집>에 붙인 해제를 보면 그건 ≪춘주승람(春州勝覽)≫! 그 발문의 내용을 보면 단지 엄황의 춘주지를 <동국여지승람>의 편목대로 편차하면서 제영들을 뽑아 묶은 정도라고 하니 다른 내용은 크게 기대할 것이 없어 보임!
엄황과 송광연, 두 사람 중에서라면 단연 엄황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생각입니다. 엄황 춘주지는 차근차근 이주 같은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나며 스스로 즐기듯 실감있게 서술해나간 책이니까요.
또 드는 의문은 엄황의 <춘주지>에는 '삼한동'이란 말이 여기서 왜 안 쓰였냐는 겁니다.
우리 첨 답사 때 내가 김평묵의 <중암집>에 나오는 한시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1877년의 이 자료와 다른 추가 자료들을 옆 '춘천의 역사 - 조선시대'방에 다시 올리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