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와 ＜곡우＞날 아침

[張 프란]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물 한잔을 마신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 물이 지난 밤 내 거친 속과 영혼을, 정화 시키고 오늘 하루 종일 내 심신이 목마르게 않게 할 것이다) 물 한 컵으로 무슨?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에, 매일 새벽 눈을 뜰 때마다 해 오고 있는 오래된 습관이다. 혹 플러시보(placebo)효과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 자정이 다 되어 귀가한 탓에, 피곤해 침대에 잠시 도로 누운 채로 오디오 리모콘 cd 버튼을 눌렀다. 그것은 20여 년 전에 <객석>이라는 잡지를 정기구독하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아주 오래된, 개인적으로 무척 아끼는 cd다. 파바로티가 부른 도니제니의 <Ah! Verrano a te sull'aure from-산들바람은 애틋한 그리움을 가져다 줄 거에요>부터 라벨의 <Chanson romanesque-낭만적인 노래>까지. cd에는 성악가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이 마지막 곡의 성악가가 아리송하지만 스투더가 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그마치 13명의 세계적인 남녀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말 그대로 <The Golden Voices> cd다. 요즘은 저작권법이 만만치 않아 불법으로 만들기가 불가하고, 정법으로 한다면 기라성 같은 성악가들을 이렇게 cd 한 장으로 다 담아 낸다는 것이 비용 면에서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는 이런 조합의(노래도 노래지만 주옥같은 작곡가들/구노, 푸치니, 차이코프스키, 벨리니, 슈베르트, 거슈윈, 베르리오즈, 오펜바흐 등등) cd가 공공연하게 사은품 등으로 제작되어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렇게 cd를 듣다가 갑자기 영화 <쇼생크의 탈출>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사실 며칠 전 <음악의 신비> 강의 때 이병삼 교수가 상기 시켜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살인죄로 누명을 쓰고 쇼생크에 갇힌 에디(팀 로빈스 扮)가 우연한 기회에 위험을 무릅쓰고 모차르트의 <피가로 결혼 중-편지의 이중창>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을 교도소의 동료 죄수들에게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었을 때의 그 감동...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든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오늘 아침 cd의 파바로티의 노래와 에디가 틀어 준 노래가 ‘부드러운 바람’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맞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내가 조석으로 만나는 바람이 ‘부드러운 산들’, 봄바람인데, 그 덕택에 새삼 불현 듯, 인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노래들 탓에 무슨 사춘기도 아닌 내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참 청승맞은 아침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한 해를 살아 내기 위해 대지에서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생명체에, 비로 힘을 실어 주는 ‘곡우’(穀雨)다. ‘곡식을 깨우는 비’ 곡우라서 내 눈가가 젖은 것도 그런 걸까?라며 애써 시답지 않은 말로 나의 궁색함을 무마시키며 출근길에 올랐다.

지난 주말에 cc인 대학동창 부부가 서울에서 경주로 여행 차 내려왔다. 그들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고, 오래된(?) 벗도 볼 겸, 겸사겸사해서 왔다고 했다. 함께 보문호수를 걷던 친구 와이프가 손가락을 헤아려 보더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30년 전이었다고 상기 시켜 주었다. 그러고 보니 세월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보다 빠른 것 같다.

“살아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너무너무 좋아요.” 라고 같은 말을 자꾸자꾸 반복하는 그녀에게 (무슨 이산가족 상봉도 아니고...)라며 실없는 웃음을 던지다가 문득, (하여간 살아 있어 이렇게라도 보게 되어 반갑다)라는 말로 응해주고 나니, 그리운 사람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갔다. 오래 전에 먼 나라로 떠나 그곳에서 뿌리를 박고 사는 이들, 이 땅에 살면서도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 행방을 알 길 없는 이들. 그리고 뭐가 그리 급한지 벌써 이 세상과 등진 이들... 그리고...

그 cd 네 번째 곡 이름이 <None but the lonely heart-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이다. 가사는 괴테의 시를 러시아 작가 레브 메이가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이다. 선율은 전체적으로 서정적이고 정감이 가득한 데, 특히 넓은 음역으로 하행 도약하는 시작은, 곡에 가사의 우울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혼자, 그리고 모든 즐거움과 담 쌓은 곳에 앉아 저 멀리 창공을 바라본다. 아, 날 사랑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먼 곳에 있다! 이 내 눈은 어지럽고 이 내 가슴 타누나.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절기로 우리 조상들은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계절의 변화나 농사일, 날씨의 변화와 같은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절기를 통해, (특히 곡우 날 아침에) 혼자 중얼거려 본다. (땅속의 그것(생명체)과 하늘의 그것(비)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 살아만 있다면, 때가 되면 곡우 같은 날이 올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은 백곡이 윤택해 질 것이라 나는 믿고 소망한다)라면서.

<20여년 동안 내 가까이에서 날 정화시켜 주곤하던 cd>

[張 프란]

불국사 인근에 왕겹벗꽃이 한창입니다. 가본다가본다 하면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쩌면 또 놓치고 말지도 모릅니다. 삶이란 게 그런 것 같습니다. 다 때가 있기 마련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