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윈난성 배낭여행기
윈난성 쿤밍과 석림(5.6-9)
허커우는 중국 윈난성 남쪽 끝에 있는 하구도시인데 이곳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는 산더미처럼 짐을 실은 트럭이 여러 대 대기하고 있었고 이민국 건물 앞에는 입국 수속을 하고 있는 초라한 복장의 베트남 사람들이 수백 명씩 줄을 서 있었는데, 우리국적을 알아 본 이민국 직원의 배려로 긴 시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국 수속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중국의 도시는 베트남 보다는 깨끗하고 현대적이었습니다. 식당음식도 먹을 만 했고 시원한 곳에서 편히 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그 곳 버스대합실에도 교묘한 수법으로 외국인을 골라 사기 치려는 인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놈은 그 속은 환전상인데
마치 외국어 통역안내인처럼 만든 표찰을 달고 접근하여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터미널 직원들과도 한 통속인 것 같았습니다. 자기 공작시간을 벌기 위해, 아직도 자리가 비어있는 버스의 좌석권이 다 마감되었다고 하면서 다음 버스를 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표창구 앞에서 안내인 행세를 하는데 속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호통을 쳐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버스는 오후 1시 10분에 허커우를 출발하여 백두산 보다 더 높은 산봉우리를 길게 십여 번 지그재그로 올라가는데, 건너편 비슷한 높이의 거대한 붉은 산이 앉은 자리에서 왼쪽으로 보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보이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산 고개에 올라서면서부터 보이는, 산비탈에 펼쳐진 여유롭고 평화로운 계단식 논밭과 아담한 마을은 베트남 사파의 그 것 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더 아름다웠습니다. 버스가 고개에서 잠시라도 쉬기를 바랐지만 내 생각일랑 아랑곳없이 그냥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고갯마루에서 10여분 더 달리니 작은 도시 핑비엔이 나타났는데 해발 3000미터는 되는 고지대였습니다. 잠간 밖에 나가 사진을 찍는데 햇볕이 어찌나 따갑던지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전에 이곳 정보를 알았었다면, 오늘 하루 여기서 쉬었다 가도 되는데 여간만 아쉽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윈난성 성도 쿤밍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 예약한 게스트하우스76에 전화를 해 위치를 물어 택시로 찾아가니 한국 사람이 반갑게 맞아 주어서 한결 좋았습니다. 방은 다인실 뿐이었는데 마침 손님이 적어서 우리 부부는 독방을 쓰듯 할 수 있었습니다. 숙소에서는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중국인 아주머니가 김치 등 한국음식을 잘 만들어서 오랜만에 맛있는 식사를 맘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숙소도 편안하고 해서 베트남여행의 피로를 풀 겸 하루쯤 쉬려고 했는데, 시내 풍경이 궁금하여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찾아 간 곳이 그 곳 유명한 보이차 시장이었는데,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차의 종류가 많은 것과 그 가격이 높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 가게에서는 예쁜 여자 종업원이 손님이 지적하는 모든 차를 시음 시켜 주는 친절도 베풀었는데, 마침 영어를 할 줄 아는 두 쌍의 그 곳 대학교 교수 부부 팀을 만나 통역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무려 3시간이나 같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보이차는 우리의 전래 누룩처럼 둥그런 그릇에 눌러서 형태를 만든 다음 오랫동안 띄운다고 하는데, 마치 골동품이나 마찬가지로 오래 된 것일수록 좋고 값도 비쌌습니다. 10년 이상 묵은 상품 중에 어떤 것은 한 덩어리에 수 십 만원을 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차를 많게는 40번까지 우려 마신다는 것입니다. 숙성기술이 노하우인데, 오래된 고가품은 우려낼 때 처음엔 짙은 붉은 색이었다가 점차 옅어지고 나중에는 주황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짙은 것은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옅은 맛을 내는 것으로 두 뭉치를 샀습니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사람들끼리 팀을 만들어 주인이 왕복 300위엔에 불러주는 택시를 타고 그 유명한 석림 관광에 나섰습니다. 쿤밍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 쯤 가는 곳에 있는데, 가는 길에 먼지와 매연이 어찌 심하던지 줄곧 코와 입을 막고 있어야 했습니다. 차내 에어컨 장치가 안 되어 있어서 창문을 닫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마신 더러운 매연이나 먼지 보다 더 많이 마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석림은 참으로 기상천외한 모습이었습니다. 보지 않았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 했습니다. 입장료(140위엔)도 비쌌지만 찾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전혀 질리지 않게 하루 종일 볼거리를 제공하는 매우 아름답고 넓은 석회석 돌기둥 숲이자, 신이 빚은 지상 최대의 조각 공원이었습니다. 갖가지 모양을 한 돌 숲 사이로 작은 길을 만들어 놓았으며 중간 중간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전체를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어떤 것은 산호초의 모습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탑 같기도 했는데, 그 돌기둥들이 높고 빽빽한 구역도 있고 낮고 듬성듬성 한 구역도 있었는데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돌기둥 꼭대기에 마치 지붕이나 모자를 얹어 놓은 모습을 한 것도 있었는데 여러 개가 같은 높이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수억 년 전에 바다가 융기하여 생긴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중국은 참으로 복 받은 나나라라는 질투심이 일었습니다.
