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지난 9월 24일 오후예배시간에 진행된
2023 교인역사문화탐방을 위한 배경지식 역사강의안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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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만큼 보인다.
강사; 최익제 장로
(전)안동고등학교 역사교사/ 안동대교육대학원 겸임교수
교육학박사(한국교원대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요즈음 같은 SNS 시대의 유튜브, 인터넷에는 유익한 정보만큼이나 쉰내 풀풀 나는 허접한 가짜(fake) 뉴스도 넘쳐납니다. 그래서 이성과 상식이란 후각에 탈이 난 사람들은 오늘도 거기에 코를 박고 삽니다. 또 세상에는 파편화된 지식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아는 지식’은 쓸모도 없으려니와 알고 있으면 머리만 복잡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지식은 뭘까요? 그게 바로 ‘실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입니다. 즉 전문가에 의해 정밀하게 편집된 지식을 나의 인지구조 안에서 나 스스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한 지식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활용 가능한 지식이고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의 살아있는 나의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많은 실제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는 남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의 세계에서는 내가 알고는 있는데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비유컨대, 우리가 음식으로 섭취한 포도당은 저분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효소를 촉매로 해서 쉽게 분해, 연소되고 다른 물질에 의해 변형됩니다. 그러나 쓰고 남은 포도당을 인슐린이 고분자 구조로 바꾸어 간에 저장하는 ‘글리코겐’은 견고하고 그 효용성이 크고 오래 갑니다. 오늘 강의가 글리코겐처럼 고분자 구조의 생명력을 가진 ‘실제적 지식’을 다함께 공유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땅은 좁지만 깊은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사우디는 땅만 파면 석유가 나오지만 우리나라는 땅만 파면 역사적 유물들이 나옵니다. 전 국토가 박물관입니다. 역사가 깊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애완용 개 족보는 있어도 사람 족보는 없습니다. 여러 해 전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는 아프리카로 흑인 노예의 5대 조상 만딩고족 쿤타킨테를 찾아가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수십 대 조상의 내력이 적힌 족보가 있는 우리가 볼 때 <뿌리> 정도는 가십거리도 안됩니다. 하지만 당시 전 미국인들이 그 스토리에 열광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널린 게 천년의 향기를 품은 역사유적이고 사람들은 수백, 수천 년 역사의 흔적을 깔고 삽니다. 경주 금관총의 찬란한 금관에서부터 전라도 광주 신창동 화장실 유적지까지 끝이 없습니다. 30년 전 아파트를 짓기 위해 그 신창동 저습지를 발굴할 때, 2천년 전 사람의 인분으로 추정되는 물질에서 회충, 편충알 키틴질 껍질이 나왔습니다. 기생충에 오염될 만큼 당시 그 지역에 인구가 밀집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화장실 고고학’이란 용어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수준의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번에 그 어떤 교회도 시도하지 못하는 문화사역, ‘역사탐방’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오늘 역사 강의는 이 프로그램의 첫 순서입니다. 강의제목은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문화유산은 더더욱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탐방코스는 순흥 피끈마을—어숙묘—금성단—소수서원—부석사—태백산실록사고터—사이드코스로 만산고택—소천의병전적지—법전척곡교회 순서로 진행합니다. 이 시간은 탐방 메인코스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만 살펴보고 탐방지의 추가 설명은 이동하는 차량이나 현장에서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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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피끝마을, 금성단입니다. 이곳은 우리 역사영화의 단골소재였던 ‘단종애사’, ‘사육신’, 즉 조선 초기 단종복위사건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현장입니다. 566년 전 소백산자락 순흥은 처절한 살육의 현장이었습니다. 1457년 정축년 한여름,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력들과 수양대군 세조는 조카이자 폐위시킨 소년왕 단종도 죽이고 친동생 금성대군까지 죽입니다. 그 바람에 수백 명 순흥의 쓸만한 목숨들이 역모의 죄목으로 칼날 앞에 쓰러져갔습니다. ‘정축지변’입니다. 그날 이후 280년이 지난 숙종대에 이르러 복권, 즉 신원(伸冤)되기 까지 실로 작은 고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역사의 아픔이 순흥 땅 산하를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억울한 죽음 그 원혼들을 위한 위령제단 대신 왕실의 지친인 금성대군의 제단만 세워집니다. 지금의 금성단입니다.
