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김정환 시인>>
* 1954년 1월 22일, 서울 출생.
*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 1980년 <창작과비평>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단.
* 한국작가회의 상임이사.
* 시집 : 『지울 수 없는 노래』, 『회복기』, 『개인의 거울』, 『좋은 꽃』, 『해방서시』, 『해방서시』, 『우리, 노동자』,
『기차에 대하여』, 『사랑, 피티 1·2·3』 , 『희망의 나이』, 『하나의 2인무와 세개의 1인무』,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텅빈 극장』 등 간행.
* 산문집 : 『발언집』.
* 문학평론집 : 『삶의 시, 해방의 문학』.
* 소설 『세상 속으로』 상·하, 『그후』, 『사람의 생애』, 『순금의 기억』 등 간행.
* 아포리즘 : 『지금, 사랑에 들뜬 그대여』등이 있음.
* 제9회 백석문학상,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 2017. 제32회 만해문학상 수상.
<<김정환 시인>>
강남 스타일/김정환
종말이 지나갔다. 더 다행히
희극적으로 지나갔다. 그게 좀 슬프지만
미쳤지만, 종말 지나갔다.
강남의 전세계에서 사람들 말춤 추고 있다.
섹스가 가장 절묘한 직전으로 흐트러지는
춤, 여성의 뇌쇄(惱殺)도 종말 직후다.
그건 좀 아쉽지만 권위가 있지. 말의 육체는
육체성의 권위가 있다.
목관(木管)의 행복도 없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파시즘 발흥 앞에
어제의 죽음과 장차의 죽음 사이
서늘한 여인 위해 목숨 걸고 부르던
죽은 이 노래 속 나의 죽음은 전세계
조회수가 기껏 1천 남짓이고 1930년대
머릿기름 바른 번식 욕망이 흥건하다.
어떤 지휘자는 위키피디아에도 나오지 않는다.
맞아. 거대한 비유는 거대한 기우였어.
수천만 명 죽고 나서 코미디가 종말을 능가한다.
아직은 죽어본 적 없다는 거지.
지금
적그리스도가 착한 사람이다. 지금
없는 사람이 경악한다.
본토는 멀쩡하다. 성(聖), 그
호들갑이라니. 범죄 현장도 그런 범죄 현장이 없다.
수녀원이 뉘앙스와 냄새 사이 영원한 동안
그냥 전화번호 몇 개 지우고, 그것도 그만두고
수음. 그렇게 통달해간다. 음풍농월 아닌
진흙의 자연에.
없는 사람 얼마나 더 없어야 잊혀질 수 있나.
있는 사람 얼마나 더 있어야 사라질 수 있나.
수음만 경악한다.
가장 좋게 드러나는 배후다.
놀라지 않는 기적이다.
무슨 오이지처럼 붙어 있다 여섯이,
다섯 아니고, 모르는 사람 생일이.
귀신 부른다 마이너, 아웃사이더, 루저 들이
아직도 비명, 혹은 다른 세상의 활기로. 애꿎기는.
귀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린 물속에 있다.
인위적/김정환
가장 끔찍한 것이 죽음의 치정이다. 그래서
40년 뒤
명작이 있다.
여러 겹 의미심장이 여러 겹으로 이상하다.
죽음이 발굴하는 거지 생 아닌
생의 죽음을.
역사 아닌 역사의 죽음을. 육체 아닌
육체의 죽음을. 언어가 끝없이 (네?) 몸 향해
기울고, 언어 아닌 언어의 죽음을.
화 아니라 뿔 난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정액도 궤도를 벗어난 영롱한 슬픔이다.
세고비아가 기타 이름이었나? 북한이
청소년이다. 인위적이라
난폭이 더 난해하지.
낙화생 기름, 사탕, 낙화생, 낙화생,
그게 일본말 땅콩이었나.
적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전방(前方),
그게 앞으로였고 미래였으니
어디까지 말랑말랑해지면 생이 불길(不吉)을
벗을 수 있냐고 묻는 것이 상처의 따스한
낙관이었나. 죽음의 치정에 맞서
지리멸렬해지는 육체의
지옥은 Innamoraya, innamorate, 아름다움의
성욕이 그리 끈질길 수 없다. 그,
뼈대가
그리 노골적일 수 없다
더 노골적인 것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의
병존이고, 그 옆에서 죽음과 음식의
그것은 오히려 유구의 자연이다. 자연의
자연이지. 모든 파란만장이 제 안에
암전(暗轉)을 키우며 보통명사에 달한다는 거.
