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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정(寬心亭) 고증(考證) [금석문(金石文)]
관심정(寬心亭)에 관한 시문(詩文)은 대부분 「정선전씨 근원서급 정랑공 유고집」과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의 기록(記錄)에 나와 있습니다.
이외의 문헌(文獻)에 기록(記錄)이 없을까 궁금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율곡집」같은 문헌(文獻)에 나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금석문(金石文)은 그 당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직접 이루어진 것이므로 가장 정확(正確)하고 진실한 역사적(歷史的) 자료(資料)가 된다.」는 금석문(金石文)의 의의를 보고 비문(碑文)에 관심정(寬心亭)에 관한 자료가 없을까? 연구를 해 보게 되었습니다.
「최여림 묘표(崔汝霖 墓表」라는 곳에 관심정이(寬心亭) 언급(言及)되었다는 내용(內容)을 보았습니다. 찾아가기 위해 위치(位置)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나 강릉시 유산동 섬돌[剡石]길 옆 산 위에 있다는 것 이외는 번지(番地)가 없었고, 방문자(訪問者)들의 기행문(紀行文)도 없어서 그 넓은 유산동(幼山洞)을 다 찾아다닐 수도 없고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찾아서 금석문(金石文)을 통한 고증(考證)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감(使命感)으로 2020년 05월 23일 09시 10분경 집에서 출발(出發)하여 걸어서 혼자서 탐사(探査)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강릉청과물도매상가 건너편 산 부근에 산 쪽으로 30여개의 계단을 본 적이 있어서 그 쪽 어디일 것이라고 추측(推測)하였습니다.
시내를 통과하여 어리미마을을 지나서 모산봉(茅山峰)을 돌아서 섬돌표지석을 지나서 목표지점(目標地點)에 도착(到着)하였습니다. 11시 20분경이고 약 7,000보 정도였는데, 중간에 쉬면서 천천히 걸어서 예상(豫想)보다 1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혹시 틀리면 어찌하나 생각하면서 계단(階段)을 올라가니 효자각이 있었습니다. 한 15m 옆에 도착하니 조금 익숙한 묘지(墓地)가 4기 정도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2019년 05월 19일에 저의 원큰댁 시제 기행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유산동에 소재한 정선전씨 50세 錫謨 公의 시제가 있었습니다.
매년 5월 셋째 주 일요일에 봉행되는데, 9시 30분경 도착해서 시간의 여유가 많았습니다. 동네 야산이므로 도시화가 진행되어 작년보다 공장이나 집이 더 많이 들어서서 입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유사(有司)보다 더 빨리 나왔으므로 늘 궁금하던 접근로를 여기 저기 다녀 보았다. 학산행과 어단리행 버스 정류장중 유산리 버스정류장에서 유산노인회관에서 들어오는 길도 있었습니다. 또 한 곳은 정동가는 길에서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접근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강릉농산물 도매상가에서 접근하는 길도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강릉최씨 묘소와 재실도 보였습니다. 근접한 산소는 정선전씨로서 횡계에 사는 분들이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년에 시제(時祭)에 와서 시간이 나서 산을 탐방(探訪)하는 가운데 한 번 온 적이 있는 묘소(墓所)였습니다. 우리 집안 묘소(墓所)와 한 40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낸 묘소(墓所) 바로 밑에 최여림(崔汝霖)의 묘소(墓所)가 있었습니다. 단 한 번에 찾아내서 상당히 기뻤습니다.
비석(碑石)이 오래 되어서 물티슈로 닦아 가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와서 한 5분정도 걸어가면서 미진한 부분이 없는지 회상(回想)해 보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관심정(寬心亭) 3자를 확대(擴大)하여 촬영(撮影)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내년 우리 집안 전사(典祀)때 다시 촬영(撮影)할까 생각하다가 오늘에 찍어야겠다고 결정(決定)하고 다시 뒤돌아 가서 사진을 다시 찍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활기(活氣)가 넘쳤는데 10,000보 정도 걷고 물 한 모금 안 먹어서 당(糖)이 떨어져서 힘없이 터덜터덜 걷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와 보니 병무청부근의 기차터널부근이 공원화(公園化)되어 보기 좋았고 보진재(葆眞齋)라는 건물도 보았습니다. 관리가 부실해 보였습니다.