이곳을 다녀 온 경험을 살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택시나 빵차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내에서 이곳까지 냉방이 잘 되는 크고 안락한 버스가 자주 운행하고 있느니 좀 번거롭더라도 운임이 저렴한 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쿤밍시내에서는 버스비가 보통 1원인데 냉방장치가 된 것은 2원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날 냉방버스를 타고 우리의 민속촌 같은 곳을 찾아 갔었는데, 소개하는 자료와 달리 20여개의 각기 다른 소수민족들의 생활 모습을 다 볼 수 없었습니다. 바이족 등 대표적인 민족의 주거지 4-5곳을 볼 수 있을 뿐이었고 전체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공원이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찾아가겠다면 기어이 말리겠습니다.
다리(5.10-11)
4일 동안의 쿤밍체류를 마치고 5월 10일 아침 우리는 버스 편으로 옛날 다리국의 수도라는 다리시를 찾아 갔습니다. 다리시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는데 시외버스는 신시가지 터미널까지만 갔습니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전에 서양인이 거주했다고 해서 양인가라고 하는 구 시가지로 와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4인실에 짐을 풀었습니다.
구시가지 바로 앞에 길게 늘어져 있는 창산연봉은 그 최고봉이 해발 5000미터 급이라는데, 말을 타기도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돌아보는 산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비가 계속 내려서 산에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고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해(얼하이)라고 이름 붙인 호수를 찾아가 배를 타고 건너편 언덕, 창산의 연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우아하게 자리 잡은 절 관음사를 다녀왔습니다
유람선비가 100위엔이라고 해서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고 있다가,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50위엔에 타는 것을 보고 달려가 같은 값으로 타게 되었습니다. 얼하이는 그 주변이 단조로운 모습이었지만 그 넓이는 아마 서울시만큼 될 것 같은, 끝이 아득한 드넓은 아름다운 호수였습니다.
구시가지 구석에는 커다란 천막시장이 있었는데 대리석의 고장답게 가게마다 온통 대리석 제품으로 가득했습니다. 기념으로 한 두 개 사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배낭이 더 무거우면 안 되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리지앙(5.12)
우리는 다리에서 이틀간 머물렀다가, 골목 여행사에서 파는 아침 7시발 버스표를 사가지고 리지앙으로 갔습니다. 다리 리지앙 간의 도로는 매우 잘 닦여진 고속도로였습니다. 리지앙에는 12시에 도착했는데, 이곳도 신시가지와 구시지로 나뉘어져 있어서, 신시가지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구시가지(고성/꾸청)로 가야했습니다.