흐린 열망 너머 명징한 아름다움의 현재로서 미래라는 거.
이해 못하지, 죽음의 치정은 이응의 혹은 리을의 투명 밖으로
설레는 파국, 내용이 다분한 창세기, 세상의 세상 밖으로
뒤흔들림도 없이, 위안의 뜻을 과격하게
가까스로 가누는 것이 죽음의
치정이라는 듯이,
‘인위적’,
기악과 연기의, 그 둘의
병존의.
운명도, 결국 우리 살 뜯어 먹고 산다는 듯이.
들숨 날숨만 남을 때까지 말이지.
두 기자/김정환
그들은 닉슨을 탄핵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정의의 사도라고 불렀다.
언론의 권력은 언론을 자신의 입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권력이었으므로 두 기자는 영웅 대접을 받고
닉슨 일가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투사가 된 감격을 누렸다.
그것은 당연하고 또 자랑스런 일이다. 미국은 전세계
언론의 민주주의의 메카였다.
하지만 그렇다. 폭로는 배설의 허기진 아구에
그리고 일관성은 목표에 가깝다.
대통령을 쫓아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흥분의 도가니는 식고 그 폭로 정신은
육체를 쾌락으로 강간하고 고문하고 신격화하는
헐리우드 연예정보지 기자와 점심을 같이 한다.
당연하게 시시덕거리며
킬킬대며 아주 기분좋게 미쳐가면서.
요는,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랑만이 볼세비키적이다.
실패가 운명적인, 그러므로 더 나은
운명의 완성을 위한 권력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영웅적인 두 기자는 거대한 허기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화려하게 산발한 비명소리로 남는다.
마포, 강변동네에서/김정환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당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알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번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하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스캔들 혁명사/김정환
베스트셀러 신정아 고백록 주요독자가 50대라니
50대인 나 기성회비라는 말의 슬프고 장한 뜻 아는
마지막 세대였다가 시시껍절한 섹스 스캔들이 일약
정치적 과격으로 되는
최초의 지저분한 세대에 속하고 나의 혁명사
육체에 밴 추문을 씻어내는 식일 밖에 없다.
의식의 잔인은 얼마나 완화해야 기억되지?
자살을 뺀 들뢰즈와 알튀세르는 레닌 뺀 마르크스와
같다는 말이 고무줄 없는 빤스 운운으로 들린다.
왜 사람들이 명작 건축에서 자연사하지
않는가, 왜 자살하거나 피살되는가?
집을 나서면 우리 동네 제법 번듯한 건물 지하가
반 너머 성인용품 시뻘건 물감에 허리까지 잠겼고,
그것에 발 담그며 내가 되뇐다. 가장 야하고
청초한 말, '여자는 온몸이 악기다,'
가장 오래되고 언제나 개인적인 말, 가장
넘치나 가장 아껴 쓰는 말, 가장 육감적이지만
냄새와 상극인 말, '여자는 온몸이 악기다.'
혁명사보다 혁명 전후사가 더 혁명 실패사보다
혁명 살아남은 차르 귀족 딸 고생 얘기가 더 흥미로운
나의 사태에 나는 어디까지 찬성할 것인가.
오래전 죽은 벗의 오랜만 생가를 보았다. 동생 찾아
월남, 전쟁과 혁명 및 남한과 무관하게 오래 사셨던
큰아버지 문상하고('정환아 사는 게 정말 지겹다')
식구들과 함께 탔던 구포 시내 경전철 덜컹대는게
이승도 저승도 아닌 상자 속이고 그 앞에 철길
아무리 뻗어도 아기자기했고 더 멀리 안개 속 낙동강
철교, 참화를 벗고 다리가 미끈했다.
행군이 운명이라는 소리 빤하다.