12시 10분경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12,000보를 걷게 되었습니다.
◎ 금석문의 의의
‘금석’이라고도 한다. 그 내용을 풀이하여 자체와 화풍을 연구하고, 그 시대를 밝혀 인문 발달의 연원을 캐며, 역사의 자료로 사용하여 미술·공예·사상 등 여러 방면의 학술적 탐구를 진행하는 것을 ‘금석학(金石學)’이라 한다.
이는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이 학문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연대가 그다지 오래지 않다. 문헌으로 전하는 것은 애매한 점도 있고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이 있지만, 금석문은 그 당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직접 이루어진 것이므로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석문 [金石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여림묘표
장사랑 행 괴산훈도 강릉 최공
휘 여림과 단인 진해 김씨 쌍묘
장사랑 괴산훈도 송헌 최공 묘표
아! 이 송헌 최공의 묘소에는 예전부터 간직해 오던 작은 묘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다만 관직을 쓰고 성명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쳐 있었고 글자 또한 새긴 상태가 형편이 없었다. 그래서 후손인 익정이 장차 돌을 채취하여 새기는 것을 추가하여 묘표를 새롭게 세우려고 하여서 아들인 시영과 삼종질인 두영을 시켜 나에게 비석의 뒷면에 새길 기문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선조께서 돌아가신지 38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자취가 실려 있는 문서를 구할 길이 없어서 공의 생졸과 이력에 대해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가승 중에 쓸쓸하게 몇 마디 말만이 남아있을 뿐이니, 원컨대 그대는 거기서 요긴한 말 한 마디를 빌려 불후을 비문을 도모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공의 행장을 살펴보았다.
공의 이름은 여림이요, 자는 경열이다. 그의 선조는 완산에서 나왔는데, 대경을 지낸 흔봉이 공의 비조가 되고, 관향이 강릉으로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낸 입지가 공의 중조가 된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이름이 유연이고 호가 매와로, 태조를 도와 개국을 계책한 공으로 강릉군에 봉해지고 ‘문희’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공의 5대조가 된다.
고조는 이름이 이이고 호가 빙호로, 좌찬성을 지냈고 ‘희경’이란 시호를 받았다. 증조는 이름이 경지고 목사를 지냈으며, 할아버지인 계원은 진사였다. 아버지 홍은 호가 학계로 문과 출신으로 장령을 지냈고, 어머니 강릉김씨는 현감을 지낸 김정의 따님이시다.
공은 천성이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조금 성장해서는 널리 경서와 사기를 상고하여 견문이 날로 진보하였는데, 과거 공부에만 두루 힘을 쏟다가 이윽고 실학에 전념하여 성명의 근원을 깊이 궁구하였다.
더욱이 주자서를 익히는데 힘을 쏟아서 꾸준하고 부지런하여 그침이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 문충공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공에 대한 기대와 자랑함이 매우 깊었다. 한훤당과 일두 등의 제현과 함께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자못 남이 깨닫지 못하는 오묘함이 있었다.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름으로 천거되어 괴산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 사례한 뒤에 경포의 물가에 은거하여 예전에 들었던 것들을 연구하여 밝혀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타일러 뉘우치게 하는데 힘썼다.
성화 병술년에 뛰어난 선비 35인과 함께 ‘금란반원회’를 만들었다. 그래서 매년 꽃피는 계절과 단풍철이 되면 번번이 초대하여 함께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여유 있게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기며 자못 늙음이 장차 이를 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공의 맑은 풍도와 고결한 지조는 충분히 쇠퇴하고 문란한 풍속을 경계할만하였다.
일찍이 현감으로 있었던 전륜이 ‘관심정’이란 시에서,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니
기로당 앞에서 옛 회포를 이야기하네.
봄바람 속에 만취하여 아직도 끝낼 줄을 모르니
천세를 비는 장수 술잔 또 한 잔을 권하네.”
라고 하였으니,
그의 아담한 운율과 더 없이 맑고 깨끗한 시도 이같이 미치게 된 것이다.
세조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고 곧바로 고질병을 걱정하여 오대산에서 부처에게 기도하며 만과를 반시하였다. 부사인 김계형이 응시하려고 하자 공이 이르기를, “그대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에 대해 듣지 못하였는가?”
