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 정근두 목사(울산교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정근두 목사(울산교회)
야보고서 1장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설교 한눈에 보기
1. 직책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자신의 직책을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는 직분자이기 전에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2. 혈통을 내세우지 않는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 자신의 혈통을 내세우지 않는다.
야고보는 부활의 주님을 새로운 관계로 만난다.
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겸손을 나타내는 칭호인 동시에 명예와 권리가 내포되어 있는 호칭이다.
하나님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 ● ● 핵심 메시지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 ● ●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사람이 만나면 먼저 인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첫 만남인 경우는 무엇보다 먼저 서로를 소개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직접적인 만남에도 인사가 필요하지만 편지로 만나도 인사가 먼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1장 1절에는 야고보의 문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절이기는 하지만 잘 살펴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편지를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인사의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가운데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 야고보의 자기소개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먼저 보내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1. 직책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우선 야고보는 자신을 직책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초대교회에서 누구보다도 내세울 만한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야고보를 언급합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환영하고 어떤 사역을 각각 분담했는지 언급할 때 그가 교제한 사도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합니다.
순서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초대교회가 기둥과 같이 여기는 세 인물 중에서 야고보의 이름이 맨 먼저 등장합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보다 앞자리에 야고보가 등장하는 것은 그가 초대 예루살렘 모교회의 첫째가는 위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으로 보면 원로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5장을 살펴보십시오. 교회 역사상 최초로 모인 총회에서 초대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입니다. 지역 교회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교회가 최초로 함께 모였습니다. ‘할례와 믿음이냐?’, ‘오직 믿음이냐?’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말할만한 사람들이 다 나서서 한 마디씩 하고 드디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즉 게바가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그러고 나서 맨 마지막의 결론을 내린 분이 야고보 선생입니다. 신약학자들은 이 최초의 공의회에서 야고보가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고 그가 최초로 모인 총회의 회장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회장이 내리는 것이 상식이요 예의입니다. 제대로 된 집안이라면 가족회의에서 가장이 최후의 결론을 내립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당회를 하건 제직회를 하건 사람들이 모두 의견을 진술하고 나서는 마무리를 회장이 하도록 하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야고보, 그는 직책으로도 누구보다 못지않은 사람입니다만,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 앞에 소개하면서 그가 가졌던 직책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 그가 가졌던 직책인 예루살렘교회의 원로요, 초대 총회의 회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대신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자기인식입니다. 예배시간에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가지고 자신을 생각하고 앉아있을 때 은혜받기 힘듭니다. 여러분은 예배자로서 주일에 교회당에 발을 디디시기 바랍니다. 결코 관리자로서 발을 내딛지 말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자로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관리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나아온다면 은혜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리자인 여러분의 눈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화가 나서 소리라도 치고 나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예배하러 온 다른 사람들 조차 은혜 받지 못하게 만듭니다. 부탁드립니다. 주일에 교회 올 때는 여러분 모두가 예배자로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책에 따라서 교회를 섬길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에 들어올 때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니까 1층 로비에서부터 고함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본인이 은혜가 되지 않고 보는 사람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 문제는 심각하게 다룰 자리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에 나오는 시간에 그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 나아올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자로서 내 죄를 용서 해주시고 나의 주인 되시는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해 나온다면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만나기 위해 나아가는 그 크신 분을 의식한다면 감히 소리를 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계시면 아이들이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온 천하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것이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엇으로 인정해줄까 하는 생각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위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인생 그대로의 모습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될 때에 장로님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살피게 됩니다. 집사님은 자기가 봉사해야할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우리가 예배해야 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2. 혈통을 내세우지 않는다
야고보는 혈통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직분만 아니라 혈통을 내세울 만도 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것을 내세울 만도 합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한 형제라는 것은 대단한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런 암시조차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관계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사람이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했을 때 예수님보다 두서너 살 어린 청년이었으니까 형 예수가 사역을 시작해서부터 끝날 때까지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예수를 주로서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예수가 누구인지 철저히 몰랐던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육신적인 관계가 신앙에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자기가 육적으로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모든 관계를 영적인 안목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분이 무엇이라 해도 관계없습니다. 우리가 그 직분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형제지간이있었지만 야고보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모나 형제가 교회 안에서 어떤 직책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여러분과 주님 사이를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부모가 장로일 수도 있고 권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인 신분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새생명 훈련원 간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네 가지 영적 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전달하는 숙련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녀들의 신앙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보십시오. 여기 야고보는 형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만나고 있습니다. 육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로서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 주님은 동생 야고보에게 자신의 영광된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 후 야고보는 주님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에 의하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나타났던 영광스러운 부활의 주님의 모습을 야고보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야고보는 새로운 관계에서 항상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예수님과 맺은 새로운 관계로 인해 모든 성도들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난 이후 모든 주님의 백성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흩어진 열두 지파, 모든 성도들이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안부와 교제의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관계에서 해방된 자가 누리는 새로운 가족관계에 대한 축복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모든 땅을 버린 자는” 내세에 하늘을 상속하는 동시에 현세에서도 백배나 축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이전의 육신의 혈연적인 것에 더 이상 매여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해방되어서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만난 사람들과 형제자매의 관계에 들어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누구든지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을 만날 때에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될 때에 얻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축복 받은 새 관계를 여러분은 확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옆에 함께 앉아있는 형제자매가 여러분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안부의 대상, 교제의 대상으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가와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찬양대에서 함께 봉사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관계라면 그것은 성도의 봉사의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영화관에 가면 각각 표를 사 가지고 들어가서 자기 번호에 앉으면 됩니다. 영화를 감상하고 나오면 됩니다. 옆의 사람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아니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바로 옆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신앙으로 만나는 형제자매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교제와 안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로 그렇게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몇 천 명, 몇 만 명이 모이는 교회는 이상적인 크기의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17년 정도 되니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울산교회에 와서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20명 정도의 장로를 알 수 있고 40명 정도의 장립집사, 권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닐 때 줄반장 밖에 못해서 숫자가 많아지면 기억이 잘 되지 않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목회할 수 있도록 이분들이라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도 천 명이 넘는 서리집사를 제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야 합니다. 여기는 나의 축복만 받고 가는 곳이 아니고 지체들, 형제자매가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구역모임이 소중한 것입니다. 저처럼 기억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구역에 나오는 사람 정도는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꿈이 두산리 구역장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적으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주님의 백성들과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은 나의 어려움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은 내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기쁨은 내 기쁨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거룩한 공교회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장로 교회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는 보편적인 교회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이 내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야고보에게 주어진 새 관계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길 바랍니다.