1392년 조선왕조는 이성계 혼자 세운 나라가 아닙니다. ‘말 등에서 창업할 수는 있어도 말 등에서 수성할 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조선은 이성계의 무력과 신진사대부 성리학자들의 두뇌가 손잡고 창업하고 수성(守城), 즉 통치한 나라입니다. 무릇 정치사의 기본 프레임은 왕권과 신권의 파워게임입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당시 나라를 창업한 브레인 집단들은 ‘왕도정치’를 주장했습니다. 군왕이 아닌 유능한 재상중심 정치입니다. 법치보다는 덕치(德治)를 추구했습니다. 왕도정치 사상에는 백성이 군왕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혁명사상이 들어있을 만큼 민본이 강조된 정치사상입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왕과 신하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프레임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군신이 함께 학문과 정치를 논의하는 ‘경연(經筵)’입니다. 경연은 온갖 변칙과 비리로 얼룩진 오늘의 우리 국회를 부끄럽게 하는 토론정치의 꽃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하루 일과는 살인적인 스케줄의 연속이었습니다. 새벽 5시에서 밤 10시에 이르는 강행군입니다. 조회, 윤대(접견)에다가 무수한 상소문, 공문서를 읽고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경연도 하루 3번입니다. 야간 궁궐 숙위금군들의 명단확인과 암호까지 내려야 합니다. 가뭄에는 기우제, 장마에는 기청제를 지내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주의가 정착된 현대국가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모든 걸 챙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봉건왕조 국가는 왕이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해야 하는 통치구조입니다. 그래서 격무와 스트레스로 대부분 왕들의 수명은 40대 고개를 넘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1인 통치 독재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의 김정은도 새벽 3시까지 온갖 보고문건을 보고 지시를 내린다고 합니다. 살인적 스트레스에 속절없이 독재자의 몸이 망가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쨌든 조선 초기는 이처럼 왕권과 신권이라는 두 개의 힘이 팽팽하게 대립합니다. 그리고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왕권과 신권은 불안한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적장자 승계라는 왕위계승원칙 또한 예측 가능한 정치를 위한 군신 간의 불문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세종 사후 병약한 문종에 이어 12살 어린 왕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과 신권의 파워게임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섭니다. 김종서를 비롯한 신권우위 세력들은 이른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제)’를 굳히며 국정은 물론 병권(兵權)까지 장악하면서 권력구조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한 종친세력과 그의 추종세력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1453년, 전격적인 쿠데타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습니다. ‘계유정난’입니다. 이로써 신권에 휘둘리는 유약한 왕, 단종 대신 수양대군 세조의 강력한 왕권통치가 시작됩니다. 이같은 왕권과 신권의 파워게임은 조선왕조 권력구조의 새판을 짜게 했습니다. 하지만 정변은 늘 또 다른 정변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명분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집현전 지식인들과 세조의 지친인 금성대군은 목숨을 걸고 판을 뒤집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육신의 거사는 동료 김질의 배신으로 금성대군의 순흥거사는 안동 관노비 이동의 배신으로 막을 내립니다.
지금도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무릇 권력은 나눌 수 없고 정적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철저하게 짓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그 꼴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승자가 피 묻은 칼을 씻고 승리의 축배를 드는 순간 패자는 피눈물과 함께 처절하게 죽어갑니다. 그때 16세 어린 단종도 소백산 너머 영월의 적소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단종이 유배된 후 혼자 남겨진 여산송씨 어린 단종비는 서울 동대문 밖 창신골에서 염색을 하며 수종들던 시녀의 구걸로 모진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단종의 죽음 전해 듣고 그녀는 근처 산에 올라 밤낮으로 통곡합니다. 그때 아낙네들이 왕비와 슬픔을 나누기 위해 함께 곡을 했습니다.
동정곡(同情哭)입니다. 가슴 한번치고 땅 한 번 치고 구슬피 우는 것입니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따라 울 수 없는 고통공감 행위입니다. 여항의 아낙네들이 어린 왕비를 따라 우는 동정곡은 따뜻한 피 울음이었습니다. 아마 그 시절 순흥 땅 풍경도 그랬을 것입니다. 동정곡만큼 처절한 피 울음이 진동했을 것입니다. 정축년 그해 여름, 60여 가구 수백 명 죽음이 흘린 핏물이 서천으로 이어지는 죽계천을 따라 10리를 흘렀습니다. 이게 바로 그 핏물이 끊어졌다는 ‘피끝마을’을 지날 때마다 잠시라도 우리가 역사의 메아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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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순흥어숙묘입니다. 고분은 그냥 단순한 무덤이 아닙니다. 땅속의 역사교실이자, 문화유산의 창고이며 그 자체가 신분의 상징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그런 곳에 묻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돌에서 시작한 우리 민족의 장례풍습은 하나의 형태로만 전승된 건 아니었습니다. 옛 옥저의 세골장(洗骨葬)은 망자의 시신을 타처에 가매장 했다가 유골만 옮겨와 집 마당에 보관한 ‘가족공동 납골묘’였습니다. 요즈음도 수준높은 가풍을 지닌 가문을 일컬어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하는데 세골장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후 우리 민족이 만약 이런 장례풍습을 지켰다면 이 나라의 산천에 지금처럼 무수한 무덤 혹불을 내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왜군이 신라를 침공할 때 상륙지점이 되는 동해안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의 해중릉입니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바다무덤입니다.