생이 어떤 사태인지도.정치는 70년대 민주화 운동
주역들이 아직도 제일 잘 하니 80년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었다. 정말 혁명사 쓰고 있구나. 벌써
미수꾸리나 하려 들고… 내가. 나 말야? 어긋난 데
익숙해져 세상 살 만하다 싶으면 세상이 더 어긋나
거기에 다시 맞추어 다시 살 만하다 싶으면 세상
어긋나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 이 악화를
파탄으로 정화(淨化)할 밖에 없을까? 그것들도 분명
우주가 있을 것이다. 자기들의 무한대를 닮았으나 자기들
지능으로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바다에
우렁쉥이나 이름 없는 수초들 말이다. '한 끗 더',
'조금만 더'는 그럴 수 없이 위대한 인간 언어지만
그정도로는 언감생심인 우주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아파트 정원에 봄이면 어김없이 육덕 좋은
엉덩이를 까는,
왜 사냐면 웃는, 민낯과 큰 절의 맥문동 같은 것들 말이다.
이천십이 년 오월 현재 그 사내
밤 열두 시 넘은 전화 두 달째 없는 것 크게
기뻐하고 있다. 술 정신은 차린 모양이군. 정치와
시민 없고 정치 비판과 시민운동만 있는
세상 살 만한 동안.
그러나 세드나*. 오 냉혹한 풍요.
북극 얼음 바다 속 고래와 바다표범 포유류 낳은
성스러운 말씀, 명명은, 마디마디 잘린 냉동
아이스케익 손가락들. 카약, 카약, 갈가마귀,
카약, 갈가마귀, 카약, 딸, 애원하는, 애비,
겁에 질린. 애원도 단검도 너무 잔인하여
분노에 달할 수 없는 생명이 운명의 단어 같은
모든 걸 밀어내고 맥락도 그 밖도 모종도 없이
밀어닥치는 신화 아니라 직접성의 지옥, 빙하기
제의로서 육체가 그냥 견딜 밖에 없는, 악화와
심화로밖에는 종말을 앞당길 수 없는
혁명사 있었다. 다시 쓸 수 없다. 혁명 이전 혁명의
냉혈을 푸는
혁명사 쓰며 앉아있다.
* 이누이트 신화 바다여신
레닌의 노래/김정환
지워지는 것은 짓밟히는 것
지금도 꺼꾸로가 아니다
자동차 물결에, 헤드라이트 불빛에
2001년 4월 어느 날 봉천동 밤거리
인파가 자동차에 지워 진다
사람이 사는 집도, 건물뿐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멸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
조금씩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풍경 속으로 내려앉으며
겹치고, 덜컹댔다, 자동차 앞좌석이 겹침의
계단이. 그리고
광경과 음악의, 덜컹대는 겹침 속에,
드러났다, 모종의 사라짐이.
오 그렇다. 자본주의는 불야성
IMF 외환위기는 연필보다
일상적이고 전쟁보다 더 메마른 단어다
출근은 진한 화장뿐
퇴근하는 뒷모습의
어깨의 표정이 가장 솔직하다. 생계와 화해한
만큼만 그것은 가난하고 안온하다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그 위로 겹쳐진다
지워지는, 짓밟히는, 메마른
풍경과 질문 위로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액화,
인간의 조직이 일순 너무나 아름다웠던
시절은 화음의 광채로만 남아
생애가 차라리 슬프다는 풍문에 달한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거리 풍경과 살을 섞으며
합쳐진다, 그것만이 위로가 된다는 듯이
그때 우리는 모두 레닌이다
지워진 것들의
윤곽이 슬픔으로 명징해질 때
그때 우리는 모두 노래다
그리고 레닌이 된 우리 모두가 무든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 질문은 결코 메마르지 않는다
마치 그가 울음의, 실종의, 그리고 질문의
보편이라는 듯이
그것만이 법칙이라는 듯이
아직도 표정은 지워진다
물결도 지워진다
아직도 풍경은 지워진다
거리도 건물도 지워진다
눈물 한 방울.