라고 하고는 마침내 문을 닫아걸고 재능이나 학식을 감추고 은둔하였다. 내성의 흉보를 듣고는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고, 매번 기신일을 만나면 번번이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것이 공의 자취에 대한 대강의 줄거리이다.
공의 배위는 진해김씨로, 현감을 지낸 김려지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숙남은 생원이고, 딸들은 진사인 최황·장희석·김사려와 이시준·최형필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로 응상은 효성으로 인해 정려문을 받았고, 응서는 첨정이며, 응복은 수군절도사이다. 응록은 참봉으로 효성으로 인해 정려문을 받았으며, 응수는 진사로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고,
응명과 최여형의 처가 있다. 공의 손자사위와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기록하지를 못한다.
아! 단종과 세조의 때에 대체로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선비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보답하고 어떤 이들은 살아서 온전하게 충성하였다. 이것은 자못 은나라의 세 인자의 일과 같으니,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면 한 가지 일이다. 당시의 일은 나라를 위해 크게 꺼려하여, 선비가 의리를 잡고 높이 드날리는 자취를 때때로 숨겨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 하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그러나 공의 일은『장릉지』에서 하나도 추려볼 수 없으니, 이 또한 어째서인가? 뒷날에 옛사람의 말과 행동을 평론하는 자들이 반드시 여기에서 감회가 있을 것이다.
이제 후세에 남겨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하여 알려지지 아니한 이치를 밝히려 하니,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되지만 공의 명분과 절의가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을 개탄하여서이다.
그래서 대략 징험할 만한 것들을 모아 섬석산 묘향의 언덕에 있는 네 자되는 봉분에 묘표를 세워 표하고자 한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경술년 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원임 규장각제학인 동래 정원용은 글을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원임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지성균관사 규장각제학인 안동 권돈인은 예서로 제액하다.
위의 선조 송헌공의 묘갈은 인조 갑신년에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세월이 오래지나 비문이 벗겨지고 쪼개어져 자획이 까맣게 뭉개져 판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숙종 갑술년에 5대손인 진축과 진유, 8대손인 찬규가 고쳐 세웠는데 또 마염에 의해서 쪼개어졌다. 철종 경술년에 경산 정 상공이 묘갈을 짓고 이재 권상공이 제액하였으나 미처 겨를이 없어서 세우지 못하였다. 이제 11세손인 진호가 종친들을 인도해 옥돌을 채취하여 묘갈을 세웠는데, 14세손인 상찬이 그 일을 맡아 주선하고 처리하였다.
문장은 예전에 지었던 것을 사용하였고 예서도 예전의 본을 사용하였는데, 15세손인 중희가 비석에 작은 글씨를 썼으며 못난 이사람 탈희가 그 아래에 대강의 내용을 삼가 기록하니, 이때가 갑신년 10월이다.
이 해와 전에 처음으로 묘갈을 세웠던 해의 간지가 우연히 들어맞으니, 혹시 그 사이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수가 존재하는 것인가? 아! 감격스럽도다.
崔汝霖墓表
將仕郎 行 槐山訓導 江陵崔公諱汝霖 端人 鎭海金氏 雙墓
將仕郎 槐山訓導 松軒 崔公墓表
噫此松軒崔公之藏舊有小表止書官稱姓名而字亦泐頑後孫翼楨將伐石遺刻而以新之使男始榮 三從侄㞳榮請不侫記其陰曰今去先祖歷三百八十餘歲載蹟無徵其生卒履歷俱不可詳惟家乘中 寂廖數語也願借子一言之重以圖不朽焉余感其誠而按其狀有曰公諱汝霖字景說其先系出完山 大卿諱欣奉爲鼻祖貫江陵者以高麗平章事諱立之爲中祖入我 朝諱有漣號梅窩佐 太祖策開 國勳封江陵君諡文僖寔公五代祖也高祖諱迤號氷湖左贊成諡僖景曾祖諱景智牧使祖諱季元進 士考諱泓號鶴溪文掌令妣江陵金氏縣監精女公資性醇厚自幼劬學稍長博考經史聞見日進治 擧業旣而專意實學潛究性命之原尤着力於朱子書孜孜不已嘗出入于佔畢金文忠公之門期詡特 深與寒暄一蠹諸賢講論經義頗有不得之妙以經行薦 授槐山訓導赴謝隱居鏡浦之賓以講明舊 聞訓誨後進爲務 成化丙戌與傑士三五儕作金蘭半月會每逢花辰楓節輒邀同舟沿流上下悠然 自適頗不知老之將至其淸風高操足爲頹俗之警也
嘗有縣監全公崙
寬心亭詩曰
良辰美景百花開
者老堂前話舊懹
爛醉春風猶未罷
壽盃千歲勸千盃
其雅韻淸絶亦如此逮 光廟受禪旋憂身痾祈 佛於五臺山頒示萬科府使金公季衡應選公曰君不聞忠臣不事二之義乎遂杜門鞱晦聞奈城凶報 西望痛哭每値 忌辰輒不御肉此其大略也配鎭海金氏縣監礪志女生一男五女男叔男生員女適 崔煌張希奭金士礪進士李時俊崔亨弼孫應祥以孝 旌應瑞僉正應福水使應祿參奉孝 旌應壽 進士 贈同樞應命崔汝衡妻其孫壻內外曾玄不盡錄噫 莊光之際盖多忠義之士或死而報或生 而金殆若殷之三仁而出於至誠則一也當時事爲國大諱士之秉義遐擧之跡往往隱晦而不顯於世 誠可悲也然且公之事於莊陵誌一不槩見又何歟後之尙論者必有感於斯也立言闡幽余匪其人而 慨其名節之泯沒略掇可徵用表四尺之封於蟾石山卯向之原