고분은 크게 두 가지 유형입니다. 삼국시대 초기, 신라의 돌무지무덤과 백제,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습성에는 놀라운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고대사회는 태어난 곳을 떠나 어디에 가서 살든 장례풍습만은 좀처럼 바꾸지 않았습니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돌무지무덤과 똑같은 형태의 무덤들이 중앙아시아에 가면 널려있습니다. 그곳은 바람이 많이 불어 자고 나면 모래언덕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할 정도입니다. 흙무덤으로는 시체를 보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무지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그럼 그런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만주, 특히 한반도 경주일대에 왜 돌무지무덤이 나타났을까요? 초창기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세력들은 돌무지무덤 장례 풍습을 지닌 북방에서 이동해 내려온 유이민 세력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고대인들의 사생관(死生觀)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무덤은 다만 죽은 자를 묻는 공간이 아니라 망자가 살았던 세상을 옮겨 놓은 영혼의 거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무지무덤의 부장품과 굴식돌방무덤의 온갖 벽화를 통해 아득한 고대사회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돌무지무덤인 신라 고분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당연히 벽화가 아닙니다. 천마도는 ‘장니(障泥)’, 즉 말이 달릴 때 진흙이 튀는 걸 막는 마구인 흙받이에 그린 말 그림입니다. 그런데 천마도의 바탕 재질이 백두산 부근에서만 자생하는 한랭 수종인 자작나무 껍질입니다. 무덤의 주인공이 어디 출신인지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또 인골이 다수 발견된 순장(殉葬)의 흔적은 ‘영혼불멸의 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시중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산사람을 함께 묻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돌무지무덤의 부장품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구조상 도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굴식돌방무덤은 벽화를 남길 수 있으나 대부분의 부장품은 도굴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반론도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의 경우, 부장품이 없는 것은 신라, 백제와 달리 피장자가 생전에 아끼던 물건을 함께 묻지 않고 장례 후 무덤 앞에 놓아두면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죽음길은 가볍게 하고 살았을 때의 부귀영화는 벽화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제의 고분처럼 당시 한반도 문명의 저수지였던 중국은 ‘굴식벽돌방무덤’이었습니다. 벽화를 남길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의 성현 공자는 조실부모하고 소시적에 ‘유(儒)’라고 불리는 장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들은 장례를 치러준 다음 날 값나가는 부장품들을 파내 가 돈벌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런 비열한 ‘소유(小儒)’들의 세계와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런 비리에 충격을 받은 공자는 훗날 노나라의 법을 다루는 ‘사구’라는 관직에 나갑니다.