밤도 낮도 지워진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엇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예감이 지워진다
남은 것은 슬픔이 촉촉한 질문뿐이다
나무/김정환
나무는 숨결이 꺼칠하다
충혈된 심장이
내 고단한 고막 속에서 할딱거린다
다시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깡마른 어깻죽지가
어느새 새파란 하늘로 출렁여대면서
홀로 있을 때
그러나 나무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투다
나무는 그냥 숨결이 꺼칠하다
우리가 뜨겁게 볼을 부빌 때까지
우리가 나무의 출렁이는 어깨를 잡아채 부여잡고
우리의 눈물로 이렇게 서서
아름다움은 배반이었다, 말할 때까지
나무의 호흡을 거칠게 두드릴 때까지
나무는 그냥 숨결이 꺼칠하다
나무의 충혈된 생애여, 우리들의 미학이여
절망에 대해서/김정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발설의 입도 없고
다만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에서(혹은 앞에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두고 차분히
걷지 못한다.
돌아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왜소한 그림자를 삽시간에 삼켜버리고
다시 토해내고, 토해낸 그림자는 갑자기 산더미만해지고
헤드라이트와 내 그림자는
골목 저편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게가 된다 담벼락 끝으로 설설 기어 오르는
헤드라이트는 다만 번쩍거릴 뿐인데
뻔뻔스레 번쩍거릴 뿐인데
헤드라이트의 절망과
내 몸 속, 그립고 또한 아주 왜소한 나의 절망이
그리고 절망의 절망이
일순의 거대한 시대를 지나
골목 저편으로 어둠을 몰고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다만 한 마리 비겁한 게처럼 설설 기면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에서(혹은 아무데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두고
안심하지 못한다. 참지 못한다.
선물과 명작/김정환
사람이 죽는 줄 알고
죽을 줄도 알지만
죽은 줄은 모르지.
죽은 자가 스스로 죽은 줄 모르고
걸어가는 혹은 다가오는
거리의 사물 형상 빛이 약간 더 생기 있다.
살아 있는지 모르고 살아 있을 때 이따금씩
우리를 놀래키는 그 빛은
때로 약간 더 멀쩡하고 약간 더 본질적으로 보인다.
땅거미 직전 땅거미
예감의 빛.
예감인 빛.
그
차이인 빛.
짐승 소리가 아냐, 그 소리 우리가
죽어도 알 수 없다. 죽음에 무슨 반전? 무엇보다
죽음이 그렇게 노골적일 수 없다.
그건 선물과 명작의 차이랄까.
명작의 값어치를 능가할 수 없는
선물은 명작의 감동에 다가갈망정
끝내 명작일 수 없는
우리 생 속에 생의 일부로 있고 각각의 생애로 빛난다.
‘그러나’가 갈수록 빛바래는 세계.
밤이 딱히 경건한 것 아니라 햇빛이란 게 정말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세계다.
밤 깊을수록 오디오 소리 크고 깊어진다.
선물 없다면 어떤 때는 아무리 낯익은 음악도
무섭지.
선물 있다면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
걸어가는 것일 수도.
명작은 선집을 선물은 전집을 읽는 것과 같다.
얼음으로 죽은 자/김정환
트로츠키, 이름조차 살기 묻은 침이 튀는
그의 묘비명을 써줄 사람이 없다
그는
얼음으로 죽은 자,
그는 레닌과 싸우지 않고
스탈린과도 싸우지 않고
둘 사이에 얼음으로 살다가
얼음으로 죽었다.
그가 살던 시대 천재 예술가는
또한 스스로 빙하시대에 살았다.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김정환
1. 모기, 내가 간섭
너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체위를
무슨 결심하듯
경배하듯 허공에 단 한번
손뼉 짝 박수를 치고
속도와 방향의 운이 좋은 그사이 나는 죽는다.
눈 깜짝할 사이고, 합장이다. 운이 나쁘면 내가 긴 다리를
더 쭉쭉 뻗으며 죽음의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착하다면 네가 연민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건 ‘뒤늦은’보다 ‘하마터면’에 더 가까울 것.
그렇지 않더라도 내 다리의 기나긴 경련은
너나 나나 속수무책일 것이다.
바퀴벌레 같은 소리.
네 말마따나 목숨은 기계와 같다. 다만
거기까지만 너의 말,
나의 정신을 보지 못한 네가 정신을 잃는 나의
순간을 보았을 리 없다. 그 순간
너의 시간은 흘러간다. 위태하다. 째깍째깍 나의 육신을 찢어발기는
의성과 의태 모두.
