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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만지기. 요20:19~23. 160, 161장. 220417. 평해제일 교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T/114 권시혁
예수 부활하심을 함께 찬양합니다. 오늘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중석장로님 노회장 때 저는 노회 서기로서 임직식에 참석했고 최병원 목사님은 저의 뒤를 이어 노회 정치부장을 하셨습니다. 정치부장이라 하면 사회로 보면 중앙정보부, 지금은 안기부장과 같은 성격입니다.
부활은 모든 종교가 원하는 것이지만, 어느 종교도 흉내 내지 못하는 절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도 자칫하면 진리를 놓치거나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가지 절대적인 공식과 원리가 있습니다.
그건 내가 부활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부활하기 싫어하라는 말입니까? 그것도 절대 아닙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여기서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희망은 무엇일까요? 나를 믿는 자는, 아주 어려운 조건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헌금 많이 한 자, 기도 많이 한 자, 전도 많이 한 자. 이런 조건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절대 변경 불가입니다. 사람은 어떤 약속을 했더라도 못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이 약속을 변개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절대로 여러분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면 평생 예수 믿은 사람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줄 분명히 믿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흘러나오면 그게 도리어 큰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의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줄 분명히 믿습니다.
부활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난재 2가지를 생각하는데 그것은 창조와 부활입니다. 죽음은 안 가르쳐줘도 잘 압니다. 산다는 것은 주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죽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초창기는 화장해서 유가족에게 인계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최종 염하고 입관은 참관시킨다고 하는데 코로나가 속히 종결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은 경험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부활보다 더 난재는 천지창조입니다. 우리 머리로는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 주변에 피조물이 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장엄한 선포를 위엄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모든 세계와 그중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하여 우리가 창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로 들어가기 전에 창조 신앙을 가지면 부활은 저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고, 각종 식물을 지으시고 동물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빚은 인간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사고는 아주 간단 보다 더 단순합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사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온전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은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맞는데 살아나서 다시 죽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사시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활도 내가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그 과정을 일으키려고도 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룰 줄 믿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음은 끝이 아니라 통과하는 문입니다. 죽음은 죄의 산물이지만 믿는 사람의 죽음,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귀히 보십니다. (시116:15) 죽음을 통과해야만 영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죽음은 불신자에게는 매우 두려움이지만, 영원을 가진 성도에게는 천국 갈 때 통과하는 문일 뿐입니다.
본문에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든 곳에 문을 닫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고 죽어서 장사 지냈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신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살리는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살리는 영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할렐루야. 죽음을 부활로 바꾸셨습니다.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만지기입니다.
에스겔 37장에 죽은 해골 같은 뼈다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다시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토록 환상을 보고 천국을 경험한 에스겔도 하나님이 아신다고 직답을 피합니다.
뼈들에게 대언해야 합니다. 뭉쳐라. 움직이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입니다. 사방에 생기야 뼛속에 들어가라. 외치니 그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공격했지만 그건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화장하여 수목장하기도 하고 뿌리기도 합니다. 화장이 아니라도 수십 년이 지나면 그냥 한 줌의 흙입니다.
부활은 걱정하지 마세요. 죽은 시체나 화장된 가루나 이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시면 완전한 부활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은 어떤 죽음도 다시 살려냅니다. 병도 치유되고, 절망도 치유되고 말씀 듣는 순간에 우울증도 흔적도 없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완전히 물러갑니다.
여러분 마음을 닫지 마세요. 생명의 빛이 들어올 때 내 영혼의 절망과 좌절은 물러갈 줄 믿습니다. 내 입술에는 찬양이 터져 나올 줄 믿습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살리신 이의 영이, 생명의 영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면 우리가 죽은 후에도 부활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감으로 우리의 죽은 몸도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옆 사람 보시면서 직분 이름 부르며, 장로님도 다시 살아납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지금 정치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부활의 영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이 부활하게 될 줄 믿습니다.
실제로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요. 죄에 대한 승리이며 사탄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 승리는 불안하거나 아슬아슬한 승리가 아니라, 완전한 승리이며 영원한 승리인 줄 믿습니다.