순흥어숙묘는 고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유적입니다. 특히 소백산 이남 지역에서 벽화가 나온 유일한 굴식돌방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백산 일대는 삼국시대 국경을 맞대는 최전방이었습니다. 자연스레 문화적 결절(結節)지점이 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어숙묘들이 나올만한 지역입니다. 어쨌든 그 무덤에서 발굴 당시 ‘을묘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之述干)’이라는 명문(銘文)이 나왔습니다. 학계에서는 ‘어숙’은 고구려의 인명, ‘술간’은 신라의 관직명으로 봅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확률상 6세기 말 신라 진평왕때 신라에 망명한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보는 게 합리적 추정입니다. 이때는 신라전성기였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쇠퇴기였습니다. 중국이 남북조의 분열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 수나라가 등장하면서 고구려, 백제를 압박해 왔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지배층이 신라로 망명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정황이었습니다. 특히 상당한 수준의 벽화를 그린 석실묘에 묻힐 정도라면 피장자는 아마 순흥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귀족반열의 인물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장례풍습을 끝까지 지키며 타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 놀라운 문화적 정체성 또한 K-Pop, K-Culture가 글로벌 브랜드로 세계를 주름잡는 오늘 우리에게도 한 번쯤 귀 기울일만한 역사의 숨결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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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소수서원입니다. 조선전기 사림양반세력들은 집권훈구세력들에게 밀려났지만 서원과 향약, 향청을 통해 향촌지배세력으로 힘을 길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중기 이후 붕당을 형성했고 마침내 정치적 주도권까지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향약은 자치법규를 통해 재지(在地)농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관권을 집행하는 수령보다 사는 곳에서 자신들을 쫓아낼 수 있는 향약의 집행자인 양반들을 더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또 향청은 사림이 고을수령(守令)의 지방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촌 자치기구이자 견제기구였습니다. 수령의 손발인 향리가 향청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특히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거대한 아카이브(achive)였고 도서관이었습니다. 왜란, 호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책들이 불타 없어지면서 출판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사실상의 여건을 갖춘 곳은 서원밖엔 없습니다. 물론 서원은 사림세력들이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확산시키고 정치적 여론 집단을 형성해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을 결집하고 키우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유교의 본질에 한번 눈길을 돌려야겠습니다. 성리학을 포함한 유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상을 당하면 장남은 생업을 전폐하고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습니다. 만약 너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고 마을로 돌아오면 그는 거의 죽을 때까지 인간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수많은 조선의 장남들이 그 3년을 이기지 못하고 숱하게 병사했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충,효,정절(貞節)이라는 강상(綱常)의 절대가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에 이르러 우리 한국인들이 참으로 견고한 ‘가치중심적 집단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배경입니다. 그동안의 처절한 역사적 시련과 비극을 극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낸 저력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입니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일개 사림이 세운 사설 학교로서의 위상을 넘어서게 됩니다. 동시에 순흥지역 사림의 존재가치는 왕의 ‘친필사액’이라는 국가적 공인을 받아 오히려 수령권을 능가하는 막강한 정치적 입지를 갖추었습니다. 이후 전국에 걸쳐 사액서원이 늘어가면서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의 학맥은 그대로 정치지배층의 인맥으로 이어지고 서원의 학풍은 조선 후기 붕당의 당색(黨色)을 결정합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는 같은 스승의 문하라면 정치적으로도 같은 당파를 이루는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했고 이같은 궤도로부터의 이탈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국적은 바꾸어도 모교는 바꿀 수 없듯이 바야흐로 서원은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삶의 방향, 즉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절대적 상징같은 곳이었습니다. 또 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당간지주는 그곳이 절터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왜 하필 주세붕은 숙수사 절터에 소수서원을 세웠을까요? 무소불위(無所不爲), 막강했던 고려불교를 밀어낸 조선 성리학의 거침없는 반전의 파워가 실감나게 다가오는 역사의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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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부석사입니다. 불교는 샤머니즘만 존재하던 한반도에 들어온 첫 고등종교였고 천년세월을 넘어서며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입니다. 왕즉불(王卽佛), 즉 ‘왕이 곧 부처’라는 논리의 초기불교는 귀족세력을 정치는 물론 종교에 이르기까지 풀 버전으로 제압하기 위한 통치의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불국정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원효의 정토(淨土)사상, 갈등 대신 화합을 설파한 화쟁(和諍) 사상이 나옵니다. 기독교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교리와 비슷합니다. 또 ‘하나가 곧 일체요 모두가 하나’라는 의상의 화엄(華嚴) 사상, 이타구세(利他救世)의 관음(觀音) 사상도 나옵니다. 기독교와 비교하면 십자가의 사랑, 즉 ‘박애(博愛)’와 닮아있습니다. 요컨대 원효와 의상의 사상은 모두 천하만물의 상호의존성과 조화를 강조한 ‘평등론’입니다. 이를 통해 비로소 고대 신라불교는 지배층의 불교에서 민중의 불교로 자리잡게 됩니다. 특히 부석사는 신라불교사상을 모두 담아낸 사찰입니다. 즉 화엄종의 본찰이지만 금당인 무량수전이 정토경의 하나인 ‘무량수경’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고 화엄종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 대신 정토신앙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무량수전에 모신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또 하나 무량수전의 주심포 건축양식은 다포양식과 더불어 고건축의 꽃입니다. ‘배흘림’ 기둥과 양 사이드 기둥을 살짝 높게 하는 ‘귀 솟음’은 단연 한국 건축사의 백미입니다. 요컨대 건축의 기본은 기둥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고건축물은 웅장하게 보이기 위해 지붕이 엄청나게 큽니다. 자연스레 엄청난 지붕의 무게는 비나 눈이 오면 더 무거워집니다. 그렇다면 그 지붕의 무게를 기둥이 감당하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량수전은 지붕의 무게를 완충시키기 위한 공포(拱抱)를 기둥 위에만 배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심포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기둥의 가운데를 불룩하게 한 것과 귀솟음은 건물의 안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착시현상을 고려한 것입니다. 요컨대 무량수전은 미학과 과학의 신비가 모두 깃들어있는 소중한 건축문화유산입니다.
