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공파(松窓公派)의 파조(派祖) 유록(綏祿)
공파소개
송창공파의 파조 유록(綏祿)은 1579년(선조 12) 정월 23일에 증통례(贈通禮) 흥문(興 門)과 증숙인(贈淑人) 보성오씨(寶城吳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증 통정대부 좌승지다. 난곡 송병화(宋炳華)의 묘갈(墓碣)에 따르면 자가 유지(綏之)인 그는 어려서부터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기개(氣槪)와 절조(節操)가 있었다. 항상『소학(小學)』과『춘추(春秋)』를 읽어서 그것으로 마음을 세우고 처신하는 법도를 삼았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끓이지 못할 때도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때도 안연(晏然)하였다. 세속 사람들이 명리(名利)에 얽매어 분주함을 보아도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1613년(광해 5)에 광해군이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적신(賊臣) 한찬남(韓瓚男)이 충청감사로 있었는데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阿 附)하여 같이 폐모(廢母)에 참여하여 그를 끼어 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유소(儒疏)를 올리겠다고 협박도 하고 좋은 벼슬자리를 주겠다고 달래도 보았으나 그는 의연히 대의 (大義)를 가지고 물리쳤다.
적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버렸다. 1637년 (인조 15)에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한 마음을 깊이 품고 서울에는 종적을 끊었다.
그 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면 “한평생 담박함을 삼공(三 公)272)과 바꾸지 않는다.” 라 하였다. 몸소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도연명(陶淵明)273)의 글을 외며 스스로 즐겼다. 그의 맑은 지조를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우암 시열은 칭찬하기를“처사(處士)다.”라고 말하였다. 1639(인조 17) 3월 17일에 향년 61세로 타계였다. 묘소는 쌍청당 묘소 뒤 임좌(壬坐)의 자리에 있다. 우측에 있는 묘갈은 1911년 7월에 난곡(蘭谷) 송병화가 찬하고 족후손 완빈이 써서 1965년 2월에 세웠다.
송창공(松窓公) 유록(綏祿)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 좌측에 있는 비는 초취(初娶) 증숙부인 선산곽씨는 참판 대윤(大胤)의 따님으로, 묘갈로 1983년 2월 하순 11대손 제영이 짓고, 족후예 진도가 써서 세웠다. 추기는 1997년 3월 24일 증숙부인 선산곽씨 묘소가 택조가 불리해서 사한리 장군봉 술좌(戌座)에서 천장하여 부군의 묘소와 합폄하고 묘비도 당시 옮겨온 것이다.
재취(再娶)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주부(主簿) 여온(汝溫)의 따님인데 공과 합장하였다. 슬하에는 시정(時程), 증직이 참판인 시윤(時尹), 시양(時楊), 시주(時周), 시범(時范) 의 5남과 이동발(李東發)에게 출가한 따님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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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공유록묘갈명
우리 선조 사우당(四友堂) 효정공(孝貞公)에게 재종형이 계셨으니 처사(處士)다. 이름은 유록(綏祿)이고 자는 유지(綏之)이다. 공이 어려서부터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기개(氣槪)와 절조가 있었다. 항상『소학(小學)』과『춘추(春秋)』를 읽어서 그것으로 마음을 세우고 처신하는 법도로 삼았다. 집이 본래 간고하여 끼니를 끓이지 못할 때도 흔히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러할 때도 안연(晏然)하였다. 세속 사람들이 명리(名利)에 얽매어 분주함을 보아도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광해(光海) 계축(癸丑)에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송창공(松窓公) 유록(綏祿)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 적신(賊臣) 찬남(纘男)이 충청감사로 있었는데 이이첨(李爾瞻)배에게 아부하여 같이 폐모(廢母)에 참여하여 공을 끼어 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유소(儒疏)를 올리겠다고 협박도 하고 좋은 벼슬자리를 주겠다고 달래도 보았으나 공이 의연히 대의(大 義)를 가지고 물리쳤다. 적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버렸다.
정축년에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 강화 하였다는 말을 듣고 깊이 분한 마음을 품고 서울에는 종적을 끊었다. 사람들이 혹 벼슬하기를 권하면 “한평생 담박함은 삼공(三公)과도 바꾸지 않는다.” 고 말하였다. 손수 솔과 국화를 심고 도연명(陶淵明)의 글을 외우며 스스로 즐겼다. 대개 맑은 지조를 사모함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암선생(尤庵先生)이 항상 칭찬하여 말하기를“처사(處士)다.”라고 하면서“사적이 지금 가승(家乘)에 실려 있으니 회암(晦庵) 주부자(朱夫子)가『강목(綱目)274)』에다 진처사(晋處士)의 의리를 특서한 것과 같은 뜻이겠구나."라 하였다. 공이 기묘 3월 15일에 61세로 타계하였다. 묘소는 쌍청당 묘소 뒤 임좌의 자리에 있다. 재취다. 전배는 선산곽씨(善山郭氏)니 참판 대윤(大胤)의 따님이다.
사한리 장군봉 아래 술좌의 자리에 따로 안장하였다. 그러다 최근(1997년)에 송 창공묘소에 합장하였다. 후배는 김해김씨(金海金氏)니 주부 여온(汝溫)의 따님인데 공과 합장하였다. 5남을 두었다. 시정(時程), 증직이 참판인 시윤(時尹), 시양(時楊), 시주 (時周), 시범(時范)이다. 따님은 이동발(李東發)에게 출가하였다. 우리 은진송씨가 먼데서 대를 이어 와서 이름 있는 선비들이 잇닿았다.