崇禎紀元後四庚戌 月 日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原任 奎章閣提學 東萊鄭元容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原任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知成均館事 奎章閣提學 安東權敦仁隷
右先祖松軒公墓碣 仁祖甲申竪焉歲久剝泐字䵝不能讀 肅宗甲戌五代孫鎭軸鎭維八代孫 粲奎改竪又爲馬髥所折 哲宗庚戌經山鄭相公碣其墓彛齋權相公亦題其額而惟未遑今十二 世孫鎭浩倡于宗伐珉以樹之十四世孫相瓚幹其事文用舊撰隷用舊本十五世孫中熙書小字于 石不 肖脫熙謹記梗槩于其下時甲申小春也此年與前甲偶爾同符倘有數存於其間歟嗚呼
◎ 정원용[ 鄭元容 ]
출생 - 사망
1783년(정조 7) ~ 1873년(고종 10)
정의
조선후기 좌의정, 중추부판사,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정석증(鄭錫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순(鄭啓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정동만(鄭東晩)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정기세(鄭基世), 목사 정기년(鄭基年), 부사 정기명(鄭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 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20여 년 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저서로 『경산집(經山集)』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찰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원용 [鄭元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돈인[ 權敦仁 ]
출생 - 사망
1783년 ~ 1859년
정의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서화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彛齋), 우랑(又閬), 우염(又髥), 번상촌장(樊上村庄),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우의정을 지낸 권상하(權尙夏)의 5대손이며, 군수를 지낸 권중집(權中緝)의 아들이다.
생애
1813년(순조 13)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正字: 조선 시대 홍문관·승문원·교서관에 속한 정구품 벼슬)와 헌납(獻納: 조선 시대 사간원의 정오품 벼슬)을 거쳐, 1819년과 1835년(헌종 2)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과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장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1859년연산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그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일생을 친밀히 지냈던 김정희(金正喜)로부터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예서체(隷書體) 비문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전혀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서화를 얻으면 김정희와 연구하여 감식안을 높이기도 하였다. 유작으로 「세한도(歲寒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김정희의 「세한도」와 화풍상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의 「세한도」가 갈필(渴筆)로 다루어져 싸늘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비하여, 그의 「세한도」는 안온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간단 명료한 구도라든가 넘치듯 배어 있는 농축된 문기(文氣) 등은 사의(寫意)를 지향하여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크게 진작시켰던 김정희의 화풍과 상통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돈인 [權敦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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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만이 지나더니 날씨도 어지간히 더워 졌는데
여러가지로 고생이 심하였군요
하루 만보 걷기가 수월치 않은데 모르는 산길을 훼매며 그렇게 걷기는 ....
그 정성과 목마름에 하늘이 도운것이 확실해 보이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옛말이 그냥 생긴게 아닐수 밖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늘 건강 챙기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