고대에 이어 중세의 고려불교는 국가적 숭불(崇佛)정책으로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불력(佛力)이 곧 국력으로 인식될 만큼 융성했다. 그리고 불교는 그 위상에 걸 맞는 변신을 시도합니다. 즉 경전과 참선수행 가운데 경전을 우선하는 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에서 참선수행을 우선하는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로 불교사상이 변화합니다. 기독교와 비교하면 ‘성경말씀과 믿음의 실천이 모두 소중한 것이로되 그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시 하는가?’라는 논쟁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교리논쟁은 어디까지나 불교통합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후기 불교는 결사운동(結社運動)이 크게 일어납니다. 불교가 사찰의 경계를 넘어 세상과 민중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난세의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해결자, 선도자로서의 종교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고려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사상계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혜심의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입니다. 즉 유교와 불교의 근원이 하나라는 논리로서 유교와 불교의 접점을 찾는 사상운동으로 발전합니다. 그 결과 혜심의 결사운동에는 성리학 지식인들까지 합류할 정도였습니다.
요컨대 우리 역사에 비친 고려불교는 두 얼굴이었습니다. 40년 몽골침략을 막아낸 국민적 저항심리의 원동력이었던 ‘팔만대장경’ 조판은 호국불교로서의 고려불교가 남긴 위대한 유산입니다. 하지만 고려말 불교의 폐단은 철저한 세속화라는 극단의 지경에 이릅니다. 사찰의 막강한 힘과 비대한 경제력이 마침내 윤리적 타락까지 부추긴 결과였습니다. <고려사>에는 ‘승려들이 어깨에 걸치는 가사는 술 항아리의 덮개가 되고 범패장소는 파밭과 마늘밭이 되었으며 승려가 속인들과 싸워 피 흘리는 일도 많았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결국 조선왕조가 창업되면서 성리학 신진사대부들의 척불론(斥佛論)이 철저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현실화되면서 불교의 전성기는 막을 내립니다. 거대사찰은 세상에서 밀려나 산중암자로 숨어들었고 막강한 브라만으로 행세하던 승려들은 천민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사찰이 소유한 재산은 몰수되고 사찰이 거느린 사원의 노비들은 공노비로 전환되었으며 도첩제는 승려의 수를 옥죄면서 불교를 세상의 주변으로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조선의 불교는 혹독한 시련기를 맞습니다. 시대적 소명을 망각한 종교, 즉 짠맛을 잃은 소금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서 버림받는지를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숨죽이며 지내던 조선의 불교에 가느다란 햇살이 비친 적도 있긴 했습니다. 세종대의 내불당과 조선중기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입니다. 하지만 불교에게 조선시대는 여전히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불교는 왜란을 기점으로 휴정, 유정의 승병(僧兵)을 통해 호국불교로 재기합니다. 승병들은 ‘동족을 죽이는 자를 죽이는 것은 살생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죽창을 들고 왜적과 맞섰습니다. 당시 승려집단은 이념, 지식, 훈련을 갖춘 최대의 인적 자원이었고 전시동원 전투자원으로도 사실상 최적화된 집단이었습니다. 이후 승병은 왜란 내내 의병, 관군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물론 전후 뒤처리와 복구사업에도 승려들은 소중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특히 사명대사 유정은 유생 관료들이 모두 마다하는 일본 도쿠가와(德川) 막부와의 험난한 협상 길에 나서 3,000여 명 포로를 데려옵니다. 또 산성의 수축과 한양의 도성 복구공사에도 승려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국가는 불교에게 실록보호 및 재난 예방, 개간사업, 종이, 기름, 신발, 심지어 누룩의 생산까지 맡길 정도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의 불교는 고려 후기 불교가 민족사 남긴 얼룩을 말끔하게 지우면서 인격의 완성, 사회의 구제, 화평복지라는 종교 본연의 소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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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史庫)터입니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하는 문화적 장르입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동서고금 어디에도 완벽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완전성을 추구하는 노력만 쉼 없이 계속되었을 뿐입니다. 다 아는바, 우리 민족은 세계사상 그 유례가 없는 기록문화, 아니 위대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朝鮮王朝實錄』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유일의 장장 500여 년을 다룬 국가단위의 방대한 공적 기록입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집필부터 정본의 완성, 이후의 보존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빈틈이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자인 사관은 비록 품계는 낮을지라도 벼슬자리 가운데 가장 청화(靑華)하며 글 잘하고 문벌이 좋아야 했습니다. 왕은 공적 공간에서는 반드시 승지와 함께 복수의 사관을 대동해야 했습니다. 사관은 여러 기록을 수집한 후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를 집필해 춘추관에 보관했지만 다만 시정의 득실과 왕의 언행, 인물의 선악을 기록한 극비문서는 반드시 개인이 따로 보관했습니다.
