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 *중관
천영필
손바닥이 마주 쳐야 박수가 되듯
혼자로서는 짝소리를 내지 못한다
인연생기로 완성되고 흘러가는 것이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능히 이 인연을 말해서
모든 희론을 없애니
모든 설법자 중 제일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
不異 不來亦不去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오온개공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따라서 제법이 공하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더럽혀지는 것도 깨끗해지는 것도 없고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또한 없다
나라고 할만 한 다섯 덩어리 오온도 없고
내 몸이랄 것도 내 감각이랄 만한
**육입도 육처도 없으니
연기에 들지 않으면 해탈이다
ㅎ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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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 가운데,
언어를 가장 비판하면서도
언어를 잘 활용해
깨달음에 이르게 한 학파(종파)가
중국의 선[선종]과 인도의 중관사상[불교]이다.
선과 중관에서 언어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선과 중관에 의하면
언어를 통해
깨달음[열반]을 획득할 수도 있고,
고통[윤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개념을 형성하며 모든 판단을 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일체를 분별하는 것이다.
인간은 분별을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좋고 나쁨을 구별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논하는 등
일체의 사유 판단을 한다.
선과 중관에서는
이러한 일체의 사유 판단,
즉 분별을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별하는 마음[분별심]을
여윌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분별심의 주체가 언어라면,
고통의 뿌리가 되는
언어를 제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킨
열반,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별심을 조장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언어의 이중성을
철저하게 파악하였던
선과 중관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언어를 어떻게 방편적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선과 중관은
언어를 깨달음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방편으로 활용하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다르다.
선과 중관 모두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언어(개념, 분별심)의 해체를
목표로 하지만,
중관은 사구부정(四句否定)과
희론적멸(戱論寂滅),
그리고 선은
선문답(禪問答)과
언어도단(言語道斷)을 통해
언어를 해체함으로써
분별심을 타파한다.
중관의 사구부정은
인간이 논할 수 있는
사유의 모든 형식체계를
네 가지 범주(catuṣkoṭi)로 나누어,
이 모두가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무분별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체계이다.
그 결과 대립과 분별을 초월함으로써
공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른바 희론적멸로써
열반적정을 성취하는 것이다.
선불교는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분별의식을 끊고,
분별의식이 끊어짐으로써
본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도단은
언어로부터의 해탈이며,
언어로부터의 해탈은
분별의식 혹은 관념[개념]으로부터의
해탈이다.
선과 중관에서
언어의 기능은
고통(윤회)과 깨달음(열반)의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언어의 최고 기능과
한계를 끝까지 몰아 부친 그 결과
선과 중관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평안의 근거가
언어에 있음을 간파하여
언어의 역기능을 제거하고
순기능을 최대한 살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선과 중관의 수행은
신체적인 측면보다는
인식론적 전환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과 중관에서의 깨달음이란
언어를 통해
인식론적인 비약 또는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禪)이고 공(空)이다.
Among Buddhist ideologies, the schools
that criticize language the most and
use language to lead to enlightenment are
the Chinese Zen and the Indian
Mādhyamika. Language has dual
functions Zen and Mādhyamika.
You either attain enlightenment
through language or fall into the abyss
of pain[samsara].
Humans form concepts and make
all judgments through language.
In a word, humans identify everything
through language. Men make all kinds
of judgments, such as right and wrong,
by distinguishing between good and bad,
and by discussing beauty and
ugly things.
Humans form concepts and make
all judgments through language.
The Zen and Mādhyamika use language
as an indispensable means of
enlightenment, but the methods are
different.
Both Zen and Mādhyamika aim to
dismantle the language(concept,
discernment) that is the cause of
all suffering.
By Mādhyamika breaks through
discrimination by deconstructing
language through catuṣkoṭi and
extinction of prapañca, and Zen
through Zen's question and
answer and unspeakable.
The catuṣkoṭi negation of
Mādhyamika divides all the formal
systems of human arguable into
four categories,
and attempts to attain enlightenment by denying them all.
As a result, Śūnyatā is obtained by transcending
opposition and discrimination.
To achieve so-called Nirvana by the
extinction of prapañca.
Zen Buddhism uses language to cut off the path
of language, thereby breaking the consciousness
of discernment, and
seeing the original mind by breaking
the consciousness of discernment.
Therefore, unspeakable is liberation from language,
and liberation from language is liberation
from discernment or idea [concept].
In Zen and Mādhyamika, the function of language
has both aspects: suffering (reincarnation) and
enlightenment (nirvana). As a result of pushing the highest
function and limit of language to the end,
Zen and Mādhyamika understood that
the basis of all human suffering and
peace lies in language, so they tried to eliminate
the dysfunction of language and maximize its good function.
Therefore,
in the practice of Zen and Mādhyamika,
the epistemological transformation is more important than
the physical aspect.
In that sense, enlightenment in Zen and Mādhyamika
means an epistemological
leap or experience through language.
That is Zen and Śūnya.
공한 본질의 이치에서
일어나는 연기현상이 있을 때
이는 가(假)가 된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임시로 있는
거짓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공(空)과 가(假)가
서로 분리되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기하면서 공한 것이고
공하면서 연기하는 것이므로
공이 곧 가고
가가 곧 공이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말처럼
공이 가이고
가가 공이면서
더 나아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면서
공이고 가인 것을
중도(中道)라 하는 것이다.
또 중도에 의해서 보면
삼제(三諦)가 원융하다는
삼제원융설이 나오기도 했다.
용수는 먼저 <중론> 초품에서
팔불중도(八不中道)를 말한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능히 이 인연을 말해서
모든 희론을 없애니
모든 설법자 중 제일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
不異 不來亦不去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통해
그릇된 유(有)의 견해를 척파한 이 말은
<중론>의 근본 대의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이근(耳根)+이식(耳識)이 이처(耳處)이고,
비근+비식이 비처이고, 설근+설식이 설처이고,
신근+신식이 신처이고,
의근+의식이 의처였습니다.
기능이 파괴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은
육입의 ‘처(處)’를 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법을 인식하는 것은
대상을 감각하는 것이므로,
감각하려면 주관과 객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는 감각주관이 되어
육내입처라 하고,
‘색성향미촉법’은 객관이 되어
육외입처라고 했습니다.
결국 육입이 있다(일어났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및촉법’을
감각했다는 말과 통했습니다.
그러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출산된 식(識)이 일어나고,
‘안처+색처+안식’이 화합하면
(눈으로 색을 보면 이 셋이 동시에 일어남)
촉(觸)이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