꾸청으로 들어가는 입구 맞은편에 용수산이라는 한국음식점이 있어서 일단 그 곳에 들어가 점심을 먹으며 묵을 만한 숙소를 물어 보는데, 조선족교포인 주인여자가 낭만일생이라고 적힌 명함을 한 장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용수산식당은 그 집 주인남자가 한국에서 8년간 일해 모은 돈으로 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낭만일생을 찾아가는데, 골목도 많고, 그 조선족 여인이 초행길 외국인에게 길을 대충 가르쳐 준 탓으로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30여분 헤매다가 겨우 언덕 꼭대기에 새로 지은 그 집을 찾았는데 젊은 주인아주머니가 한국인이었습니다. 남편은 대만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리지앙 구청도 그 규모가 클 뿐이지 다리의 구시가지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다리에 비하여 훨씬 많았고 매우 북적였습니다. 특히 중국 청년들이 많았는데 밤이면 이들이 카페 마다 몰려다니면서 온갖 소란을 다 떠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옛날에 리지앙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데 신시가지는 다 무너졌으나 이 꾸청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이 일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시 당국에서는 언덕위의 집집마다 야간 조명설치를 해 주고 전기료를 내 주면서 꾸청을 아름답게 보이고자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리지앙도 다리처럼 시내에 물길이 있어서 그 정취를 더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목마다 집마다 연탄불을 피우는 곳이 많기 때문에 다니다 보면 연탄깨스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했습니다.
루꾸호(5.13-15)
하루 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우리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산 차표를 가지고, 2박 3일 계획을 짜서, 수면 높이가 해발 2690미터나 된다는 바다 같은 호수 루꾸호로 향했습니다. 리지앙에서 258km나 떨어진 먼 곳에 있는 호수입니다. 차는 8시 반에야 출발했는데 상해 와 북경 등지에서 온 젊은 커플들로 빈자리 없이 떠났습니다.
리지앙에서 한 시간 쯤 지나서 부터는 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어찌나 아찔아찔하던지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금사강(진사강)이라는 장강의 지류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서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민둥산을 돌고 돌아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다시 내려가는 등 세 번이나 높고 낮은 산을 넘어 도착한 루꾸호는 완전히 별세계였습니다.
주위에는 설산이 빙 둘러 있는 아늑한 분지에 서울시 면적의 반만큼 넓은(50평방km) 호수가 담겨 있었습니다. 물의 투명도는 11km라고 했습니다. 이 곳 주민들인 모스족은 오랫동안 외부 세상과는 소통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모계사회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으며, 원래 농사가 주업이던 것이 이제는 관광수입으로 살아가는 듯 했습니다. 여자가 선택권을 가지고 이 남자 저 남자 번갈아 가며 사랑을 나눈다는데, 자식이 태어나면 여자가 양육하고 그 남자들은 모두 자식들의 공동삼촌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없는 유일한 곳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보트를 저어 주며 불러 준 남자의 노래 소리가 조금 슬픈 곡조였습니다.
한없이 넓은 호수 물도 깨끗하고 멀리 보이는 설산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장기 체류하기에 숙소의 화장실이나 부엌의 위생 수준이 좋지 않았습니다. 휴양을 하면서 머물기 위해서는 좋은 집을 고르고 가급적 자체 취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루꾸호도 개발 바람이 불었는지 호숫가 마을마다 새로 짓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관광객 숙소를 쓰기 위해 짓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통나무집이었습니다. 2층집이 많았고 가끔 3층집도 있었습니다. 집을 짓는 형태로 보아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것 같았는데, 우리는 5월 중순경이었는데도 주인이 제공하는 전기장판을 켜야 잘 수 있었습니다.
집사람은 숙소 앞 카페에 남아 쉬고 혼자 건너 마을의 집 짓는 현장을 구경하면서 다음에 올 때를 생각하고 집 빌리는 값을 알아보는데, 이를 티벳식 중국어로 통역해 주는 젊은 여인이 나중에 혼자 왔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 집 2층 방으로 안내하고서는, 우리 집에 머물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일행이 있어서 안 되고 다음에 꼭 찾아오겠다고 했더니, 약속할 수 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아쉬움때문이었는지돌아오는발길이여간지겁지가 았습니다. .