사초와 시정기는 사관이 목숨을 걸고 직필한 것으로 왕을 포함한 그 어떤 권력자도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 표현을 빌리면 언론탄압, 즉 필화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왕이 승하하면 비로소 글 잘하는 문신을 당상으로 뽑아 실록청을 구성하고 사초와 시정기 및 관련 문건을 모아 실록을 편찬합니다. 나라에서는 사관이 보관한 사초의 제출기한 및 기준을 정하고 이를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했습니다. 실록은 초초, 중초, 정초의 단계를 거쳐 완성되고 인쇄 후 사고에 봉안합니다. 그리고 실록편찬에 사용된 사관이 생산한 일체의 기록물은 세초(洗草)했습니다. 집필자의 신상을 감추고 기밀 누설을 방지함으로써 사관의 직필을 제도적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조선시대 세초는 서울 세검정 부근 개천가에 있는 차일암에서 실시했는데 그 주변에 제지공장인 ‘조지서(造紙署)’가 있었습니다. 세초한 후의 잔여물을 종이로 재생했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실록의 보존도 철저했습니다. 전란과 화재 등을 감안해 여러 본(本)을 인쇄해 전국에 분산된 사고에 비치했고 화재예방 및 큰 틀에서 사고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비보(裨補) 사찰을 지정했습니다. 지금은 사고터 흔적만 있지만 전국 5대 사고 중 영주와 가장 가까운 곳에 바로 태백산 사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고 아래에 위치한 각화사가 비보 사찰이었습니다. 특히 태백산 사고본은 정족산본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실록 원본으로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고에 보관한 실록은 3년에 한 번씩 나라에서 사관을 파견해 정기적으로 ‘포쇄(暴曬)’했습니다. 즉 책장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햇볕에 말려 습기와 충해(蟲害)를 방지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기록물의 생산과 보존에 관한 나라의 열정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역사에서 기록과 증언의 논의는 언제나 간절합니다. 왜일까요? 모름지기 오늘의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는 개인과 공동체는 과거에도 무관심합니다. 과거에 대한 무관심은 곧바로 현실에 대한 무책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미래에 대한 건강한 비전을 생산하지도 공유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오늘은 후대들이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망각의 지층으로 내려가 묻히고 사라져 버립니다. 사실상 찰나에 가까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일상들과 맞바꾸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손실입니다. 돌아보면 요즈음 우리 사회의 역사논쟁은 ‘제주 4,3사건’에서부터 ‘백선엽 친일논란’, ‘홍범도 흉상논란’, ‘정율성 공원논란’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습니다. 요컨대 역사논쟁은 치열한 전쟁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미래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통성의 기반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알면 좋고 몰라도 상관없는 그런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영주중앙교회 교회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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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소천 왜란의병 전적지입니다. 1592년부터 7년간 벌어진 왜란은 6.25전쟁과 더불어 한반도의 땅과 바다가 모두 전쟁의 불길로 뒤덮였던 우리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희대의 혼군(昏君), 선조의 무능에다가 훈척과 사림간의 권력투쟁으로 정치, 경제, 국방이 모두 거덜 난 상태였습니다. 200년 일본열도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조선만큼 만만한 먹잇감도 없었습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평양성까지 북진하는 동안 나라가 한 일은 백성을 내팽개친 국왕 선조가 압록강변 의주까지 도망간 사실뿐이었습니다. 전황이 여기에 이르자 요동이 불안한 중국 명나라 군대가 개입해 왔습니다. 하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그들은 최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화력 앞에 참패당합니다. 이때 명군은 비로소 포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적을 얕잡아보고 무대뽀로 덤비다가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포없음, ‘무철포(無鐵砲)’, 즉 일본말로 ‘무데뽀(’むてっぽう)란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왜군의 승승장구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전시내각, 즉 분조(分朝)를 책임진 세자 광해군이 전쟁을 지휘하기 시작합니다.