나의 시간은 명멸한다. 그 명멸 속으로 나도 명멸한다. 명멸이
원래 나의 삶이기도 하였다는 생각. 정신을 잃으며
시간은 누구에게
빛인가.
너는 이상한 장소 이상한 시간이다.
너의 계단은 불안하지만 불안은 나의 계단이다.
2. 거미, 그렇다면 나도 간섭
기억은 호시탐탐 육체의 지위를 노린다.
육체보다 더 똘똘 뭉치고
내 생각에 여기서 죽음이 삶과 갈라진다.
너무 똘똘 뭉쳐 확연한 기억의 바깥과 접근
불가능한 기억의 핵심이
모두 죽음이라는 거지.
그러느니 나는 파경의 좌우도 포함해서
기억의 실타래 풀어
집을 짓겠다는 거지. 신경망보다는
살림 가재도구 배열에 더 가깝게. 그리고
시간을 끝없이 줄이는 망원경(광년, 별빛은 언제
어디서 오고 우리는 어디로 어느 만큼)으로
그것을 곰곰 들여다보는
것과 일이 죽음이라고 한번 해보자는 거지.
아무래도 집은 불가사의할 수 없다.
과학도 배꼽이거니 할밖에 없다.
바람은 이따금씩 불어
내 집 내 줄 내 몸을 스친다. 그건 나의 연주다.
나를 연주하는 것 아니라
내가 연주하는 나의 연주다.
우주 같은 소리.
시간에 대한 물증/김정환
할머니가 쓰러졌다
시간이 가득 담겼던 가죽부대는 쉽게 구겨졌다
기다렸다는 듯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죽부대 속 구겨진 틈바구니에 갇혀 있던
몇몇 시간들 할머니의 앙다문 이빨 사이로 기어나왔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119구급대원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람들 꾹 다문 제 입가를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사라져간 골목길
할머니에게 끌려온 작은 손수레 하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학원 아이들 태우러 가던 내 차 앞에서
달팽이 처럼 끄리던 바퀴에
할머니를 쓰러뜨려 온 시간을 헐렁하게 감고
내 가슴 속 시간의 통로를 우두커니 가로막았다
귀/김정환
가는 비는 세상을
씻어내리지 않고 세상을
적시지 않고, 가는 비는 세상의
귀지,
제 몸에 귀를 기울이는
귀지,
가는 실잠자리 가는
장구채 위에 내리는
가는 비는
귀지.
좋은 꽃/김정환
이렇게 생생할 수야 전생의 그대, 욕망의 흔적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지쳐 흐려진 내 이생의 눈망울을 때리는
그대 잎사귀의 원색,
그 순결한 운명에 짐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충동을
피 흘려 지금은 다만 그대를 건드려보기 위한
손가락의 마구 떨림과 그대의 그 아직도 의연한 자태 사이
내 비인 주먹과 그대의 그 복수심 같은 아름다움 사이
숨이 막히는 공간 속에 갇혀서
나는 와들들 떨려 그대의 그 진한 향기도 참지 못하고
그대도 아아 조금씩 눈물 반짝이며 흔들리며 섰나니, 그대의 꽃잎
자꾸자꾸 벗어버리는 고운 살결 같은
그대의 경련 벌써 끝없이 들키고 있음!
설운 몸, 수습하기도 전에
경미한 흔들림으로 그대가 내 발에 흘린
그대의 향기 그 피비린 맛에
나도 막강한 설레임만으로
그대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앙칼진 복수심으로 내 눈을 때리는
아름다운 꽃,
좋은 꽃,
제설작업/김정환
살아도 오히려 힘에 또 겨울
벅찬 아픔과 감동의 시대였니라
연병장에 엄청나게 쌓인 눈산더미를 보며
일요일 제설작업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넉가래를 밀면
우리 힘만으로는 암만해도 모자랄 것 같은
눈은 지금도 쌓이며 넉가래 끝에서
묵직한 사랑의 감동이다
시력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하얀 반짝임. 눈물.