호도협 트레킹(5.16-18)
다시 리지앙으로 돌아와 루꾸호에 동행했던 어느 신혼부부를 용수산식당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먹다가 다리 숙소에서 만났던 한국인 여행 가이드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가 한국 관광객 30여명을 안내하는 중이라고 해서 그들과 같이 옥룡설산 관광을 하려 했으나,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다음 날 우리는 치어터우로 떠났습니다. 옥룡설산의 더 멋있는 뒤쪽의 모습을 호도협 트렉킹을 하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지앙 사람들이 최근 비가 많이 와서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낭만일생에서 만난 한국인 청년과 같이 치어터우에 도착하여 시드니에서 온 어떤 여자가 운영하는 카페에 큰 배낭을 맡기고, 그 곳에서 방금 만난 20세의 한국인 학생과 4인 팀을 만들어 해발 2-3000미터의 장장 23km나 되는 하이패스 코스로 2박 3일의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만난 마을에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여행객을 위한 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호도협은 아주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4000미터와 5000미터 급 바위산이 가파르게 서서 마주보고 있는 보기 드문 협곡입니다. 옥룡설산 쪽의 대부분은 거의 수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옥룡설산 맞은 편 4000미터 급 산자락 중간경사면을 따라 난 좁은 길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는데, 출발시간이 오후 3시 반쯤이어서 두 시간 후 쯤 만나는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시족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이른 것 같아, 한 시간 쯤 더 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계속 걸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악명 높은 28밴드 고개를 넘어서서 다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여 보니 문이 굳게 잠겨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계속 가게 되는데 호도협 중간 전망대를 지나면서부터는 어두워져 손전등과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조심스럽게 벼랑길을 더듬어 걸어야 했습니다. 두 시간 쯤 더 가서 멀리 불빛이 보였는데, 그 곳이 우리가 애태우며 찾아가는 차마객잔이었던 것입니다.
호도협 하이패스 트레킹은 옥룡설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시작했는데, 눈 덮인 옥룡의 연봉들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아름다움도 그만큼 더 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가운데 설봉위에서는 끊임없이 옅은 구름이 일고 있었으며, 더러는 길게 나래를 편 체 멀리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구름은 계곡에서도 피어나고 있었는데, 봉우리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산허리에서 주춤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환상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발 2700미터의 호도협 산길 중간에 서니 옥룡설산의 연봉이 바로 코 앞에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옥룡설산의 주름 깊은 계곡 여기저기에서는 눈과 빙하 녹은 물이 길게 폭포를 늘어뜨리고 있어서 더욱 보기 좋았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설산의 연봉을 계속 바라보면서 걷는 산길은 아무리 힘들어도 지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빼어난 경치가 주는 기쁨의 선물일 것입니다.
차마객잔의 여주인이 밤중에 찾아 든 우리를 맞으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는데 여간만 반갑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으로 오골계백숙을 시켰는데 커다란 닭 한 마리를 끓여 주면서 중국 돈 80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을 반이나 남겼다가 아침에 다시 끓여 달라고 했습니다.