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면서 비로소 관군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순신의 수군은 왜군의 수륙양면작전을 남해에서 무산시켰고 동시에 호남의 곡창을 지켜냈습니다. 물론 진주대첩, 행주대첩도 적의 예봉 꺾어놓은 결정적 승전이긴 합니다. 하지만 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결정적 요인은 ‘이순신 수군의 승리’와 ‘의병의 항전’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노군과 포군이 격리된 구조로서 효율적 전투가 가능했고 배 밑창이 평평한 평저선으로서 해상전투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전환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속도와 직진에만 초점을 맞춘 왜 수군의 전함 세키부네(關船)는 해상에서의 회전 각도가 너무 커 ‘학익진(鶴翼陣) 전법’ 같은 이순신의 측면공격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북선이 아니더라도 판옥선과 수군의 화포는 왜군의 조총을 부지깽이로 만들었습니다. 또 육상전투에서도 대당 궁수 200명의 화력을 지닌 조선의 최신병기 신기전(神機箭)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다연장 로켓포 그 이상의 화력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은 무기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군이 84개월의 전란 가운데 주도권을 잡았던 것은 고작 4개월뿐이었습니다. 요컨대 이 전쟁은 왜군이 나머지 80개월을 굶주린 개떼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패배한 전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쟁터의 병사들은 먹어야 싸웁니다. 왜군의 패배는 한마디로 병참(兵站)전략의 패착에서 나왔습니다. 6.25전쟁에서 김일성이 패배한 이유가 그랬습니다. 왜란 당시 일본 본국에서 압록강까지 이어지는 전선은 본시 병참선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 병참선은 현지에서 군량조달이 가능할 때만 작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최대의 곡창 호남을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에서 틀어막고 조헌 의병, 영규 승병 연합부대가 땅에서 완벽하게 지켜냅니다. 게다가 왜군은 이순신의 재해권 장악으로 본국과의 연결망도 차단되었습니다. 그나마 있는 병참선마저도 의병들이 도처에서 공격해 병참선을 끊어놓았습니다. 요컨대 왜군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또 당시의 의병은 누가 하라고 시킨 게 아니었습니다. 내 가족 내 마을을 지키겠다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동기 때문이지 충군(忠君), 애국 같은 뭐 그런 거창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무기가 열악한 의병은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강궁으로 혹은 기습한 후 백병전으로 맞섰습니다. 현지 사정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보는 의병들은 적들이 어디로 지나가고 어디서 밥 먹고 쉬고 잠자는지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 그런 때만 골라서 공격했습니다. 왜군에게 의병의 게릴라 공격은 그 자체가 날벼락이었습니다.
무릇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왜란 역시 엄청난 백성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맞아 죽고 얼어죽고 굶어죽고 칼 맞아 죽었습니다. 왜군은 전과를 부풀리기 위해 민군을 가리지 않고 수급, 즉 죽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갔고 나중에는 산 사람의 귀와 코까지 베어 소금에 절여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왜란 후 귀 없고 코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그때 가져간 코무덤과 귀무덤이 있습니다. 왜군만큼 조선을 괴롭힌 것은 중국 명나라 군대였습니다. 출병은 뒷전이고 살인, 약탈, 강간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명군의 패악질을 목격하고 피눈물을 흘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반명(反明)정책으로 완벽하게 돌아선 이유입니다. 요컨대 조선 백성에게 명나라 군대의 주둔은 재앙이었습니다. 심지어 적과 내통한 명군이 후퇴하는 왜군을 지켜주는 바람에 그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새재를 넘어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정부를 대표해 출병을 요청하는 류성룡에게는 곤장을 쳤습니다. 서애는 그의 <징비록>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적었습니다. 나라의 안보를 남의 손에 맡기면 지금도 우리는 이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적이 누군지도 모르고 헤매는 지도자를 만나면 착한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사정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 다를 게 없습니다.