죽음은 쉬워요. 죽으면 되니까, 그런데 부활은 정말 성령이 함께하지 아니하면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면 부활은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부활 만지기가 예수님에게 있고 그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세 번째 목격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발견합니다. 그 빈 무덤을 발견했는데 예수님은 무덤 속에 없었습니다. 어디 계셨습니까? 엠마오 도상에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자살했고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실 도마가 앙탈합니다. 나는 아무리 말해도 못 믿겠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겠다. 안 믿으려면 그만두어라 해도 좋은데 예수님은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어요. 요20:27
사실 도마는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는 안 했습니다. 넣어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고전15:6) 승천하시기 전에는 120명(행1:15)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중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도 만나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 마음속에 주님은 부활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어린 조카가 있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큰아빠인 목사님을 올라타고 무릎에 앉고 귀도 당기고 뽀뽀도 하고 마구 장난을 칩니다. 5살짜리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예배 중 예수님을 만났는데 180도 달라졌습니다. 큰아빠로 부르며 천방지축이었는데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점잖아졌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 장난감 같은 큰아빠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목사님! 하면서 순한 양이 되었답니다.
어린이도 예수 만나면 달라집니다. 꿈에만 만나도 달라집니다. 부산 대지교회 여집사님이 배다른 남동생을 전도했습니다. 많은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못했습니다. 누님이 예수 믿으라니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왔는데 그렇게 나온 사람은 예배 시간이 졸리지요. 졸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아주 달라졌어요. 적극적으로 출석하고 기도하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을 닫고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아주 짧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문들 닫았는데도 들어오십니다. 이게 부활의 특징입니다. 영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의 몸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도 들어오시고 역사상 승천하시기 전 40일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죽으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단순히 떠다니는 영이 아니라, 육의 몸은 고대로 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가더라도 먼저 평강을 기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범을 배운 것입니다.
평강 히브리어로는 샬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평강입니다. 완전한 구원이요. 완전한 승리요. 영원한 축복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부도나도, 감옥에 가도 살롬입니다. 샬롬을 가진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도 두려운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하나도 없어도 평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돈이 많아도, 돈이 없어도 평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평강은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잠도 잘 자고, 아침에 새벽기도 시간에는 벌떡 일어나세요. 절망과 실패 갈등과 두려움을 다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니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21절에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 유대인은 강조법이 반복입니다. 우리는 억수로 매우 많이 형용사가 붙지만, 유대인은 반복하는 것이 강조법입니다.
예수님이 한번 하시면 우리도 한번. 예수님이 두 번 하시면 우리도 두 번 하면 됩니다. 00께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평강이 오면 죄나 고통, 염려가 떠나갑니다. 평강과 불안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예수님의 평강을 받아들이면 불안 염려는 완전히 물러갈 줄 믿습니다. 열등감 좌절감, 고통은 예수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21절에 보낸다고 하시지요. 이건 떼어 놓는 건데 그냥 보내는 게 아니라. 파송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하신 것 같이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라 하시면 우리는 아멘하며 가야 합니다. 변명도 필요 없고, 망설임도 필요 없습니다. 가라 하면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냥 가라 하신 게 아닙니다. 부활을 보고, 확실히 믿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아무 준비 없이 막 달려갈 게 아니라, 예수 부활을 온전히 보고 믿고 함께 체험한 후에 주님의 명령 따라 파송 받으시면 됩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은 그대로 받으시면 됩니다. 숨을 내쉬며, 후----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성령은 바람입니다. 영입니다. 이론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되지요? 그냥 아멘 하면 됩니다. 자! 이제 다시 해 봅시다. 아멘도 타이밍이 맞아야 해요. 기차 지나간 후에 손드는 식으로 하지 마시고, 아주 제때 해 보세요.
성령을 받으라. 아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아멘하고 성령을 받으세요. 다시 한번 해 봅시다. 성령을 받으라.
이번 부활절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평강이 있으라.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이 세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평강을 선포하시고, 부활의 증인으로 파송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23절에 용서를 조건으로 말씀의 고리를 걸어두셨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의 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자기의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내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주님은 내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엄청난 선포를 하십니다. 우리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해서 모든 탕감이 무효된 사건을 아시지요. 마18:24.
이번 부활절에는 모든 것을 한 가지로 축약합시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건 내 인생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미리 본 사람도 있고 늦게 본 사람도 있고 단 한 번만 본 사람도 있고, 몇 차례 부활을 목격한 제자와 무리들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할 때 지체없이 아멘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아야 할까요? 받지 말아야 할까요? 상처를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반사하고 마세요. 상처를 안 받으면 용서고 뭐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영이 내 속에 바로 들어왔는지는 만져볼 수 없어요. 그러나 내가 용서하는 모습을 보면 부활을 만진 사람과 부활을 구경한 사람이 구분됩니다.
사랑하는 평해 교회 성도 여러분, 부활을 만지시고, 온전히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멋진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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