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눈 먼 사람이라면...
사순 시기를 보내며 잠시 일상을 떠나 잠시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그냥 고요함으로 들어가는 피정의 시간을 갖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모으기로 해요. 사순 4주의 복음 말씀이 요한복음 9장의 태생 소경 이야기입니다. 이 시점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치유’ 이야기를 듣게 하는 그 배려의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요한복음의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순 시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향하는 때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 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가 눈 먼 사람입니까? 아니면, 환히 볼 수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사이파 몇이 “그러면 우리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하고 대들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 먼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하십니다. 차라리 실제 육적으로 눈이 멀었다면 영적으로 눈을 뜨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말씀이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 봅니다. 생의 처음부터 빛이 아닌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절망스러운, 희망이 없는 삶의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이 눈먼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 소경을 보시고 다가가신 것이지요. 동행하던 제자들이 묻지요. 누구의 죄 탓입니까? 당시 병은 죄의 결과로 보았고,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으니까 부모의 탓이 아니겠는가 하는 당시 사람들의 죄가 대물림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이 물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늘 풀기 어려운 고통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의 문제들, 고통을 직면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때 예수님의 이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를 헤아리면서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구체적인 행위를 하십니다.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이 청하기도 전에 소경에게 다가가셨고 그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을 보시고 깊은 연민의 마음이 드신 것이지요. 저는 ‘손은 마음의 대행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손을 내미신 것은 마음이 깊이 움직이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행위를 하시면서 그에게도 그가 행할 몫을 주십니다. 그분이 늘 먼저 우리를 초대하시지만 우리도 자발적으로 그 초대에 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독특한 교육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고 그 마음으로부터 희망을 갖게 하시고 그 희망이 자발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그 구체적인 행동으로 일이 실현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논쟁입니다. 신앙과 불신앙, 마음의 개방과 폐쇄, 의견의 엇갈림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취하게 되는 태도의 두 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기적은 분명히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초대입니다. 당신을 향해 마음을 열라는 하느님의 손짓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 표지 앞에서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 표지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 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 영적인 눈을 감고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게 되니, 그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이미 자기들이 나름대로 내린 판단 때문에 진실을 볼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의 행위를 안식일에 했다고 해서(흙을 개는 행위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규정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실상은 그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구하고 예수님을 인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이미 죄인으로 단정을 내렸고, 그 단정 아래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놓고 묻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전혀 열어두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진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힘은 전혀 없지요. 소경에게 다시 물은 것은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판단에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요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경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벌써 해드렸는데 그때는 듣지도 않더니 왜 다시 묻습니까?” 그 때도 듣지 않았고 다시 물으면서도 들을 마음이 전혀 없음을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한 술 더 떠서 반문합니다.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들의 닫힌 마음을 꿰뚫는 통쾌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도 가끔 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전혀 들으려는 태도는 없이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는지요? 이 대목에 붙여진 소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트집.’입니다. 우리도 가끔 생트집을 하지는 않는지요?
한편,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도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하고 맞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기적의 표지를 받아들일 태도를 어느 정도 보입니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드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음 한 구석의 양심은 이분이 틀림없이 죄인이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말씀과 행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이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속삭이는데 다른 한편으로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마지막으로,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자기에게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점차 깊이 바라보고 그 의미를 깨달아 나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 처음에는 자기에게 일어난 그 사건이 홀린 듯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들으며, 과연 자기를 보게 해 준 그분이 누구 신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 예언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그는 회당에서 쫓겨났고 그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셨고 그래서 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그는 믿음에로의 초대에 응답합니다. ‘주님, 믿습니다’라고. 이제 소경이 아닌 밝은 눈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보았고 그분께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질문에 “예수라는 분”이라고 대답했고, 그 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찾아와서 경위를 묻자, ‘그분은 예언자이시다’라고 했고 이제 예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호칭의 변화는 예수님과의 관계의 변화와 믿음의 깊이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면서 변화되는 그 과정은 신앙인으로서 삶의 체험 안에서 깊어져가는 신앙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영적으로 멀었던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분이 누군 신지 명확하게는 모르면서 예수라는 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점차 그분이 내 삶을 변화시켜 주신 위대한 분, 예언자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나의 주님, 내 일생을 걸고 따를 주님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분을 만나는 과정 안에서 그리고 비로소 그분을 깊이 만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많은 희생과 극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복음서를 통해 가만히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삶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때 우리는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주님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삶인 희생과 봉사를 자발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2023년 3월 19일 사순 제4주일 (가해) (류해욱 신부)