소천의병전적지는 왜란 첫해 여름, 유생출신 의병장 류종개와 600명 의병이 봉화 소천일대에서 3,000여 병력의 가또오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왜군 1,000여 명을 죽이고 전원이 순국한 곳입니다. 이로 인해 왜군은 안동, 영주, 봉화를 비롯한 경북북부지방으로의 진격을 포기합니다. 이후 저들은 해안을 따라 함경도까지 북상하면서 강원도 지방에서 온갖 노략질을 저지릅니다. 소천의병 덕분에 왜란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후 왕조실록은 경북북부지방을 ‘왜란의 복지(福地)’라고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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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법전 척곡교회입니다. 우선 초기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890년대 후반에 주일오전 성경공부와 주일 오후예배, 전도가 정착되면서 자연스레 주일성수가 자리잡게 됩니다. 이를 위해 심지어 토요일에 물을 길어 쌀을 씻어 놓는 집도 있었습니다. 수요기도는 기도와 간증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짧은 기도를 이어가는 돌림기도, 다 함께 하는 통성기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새벽기도는 한국교회만의 아주 특별한 영성 신앙으로 움트기 시작합니다. 교회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는 이후 한국인들의 건강한 서카디언(circadian) 리듬을 일깨우는 기상나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풍경은 여전히 전통의 흔적 그대로였습니다. 예배당 내부는 당연히 의자가 없었고 교인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할 때는 모두가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맞대고 절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당시 풍속대로 남녀의 좌석을 분리한 것입니다. 커튼을 쳐 남녀를 구분하거나 성별에 따라 예배를 따로 드렸습니다. 아예 교회당 구조를 L자 형식으로 만들어 남녀를 벽으로 격리시켰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장로가 있는 조직교회(church), 영수와 집사만 있는 반조직 교회(chapel), 교인만 있는 미조직 교회(group)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미조직 교회는 한국인 영수(領袖), 즉 리더가 설교와 목회, 세례자 심사를 책임졌습니다. 선교사는 일년에 한 두차례 방문해 문답 후 세례의식을 베풀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초기교회는 철저한 서리제도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합니다. 교회사가들은 초기 한국교회 급성장의 비결을 ‘네비어스(Nevius) 원칙’에서 찾습니다. 즉 선교사 주도가 아닌 한국 토착교인들의 자립, 자발적 전도, 자치정신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사의 의지가 아닌 한국교인들이 공유한 믿음의 열정이 선교의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선교사들 역시 ‘한국인들의 준비된 마음이 오히려 선교사의 미션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으로 상징되는 유교 양반문화와 용단지, 성주 신앙이라는 토속신앙과의 문화적 갈등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 길은 엄격한 치리(治理)와 권징(勸懲)을 통해 세속을 능가하는 월등한 교회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깨끗하고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갖출 때만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넘어서 공존 상생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담배, 음주와 노름, 축첩(畜妾)의 악습은 교회가 앞장서 넘어야 할 벽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인습과의 전쟁에서 한국교회는 십자군의 군병처럼 전진했고 승리했습니다. 이로써 문명의 변방, 조선 땅에 복음과 찬송, 신문명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복음의 옥토 위에 무실역행(務實力行), 기독교의 ‘청부관(淸富觀)’은 수천년 찌든 가난까지 몰아냈습니다. 또 ‘교회 옆에 학교’라는 칼빈의 사상과 ‘선교는 청진기와 함께’라는 선교원칙도 실천해 나갔습니다. 이로써 한국개신교는 교회 안에 갇힌 종교가 아니라 민중의 일상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었던 문화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법전 척곡교회는 1909년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 김종숙이 신교육기관인 명동서숙(書塾)과 함께 세운 이 지역 최초의 교회입니다. 우선 척곡교회는 열린교회였습니다. 비록 남녀교인들이 입장하는 문은 달랐지만 ’미음자 형‘ 예배당구조였습니다. 또 척곡교회는 민족운동의 양대 맥락인 무장투쟁과 애국계몽, 즉 실력양성운동이 만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모은 독립군 군자금을 만주로 보내는 일, 무장독립 투쟁을 하는 독립운동지사들이 비밀리에 회합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일본경찰의 급습을 대비해 망을 보는 담장 구멍도 있었고 교회당 뒷문은 뒷산과 연결해 놓았습니다. ‘저에게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며 식물을 주실 때마다 그 크신 은혜를 잊을 길 없나이다.’ 100년 이상 내려온 척곡교회의 식사 기도문입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척곡교회, 그 거룩한 교회사의 향기를 지척에서 맡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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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마치며 마무리로 말씀드립니다. 추석명절이 다가옵니다. 수많은 선물들이 택배의 물결을 따라 흘러갑니다. 최고의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내가 가진 최고의 사람을 소개해 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선물(膳物)은 제사상에 올리는 가장 질 좋은 고기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왕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고기를 ‘육선(肉膳)’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그게 무엇이든 아무것도 남에게 줄 게 없는 사람, 아니 있어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록 물질이 아닐지라도 남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나름의 정성으로 준비한 이 강의는 여러분 모두에게 드리는 ‘지식’이란 이름의 선물입니다. 저에게 행복한 삶의 기회를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