살아도 내사 다는 못 살고 돌아갈 시대
80년대까지 이렇게 산사태로 밀려오는 눈을 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도
밀어도 밀어도 80년대까지 밀려드는 눈은
우리 자라다 만 키의 어깨를 넘칠 듯, 넘칠 듯
우리 서툰 넉가래질을 덮쳐 삼킬 듯,
그러나 눈발 속에서 아이가 운다 배가 고파서
살려주셔요 소리같이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지 마셔요
소리같이 윙윙대는 눈보라 현수막 흩날리는 전쟁구호
뒤에 저희들이 있다는 듯이
눈은 아직도 쌓이고, 넉가래질은 서툴고
땀에 흐려진 시야 주먹으로 닦아내면
담벼락에 엉겨붙은 하얀 잔설
풍경엔 핏자국이 묻어 있다
아름다움엔 피와 살기가 묻어 있다
온통 하얘지는 세상에 일렬종대
그대는 아직도 고통에 갇혀 지내고
연병장에 쌓인 눈을 밀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 남은 것은
우리의 앞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하철 정거장에서 1/김정환
말하라 우리가 이젠 벅찬 한줌의 먼지로 서서
열차가 도착하는, 발 밑의 지축을 울리는 경적소리
그 몰고 오는 풍파의 장엄이나마
온전히 온전히 가슴 설레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열차는 기다림 속 무언가 가여운 떨림을
산산조각 내는 속도와 방향으로 들어온다
이 조그만 도착의 운동에도 흩날려대는
갈채 같은, 환호 같은 슬픔의 나부낌!
그러나 진실은
훨씬 더 우람하고 시끄럽고
두려운 소리로 온다
아직도 버팅겨 있음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율의 함성으로 온다
기다려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훨씬 더 아픈
훨씬 더 심장이 터질 듯 벅찬
감격으로 오리라
철길 위에 쓴다/김정환
무쇠와 근육을 부딪쳐
근육과 눈물을 부딪쳐
울컥이며 가자 만국의 노동자
덜커덩거리는 것은 시대일 뿐
우리들의 심장은 촉촉하고 강하다
음침한 것은 또한 화려하다
대낮 햇빛 밝은 시절의
영롱한 인간이여
미래여 우리가 걸어온
함성 위에 굵은 눈물로
더욱 강인한
철길 위에
드디어 우리는 자유라고 쓴다
갈 길 위에 쓴다 오 진정한 자유
최고의 사랑은/김정환
끝끝내 아내는 운다 전교조(全敎組)의 아내
우리는 쁘띠 아니냐고, 애새끼들은
어쩔거냐고, 일순 기차는
덜컹대고 그 틈에
핑 돌던 것이 흩뿌려
차창 밖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
아내여 어차피 자본주의에서
최고의 사랑은 계급동맹이다
덜컹대며 기차는 달리고
세상은 영화처럼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자유는 자급 자족에 있지 않고
평화는 농촌 풍경에 있지 않고
사랑은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오늘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몸과 몸을 섞듯이
몸을 섞으며 덜컹덜컹 달리듯이
철길/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이 내려
철길의 들끓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 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을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 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국이 된다.
길잃기/김정환
목숨을 걸고 살아오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길은 저렇게 아스팔트 길이다
삶이라는 것이 오로지 목숨을 거는 일일 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가슴의 구멍처럼 확 뚫린
확 뚫려 그 속을 길 잃는 바람이 쌩쌩 지나가는
저 아스팔트 길밖에 무에 또 남을 것이 있겠는가
마지막 이빨 악물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길은 저렇게 확 트인 아스팔트 길이다
이제 텅 비고 깜깜한 아스팔트 길에 남아
쏜살같이 내 앞을 지나가는 저 속도를 보아라
보아라 혼자 가도 여럿이 가도
우리를 마구 덮치는 이 막강한 힘을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못내 부끄러워
길은 저렇게 아스팔트 길이다
쫙 깔렸다
여보게 여보게 왜 말이 없는가
왜 말이 없는가 몸조심이나 잘하게 마누라쟁이는 잘 사는가
누군가가 공중전화 박스에 그냥 두고 간
아직도 부르고 외치는 소리.
목숨을 걸고 살아오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길은 저렇게 저렇게 아스팔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