차마객잔의 2층 방에 짐을 풀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했는데, 산속에서 그러한 호강을 누릴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차마객잔의 침대는 눕는 방향을 바꾸면 창 너머로 하늘 가득한 별을 바라보며 자도록 되어 있습니다. 밤새 옥룡설산위로 수 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잠간 잠이 들었는데, 어느 새 나도 그 작은 별들과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인간도 태어나기 전엔 하늘의 작은 별이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설산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도 황홀한 즐거움이었습니다. 태양은 그 높이에 따라 여러 가지 신비한 빛깔로 변해 갔습니다. 여기 객잔 또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한없이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나 산모퉁이를 수 십 번도 더 돌고 돌며 걷다 보니, 저 멀리 또 다른 산 하바설산이 보였습니다. 아래로 점차 고도를 낮추어 내려오니 금사강의 우렁찬 물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산행을 마치는 곳에는 예쁜 포장도로가 나오고, 깎아지른 옥룡설산을 치어다보는 곳에 이틀간의 산행피로를 풀 수 있는 객잔 티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샹그릴라/중띠엔(5.18-19)
티나객잔에서 하룻밤 묵고, 그 집 차를 빌려 배낭을 맡겨 둔 치어터우로 돌아와서는 한국인 친구들과 헤어져 바로 중디엔 즉 샹그릴라로 떠났습니다. 중디엔으로 오는 길은 비교적 안전하고 좋았으나 4-5000미터 급 높이의 산을 굽이굽이 돌아 넘는 것은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디엔은 해발 3200미터 고산지대에 펼쳐진 넓은 분지였습니다. 보이는 건물은 거의 티
벳탄 풍의 2층이나 3층 건물이었습니다. 집에도 밭에도 여기저기 곡식건조대가 앙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의 아이스콘을 거꾸로 세워 둔 모양을 하고 있는 티벳불교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낮은 언덕에는 우리의 철쭉이나 진달래 같이 생긴 붉은 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에 따라 티벳카페라는 곳을 찾아가서 체크인 하고 짐을 풀었는데, 그 곳에 먼저 와서, 부근 관광을 함께 할, 즉 택시를 같이 빌리기 위한 동지를 찾고 있는 한국인 젊은이 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30분 거리의 삐타하이(벽탑해)로 갔는데, 돈 값을 전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호수 물은 주변에 방목중인 소와 말의 분뇨로 거의 썩어있었으며, 주변경관도 볼품없었습니다. 택시기사도 미안했던지 우리를 시가지를 벗어 난 곳의 초원으로 안내했는데, 어찌나 넓은지 그 끝이 아스라했습니다.
초원의 한 쪽 끝 산자락에는 설산으로 오르기 위한 케이블카 건설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 쯤 개통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초원에는 전혀 경작지가 없었으며 수천 마리도 넘는 말과 소가 열심히 어린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말과 소도 멀리서 보면 그냥 작은 점과 같았습니다.
중디엔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나뉘어 있었는데 여행객들은 모두 구시가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구시가지 초입에 한국음식을 하는 식당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김치도 있고, 되지고기김치덮밥, 닭도리탕 된장국 등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송이버섯 요리를 권하기도 했습니다. 가격은 중국식에 비하여 높은 편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구시가지 광장으로 가니 스피카에서 노래소리가 들리고 티벳탄들이 모여들더니 곧 군중무용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래 가락은 우리의 민요조였는데 더 활기차고 경쾌했습니다. 스텝을 따라 해보았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중디엔에서 하나 유명한 것은 구시가지 언덕에 있는, 그들이 세계최대라고 자랑하는 거대한 마니차였습니다. 10여명이 힘을 써야 겨우 돌아가는 마니차이지만 이곳을 찾는 신도들로 하여 끊임없이 돌고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중디엔에 더 이상 볼거리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송찬림사를 가 보자고 했는데, 절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생략하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자고 달랬습니다. 내 눈에 중디엔은 인간의 샹그릴라가 아니라 말과 소들의 천국이었습니다.
더친, 메리설산과 밍용빙천(5.19-21)
중디엔에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매리설산을 가기위해 아침 일찍 더친으로가는 버스를 탔 습니다. 터미널에서는 호도협 차마객잔에서 만난 미국사람 부부와 중디엔에 같이 왔던 영국인 처녀들도 다시 만났는데, 다음 행선지가 거의 같았습니다. 버스는 매우 낡고 더러워 보였는데, 길이 힘든 줄 알기 때문에 적이 걱정되는 것이었습니다. 더친을 가기위해서는 백망설산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버스만큼이나 입새가 초라해 보이는 현지인들은 하나도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버스는 두 번이나 고장을 일으켰는데 정비사 기술이 좋아서인지 금방 고치곤 했습니다.