쌍청당 유(愉)는 태종 때에 덕을 감추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공의 7세조가 된다. 고조는 군수를 지내고 증직이 좌통례(左通禮)인 여림(汝霖)이다. 증조는 증직이 집의(執義)인 세면(世勉) 이다. 조부는 감역(監役)이고 아버지는 증직이 좌통례인 흥문(興門)이다. 어머니는 숙인(淑人)을 증직 받은 보성오씨(寶城吳氏)니 몽벽(夢璧)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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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공(松窓公) 유록(綏祿)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 아! 공의 경력이 처음부터 기록할 것이 많으나 오직 폐모할 때를 당하여 스스로 꿋꿋이 잡아서 지킨 것은 수옹(睡翁) 송경헌공(宋景獻公)275)의 지조와 함께 한 끈으로 함께 꿸만한 것이다. 두 어른이 선조의 행실을 이어받은 효성은 진실로 쌍청공의 자손 됨에 부끄러울것이 없다. 그리고 묘소도 다 전후로 붙어서 있으니 그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경헌공은 저명한데 공은 행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공의 후손들이 오래 가면 징빙할 바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판서 강세정(姜世靖)이 지은 묘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니 내가 생각건대 공의 큰 절개는 마땅히 묘비에 기려야 할 터인데 아직도 요적한 것은 실로 슬픈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사자(死者)를 찬양하는 의리를 붙여서 명을 지으니 명에 가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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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옹과는 단면(袒免)276)의 복을 입을 친족이고 쌍청당에게는 7대손일세. 그 의리가 백중지간이니 이 할아버지에 이 손자로다. 한 언덕에 세 묘소 자리 같이 하였으니 백세에 맑은 바람 그칠 줄을 모를세라. 혹시 밟아서 훼손하는 자 있다면 떳떳한 마음이 없음이로다.
난곡 송병화 지음
松窓公綏祿墓碣銘
吾先子四友堂孝貞公有從祖兄曰處士宋公諱綏祿字綏之公自幼倜 有氣節常讀小學春秋以 是爲立心行己法度家素貧簞瓢屢空而處之晏然視世俗屑屑無足動其意者光海癸丑遷 母后 于西內賊臣纘男時爲錦伯諂附爾瞻而謀廢之欲引公爲重脅之以儒疏誘之以美官公毅然以大 義斥之凶黨知其終不可屈而去云丁丑聞南漢 成深懷憤 絶跡京師人或勸之仕則曰一生澹 泊三公不換乃手植松菊口誦淵明賦以自娛盖慕其靖節也是以尤庵先生常稱之曰處士今載在 家譜其亦晦菴夫子綱目特書晋徵士之義也歟公以己卯三月十五日壽六十一而卒墓在雙淸公 兆後壬坐原二孺人善山郭氏參判大胤女別葬沙寒里將軍峰下戌坐原金海金氏主簿汝溫女墓 與公 男時程時尹 贈參判時楊 時周時范女適李東發我恩津氏遠有代序名碩相望有諱愉卽 雙淸堂 太宗時隱德不仕是爲公七世祖也高祖郡守 贈左通禮汝霖曾祖 贈執義世勉祖監役璉 考 贈左通禮興門 贈淑人寶城吳氏夢璧其考嗚呼公之始卒固多可書而惟其廢母時所自樹 立實與睡翁景獻公之節同條而公貫矣二公繼述之孝眞無愧爲雙淸公後孫而墓皆 葬于前 後者其亦非偶然矣然景獻顯 公則晦此曷故焉公之後孫錫疇深懼愈久而無徵以姜尙書世靖 之狀謁銘于余余惟公之大節宜有石筍之理而今尙寥寥者 實可悲也故敢附闡幽之義而爲之銘銘曰 睡翁袒免雙淸耳雲難兄難弟是祖是孫一岡三墓百世淸風有或踐者是無彛衷
蘭谷 宋炳華 撰 |
추기
부군의 묘갈문은 해가 오래되어 떨어지고 없어져서 능히 분별하여 읽을 수가 없다. 온 일가들이 협의하여 장차 다른 돌에 새기는데 나에게 보궐을 부탁하였다. 부군이 자호를 송창(松窓)이라 하였다. 손자 덕신(德新)이 귀하게 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동춘선생이“당당한 기안은 삼협을 능멸히 하고 늠름한 담봉은 구추를 지난다.”라는 글귀로서 만사를 쓴 것에 추급한 것이다. 아! 이 어찌 범장의 맥주와 더불어 함께 인몰하겠는가? 이에 감히 표출하여 길이 후일의 상고에 자료가 되도록 한다. 내가 제족의 명을 이어받아 우와 같이 추기하고 비석을 고쳐 세울 때에 춘옹의 만사시에 이하 두어 글귀의 말을 깎아버린 것이 한이 된다.
追記
府君碣文 歲久漫 多不能辨讀矣 擧宗協謀 將移刻他石 託余補闕 府君之自號松窓 及以孫 德新貴 贈 承政院 左承旨 及同春先生之以 當當氣岸凌三峽 凜凜談鋒邁九秋之句 題輓者也 噫 是豈可與 狀之麥舟同其湮沒乎哉 乃敢表出 永資後考 余承諸族命 追記如右 改竪時 刪 去春翁輓詩 以下數句語 可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