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우리는 종을 두고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머슴조차도 잘 모릅니다. 단어는 알지만 경험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는 머슴을 두고 살 수 밖에 없었던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이라는 단어를 알지만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와 야고보만이 편지를 하면서 다른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종 이상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가졌던 위치로도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종이요, 주인의 명령에 복종밖에 모르는 종입니다. 종은 자기 권리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종은 주인의 소유에 불과했습니다. 부잣집 주인은 두 가지 종류의 도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도구인 연장과 말을 하는 도구인 종이었습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복종만 하는 것이 종입니다. 야고보는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자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절대적인 충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해 있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꿈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못 박아 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은 계산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자를 일컬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 받은 대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속에는 겸손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야고보의 직무가 나타나는 명예와 권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야고보가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때 거기에 그의 직무에 따른 명예와 권리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꼭 같은 비서라도 누구의 비서인지에 의해서 신분이 달라지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조그만 개인 사업체의 비서와 큰 기업의 비서는 신분이 다릅니다. 구청장 비서와 시장비서는 격이 다릅니다. 꼭 같은 비서실장이라도 시장 비서실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은 급수가 다릅니다. 누구의 종이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국무장관을 가리켜서 ‘Secretary of the State’라고 부릅니다.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는 비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할 때 그것은 치욕스러운 칭호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선택받은 자의 즐거움이 거기에는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보다 더 존귀한 칭호가 없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마리아가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낳았다는 구실로 천주교에서 하나님의 어머니, 모후, 여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변질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 한 분이 주인이고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종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황해도 어느 노회에서 모여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들을 종(從)이라고 부르지 말고 사자(使者)라고 부르도록 하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도 어떤 모임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자(使者)는 일 사(使), 놈 자(者) 일하는 놈입니다. 일하는 놈이나 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종(從)’이라고 불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칭호인지 깨닫지 못하는 무식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렇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보다 더 귀한 직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순종하고 충성하는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의 칭호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습니까?
그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의 사욕과 관심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은 원대한 꿈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명실 공히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칭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불리던 칭호입니다. 여호와의 종 아브라함, 하나님의 종 모세,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 여호와의 종 다윗, 많은 선지자들이 불리던 칭호가 바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리더, 지도자라는 칭호는 실패한 지도자 사울과 관련해 구약성경에 두세 번 언급된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던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족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이 구약 족장과 왕들과 선지자의 반열에 나란히 선 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소개를 통해서 야고보는 세 번째로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다가서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이는 인간 야고보가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문안한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에 쓰여 있는 글들은 어떤 한 사람의 종교적 의견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권위로써 전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예” 할 것인지 “아니요” 할 것인지는 설교하는 어떤 사람의 종교적 견해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 할 것인지 “아니요”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될 때에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할 말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가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기가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소개를 통해서 ‘나는 흩어져 있는 12지파를 향해서 말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자’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무도 그 권위 말고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아서 진리와 부합하는 말만이 성도를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이라고 해서 여러분이 그 말을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성도들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일하는 직책일 뿐입니다. 제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신분이 없습니다. 종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함부로 지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교라고 말을 합니다. 신교도를 영어로 항의하는 사람들(Protestant)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교도들이 출발부터 가진 생득적인 권리입니다. 강대상에서 어떤 직함을 가지고 말하든지 하나님의 성경과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은 우습게 여기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시키는 대로만 따라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고 인식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도 설교자에게 감정을 표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보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전하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됩니까? 그렇다면 설교자에게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을 위로하시는 하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야고보서 1장 1절 야고보의 문안을 본문으로 택해서 그 가운데 한 부분인 야고보의 자기소개를 살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기가 가진 직책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단한 혈통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거기에는 그의 겸손함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내세울만한 모든 것을 감추고 오직 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야고보는 당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요 지금도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의로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크리스천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모두 야고보를 존경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을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헛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을 향해 코웃음 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하게 다가서면 무시하려고 하고, 그런 자격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강단에서 반말을 하고 “하라면 무조건 해라”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부흥사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동시에 단순한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는 그의 직무, 그 직무의 영광, 명예와 권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오직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가설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타고난 어떤 신분이나 교회가 준 어떤 직책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가서서 무언가 말하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자리에서 말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로소 은혜를 끼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가 어떤 혈통을 가졌든지 어떤 직책을 가졌든지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지 아니할 때는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거룩한 거부권을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은 분별할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고 야고보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다가오는 분들에게는 순종하시고, 자신의 혈기로 공동체의 분위기를 깨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새로 주어지는 한 주간 동안 부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
남아공 포체프스트롬대학교 졸업(신학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 부총회장
국제제자훈련원 울산지역 팀장
(사)월드비전 울산지회장
CTS기독교방송 울산 지부장
울산교회 담임목사
<저서>
「구원사의 서곡」,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