그 곳 사람들한테 어길 수 없는 하나의 준엄한 법칙인양 버스는 하얀 불탑이 서있는 백망설산 전망대에서 잠시 쉬었는데, 찬바람 매섭게 몰아치는 그 곳에도 티벳탄들이 천막을 치거나 움막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야크도 키우고 동충하초도 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중띠엔에서 더친까지는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도중에 버스 차창으로 내다 본 참으로 기이한 모습은, 같은 지역인데도 한 쪽은 나무 하나 없는 붉은 산이고 한 쪽은 숲도 있고 바위틈에 물도 솟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쪽은 나무가 모두 말라죽어있고 건너편 산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펀즈란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앞에 흐르는 강이 메콩강 한 갈래의 상류라는 것입니다. 강물은 거의 흙탕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더친 버스터미널에서 바로 택시를 타고 12km쯤 달려서 메리설산이 가장 잘 보인다는 페어라이스(비래사)지구로 와서 산장호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매리설산은 가히 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웅장한 모습이었으며, 그 장엄함은 금방 나를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중국사람들과 대만 단체관광객이이 많았으며. 저마다 경건한 자세로 산을 향해 합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미국인 부부와 같이 팀을 만들어 내일 메리설산 중턱의 밍용빙천(빙폭)을 가기로 하고 택시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동트는 메리설산의 모습을 보기위해 밖에 나오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보았던 중국인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향과 가짜 지전, 발원문이 적힌 종이들과 함께 여기에 태울 나뭇잎도 팔고 있었습니다. 해는 메리설산 옆쪽 하늘에서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햇빛이 비치는 설산은 처음 빨간 빛이었다가 주황색으로 변하는데 처음 보는 신비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나도 합장한 체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보살펴 주십사 하고 빌었습니다.
택시로 밍용빙천 입구까지는 약 두 시간 걸렸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30마리 정도의 조랑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빙천 바로 밑까지 다녀오는 요금이 85 위엔인 것을 아내가 깎아서 70 위엔에 탔다가 나중에 결국 싸움까지 하면서 85 위엔 다 주어야 했습니다. 빙천가는 길은 숲속의 산길인데 아주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험한 곳에는 철골구조물위에 나무판자 다리를 놓아서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길가에는 우리나라의 상사화 같은 꽃이 만발해 있었고 숲도 울창했습니다. 빙빙 돌아가는 편한 길도 있고 중간 중간에 바로 올라가는 지름길도 있었습니다. 나는 주로 지름길을 이용했는데, 말을 타고 오는 아내보다 내 걸음이 더 빨랐습니다. 미국인 젊은 친구가 나를 흉내 내다 금방 지쳐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 하였을 것입니다.
두 시간 쯤 올라가니 말과 마부의 쉼터가 있고, 다시 걸어서 30여분 오르니 빙천 전망대가 나타났습니다. 빙하는 멀리서 볼 때는 하얀색이었는데, 여기서 보니 회색 빛깔이었습니다. 바위부스러기와 모래가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빙폭이 “쿵”하고 부서지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십년 쯤 지나서 와도 이 빙폭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빙하는 해발 2800미터까지 내려와 있다는데 세계에서 가장 낮은 높이라고 했습니다.
빙천에서 돌아와서는 그 곳의 유명한 절인 비래사를 둘러보고, 마침 그 곳에 왔다 나가는 스님들의 차에 합승하여 더친 시내로 들어와 버스터미널 가까운 빈관에 짐을 풀었습니다. 내일아침 일찍 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입니다. 더친은 특별히 볼 것이 없는 아주 작은 도시였습니다. 가파른 협곡사이에 집 짓고 살만한 공간이 거기뿐이어서 생긴 도시 같았습니다. 시장이라고 간판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텅 비어있었습니다. 터미널 부근에 작은 상점과 식당들이 모여 있었고, 송아지 한 마리가 한가롭게 가게를 기웃거리며 거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침 8시 반차로 더친을 출발하였는데, 중띠엔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오른 백망설산 고개는 얇게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한 무리 야크 떼가 마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커다란 불탐을 돌아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본 메리설산도 간밤에 내린 눈으로 더욱 눈부시고 아름다웠습니다. 역시 메리설산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다시 합장하고 여행 중 안전과 가족들의 건강 그리고 앞으로의 행운을 빌어보았습니다.
더친에 돌아와서는, 내일 아침 일찍 사천성의 또우청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어 놓고 전에 묵었던 야크바 호텔에 들었습니다. 내일 윈난성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으나 또 다른 곳을 찾아 간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호텔 앞 한국음식 식당에 가서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세계최대의 마니차와 군중무용을 관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